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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골에서 원도봉, 도봉산을 만끽하다
1. 일자 : 2011. 9. 13 (화)
2. 장소 : 도봉산(740m)
3. 행로 및 시간
[도봉역(09:05) -> 둘레길 이정(09:25, 도봉역 1.4km, 우이암 3.2km) -> 난향원(09:35) -> 무수골 입구(09:40, 우이암 2.1km) -> 원통사(10:16) -> 우이암(10:40, 자운암 2.2km) -> (도봉주능선) -> 오봉 갈림(11:10, 자운암 1.4km) -> (중식 -11:20) -> 오봉 갈림(11:39/44) -> 주봉(12:03) -> 신선대(12:21) -> Y계곡 입구(12:33/51) -> (포대능선) -> 민초샘(13:01) -> 포대능선 사진(13:31, 산불감시탑, 사패산 2.3km) -> 망월사(13:50) -> 민초샘/포대 갈림(14:02) -> 덕재샘(14:09) -> 두꺼비 바위(14:23) -> 沼(14:41) -> 덕천사(14:50) -> 망월사역(15:00)]
< 도봉산 산행을 준비하여 >
추석 연휴다. 부모님 댁을 찾아 조상님께 차례 올리고 친척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의식’를 마치고 일상의 휴일로 돌아왔다. 명절맞이 산행 장소를 물색하다, 문뜩 본격 등산을 시작한 이래 도봉산을 제대로 올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불러 보면, 예닐곱 번 도봉산에 언저리를 오른 것 같은데 모두 '조각 등산' 이었다. 그래도 그 남성다운 암릉의 풍모와 길의 아기자기함은 힘들었지만 즐거움으로 기억 한편에 저장되어 있다. 특히 2007년 여름 포대능선을 넘어 신선대로 향하던 중 Y계곡을 경험하고는 '앗 뜨거라' 돌아내려 온 것과, 지난 해 4월말 망월사에서 본 눈의 정취는 특별한 것이었다. 늘 부족함을 느끼고 하산할 때면 ‘내 다시 제대로 도봉을 찾을 것이다’ 라고 다짐하곤 했었는데, 그날이 오늘이 되었다.
차를 몰고 혹은 버스나 전철을 타고 서울 북쪽을 지나갈 때, 차 창 밖으로 삼각산과 도봉산의 암봉을 올려다 보며 ‘저 높은 곳을 처음 오른 이는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인수봉의 경우 일본인/서양인이 초등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식민지라는 시대적 상황, 등산에서도 존재하는 문화 사대주의, 기록 보존 소홀의 소산으로 분명 이들 외국인 이전에 인수봉을 오른 우리 선조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1500백 년 전에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가 건립된 것과 수 백 년 전 험준한 산악지역을 이용하여 만든 북한산성 등으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가적 대사를 수행함에 있어 아무리 험난한 암봉이라 하지만 정상을 답사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단,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군사적 목적 하에 수행된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등산이라 하지 못한다는 반론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산에 오르는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등산이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고 한다. 그러기에 방주를 만들어 5000미터 높이의 산에 피난한 ‘노아’와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의 행위를 등산이라 하지 않는 것이 이런 연유이다. 그러나, 기록이 희미할 뿐 일상이 등산인 나라, 한국에서 아주 오래 전 북한산과 도봉산 멧부리에 오른 선인(先人)이 있었음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도봉산의 지도를 들여다 보며 주봉, 신성대, 선인봉, 자운봉 등을 머리에 그리며 더욱 확신이 든다. 내 직접 그곳을 찾아 선인의 흔적을 확인해 보아야겠다.
< 희망사항 >
‘휴식과 자유는 하나의 양면이다. 휴식은 자유를 예상하며, 인간은 자유롭게 움직일 때 적극적인 휴식을 취한다.’ 장호 선생과 함께 한국 등산 계의 큰 어른 김영도 선생의 ‘산의 사상’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말이다. (난 대체로 김영도 선생의 글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글에도 인용하고픈 글 귀는 있다.) 이 글을 접하며 “무에 좋다고 매주 그리 산으로 쏘다닙니까? 라는 질문에 “쉬러 갑니다” 라는 답을 하는 것의 그럴듯한 근거로 찾은 것 같아 무척 기뻤다. 휴식은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때 진정 성을 갖는다. 내가 힘들어도 산행을 하고 나면 잘 쉰 것 같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자유를 만끽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 년 중 몇 안 되는 긴 연휴이다. 더구나 내일은 평일이지만 휴가가 허락되어 마음이 더욱 가볍다. 마음은 먼 산으로 가고 싶으나, ‘귀경 정체’ 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근교 산행 중 최고의 코스 중 하나인 도봉산을 오르려 한다. 내가 부산의 금정산이나 울산의 영남알프스를 동경하듯이 남도의 누군 가에게 도봉은 ‘먼 멋진 산’ 일 것이다. 내 가까이 있는 ‘보석’과 함께 즐기고 싶다.
도봉산이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반열에 오른 이유는 ‘최고봉인 자운봉을 중심으로 만장봉, 선인봉, 원도봉계곡, 용어천계곡, 송추계곡 등 경관이 수려하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도권 시민의 휴식처인 점 등이 고려되었다. 또한 암벽 등산에 최적지이며, 회룡사(回龍寺), 망월사(望月寺), 천축사(天竺寺), 보문사(普門寺) 등이 유명’ 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멋진 암릉과 계곡, 유서 깊은 사찰이 많다는 것이다. 오늘 산행에서는 계곡과 사찰 보다는 주 능선 산행을 통해 도봉의 심장부의 암릉 미를 만끽해 보고 싶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 도봉에서 우이암 >
화요일 아침, 그러나 휴일이다. 아침을 챙겨 먹고 식구들 깰까 봐 까치발을 하고는 조용히 집을 나선다. 전철이 한산하다. 시내 중심부를 지날 때도 좌석이 다 차질 않는다. 이런 여유로움은 늘 좋다.
창동에서 전철을 갈아 탄다. 머릿속으로 오늘 가야 할 길을 그려본다. 도봉역에 내려 무수골을 따라 원통사로 가서 우이암에 오른 후 도봉주능선에 붙는다. 황홀한 암릉의 경치를 감상하며 선인봉/만경대/자운암으로 둘러싸인 도봉의 심장부를 거쳐 포대능선을 따라 걷다가 원도봉이나 회룡매표소로 하산할 예정이나, 시간은 정확하지는 않아도 5시간은 분명 넘을 것이다.
< 도봉산 전경 / 삼각산 전경 >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도봉역에 내렸다. 무수골로 향하는 마을버스 정거장을 물으러 동네 빵집에 들어 갔는데 주인 아저씨 왈,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면 종점에 갈 수 있어요. 5분이면 되죠” 한다. 사전 취득한 정보와 다르지만 일단 현지 정보를 믿는다. 감사의 표시로 샌드위치 하나를 산다 (이거 없었으면 큰 일 날뻔했다.)
계천을 따라 걷는다. 우측으로 ‘같이 죽자던 여인의 하얀 속살’ 같은 도봉의 암릉들이 도열해 나를 굽어보고 있다. 선인봉, 만경대, 자운봉, 주봉, 봉우리의 이름은 구별 되지 않지만 우람하고 늠름한 자태다. 멀리서 보지만 정상 바위 위에는 신기하게도 ‘공기 돌 하나’를 올려 놓은 듯한 모습이 선명하다. 도봉은 영험한 산임에 틀림없다.
길을 갈수록 정면 11시 방향으로 삼각산도 나를 마중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다. 앞 쪽에 인수봉이 먼저 나와 있고 그 뒤로 백운대, V자 길을 건너 노적봉도 보인다. 오늘은 산에 오르기 전부터 감동이다. 서울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고개만 들어도 황홀한 전경을 늘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빵집 아저씨 말대로 8번 마을버스 종점은 역에서 5분 거리였다. 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가니 북한-도봉산 둘레길 이정표가 나온다. 도봉역에서 1.4km를 걸어왔고 우이암까지는 3.2km를 가야 한단다. 10여분을 걸으니 난향원이라는 성신여대 생활관 정문이 나타나고 이내 무수골 탐방센터에 도착했다. 도봉역에서 35분 정도를 걸었다. 평소 내가 싫어하는 산에서의 포장도로였으나 도봉과 삼각의 암릉 보는 재미에 지겨운 줄을 몰랐다.
무수골에서 원통사까지는 1.7km, 우이암까지는 2.1km다. 물이 마른 건천을 걷는다. 그리 가파르지가 않아 걸을만하다. 기온이 점점 올라간다. 새벽 서늘한 기운에 얕은 겉옷까지 준비해 왔는데 오히려 더위가 걱정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걸으니 어느덧 원통사에 도착했다. 커다란 팔각정 지붕 옆으로 우이암의 모습이 우람하다.
< 원통사에서 본 우이암 / 원통사에서 >
우리나라 절 집은 대개가 그 앉음새가 절묘한데, 우이암도 바위 밑 작은 평지에 다소곳이 내려 앉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절 집 뒤편으로 솟은 우이암의 모습을 한참이나 올려다 보다 절 경내를 잠시 둘러 본 후 다시 길을 나선다. 그 사이 한 떼의 아주머니와 아이들로 주변이 소란스러운데, 한 아이가 사라져 버렸는지 찾느라고 조용한 산 사가 시끌벅적하다. 원통암을 나서며 절 밑을 내려다 보니 소나무와 길이 어우러진 풍경이 근사하다. 꼭 멋진 풍경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음을 확인한다.
< 원통암에서 내려다 본 풍경 / 우이암 전경 >
원통사 우측을 돌아 우이암으로 향한다. 한 사내 아이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는 아버지인듯한 사내의 지청구를 들어며 내려 오고 있다. 보아하니 아이 혼자 먼저 산에 올랐고 어버지가 급한 찾아 나선 것 같다. 그 놈 몸매를 보니 크면 산을 잘 탈 것 같다. 아이의 무사함에 작은 안도감을 맛 본다.
고빗사위를 올라 도봉주능선에 붙는다. 우이암은 이곳에서도 10여분 더 비탈을 치고 올라야 나왔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길이 힘에 겹다. 그래도 우이암에서 본 사방의 풍경은 참 멋지다. 가야 할 방향으로 도봉산 정상부의 모습이 선명하다. 내려다 본 풍경에는 옅은 연무 속에서 서울 시내도 훤하다. 우이암에서 자운암까지는 2.2km, 길이 좋아도 1시간 이상을 가야 할 거리다.
< 우임암에서 도봉산 정상을 배경으로 >
< 우이암에서 자운봉 >
간밤에 부족한 잠에, 원통암에서 우이암 길을 쉽게 봤는데 예상과 다르게 에너지 소모가 큰 탓에 갑자기 피로가 몰려 든다. 사진을 찍는 핑계로 잠시 멈춰 컨디션 조절을 한다. 한숨 돌리고 나니 주위의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오봉의 올망졸망한 모습이 보이고 인수봉과 백운대는 더 늠름히 서 있다.
< 도봉주능선에서 본 오봉과 삼각산 >
긴 계단을 내려선다. 올랐으니 다시 내려서야지. 산에서도 진리는 매 일반이다. 길은 오르내림의 반복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길 사정도 도와 주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연거푸 감탄하고 걸었을 길을 힘겹게 터벅터벅 걷는다. 아무래도 적당한 곳에서 영양을 보충해야겠다.
11시가 지난다. 잠시 평지 길이 이어진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진 화강암이 부셔져 만들어진 마사토 길이 한없이 평화롭다. 적당한 그늘이 길을 더욱 정겹다. 그늘진 바위 밑에 털썩 주저 앉는다. 아침에 산 샌드위치를 꺼내어 상을 차린다. 통밀빵에 참치를 넣은 샌드위치 맛이 그만이다. 아침에 본 빵집 아저씨의 정성이 느껴진다. 작은 그러나 유일하게 몸에 지닌 음식에 감사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서울 시가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참 멋지다. 문뜩 요즈음 읽고 있는 김영도 선생의 ‘산의 사상’ 이라는 책에서, 저자가 언젠가 스위스 알프스 산자락을 방문해선 “산과 사람, 자연과 도시가 한 덩어리가 되어 살고 있는 알프스 산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어깨가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알피니스트의 조건은 높이와 험함이다.” 라고 쓴 글을 읽었다. 그는 높고 험준한 산이 없는 우리 국토의 실상과 비교하며 알프스를 극찬했다. (가끔 우리 산에 대한 글도 있지만 양념 수준이고 그마저도 진실성이 의심된다.) 가뜩이나 글 전반에 반복되는 알프스 초등을 기준으로 한 등산의 기원, 입만 열만 나오는 서양 산악인에 대한 예찬도 지겨웠는데, 우리 산을 폄하하는 태도에서, 그의 선망의 시선 안쪽에서 ‘문화사대주의’를 읽고는 진한 냉소를 그에게 퍼부어 주었다. 그와 김장호 선생을 비교하자면 우리 산에 대한 탐구와 애정, 그리고 글 솜씨 등 여러 면에서 장호 선생이 분명 몇 수 위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도봉 이름 모를 능선에서 서울을 내려다 보며, 과연 김영도 선생이 우리 산을 제대로 올라나 본 것인지, 올랐다면 제대로 된 산행기라도 썼는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적지 않은 산서를 읽은 내게도 그가 쓴 국내 산에 대한 산행기는 극히 드물며, 그마저도 어는 산을 몇 시간 만에 주파했다는 자기 자랑 일색이다.) 그의 글은 최근까지도 대개가 외국 산에 대한 동경과 난해하고 냉소적인 표현과 자기 자랑의 일색이다. 내 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남의 떡만 커 보이는’ 문화 사대주의를 난 배척한다. 오늘은 그를 대신하여 우리 산에 대한 예찬을 하고 싶다.
< 도봉 주 능선 길 / Y 계곡 길 >
우리의 산은 특히 대도시 주변의 산은, 유럽의 산과는 다르게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그리고 쉽게 실현할 수 있는 산이다. 북한-도봉산, 금정산, 팔공산, 무등산 모두가 그렇다. 큰 맘 먹고 여러 날 동안 준비해서 오르는 산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산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산이다. 과연 어느 산이 더 위대한 산인가 말이다.
사설이 길어졌다. 밥을 먹고 불룩해진 배를 밀며 다시 길을 나선다. 오봉 갈림을 연거푸 지난다. 그때마다 자운암까지의 거리는 1.4km, 0.9km, 0.8km로 점점 가까워진다.
12시 즈음, 도봉의 정상 부근 암릉들이 바로 눈 앞에 다가설 무렵 주봉을 지나 자운봉을 우회하는 긴 내리막 길로 들어선다. 몇 해 전 겨울 이 길을 오르다 무릎에 이상이 와 고생한 기억이 났다. 도봉은 늘 내게는 쉬운 산이 아니었다. 오늘 역시 그렇다. 그래도 오늘은 무리가 된다 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 삼각산을 배경으로 / 가까워진 도봉산 >
산허리 내리막 길이 지나자 긴 계단이 떡 하니 나타난다. 죽었다. 점심을 먹고 꽤 시간이 지나도 음식이 에너지로 변하지 않는다. 식후 오르막은 항상 힘겹다. 계단 좌측으로 송추 일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연무가 걷힌 북녘의 산야는 평온했다.
마침내 도봉의 정상부에 섰다. 갈림에 길도 사람도 많다. 어디서 모여 들었는지 인파로 주변이 어수선하다. 우측 신선대로 향하는 길에 예전에 없던 계단이 놓여 있다. 쇠 난간을 잡고, 오를 수 있는 도봉의 정수리에 오른다. 신선대에서 본 자운봉은 정말 근사하다.
< 자운봉 삼거리에서 본 풍경 >
< 도봉산 자운봉 >
누군가 정성스레 만든 예술품처럼 바윗돌을 쌓아 올린 형상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다. 단언하건대 인간은 저런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연의 산물은 더더욱 아니다. 분명 신의 작품이다. 아귀가 딱딱 들어 맞는, 마치 잘 맞추어진 종이 퍼즐처럼 자운암은 완벽한 기하학적 조화와 균형으로 떡 하니 서 있다. 아마도 수 만년을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도 수 많을 세월을 그러할 것이다.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우리 산을 찬미한다.
< 자운암에서 원도봉 >
< 신선대에서 본 도봉능선과 삼각산 / 포대능선에서 >
다시 분주한 자운봉 갈림에 섰다. 가야 할 길을 살핀다. Y계곡 입구에 공단 직원이 서 있다. 직감적으로 오늘은 휴일, Y계곡은 일방통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여 물어 보니 역시 그렇단다. 포대능선 길을 물으니 “우회 길로 가서 민초샘으로 가도 되고 포대정상으로 갈 수 있고” 하며 말 끝을 흐린다. 일단 우회로로 내려선다. 잠시 후 갈림이 나 온다. 우측으로 작은 길이 나 있다. 아, 이 길이 포대정상으로 가는 길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길을 따른다. 조금은 험해 보였으나 그 길 끝은 ‘포대 정상’ 이었다. 만 4년 만에 다시 찾은 포대, 오늘은 날씨가 좋아 사방이 시원하다.
포대 정상, 평탄한 그곳은 플랫폼이었다. Y계곡으로 향하는 사람들, 앉아서 경치 구경을 하는 사람들, 민초샘으로 향하는 사람들, 장터 마냥 분주하다. 한참을 주위를 둘러 본다. Y계곡을 오르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들 같아 보인다. 꿈틀대며 앞으로 나아 가는 모습이 멋지다.
다리가 산에 완전히 적응했다. 오전의 힘겨움은 사라졌다. 정상을 넘었다는 작은 성취감이 힘을 주고 있다. 지도를 들여다 본다. 내친김에 사패산까지 종주를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능선을 따라 길을 나선다. 예전에 부근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은 일이 있어 갈림에 특히 조심한다. 1시경 민초샘 이정표를 지난다. 주변에 헬기장이 보인다. 지난 4월말 상서로운 눈이 내리던 날, 눈에 길을 잃고 헤매다 이 헬기장을 보고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민초샘을 지나 본격적인 포대능선 길을 걷는다. 내 과거 기억은 몹시 험한 길이었는데 오늘은 작은 오르내림은 있어도 걸을만한 길이다. (과거의 기억은 장맛비가 내리던 날과 눈이 내린 날의 것이었다.)
사패산 방향으로 암봉들이 줄지어 서 있다. 멀리 녹색의 철 구조물이 있는 곳이 산불감시탑 일 것이고 그 뒤편이 사패산이다. 돌아 보는 길 저편에는 선인봉이 거대한 바위 몸체를 뽐내고 있다. 언제 보아도 미끈한 모습이다.
쇠 난간 바위 길을 조심스레 오른다. 도봉을 배경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고 내려서자, 포대능선 초입/끝을 알리는 사진 간판이 서 있다. 갈림이 나타난다. 자운봉에서 1.4km를 걸어 왔고, 사패산까지는 2.3km가 남았고, 망월사는 0.5km 거리다. 당초는 사패능선을 약 30분 정도 타다가 회룡골로 내려설 작정이었으나, 이미 등산 시작 후 4시간 이상이 지났고 무엇보다도 망월사를 들러 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좌측으로 길을 꺾는다.
눈에 익은 길이 나타난다. 널지만 가파르고 미끄럽다. 곧바로 나타날 것 같던 망월사는 20여분이 소요되었다. 오늘은 ‘눈’ 나리던 하늘을 푸르름이 대신하고 있다. 산 중턱 암자는 여전히 고고한 자세로 서 있다. 계절은 변해도 여전히 감동적인 모습이다. 망월사를 찾길 잘 했다.
5시간 가까이 계속되는 산 길에 다리가 지쳤다. 갈림을 맞는다. 포대능선과 민초샘 갈림이다. 예전에 이 이정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참 유용하게 길 선택을 했을 것인데 하는 생각에 머리에 잘 챙겨 넣는다.
금방이면 원도봉 입구에 닿을 수 있겠지 했는데 하산 길이 길다.
< 망월사 전경 / 덕초샘 >
덕초샘을 지난다. 물 한 모금 마신다. 예전 오름 길에는 이곳에 샘이 있는지 몰랐다. 늦더위에 물이 시원하지 않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은 날씨가
맑은 대신 기온이 예상외로 높다. 내 힘겨움의 원인을 늦게나마 찾는다.
< 두꺼비 바위 / 너른 바위 소 >
두꺼비 바위와 너른 바위 소를 지나고 몇 개의 다리를 건너자 원도봉 탐방센터 주차장에 닿는다. 늦여름 햇살이 매섭다. 탐방센터에서도 20여분을 걸어야 오늘 등산의 종착지 망월사역에 닿을 수 있었다.
< 에필로그 >
5시간 55분의 길었지만 보람된 산행을 마치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무더위도 힘겨운 오르내림도 도봉의 장엄한 암릉이라는 이름 앞에선 잊혀진 이름이다. 궂은 날씨, 길 헤맴, 바위의 공포 등 그간 도봉과의 징크스를 떨쳐 버린 의미 있는 산행을 했다. 전철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명산이 수도에 있다는 것은 알프스 고봉이 부럽지 않은 행복한 일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산을 찬미한다.
인류 최초의 8000급 고산(안나푸르나)은 등반은1950년 프랑스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성공의 이면에는 나일론의 발명으로 인한 경량화라는 혁신이 있었다 한다. 지금처럼 산소 마스크도, 고성능 장비도, 대규모의 체계적인 지원도, 정확한 기상 정보도 없었던 그 시절,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서로의 몸을 묶어 추락 위험을 줄여줄 밧줄이었을 것인데 그나마 ‘마닐라 삼’ 원료의 밧줄은 그 무게가 상당해 운반의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무게의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면, 여성 등산인 남난희씨는 ‘낙동정맥-백두대간’ 종주 시 칫솔의 머리 부분만 잘라 가지고 다녔다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단초는 나일론이라는 가볍고 질긴 섬유의 발명이었고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통해 등산용 밧줄로 만들어준 것이 결국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히말라야 8000미터 고봉의 등정으로 이어졌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도처에 깔려 있음을 확인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상은 산을 내려와 도봉산 자운암과 선인봉에 붙어 암벽을 오르는 이들을 상상하며 든 생각이다. 산에서만큼 일상에서도 일신우일신 해야겠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난다. 산 벗을 불러 내어 그
시원함을 맛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