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document.img1.width=519;}" orgWidth="1468">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히 하는 데 쓰이는 매개물의 일종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히 하는 데 쓰이는 매개물의 일종. 근대 자본주의경제는 분업과 사유재산제가 바탕이 되는 결과, 무수한 개별경제(경제주체·경제단위)로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근대경제는 분열된 무수한 개별경제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종합경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주체에는 생산주체와 소비주체가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결부되어 유통경제·시장경제를 형성하는데 여기에 화폐가 등장한다. 이같이 근대경제에서 화폐는 재화=상품인 동시에 각 개별경제를 결부시키는 사슬이며, 이 경우 화폐에는 매개적·목적적 존재의 2가지가 있다. 매개적인 것은 상품을 구입한 대가로 지불하는 화폐의 흐름이며, 이때 화폐는 구매수단 또는 유통수단이 된다. 목적적인 것은 화폐만 일방적으로 흘러가 이자가 붙은 화폐가 되어 다시 환류해 올 것을 기대한다. 여기서는 화폐 자체가 상품처럼 거래대상이 된다.
금속주의(金屬主義)와 명목주의 이같은 역할을 지닌 화폐의 본질에 관한 학설로는 오늘날 금속주의와 명목주의의 2가지가 있다. 넓은뜻으로 금속주의에는 상품학설·소재주의가 포함되고, 명목주의에는 화폐국정설(貨幣國定說)·지시증권설(指示證券說)·직능학설·추상학설 등이 포함된다. 금속주의에 의하면 화폐란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받게 되는 상품이 된다. 그 결과 화폐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소재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즉 상품과 화폐의 교환 과정에서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있는 상품으로서 다른 상품과 교환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화폐의 본질은 가치있는 소재에서 구하며, 화폐는 상품 또는 가치있는 재화 특히 귀금속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소재가치를 지니지 않은 화폐의 존재는 인정할 수 없으므로 지폐는 화폐일 수 없게 된다. 지폐가 유통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정부지폐를 뜻하는 한에서는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기능에서 생긴 가치표시이다. 즉 지폐는 화폐의 사용을 절약하는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금속주의에서는 화폐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니므로 가치척도로서 다른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화폐의 본질적 기능을 가치척도에서 찾고 거기에서 유통수단·가치보장·지불수단·세계화폐 등 여러 기능이 유도된다. 이 학설은 영국의 고전파경제학이나 마르크스경제학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 주요 학자로 D. 리카도·K. 크니스·B. 힐데브란트·K. 마르크스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마르크스에 의해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화폐학설로 확립되었다. 이것을 상품학설이라고도 한다. 이와 달리 명목주의에서는 금속주의가 주장하는 소재가치인 상품성에 의한 일반적 가치척도 기능을 부정하고 화폐의 본질을 추상적 기능, 즉 일반적 교환 내지 유통수단에서 구한다. 명목주의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 학설로 G.F. 크나프의 화폐국정설이 있다. 화폐는 소재와 관계없이 국가의 법제에 의해서만 통용력을 지닌다고 하여 화폐의 본질을 유통수단에서 구하는 이론이다. 명목주의는 다시 화폐를 상품에 대한 일반적인 참가표권(參加票券)으로 보는 F. 벤딕센·K. 엘스터의 표권설(指示證券說), 화폐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가진 모든 것이라는 L.E. 미제스·K. 헬페리히 등의 직능학설, 또한 화폐는 상품가치의 비율을 나타내는 추상적 계산단위라는 R. 리프만의 추상학설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명목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독일을 중심으로 성행한 학설이다.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근대경제학자 J.M. 케인스는 《화폐론(1930)》에서 명목주의 입장에 서서 화폐를 단순히 구매수단 기능을 가진 것으로 여겨 계산화폐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케인스의 계산화폐는 채무·각종 가치·일반구매력 등에서 표현되는 것으로서, 금속주의라는 가치척도로서의 화폐기능에 해당되는 것이다.
근대경제학에서의 화폐
정의-화폐와 계산화폐 국민소득의 크기를 나타내거나, 가령 철 1㎏의 값과 솜 1㎏의 값을 비교할 때처럼 경제적 가치의 집계나 비교를 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위를 <계산화폐>라고 한다. 원·달러·마르크 등의 명칭이 그것에 해당되며 나라마다 다르다. 계산화폐는 대부분이 무게의 단위이기도 한데, 이것은 옛날 칭량화폐(秤量貨幣)시대에 사용할 때마다 그 무게를 달아보았던 습관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계산화폐인 원(圓)은 단순히 둥글다는 뜻을 나타내며 무게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계산화폐는 도량형이나 시간 등의 단위와 관계없이 오로지 경제계산을 위해서만 쓰이는 추상적 단위이며 실체는 없다. 화폐란 이런 계산화폐로 나타냈을 때 그 가치(나타내어진 값)가 고정되고 불변한 것이 된다. 계산화폐와의 관계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화폐를 <현실화폐>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그 둘의 관계는 예를 들면 1만원짜리 화폐는 어제도 오늘도 <계산화폐·원>의 1만원 단위에 의해 나타내지며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명백해진다. 다만 화폐를 계산화폐로 나타낸 값은 불변이라도, 화폐를 화폐 이외의 재(財)나 서비스에 의해 측정한 값은 날마다 변동한다. 하지만 일반인은 예를 들어 화폐로 측정한 맥주값이 올랐다고는 말하지만, 맥주로 화폐를 측정하여 화폐가치가 내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계산화폐와 화폐는 경제생활의 기준이 되어 있다. 다만 화폐는 계산화폐가 추상적 단위인 데 대하여 현실의 경제적 거래에 수반하여 생기는 채무의 최종적 결제수단으로서 작용하는 실체이다.
종류-국가화폐와 은행화폐 특정적인 실질(實質)·형식의 것을 화폐로 선언하는 힘을 화폐고권(貨幣高權)이라고 하며, 근대국가 성립과 함께 국가가 소유하게 되었다. 국가는 화폐 위조에 무거운 형을 과하고 화폐로 납세를 하며 또 민간화폐에 의한 거래결제를 최종적인 것으로 공인함으로써 화폐고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것이 법화(法貨)의 성립이다. 그 뒤 화폐 제조기술이 발달하여 위조화폐를 만들기 어렵게 되자, 주화(鑄貨)에 찍힌 액면값과 주화를 망가뜨렸을 때의 가치는 별개의 것이 되었다. 소재가 재화로서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주화로 유통되기 때문이다. 주화는 재·서비스와는 전혀 별도로 그 소재를 재로 이용하는 것을 예정하지 않는, 화폐라는 하나의 자산이 되었다. 그 뒤 주화는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액면값에 대해 소재의 가치를 저하시켰으며, 그 극한에 이르러 오늘날의 보조화폐(한국에는 없다)나 정부지폐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 계열의 화폐는 국가권력이 근거로 되어 기능하는 화폐이므로 국가화폐라고 하며, 현실적으로 주고 받아 유통하는 화폐이기 때문에 현실화폐라고도 한다. 국가화폐와는 별도로 나중에 은행화폐가 생겨났다. 그것은 민간 금융기관인 은행의 요구가 있는 즉시 현금(국가화폐)을 인도하겠다고 약속한 자기앞 채무이다. 은행화폐는 처음에는 은행권형식을 취하였으나, 여러 종류의 은행권이 발행되어 혼란을 가져와 중앙은행이 독점하게 되었다. 이 경우에도 처음에는 중앙은행의 태환(兌換)을 의무화하였는데(은행권과 금의 교환비율=금평가를 국가가 법으로 정하는 금본위제도 아래에서), 사람들은 은행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환은행권)으로 믿고 중앙은행은 이 때문에 은행권 발행잔고에 대하여 일정한 금을 준비·보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은행권은 금본위제도 아래에서는 신용화폐(은행에 대한 신용에 의해 유통하는 화폐)였으나, 관리통화제도로 금환이 정지됨에 이르러(不換銀行券化) 국가에서 은행권에 강제 통용력을 부여한 것이 은행권에 대한 신뢰의 기초가 되었다. 이 단계에서 은행권은 국가화폐로 편입되어 은행화폐의 역할을 중지하였다. 은행권발행을 할 수 없게 된 은행은 일람출금 예금을 은행화폐로 삼았다. 이것은 은행권과 달리 형체가 없고 즉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지만 현금은 아니며, 단순히 은행 장부상 숫자로 예금자의 수표나 예금자의 지시에 따라 계좌대체라는 형식을 통해 이동하여 채무결제에 사용할 수 있는 은행의 채무이다. 은행화폐는 법적으로 채무를 최종적으로 결제하는 국가화폐와 달리 은행이라는 민간기관 채무에 대한 사회적 신뢰 성립을 근거로 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화폐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가 많다. 그러나 일람출금예금은 본래 부족하기 쉬운 국가화폐의 사용을 절약하고 보충하는 의미에서 성립된 것이므로, 관계자가 그것을 즉시 국가화폐로 바꿀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는 엄한 자주적 제재가 있으며 또 행정상 규제도 엄중하여 실제로는 현금화되지 않은 채 채무결재로 쓰이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적으로는 어떻든 기능상으로 충분히 화폐 역할을 하고 있다. 이같이 은행의 일람출금예금은 예금인 채로 이동하여 화폐 기능을 하므로 다른 금융기관의 예금과 합쳐 <예금통화>라고 하며, 통계적으로는 국가화폐(현금통화)와 함께 한 국가의 화폐량을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 있다.
기능-교환매개와 가치저장 국가화폐이든 은행화폐이든 그것이 화폐 역할을 하는 것은 첫째 경제적 <가치척도>로서 작용하는 일이다. 그러나 화폐를 계산화폐로 측정한 값이 불변이므로 마치 화폐가 가치척도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도리어 현실화폐의 기능이 아니라 계산화폐의 기능이라 하겠다. 둘째 화폐는 재·서비스를 사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그 화폐는 재·서비스를 팔아서 얻어지므로, 결국 화폐는 재나 서비스의 <교환매개>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화폐가 매개하는 교환은 재·서비스와 화폐를 교환하는 단계와, 화폐와 재·서비스를 교환하는 단계의 2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단계 사이에는 통상적으로 시간적 거리가 있다. 이 두 시점 사이에서 화폐는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있는데, 그 사이에서 화폐는 <가치저장>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교환매개와 가치저장의 두 기능을 떼어 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화폐를 내놓는 사람은 상대가 가치저장에 기여함을 알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한편 화폐를 받는 사람은 장차 교환매개로 이용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적당한 재·서비스를 적당한 조건으로 제공하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의 시간·노력(정보 코스트)과, 받은 화폐를 다음 지급에 이용할 때 입는 감가 손실(거래 코스트)이 되도록 적게 하여 화폐를 내놓는다. 그러나 이들 두 코스트를 되도록 적게 하고 교환매개와 가치저장의 두 기능을 화폐가 충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화폐를 일반 재·서비스로 측정한 가격, 즉 화폐가 다른 재를 지배하는 힘인 구매력이 불변이어야 한다. 다행히 화폐를 계산화폐로 측정한 값은 불변이므로, 오늘 1000원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을 내일은 1000원권으로 살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오늘도 내일도 1000원의 값이 붙어 있는 것은 확실히 살 수 있어 마치 화폐의 구매력이 불변인 것처럼 생각하는 <화폐착각>이 생기기 쉬우며, 그것이 큰 뒷받침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수요-동기와 요소 화폐에는 형태가 없는 면이 있어 화폐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화폐의 양을 파악하려면 잔고(어느 한 시점의 양)에 의거하도록 되어 있다. 잔고라면 언제라도 모두 누군가의 수중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동기로는 다음 3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누구든지 어떤 사람의 어떤 기간중 화폐수불(貨幣受拂) 누계액이 동일해도 그것이 그 기간 중의 모든 시점에서 수입과 지출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한편 벌칙이 따르는 성실한 원칙이 있어서 채무는 약속된 시점에서 반드시 결제되어야 하므로 약간의 잔고가 보유된다. 이것이 거래 동기에 의한 보유이다. 둘째 기대가 그대로 실현된다고는 할 수 없다. 쓰고 싶은 재·서비스가 우연히 생길 수도 있다. 그 경우에도 성실의 원칙이 작용한다. 이 때문에 약간의 잔고가 보유된다. 이것이 예비적 동기에 의한 화폐의 보유이다. 셋째 화폐는 누구든 언제라도 받을 수 있으므로 현재도 장래도 사용할 생각이 없는 것을 팔고 사서 그 차액을 벌려는 기회를 얻으려는 목적에 의해서도 사람은 화폐를 수중에 보유한다. 이것이 투기적 동기에 바탕을 둔 보유이다. 이같이 동기는 3가지 있지만, 보유하고 있는 화폐잔고의 어느 부분이 어떤 동기에 의한 것이냐를 구체적으로 보여 달라고 하면 이에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기를 하나로 총괄할 수는 있다. <유동성동기>가 총괄적인 동기이다. 자산의 유동성에는 2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다른 재·서비스로 바꾸기 쉬운 성질 즉 시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로 측정한 가치가 안정되어 있는 성질 즉 시장가치의 안정성이다. 이들 두 요소는 어떤 자산에나 많든 적든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화폐는 이 두 요소에서 다른 어느 자산보다도 뛰어나며(사실 화폐에서도 다른 재·서비스로 측정한 가격이 변동한다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화폐착각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 이것이 화폐의 수요를 가져오는 까닭이다.
공급-과거와 장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화폐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소재가치에 바탕을 둔 금속주의와 그에 반대하는 명목주의 사이에 벌어졌다. 그러나 그 뒤 현금(국가화폐)조차도 종이라는 전혀 가치없는 소재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예금(은행화폐)이 잔고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아져 오늘날에는 화폐 역할을 하는 것이 화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같이 화폐가 소재를 문제삼지 않게 되는 과정 속에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그것이 더욱 진전되어 지금은 화폐의 잔고조차 불명확해졌다. 즉 지금까지 화폐의 공급자였던 정부·중앙은행 등 공적 기관과 은행 및 기타 금융기관이 공급한 화폐의 잔고는 이들 기관의 채무이므로 양적으로 명확해졌으나, 지금은 이들 외에 금융기관이 아닌 기업이나 개인에게도 예금담보나 당좌대월 형식으로 미리 신용도가 주어지고, 그 양이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폐의 본질적 역할은 교환매개 즉 구매력으로 작용하는 데 있으며, 그 성과는 잔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래에 쓰인 총거래량에 의해 알려져야 한다. 종래에 수요와 공급을 잔고로 억제한 것은 편의에 지나지 않으며, 암묵리에 잔고의 회전수가 불변이라고 가정한 데에 있다. 그러나 가령 잔고가 불변이라도 그 회전수는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일렉트로닉 테이크 프로세싱 시스템, 정보검색과 통신시스템 분야에서 근년의 기술 진보 결과 뚜렷이 증가되었다. 게다가 잔고 자체도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한 기간 중에 움직인, 또는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는 구매력의 크기는 실제로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 공급자인 정부 및 중앙은행은 국가화폐의 공급량 조작이 전체 화폐량을 움직이고, 그것이 산출량·고용량 등의 실물량에 영향을 미친다는 화폐적 경제이론 관점에서 국가화폐의 공급량을 중요시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화폐를 포함한 전체 화폐 잔고도, 그 회전수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통화당국은 정책적으로 효과를 올릴 수 있는 화폐공급량의 지표를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현금 플러스 일람출금 예금잔고였으나 차츰 확장되어 기업의 정기성예금이나 양도성예금의 잔고, 나아가 우편저금의 잔고를 첨가하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언제라도 화폐로서 작용할 수 있는 신용도의 크기도, 또 화폐의 회전수를 파악하는 방법도 통계적으로 분명히 하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금융정책에 의해 고용량이나 산출고를 정확하게 움직이는 일은 당분간 어려움이 더해질 것이다.
역사
원시화폐 원시사회에서 물물교환이 성행하자 물자교환에 따르는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 교환매개물로서 물품화폐(자연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원시화폐로 비교적 처분하기 쉬운 물건이 이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곡물(중부아메리카·필리핀·한국·중국·일본 등)·포백(布帛;한국·중국·일본 등)·가축(그리스·로마·남아프리카 등)·농기구(중국)·소금(에티오피아)·무기(고대 영국)·모피(시베리아)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패각(貝殼)·우모(羽毛)·귀갑(龜甲)·경치(鯨齒) 등과 장식품이나 의례적·주술적인 물건들도 볼 수 있으며, 그 생성에 종교적 의의를 지닌 경우가 많다. 그 뒤 금속이 사용되자 원시화폐 모양을 한 주조화폐(coin)가 나타났다. 금속은 보존성·등가성·분할성·운반성 등 화폐로서 필요한 조건을 잘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포화(布貨)·도화(刀貨)·어화(魚貨) 등이 전형적 예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BC 2000년 무렵 이집트·바빌로니아 등에서는 금·은이 칭량화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아시리아의 금·은,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철, 아라비아의 구리, 멕시코의 주석 등이 있었다.
그리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주화는 BC 7세기 리디아왕국에서 주조한 엘렉트론화이다. 엘렉트론화는 금과 은의 천연합금으로 은이 약 30% 함유되었다. 이것은 주화로서 일정한 형상·품위·무게를 정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화폐로서, 리디아왕국 왕 기게스는 엘렉트론화에 그 가치를 보증하는 각인을 새겨 값어치가 같은 금속으로 사용하였다. 그 뒤 기게스의 후계자 크로이소스는 엘렉트론화에 리디아왕국의 증인(證印)을 새겨서 스타테르화를 주조하였고 이것은 근동 각지에서 유통되었다. 리디아왕국은 BC 6세기 페르시아에 정복되었으며, 페르시아인은 화폐 사용을 답습하였다.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1세는 금 셰켈(shekel) 및 은 드라크마(drachma)를 화폐단위로 정하고, 금은복본위제도(金銀複本位制度)를 채용하여 금화 다레이코스 및 은화 시글로스를 주조하였다. 금·은 비율은 13 ⅓이었는데 이 비율은 그 뒤 약 2000년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쓰여졌다. 그리스에서는 BC 6세기에 아이기나은화를 주조하였고 뒤에 아테네에서도 은화를 만들어 앞면에 아테네 여신의 얼굴, 뒷면에 올빼미와 올리브 그림을 새겼다. 이것은 질좋은 은화로 지중해 연안의 국제화폐가 되었다. BC 5세기에는 그리스 도시국가가 거의 독자적 화폐를 만들었고, 그것이 차츰 남이탈리아·소아시아·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로 파급되었으며, 헬레니즘시대에는 오리엔트에도 퍼졌다. BC 3세기 무렵에는 고대인도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왕이나 아폴론상(像)을 새긴 화폐를 주조하였다.
로마 로마에서는 BC 3세기에 대형 청동화 아에스 그라베 및 은화 데나리우스가 주조되었고, BC 1세기에는 금화 아우레우스가 만들어졌다. 화폐단위인 아스(as)가 각인된 아에스청동화에는 앞면에 야누스신, 뒷면에 뱃머리그림이 각인되었다. 청동화 10아에스에 해당하는 화폐단위가 각인된 데나리우스은화 앞면에는 로마의 신, 뒷면에는 통상의 신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의 쌍둥이신상 및 ROMA라는 문자가 새겨졌다. 데나리우스은화는 로마의 조폐소 외에 각지에서 다량으로 만들어져 지중해 서부와 중부에서 주요한 통화가 되었다. 또한 아우레우스금화는 앞면에 비너스상, 뒷면에 임페라토르(imperator;군사령관)라는 문자와 전리품모양이 새겨져 오리엔트의 조폐소에서 주조되었다. 카이사르시대에는 화폐에 CAESAR라는 문자와 카이사르의 가문(家紋)인 코끼리 그림이 새겨졌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안토니우스는 처음에 갈리아에서, 나중에 오리엔트의 조폐소에서 화폐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소아시아에서 주조된 화폐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초상을 함께 각인한 것, 군함이나 군기(軍旗) 디자인을 새긴 것도 있다. 또 아우구스투스황제는 본위화폐로 아우레우스금화를 채용하였다. 이 금화는 25데나리우스은화와 등가(等價)였고, 1데나리우스는 16아에스청동화와 등가였다. 아우구스투스황제까지는 화폐 디자인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그 뒤 황제의 초상이 들어가게 되었고, 황제의 인격을 강조함으로써 화폐를 신성시하여 화폐제 통일을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네로황제부터 카라칼라황제에 걸쳐서 로마제국의 재정 궁핍으로 금화·은화 모두 여러 번 품위·무게가 떨어져 개주(改鑄)되었다. 콘스탄티누스대제는 화폐제 개선에 힘써 아우레우스금화 대신 솔리두스금화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은 질 좋은 금화로 나중에 유럽에도 유포되어 1000년 이상 통용되었다.
비잔틴제국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건설한 유스티니아누스황제는 황제 초상을 새긴 솔리두스금화를 만들어 본위화폐로 삼았으며 그 밖에 금화 외에 은화·동화도 주조하였다. 은화·금화에는 황제 초상·그리스도 흉상·십자가 등이 들어 있다. 이들 금화·은화·동화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만들어졌으며, 로마·카르타고·라벤나·알렉산드리아 등에서도 주조되었다. 비잔틴화폐 가운데 특히 금화는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에 널리 통용되었으며, 6∼7세기에 걸쳐 현재의 프랑스·독일·벨기에·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러시아·발칸반도·레반트·북아프리카 등에서도 통용되었다.
중세유럽 게르만 여러 국가들의 화폐제도는 고대 지중해문명의 유산 위에 성립되었다. 당시 게르만 국가에서는 로마시대 화폐가 일반적으로 친숙하게 사용되었고, 게르만민족이 점령지역을 로마황제 이름으로 지배하였던 정치적 이유도 있어 게르만민족의 수장들은 로마황제 초상이 든 화폐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차츰 게르만 지배자들은 로마황제의 이름 대신 자기 이름을 각인한 화폐로 교체하였다. 로마제국에서는 조폐권이 황제 즉 국가에 있었으나 게르만 국가의 경우 국가의 독점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메로빙거왕조 때 왕실 주조소에서 주조된 화폐 외에 교회·주교·장원 영주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화폐도 있었다. 또한 각지의 주조소에서 만들어진 방랑화폐라고 불리는 것도 있었으나 품질이 조악하고 권위가 없었다. 여러 게르만 국가들 중 프랑크족은 메로빙거왕조 때 독자적 화폐제도를 마련하여 살리카법전 속에서 1솔리두스(금화)=40데나리우스(은화)로 정하고, 로마시대 실체화폐였던 데나리우스은화를 계산화폐로 삼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체계는 불편하여 카롤링거왕조 때 피핀 3세와 그 아들 카를대제에 의해 다시 실체화폐로서 신(新)데나리우스은화가 주조되어 중세 유럽의 본위화폐가 되었다. 카를대제의 아들 루이(루드비히) 1세는 십자가와 <신에게 드리는 봉헌물>이라는 문자가 각인된 솔리디우스금화를 주조하였다. 12세기 십자군의 영향으로 오리엔트의 금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고, 13세기에는 각지에서 금화가 주조되었다. 1251년 피렌체에서 만들어진 플로린금화는 특히 유명하여 유럽 각지에 유포되었고, 각국에서 금화를 새로 주조하는 경우 모델로 이용되었다. 플로린금화에는 성 요한의 입상과 피렌체의 문장(紋章)인 백합꽃이 각인되어 있다. 영국은 로마지배시대에 로마 금화 솔리두스를 사용하였으나, 헨리 3세가 1257년 주조한 페니금화에 의해 최초로 자국 통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1344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플로린금화가 도입되었으며, 혠리 7세 치하의 1487년 소버런(sovereign)금화가 주조되었다. 이 금화는 앞면에 왕관 쓴 국왕의 좌상(坐像)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 군대의 방패와 튜더집안 장미문장이 각인되어 있다.
근세 16세기에 들어서 신대륙으로부터 많은 은이 유럽 여러 나라에 유입되어 각국의 금·은 값은 심한 변동을 가져와 가격혁명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유럽의 화폐제도는 큰 변화를 나타냈으며 에스파냐의 페소화는 국제적으로 유력한 무역용 화폐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1520년부터 대형 탈러은화가 주조되었다. 탈러은화는 앞면에 초상, 뒷면에 문장이 새겨졌다. 그 뒤 유럽 여러 나라 조폐소에서는 각각 자기 나라 고유의 화폐를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튜더집안 에드워드 6세 때 당시까지의 소버런금화 외에 로마 화폐제를 모방하여 화폐면에 통용가격을 표시한 실링화와 페니화가 주조되었다. 근세에 들어와 중앙집권국가는 조폐권을 봉건제후에게서 빼앗아 조폐제(制)의 할거(割據)체제를 타파해 통일을 꾀하려 했던 점에 특징이 있다. 화폐모양도 그리스도·교회·성·도시·봉건영주 등에서 바뀌어, 절대군주의 초상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근대 산업혁명 결과 조폐기계가 도입되어 균일한 화폐가 대량 제조되었으며 화폐 제조비도 저렴해졌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마르크·프랑·리라·페세타 등 현재 사용하는 화폐단위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 19세기 중엽부터 주화와 아울러 지폐가 일반화되었다. 나아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각국에서는 금본위제가 채택되어 세계적 규모로 화폐금융제도의 통일기반이 형성되었다. 산업혁명을 최초로 이룩한 영국에서는 찰스 2세 치하 1662년 조폐국에 신설된 공장에서 근대 화폐인 기니(guinea)금화를 제조하여 종래의 금화와 대체하였고, 이어서 은화와 동화도 제조하였다. 그 뒤 빅토리아여왕 치하 1848년 2실링금화(플로린)가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미국에서 최초의 화폐는 1652∼1682년 보스턴 조폐국에서 만든 실링은화·6펜스은화·3펜스은화였다. 그때까지 영국·에스파냐의 화폐가 유입되어 있었으나 수량은 적었다. 독립전쟁 후 미국독립이 승인된 1783년 동화가 만들어져 초대대통령 G. 워싱턴의 초상이 각인되었다. 1785년 연방회의에서 새로운 화폐제도가 채용되어 달러는 정식으로 미국 화폐단위가 되었다. 1792년 통화법과 화폐제조법이 제정되어 금·은복본위제도를 채용하고, 필라델피아조폐국이 개설되었다. 그해 10월 5센트화폐, 1793년 1센트·1/2센트 화폐가 제조되었고, 1794년 유명한 조금가(彫金家) R. 스콧에 의해 은화가, 1795년부터 금화가 만들어졌다. 한편 세계 최초 지폐는 1392년 런던에 설립된 금장(金匠)회사 발행의 금은예치증서 <골드스미스 노트>였다. 그 뒤 영국에서는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창설되어 최초의 은행권이 발행되었으며, 이 제도는 그 뒤 세계 여러 나라로 확대되었다. 미국 최초 지폐는 식민지시대인 1690년 매사추세츠에서 발행되었으며, 그 뒤 18세기 초까지 코네티컷·뉴햄프셔·로드아일랜드·뉴욕·뉴저지 등 여러 주에서 계속 발행되었다. 그 밖에 전쟁·혁명 등 국가의 변동기에 당면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정부지폐가 발행된 적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정부가 발행하였던 아시냐지폐와 미국 남북전쟁(1861∼65) 당시 발행하였던 그린백이라고 하는 정부지폐 등이다.
중국 은(殷)나라로부터 주(周)나라 초에 걸쳐 패각·귀갑·진주·보석 등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주나라 때 포화(布貨;布幣)·도화(刀貨)·어화(魚貨)가 사용되었다. 이들은 물품화폐의 잔영을 남긴 것으로, 원형주화가 나타나기 이전에 쓰인 주화의 일종으로 보인다. 포화는 농기구로 쓰이던 괭이나 쟁기의 근원인 박(괭이)에서 진화한 것이며 도화는 가정용 작은 칼에서 발전한 것이다. 어화는 내륙지방의 생활필수품이던 건어(乾魚)가 물품화폐로 사용된 데에서 비롯하여 교환용 주화가 되었다. 이어 주나라에 원전(垣錢)·원자전(垣字錢)이라는 원형주화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환폐(環幣)라고도 하며 둥근 주화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그것이 주나라의 양치전이 되자, 주화의 구멍은 네모꼴로 바뀌었다. 진(秦)나라 시황제는 원형방공전(圓形方孔錢)을 만들고 동전에 의한 화폐의 통일을 도모하여 예전의 포화·도화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조폐권을 국가 수중에 넣었다. 이는 한(漢)나라 때도 계승되어 무제는 오수전(五銖錢)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그 뒤 약 800년에 걸쳐 중국 화폐로 존속하였다. 한나라를 멸망시킨 신(新)나라의 왕망(王莽)은 대천오십(大泉五十)·계도(契刀)·화포 등 왕망전을 주조하였으나 신나라가 15년 멸망하자 왕망전도 일시적인 것이 되었다. 당(唐)나라 고조는 개원통보(開元通寶)를 새로 주조하였는데 이것은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사용되었다. 이어서 송(宋)·원(元)·명(明)나라 등의 동전도 한국·일본 등으로 유입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명나라 성조(成祖;永樂帝)의 영락통보는 대표적인 것이다. 지폐는 송나라 때부터 발행되어 금(金)·원·명·청(淸)나라로 계승되었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때는 주화를 폐지하고 지폐를 사용케 하였음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명나라 때는 에스파냐 은, 청나라 때는 멕시코 은과 유럽의 양은(洋銀)이 유입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에 대항하여 청나라 후기에는 새로운 조폐소가 설립되어 유럽형 은화 및 동화가 대량 주조되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되자 국폐조례(國幣條例)에 의해 은원(銀元)이 본위화폐로 정해지고, 쑨원[孫文(손문)]·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초상을 각인한 화폐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주요 나라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차례로 금본위제로 이행하였으며 은값의 변동이 심해졌다. 중국은 마지막까지 은본위국으로 남아 있었으나 1935년 마침내 금본위제도의 하나인 금환(金換)본위제도로 이행하였다.
한국
고대∼삼국시대 고대에는 물물교환이 유통의 전부를 차지하여 무기와 각종 생산도구·장신구·곡물·직물 등을 물품화폐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 한치윤(韓致奫)이 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한국에 최초로 화폐가 등장한 것은 BC 57년으로, 이때 자모전(子母錢)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변한(弁韓)에서는 철을 생산하여 중국의 전화(錢貨)처럼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동옥저에서는 금·은으로 만든 무문전(無紋錢)이 사용된 기록이 보인다. 신라에서는 금·은 무문전이 사용된 기록은 있으나, 주조 또는 유통 실태 등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고려 초에 송(宋)나라와의 교역 및 국내산업 발전으로 주화의 필요성을 느껴 996년(성종 15) 최초로 철전을 주조하였으나, 유통범위가 넓지 못하였고 민간에서는 물물교환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뒤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의천(義天)의 건의로 1097년(숙종 2)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화폐주조업무를 담당, 수행하게 되었고, 1102년 1만 5000근의 구리로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만들었다. 이어 동국통보·동국중보·해동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 등의 여러 가지 주화(동전)를 주조하였다. 1101년 귀금속화폐로서 은병(銀甁)을 법화로 주조·유통시키기 시작하였다. 은병은 은 1근을 그때 국토모양을 본떠 주조한 것으로 초기에 칭량화폐로서 통용되었으나, 뒤에 위조은병이 나타나 가치가 하락하였다. 따라서 은병의 순도를 높이기 위하여 1331년(충혜왕 1) 소은병(小銀甁)을 주조하였는데, 역시 위조화폐가 성행하여 동병(銅甁)인지 은병인지 분간할 수 없을만큼 품질이 떨어졌다. 이어 칭량은화로 쇄은(碎銀)을 사용하였으나, 이것도 구리를 합주(合鑄)하여 품질이 나빠져 14세기 중엽 화폐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여전히 유통계를 지배하는 물품화폐의 주종을 이루던 베 즉 추포의 화폐기능이 둔화되어 1391년(공양왕 3) 통용을 금지하고, 이듬해 송나라의 회자(會子)와 원나라의 보초제를 모방한 저화(楮貨;紙錢)를 인조하여 5승포(五升布;중질품 베)와 함께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 저화가 국가에서 부여한 액면가치대로 통용될 수 없었으므로 고려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화폐제도 개혁은 실패하였다.
조선시대 화폐의 필요성이 다시 논의되어 1408년(태종 8) 고려 말에 사용하던 저화를 찍어서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좌절되고, 1423년(세종 5) 동전을 법화로 주조하여 발행하였다. 이것이 동전인 조선통보(朝鮮通寶)이다. 1425년 4월 마침내 저화의 통용을 중단시키고 동전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각 도의 세납을 동전으로 납부하지 않는 사람은 처벌하는 등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동전의 유통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일반민중은 여전히 베·쌀 등 물품화폐를 주로 사용하였다. 1464년(세조 10) 전폐(箭幣)를 만들어 법화로 사용하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전폐는 유사시 화살촉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화폐로 사용할 목적으로 화살촉모양으로 만든 철전이었다. 이것은 조정의 적극정책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나, 민간에서 저화를 사사로이 주조하게 됨으로써 신용이 떨어져 다시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주화의 유통이 일진일퇴하다가 1678년(숙종 4) 주전청(鑄錢廳)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그 뒤 상평통보는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 통용되었다. 1866년(고종 3)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발행하였으나, 이 당백전으로 말미암은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혼란을 겪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 서양식 신식화폐인 대동3전(大東三錢)·2전·1전 등 3종의 은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대동전은 과다한 비용과 제작기술 미숙으로 유통되지 못하였다. 1885년(고종 22) 전환국(典圓局)을 설치하고 독일에서 신식기계와 기술을 도입하여 신화폐를 주조하였으나, 러·일전쟁 발발로 이 제도는 확립되지 못하였다. 갑오개혁을 계기로 <신정화폐발행장정(新定貨幣發行章程)>을 정하고 5냥·1냥(이상 은화), 2전 5푼(백동전), 5푼(적동전), 1푼(황동전) 등 5가지 화폐를 만들어 문란해진 화폐제도를 통일하려 하였으나 본위화폐 주조는 극소수에 머무르고 대부분 백동화 주조에만 주력하여 화폐제도가 충분히 확립되지 못하였다. 1900년(고종 37) 러시아인 알렉세예프의 건의에 따라 <신화폐조례>를 제정하고 금본위제에 의한 20환·10환·5환(이상 금화), 반환·20전(이상 은화), 5전(백통)·1전(적동) 등 7종의 화폐를 만들어 일제가 국권을 빼앗을 때까지 사용하였다. 1902년 <중앙은행조례> 및 <태환금전조례>가 발표되고 중앙은행에서 1, 5, 10, 50, 100환의 태환권 지폐가 발행되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설립되자 화폐의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 중앙은행으로 한국은행을 설립하였으나 은행권을 마련하지 못하여 일본의 다이이치[第一(제일)]은행권이 대신 사용되었다. 한국은행권이 처음 발행된 것은 1910년 12월 21일로 이날 1원권이 발행되고, 이듬해 6월 5원권과 10원권이 발행되었다. 1911년 2월 총독부가 <조선은행법>을 공포하고 8월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하여 구한국은행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승계시킴으로서 한국은행권은 조선은행권으로 인정되었다. 1914년 9월 조선은행이 100원권을 발행하였고, 마침내 1915년 1원권·5원권·10원권을 발행하였다. 그 뒤 조선은행권은 계속 발행되어 중·일전쟁 때 만주는 물론 중국에까지 유통되었으며, 그 발행고는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인계받은 발행고 1180여 만원에서 광복 직전 49억원으로 증가하였다.
광복 뒤 광복 직후 미국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는 1달러에 450원, 1949년 1대 500, 12월 1대 600이 되었다. 6·25가 일어나자 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갔으며, 이때 대구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인 1000원권과 100원권 2종류를 발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행권인 100원·10원·5원·1원권의 4종류와 함께 6종류가 통용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1953년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와 긴급금융조치법이 공포되었다. 이로써 원의 유통이 금지되고 원화 표시 금전채무는 100대 1로 절하되었으며, 화폐 명칭도 <환>으로 바뀌었다. 그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제2차 화폐개혁이 실시되어, 다시 <환>에서 <원>으로 바뀌고 1/10로 명목절하되어 지금에 이른다. 현재 1만원·5000원·1000원(이상 지폐)과 500원·100원·50원·10원·5원·1원(이상 주화) 등이 통용되고 있다. 그 밖에 1970년 이후 국내여신을 각각 통화의 규제대상으로 규정하여 어음·예금증서 등과 금융·증권시장 주식·채권 등도 유사화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519){document.img1.width=519;}" orgWidth="1468">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히 하는 데 쓰이는 매개물의 일종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히 하는 데 쓰이는 매개물의 일종. 근대 자본주의경제는 분업과 사유재산제가 바탕이 되는 결과, 무수한 개별경제(경제주체·경제단위)로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근대경제는 분열된 무수한 개별경제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종합경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주체에는 생산주체와 소비주체가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결부되어 유통경제·시장경제를 형성하는데 여기에 화폐가 등장한다. 이같이 근대경제에서 화폐는 재화=상품인 동시에 각 개별경제를 결부시키는 사슬이며, 이 경우 화폐에는 매개적·목적적 존재의 2가지가 있다. 매개적인 것은 상품을 구입한 대가로 지불하는 화폐의 흐름이며, 이때 화폐는 구매수단 또는 유통수단이 된다. 목적적인 것은 화폐만 일방적으로 흘러가 이자가 붙은 화폐가 되어 다시 환류해 올 것을 기대한다. 여기서는 화폐 자체가 상품처럼 거래대상이 된다.
금속주의(金屬主義)와 명목주의 이같은 역할을 지닌 화폐의 본질에 관한 학설로는 오늘날 금속주의와 명목주의의 2가지가 있다. 넓은뜻으로 금속주의에는 상품학설·소재주의가 포함되고, 명목주의에는 화폐국정설(貨幣國定說)·지시증권설(指示證券說)·직능학설·추상학설 등이 포함된다. 금속주의에 의하면 화폐란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받게 되는 상품이 된다. 그 결과 화폐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소재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즉 상품과 화폐의 교환 과정에서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있는 상품으로서 다른 상품과 교환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화폐의 본질은 가치있는 소재에서 구하며, 화폐는 상품 또는 가치있는 재화 특히 귀금속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소재가치를 지니지 않은 화폐의 존재는 인정할 수 없으므로 지폐는 화폐일 수 없게 된다. 지폐가 유통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정부지폐를 뜻하는 한에서는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기능에서 생긴 가치표시이다. 즉 지폐는 화폐의 사용을 절약하는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금속주의에서는 화폐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니므로 가치척도로서 다른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화폐의 본질적 기능을 가치척도에서 찾고 거기에서 유통수단·가치보장·지불수단·세계화폐 등 여러 기능이 유도된다. 이 학설은 영국의 고전파경제학이나 마르크스경제학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 주요 학자로 D. 리카도·K. 크니스·B. 힐데브란트·K. 마르크스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마르크스에 의해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화폐학설로 확립되었다. 이것을 상품학설이라고도 한다. 이와 달리 명목주의에서는 금속주의가 주장하는 소재가치인 상품성에 의한 일반적 가치척도 기능을 부정하고 화폐의 본질을 추상적 기능, 즉 일반적 교환 내지 유통수단에서 구한다. 명목주의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 학설로 G.F. 크나프의 화폐국정설이 있다. 화폐는 소재와 관계없이 국가의 법제에 의해서만 통용력을 지닌다고 하여 화폐의 본질을 유통수단에서 구하는 이론이다. 명목주의는 다시 화폐를 상품에 대한 일반적인 참가표권(參加票券)으로 보는 F. 벤딕센·K. 엘스터의 표권설(指示證券說), 화폐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가진 모든 것이라는 L.E. 미제스·K. 헬페리히 등의 직능학설, 또한 화폐는 상품가치의 비율을 나타내는 추상적 계산단위라는 R. 리프만의 추상학설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명목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독일을 중심으로 성행한 학설이다.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근대경제학자 J.M. 케인스는 《화폐론(1930)》에서 명목주의 입장에 서서 화폐를 단순히 구매수단 기능을 가진 것으로 여겨 계산화폐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케인스의 계산화폐는 채무·각종 가치·일반구매력 등에서 표현되는 것으로서, 금속주의라는 가치척도로서의 화폐기능에 해당되는 것이다.
근대경제학에서의 화폐
정의-화폐와 계산화폐 국민소득의 크기를 나타내거나, 가령 철 1㎏의 값과 솜 1㎏의 값을 비교할 때처럼 경제적 가치의 집계나 비교를 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위를 <계산화폐>라고 한다. 원·달러·마르크 등의 명칭이 그것에 해당되며 나라마다 다르다. 계산화폐는 대부분이 무게의 단위이기도 한데, 이것은 옛날 칭량화폐(秤量貨幣)시대에 사용할 때마다 그 무게를 달아보았던 습관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계산화폐인 원(圓)은 단순히 둥글다는 뜻을 나타내며 무게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계산화폐는 도량형이나 시간 등의 단위와 관계없이 오로지 경제계산을 위해서만 쓰이는 추상적 단위이며 실체는 없다. 화폐란 이런 계산화폐로 나타냈을 때 그 가치(나타내어진 값)가 고정되고 불변한 것이 된다. 계산화폐와의 관계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화폐를 <현실화폐>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그 둘의 관계는 예를 들면 1만원짜리 화폐는 어제도 오늘도 <계산화폐·원>의 1만원 단위에 의해 나타내지며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명백해진다. 다만 화폐를 계산화폐로 나타낸 값은 불변이라도, 화폐를 화폐 이외의 재(財)나 서비스에 의해 측정한 값은 날마다 변동한다. 하지만 일반인은 예를 들어 화폐로 측정한 맥주값이 올랐다고는 말하지만, 맥주로 화폐를 측정하여 화폐가치가 내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계산화폐와 화폐는 경제생활의 기준이 되어 있다. 다만 화폐는 계산화폐가 추상적 단위인 데 대하여 현실의 경제적 거래에 수반하여 생기는 채무의 최종적 결제수단으로서 작용하는 실체이다.
종류-국가화폐와 은행화폐 특정적인 실질(實質)·형식의 것을 화폐로 선언하는 힘을 화폐고권(貨幣高權)이라고 하며, 근대국가 성립과 함께 국가가 소유하게 되었다. 국가는 화폐 위조에 무거운 형을 과하고 화폐로 납세를 하며 또 민간화폐에 의한 거래결제를 최종적인 것으로 공인함으로써 화폐고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것이 법화(法貨)의 성립이다. 그 뒤 화폐 제조기술이 발달하여 위조화폐를 만들기 어렵게 되자, 주화(鑄貨)에 찍힌 액면값과 주화를 망가뜨렸을 때의 가치는 별개의 것이 되었다. 소재가 재화로서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주화로 유통되기 때문이다. 주화는 재·서비스와는 전혀 별도로 그 소재를 재로 이용하는 것을 예정하지 않는, 화폐라는 하나의 자산이 되었다. 그 뒤 주화는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액면값에 대해 소재의 가치를 저하시켰으며, 그 극한에 이르러 오늘날의 보조화폐(한국에는 없다)나 정부지폐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 계열의 화폐는 국가권력이 근거로 되어 기능하는 화폐이므로 국가화폐라고 하며, 현실적으로 주고 받아 유통하는 화폐이기 때문에 현실화폐라고도 한다. 국가화폐와는 별도로 나중에 은행화폐가 생겨났다. 그것은 민간 금융기관인 은행의 요구가 있는 즉시 현금(국가화폐)을 인도하겠다고 약속한 자기앞 채무이다. 은행화폐는 처음에는 은행권형식을 취하였으나, 여러 종류의 은행권이 발행되어 혼란을 가져와 중앙은행이 독점하게 되었다. 이 경우에도 처음에는 중앙은행의 태환(兌換)을 의무화하였는데(은행권과 금의 교환비율=금평가를 국가가 법으로 정하는 금본위제도 아래에서), 사람들은 은행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환은행권)으로 믿고 중앙은행은 이 때문에 은행권 발행잔고에 대하여 일정한 금을 준비·보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은행권은 금본위제도 아래에서는 신용화폐(은행에 대한 신용에 의해 유통하는 화폐)였으나, 관리통화제도로 금환이 정지됨에 이르러(不換銀行券化) 국가에서 은행권에 강제 통용력을 부여한 것이 은행권에 대한 신뢰의 기초가 되었다. 이 단계에서 은행권은 국가화폐로 편입되어 은행화폐의 역할을 중지하였다. 은행권발행을 할 수 없게 된 은행은 일람출금 예금을 은행화폐로 삼았다. 이것은 은행권과 달리 형체가 없고 즉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지만 현금은 아니며, 단순히 은행 장부상 숫자로 예금자의 수표나 예금자의 지시에 따라 계좌대체라는 형식을 통해 이동하여 채무결제에 사용할 수 있는 은행의 채무이다. 은행화폐는 법적으로 채무를 최종적으로 결제하는 국가화폐와 달리 은행이라는 민간기관 채무에 대한 사회적 신뢰 성립을 근거로 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화폐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가 많다. 그러나 일람출금예금은 본래 부족하기 쉬운 국가화폐의 사용을 절약하고 보충하는 의미에서 성립된 것이므로, 관계자가 그것을 즉시 국가화폐로 바꿀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는 엄한 자주적 제재가 있으며 또 행정상 규제도 엄중하여 실제로는 현금화되지 않은 채 채무결재로 쓰이는 것이다. 따라서 제도적으로는 어떻든 기능상으로 충분히 화폐 역할을 하고 있다. 이같이 은행의 일람출금예금은 예금인 채로 이동하여 화폐 기능을 하므로 다른 금융기관의 예금과 합쳐 <예금통화>라고 하며, 통계적으로는 국가화폐(현금통화)와 함께 한 국가의 화폐량을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 있다.
기능-교환매개와 가치저장 국가화폐이든 은행화폐이든 그것이 화폐 역할을 하는 것은 첫째 경제적 <가치척도>로서 작용하는 일이다. 그러나 화폐를 계산화폐로 측정한 값이 불변이므로 마치 화폐가 가치척도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도리어 현실화폐의 기능이 아니라 계산화폐의 기능이라 하겠다. 둘째 화폐는 재·서비스를 사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그 화폐는 재·서비스를 팔아서 얻어지므로, 결국 화폐는 재나 서비스의 <교환매개>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화폐가 매개하는 교환은 재·서비스와 화폐를 교환하는 단계와, 화폐와 재·서비스를 교환하는 단계의 2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단계 사이에는 통상적으로 시간적 거리가 있다. 이 두 시점 사이에서 화폐는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있는데, 그 사이에서 화폐는 <가치저장>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교환매개와 가치저장의 두 기능을 떼어 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화폐를 내놓는 사람은 상대가 가치저장에 기여함을 알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한편 화폐를 받는 사람은 장차 교환매개로 이용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적당한 재·서비스를 적당한 조건으로 제공하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의 시간·노력(정보 코스트)과, 받은 화폐를 다음 지급에 이용할 때 입는 감가 손실(거래 코스트)이 되도록 적게 하여 화폐를 내놓는다. 그러나 이들 두 코스트를 되도록 적게 하고 교환매개와 가치저장의 두 기능을 화폐가 충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화폐를 일반 재·서비스로 측정한 가격, 즉 화폐가 다른 재를 지배하는 힘인 구매력이 불변이어야 한다. 다행히 화폐를 계산화폐로 측정한 값은 불변이므로, 오늘 1000원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을 내일은 1000원권으로 살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오늘도 내일도 1000원의 값이 붙어 있는 것은 확실히 살 수 있어 마치 화폐의 구매력이 불변인 것처럼 생각하는 <화폐착각>이 생기기 쉬우며, 그것이 큰 뒷받침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수요-동기와 요소 화폐에는 형태가 없는 면이 있어 화폐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화폐의 양을 파악하려면 잔고(어느 한 시점의 양)에 의거하도록 되어 있다. 잔고라면 언제라도 모두 누군가의 수중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동기로는 다음 3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누구든지 어떤 사람의 어떤 기간중 화폐수불(貨幣受拂) 누계액이 동일해도 그것이 그 기간 중의 모든 시점에서 수입과 지출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한편 벌칙이 따르는 성실한 원칙이 있어서 채무는 약속된 시점에서 반드시 결제되어야 하므로 약간의 잔고가 보유된다. 이것이 거래 동기에 의한 보유이다. 둘째 기대가 그대로 실현된다고는 할 수 없다. 쓰고 싶은 재·서비스가 우연히 생길 수도 있다. 그 경우에도 성실의 원칙이 작용한다. 이 때문에 약간의 잔고가 보유된다. 이것이 예비적 동기에 의한 화폐의 보유이다. 셋째 화폐는 누구든 언제라도 받을 수 있으므로 현재도 장래도 사용할 생각이 없는 것을 팔고 사서 그 차액을 벌려는 기회를 얻으려는 목적에 의해서도 사람은 화폐를 수중에 보유한다. 이것이 투기적 동기에 바탕을 둔 보유이다. 이같이 동기는 3가지 있지만, 보유하고 있는 화폐잔고의 어느 부분이 어떤 동기에 의한 것이냐를 구체적으로 보여 달라고 하면 이에 대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기를 하나로 총괄할 수는 있다. <유동성동기>가 총괄적인 동기이다. 자산의 유동성에는 2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다른 재·서비스로 바꾸기 쉬운 성질 즉 시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로 측정한 가치가 안정되어 있는 성질 즉 시장가치의 안정성이다. 이들 두 요소는 어떤 자산에나 많든 적든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화폐는 이 두 요소에서 다른 어느 자산보다도 뛰어나며(사실 화폐에서도 다른 재·서비스로 측정한 가격이 변동한다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화폐착각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 이것이 화폐의 수요를 가져오는 까닭이다.
공급-과거와 장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화폐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소재가치에 바탕을 둔 금속주의와 그에 반대하는 명목주의 사이에 벌어졌다. 그러나 그 뒤 현금(국가화폐)조차도 종이라는 전혀 가치없는 소재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예금(은행화폐)이 잔고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아져 오늘날에는 화폐 역할을 하는 것이 화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같이 화폐가 소재를 문제삼지 않게 되는 과정 속에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그것이 더욱 진전되어 지금은 화폐의 잔고조차 불명확해졌다. 즉 지금까지 화폐의 공급자였던 정부·중앙은행 등 공적 기관과 은행 및 기타 금융기관이 공급한 화폐의 잔고는 이들 기관의 채무이므로 양적으로 명확해졌으나, 지금은 이들 외에 금융기관이 아닌 기업이나 개인에게도 예금담보나 당좌대월 형식으로 미리 신용도가 주어지고, 그 양이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폐의 본질적 역할은 교환매개 즉 구매력으로 작용하는 데 있으며, 그 성과는 잔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래에 쓰인 총거래량에 의해 알려져야 한다. 종래에 수요와 공급을 잔고로 억제한 것은 편의에 지나지 않으며, 암묵리에 잔고의 회전수가 불변이라고 가정한 데에 있다. 그러나 가령 잔고가 불변이라도 그 회전수는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일렉트로닉 테이크 프로세싱 시스템, 정보검색과 통신시스템 분야에서 근년의 기술 진보 결과 뚜렷이 증가되었다. 게다가 잔고 자체도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한 기간 중에 움직인, 또는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는 구매력의 크기는 실제로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 공급자인 정부 및 중앙은행은 국가화폐의 공급량 조작이 전체 화폐량을 움직이고, 그것이 산출량·고용량 등의 실물량에 영향을 미친다는 화폐적 경제이론 관점에서 국가화폐의 공급량을 중요시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화폐를 포함한 전체 화폐 잔고도, 그 회전수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통화당국은 정책적으로 효과를 올릴 수 있는 화폐공급량의 지표를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현금 플러스 일람출금 예금잔고였으나 차츰 확장되어 기업의 정기성예금이나 양도성예금의 잔고, 나아가 우편저금의 잔고를 첨가하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언제라도 화폐로서 작용할 수 있는 신용도의 크기도, 또 화폐의 회전수를 파악하는 방법도 통계적으로 분명히 하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금융정책에 의해 고용량이나 산출고를 정확하게 움직이는 일은 당분간 어려움이 더해질 것이다.
역사
원시화폐 원시사회에서 물물교환이 성행하자 물자교환에 따르는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 교환매개물로서 물품화폐(자연화폐)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원시화폐로 비교적 처분하기 쉬운 물건이 이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곡물(중부아메리카·필리핀·한국·중국·일본 등)·포백(布帛;한국·중국·일본 등)·가축(그리스·로마·남아프리카 등)·농기구(중국)·소금(에티오피아)·무기(고대 영국)·모피(시베리아)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패각(貝殼)·우모(羽毛)·귀갑(龜甲)·경치(鯨齒) 등과 장식품이나 의례적·주술적인 물건들도 볼 수 있으며, 그 생성에 종교적 의의를 지닌 경우가 많다. 그 뒤 금속이 사용되자 원시화폐 모양을 한 주조화폐(coin)가 나타났다. 금속은 보존성·등가성·분할성·운반성 등 화폐로서 필요한 조건을 잘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포화(布貨)·도화(刀貨)·어화(魚貨) 등이 전형적 예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BC 2000년 무렵 이집트·바빌로니아 등에서는 금·은이 칭량화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아시리아의 금·은,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철, 아라비아의 구리, 멕시코의 주석 등이 있었다.
그리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주화는 BC 7세기 리디아왕국에서 주조한 엘렉트론화이다. 엘렉트론화는 금과 은의 천연합금으로 은이 약 30% 함유되었다. 이것은 주화로서 일정한 형상·품위·무게를 정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화폐로서, 리디아왕국 왕 기게스는 엘렉트론화에 그 가치를 보증하는 각인을 새겨 값어치가 같은 금속으로 사용하였다. 그 뒤 기게스의 후계자 크로이소스는 엘렉트론화에 리디아왕국의 증인(證印)을 새겨서 스타테르화를 주조하였고 이것은 근동 각지에서 유통되었다. 리디아왕국은 BC 6세기 페르시아에 정복되었으며, 페르시아인은 화폐 사용을 답습하였다.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1세는 금 셰켈(shekel) 및 은 드라크마(drachma)를 화폐단위로 정하고, 금은복본위제도(金銀複本位制度)를 채용하여 금화 다레이코스 및 은화 시글로스를 주조하였다. 금·은 비율은 13 ⅓이었는데 이 비율은 그 뒤 약 2000년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쓰여졌다. 그리스에서는 BC 6세기에 아이기나은화를 주조하였고 뒤에 아테네에서도 은화를 만들어 앞면에 아테네 여신의 얼굴, 뒷면에 올빼미와 올리브 그림을 새겼다. 이것은 질좋은 은화로 지중해 연안의 국제화폐가 되었다. BC 5세기에는 그리스 도시국가가 거의 독자적 화폐를 만들었고, 그것이 차츰 남이탈리아·소아시아·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로 파급되었으며, 헬레니즘시대에는 오리엔트에도 퍼졌다. BC 3세기 무렵에는 고대인도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왕이나 아폴론상(像)을 새긴 화폐를 주조하였다.
로마 로마에서는 BC 3세기에 대형 청동화 아에스 그라베 및 은화 데나리우스가 주조되었고, BC 1세기에는 금화 아우레우스가 만들어졌다. 화폐단위인 아스(as)가 각인된 아에스청동화에는 앞면에 야누스신, 뒷면에 뱃머리그림이 각인되었다. 청동화 10아에스에 해당하는 화폐단위가 각인된 데나리우스은화 앞면에는 로마의 신, 뒷면에는 통상의 신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의 쌍둥이신상 및 ROMA라는 문자가 새겨졌다. 데나리우스은화는 로마의 조폐소 외에 각지에서 다량으로 만들어져 지중해 서부와 중부에서 주요한 통화가 되었다. 또한 아우레우스금화는 앞면에 비너스상, 뒷면에 임페라토르(imperator;군사령관)라는 문자와 전리품모양이 새겨져 오리엔트의 조폐소에서 주조되었다. 카이사르시대에는 화폐에 CAESAR라는 문자와 카이사르의 가문(家紋)인 코끼리 그림이 새겨졌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안토니우스는 처음에 갈리아에서, 나중에 오리엔트의 조폐소에서 화폐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소아시아에서 주조된 화폐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초상을 함께 각인한 것, 군함이나 군기(軍旗) 디자인을 새긴 것도 있다. 또 아우구스투스황제는 본위화폐로 아우레우스금화를 채용하였다. 이 금화는 25데나리우스은화와 등가(等價)였고, 1데나리우스는 16아에스청동화와 등가였다. 아우구스투스황제까지는 화폐 디자인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그 뒤 황제의 초상이 들어가게 되었고, 황제의 인격을 강조함으로써 화폐를 신성시하여 화폐제 통일을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네로황제부터 카라칼라황제에 걸쳐서 로마제국의 재정 궁핍으로 금화·은화 모두 여러 번 품위·무게가 떨어져 개주(改鑄)되었다. 콘스탄티누스대제는 화폐제 개선에 힘써 아우레우스금화 대신 솔리두스금화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은 질 좋은 금화로 나중에 유럽에도 유포되어 1000년 이상 통용되었다.
비잔틴제국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건설한 유스티니아누스황제는 황제 초상을 새긴 솔리두스금화를 만들어 본위화폐로 삼았으며 그 밖에 금화 외에 은화·동화도 주조하였다. 은화·금화에는 황제 초상·그리스도 흉상·십자가 등이 들어 있다. 이들 금화·은화·동화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만들어졌으며, 로마·카르타고·라벤나·알렉산드리아 등에서도 주조되었다. 비잔틴화폐 가운데 특히 금화는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에 널리 통용되었으며, 6∼7세기에 걸쳐 현재의 프랑스·독일·벨기에·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러시아·발칸반도·레반트·북아프리카 등에서도 통용되었다.
중세유럽 게르만 여러 국가들의 화폐제도는 고대 지중해문명의 유산 위에 성립되었다. 당시 게르만 국가에서는 로마시대 화폐가 일반적으로 친숙하게 사용되었고, 게르만민족이 점령지역을 로마황제 이름으로 지배하였던 정치적 이유도 있어 게르만민족의 수장들은 로마황제 초상이 든 화폐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차츰 게르만 지배자들은 로마황제의 이름 대신 자기 이름을 각인한 화폐로 교체하였다. 로마제국에서는 조폐권이 황제 즉 국가에 있었으나 게르만 국가의 경우 국가의 독점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메로빙거왕조 때 왕실 주조소에서 주조된 화폐 외에 교회·주교·장원 영주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화폐도 있었다. 또한 각지의 주조소에서 만들어진 방랑화폐라고 불리는 것도 있었으나 품질이 조악하고 권위가 없었다. 여러 게르만 국가들 중 프랑크족은 메로빙거왕조 때 독자적 화폐제도를 마련하여 살리카법전 속에서 1솔리두스(금화)=40데나리우스(은화)로 정하고, 로마시대 실체화폐였던 데나리우스은화를 계산화폐로 삼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체계는 불편하여 카롤링거왕조 때 피핀 3세와 그 아들 카를대제에 의해 다시 실체화폐로서 신(新)데나리우스은화가 주조되어 중세 유럽의 본위화폐가 되었다. 카를대제의 아들 루이(루드비히) 1세는 십자가와 <신에게 드리는 봉헌물>이라는 문자가 각인된 솔리디우스금화를 주조하였다. 12세기 십자군의 영향으로 오리엔트의 금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고, 13세기에는 각지에서 금화가 주조되었다. 1251년 피렌체에서 만들어진 플로린금화는 특히 유명하여 유럽 각지에 유포되었고, 각국에서 금화를 새로 주조하는 경우 모델로 이용되었다. 플로린금화에는 성 요한의 입상과 피렌체의 문장(紋章)인 백합꽃이 각인되어 있다. 영국은 로마지배시대에 로마 금화 솔리두스를 사용하였으나, 헨리 3세가 1257년 주조한 페니금화에 의해 최초로 자국 통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1344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플로린금화가 도입되었으며, 혠리 7세 치하의 1487년 소버런(sovereign)금화가 주조되었다. 이 금화는 앞면에 왕관 쓴 국왕의 좌상(坐像)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 군대의 방패와 튜더집안 장미문장이 각인되어 있다.
근세 16세기에 들어서 신대륙으로부터 많은 은이 유럽 여러 나라에 유입되어 각국의 금·은 값은 심한 변동을 가져와 가격혁명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유럽의 화폐제도는 큰 변화를 나타냈으며 에스파냐의 페소화는 국제적으로 유력한 무역용 화폐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1520년부터 대형 탈러은화가 주조되었다. 탈러은화는 앞면에 초상, 뒷면에 문장이 새겨졌다. 그 뒤 유럽 여러 나라 조폐소에서는 각각 자기 나라 고유의 화폐를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튜더집안 에드워드 6세 때 당시까지의 소버런금화 외에 로마 화폐제를 모방하여 화폐면에 통용가격을 표시한 실링화와 페니화가 주조되었다. 근세에 들어와 중앙집권국가는 조폐권을 봉건제후에게서 빼앗아 조폐제(制)의 할거(割據)체제를 타파해 통일을 꾀하려 했던 점에 특징이 있다. 화폐모양도 그리스도·교회·성·도시·봉건영주 등에서 바뀌어, 절대군주의 초상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근대 산업혁명 결과 조폐기계가 도입되어 균일한 화폐가 대량 제조되었으며 화폐 제조비도 저렴해졌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마르크·프랑·리라·페세타 등 현재 사용하는 화폐단위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 19세기 중엽부터 주화와 아울러 지폐가 일반화되었다. 나아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각국에서는 금본위제가 채택되어 세계적 규모로 화폐금융제도의 통일기반이 형성되었다. 산업혁명을 최초로 이룩한 영국에서는 찰스 2세 치하 1662년 조폐국에 신설된 공장에서 근대 화폐인 기니(guinea)금화를 제조하여 종래의 금화와 대체하였고, 이어서 은화와 동화도 제조하였다. 그 뒤 빅토리아여왕 치하 1848년 2실링금화(플로린)가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미국에서 최초의 화폐는 1652∼1682년 보스턴 조폐국에서 만든 실링은화·6펜스은화·3펜스은화였다. 그때까지 영국·에스파냐의 화폐가 유입되어 있었으나 수량은 적었다. 독립전쟁 후 미국독립이 승인된 1783년 동화가 만들어져 초대대통령 G. 워싱턴의 초상이 각인되었다. 1785년 연방회의에서 새로운 화폐제도가 채용되어 달러는 정식으로 미국 화폐단위가 되었다. 1792년 통화법과 화폐제조법이 제정되어 금·은복본위제도를 채용하고, 필라델피아조폐국이 개설되었다. 그해 10월 5센트화폐, 1793년 1센트·1/2센트 화폐가 제조되었고, 1794년 유명한 조금가(彫金家) R. 스콧에 의해 은화가, 1795년부터 금화가 만들어졌다. 한편 세계 최초 지폐는 1392년 런던에 설립된 금장(金匠)회사 발행의 금은예치증서 <골드스미스 노트>였다. 그 뒤 영국에서는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창설되어 최초의 은행권이 발행되었으며, 이 제도는 그 뒤 세계 여러 나라로 확대되었다. 미국 최초 지폐는 식민지시대인 1690년 매사추세츠에서 발행되었으며, 그 뒤 18세기 초까지 코네티컷·뉴햄프셔·로드아일랜드·뉴욕·뉴저지 등 여러 주에서 계속 발행되었다. 그 밖에 전쟁·혁명 등 국가의 변동기에 당면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정부지폐가 발행된 적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정부가 발행하였던 아시냐지폐와 미국 남북전쟁(1861∼65) 당시 발행하였던 그린백이라고 하는 정부지폐 등이다.
중국 은(殷)나라로부터 주(周)나라 초에 걸쳐 패각·귀갑·진주·보석 등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주나라 때 포화(布貨;布幣)·도화(刀貨)·어화(魚貨)가 사용되었다. 이들은 물품화폐의 잔영을 남긴 것으로, 원형주화가 나타나기 이전에 쓰인 주화의 일종으로 보인다. 포화는 농기구로 쓰이던 괭이나 쟁기의 근원인 박(괭이)에서 진화한 것이며 도화는 가정용 작은 칼에서 발전한 것이다. 어화는 내륙지방의 생활필수품이던 건어(乾魚)가 물품화폐로 사용된 데에서 비롯하여 교환용 주화가 되었다. 이어 주나라에 원전(垣錢)·원자전(垣字錢)이라는 원형주화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환폐(環幣)라고도 하며 둥근 주화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그것이 주나라의 양치전이 되자, 주화의 구멍은 네모꼴로 바뀌었다. 진(秦)나라 시황제는 원형방공전(圓形方孔錢)을 만들고 동전에 의한 화폐의 통일을 도모하여 예전의 포화·도화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조폐권을 국가 수중에 넣었다. 이는 한(漢)나라 때도 계승되어 무제는 오수전(五銖錢)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그 뒤 약 800년에 걸쳐 중국 화폐로 존속하였다. 한나라를 멸망시킨 신(新)나라의 왕망(王莽)은 대천오십(大泉五十)·계도(契刀)·화포 등 왕망전을 주조하였으나 신나라가 15년 멸망하자 왕망전도 일시적인 것이 되었다. 당(唐)나라 고조는 개원통보(開元通寶)를 새로 주조하였는데 이것은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사용되었다. 이어서 송(宋)·원(元)·명(明)나라 등의 동전도 한국·일본 등으로 유입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명나라 성조(成祖;永樂帝)의 영락통보는 대표적인 것이다. 지폐는 송나라 때부터 발행되어 금(金)·원·명·청(淸)나라로 계승되었다.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때는 주화를 폐지하고 지폐를 사용케 하였음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명나라 때는 에스파냐 은, 청나라 때는 멕시코 은과 유럽의 양은(洋銀)이 유입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에 대항하여 청나라 후기에는 새로운 조폐소가 설립되어 유럽형 은화 및 동화가 대량 주조되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되자 국폐조례(國幣條例)에 의해 은원(銀元)이 본위화폐로 정해지고, 쑨원[孫文(손문)]·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의 초상을 각인한 화폐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주요 나라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차례로 금본위제로 이행하였으며 은값의 변동이 심해졌다. 중국은 마지막까지 은본위국으로 남아 있었으나 1935년 마침내 금본위제도의 하나인 금환(金換)본위제도로 이행하였다.
한국
고대∼삼국시대 고대에는 물물교환이 유통의 전부를 차지하여 무기와 각종 생산도구·장신구·곡물·직물 등을 물품화폐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 한치윤(韓致奫)이 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한국에 최초로 화폐가 등장한 것은 BC 57년으로, 이때 자모전(子母錢)이라는 철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변한(弁韓)에서는 철을 생산하여 중국의 전화(錢貨)처럼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동옥저에서는 금·은으로 만든 무문전(無紋錢)이 사용된 기록이 보인다. 신라에서는 금·은 무문전이 사용된 기록은 있으나, 주조 또는 유통 실태 등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고려 초에 송(宋)나라와의 교역 및 국내산업 발전으로 주화의 필요성을 느껴 996년(성종 15) 최초로 철전을 주조하였으나, 유통범위가 넓지 못하였고 민간에서는 물물교환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뒤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의천(義天)의 건의로 1097년(숙종 2)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화폐주조업무를 담당, 수행하게 되었고, 1102년 1만 5000근의 구리로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만들었다. 이어 동국통보·동국중보·해동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 등의 여러 가지 주화(동전)를 주조하였다. 1101년 귀금속화폐로서 은병(銀甁)을 법화로 주조·유통시키기 시작하였다. 은병은 은 1근을 그때 국토모양을 본떠 주조한 것으로 초기에 칭량화폐로서 통용되었으나, 뒤에 위조은병이 나타나 가치가 하락하였다. 따라서 은병의 순도를 높이기 위하여 1331년(충혜왕 1) 소은병(小銀甁)을 주조하였는데, 역시 위조화폐가 성행하여 동병(銅甁)인지 은병인지 분간할 수 없을만큼 품질이 떨어졌다. 이어 칭량은화로 쇄은(碎銀)을 사용하였으나, 이것도 구리를 합주(合鑄)하여 품질이 나빠져 14세기 중엽 화폐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여전히 유통계를 지배하는 물품화폐의 주종을 이루던 베 즉 추포의 화폐기능이 둔화되어 1391년(공양왕 3) 통용을 금지하고, 이듬해 송나라의 회자(會子)와 원나라의 보초제를 모방한 저화(楮貨;紙錢)를 인조하여 5승포(五升布;중질품 베)와 함께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 저화가 국가에서 부여한 액면가치대로 통용될 수 없었으므로 고려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화폐제도 개혁은 실패하였다.
조선시대 화폐의 필요성이 다시 논의되어 1408년(태종 8) 고려 말에 사용하던 저화를 찍어서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좌절되고, 1423년(세종 5) 동전을 법화로 주조하여 발행하였다. 이것이 동전인 조선통보(朝鮮通寶)이다. 1425년 4월 마침내 저화의 통용을 중단시키고 동전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각 도의 세납을 동전으로 납부하지 않는 사람은 처벌하는 등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동전의 유통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일반민중은 여전히 베·쌀 등 물품화폐를 주로 사용하였다. 1464년(세조 10) 전폐(箭幣)를 만들어 법화로 사용하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전폐는 유사시 화살촉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화폐로 사용할 목적으로 화살촉모양으로 만든 철전이었다. 이것은 조정의 적극정책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나, 민간에서 저화를 사사로이 주조하게 됨으로써 신용이 떨어져 다시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주화의 유통이 일진일퇴하다가 1678년(숙종 4) 주전청(鑄錢廳)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그 뒤 상평통보는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 통용되었다. 1866년(고종 3)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발행하였으나, 이 당백전으로 말미암은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혼란을 겪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 서양식 신식화폐인 대동3전(大東三錢)·2전·1전 등 3종의 은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대동전은 과다한 비용과 제작기술 미숙으로 유통되지 못하였다. 1885년(고종 22) 전환국(典圓局)을 설치하고 독일에서 신식기계와 기술을 도입하여 신화폐를 주조하였으나, 러·일전쟁 발발로 이 제도는 확립되지 못하였다. 갑오개혁을 계기로 <신정화폐발행장정(新定貨幣發行章程)>을 정하고 5냥·1냥(이상 은화), 2전 5푼(백동전), 5푼(적동전), 1푼(황동전) 등 5가지 화폐를 만들어 문란해진 화폐제도를 통일하려 하였으나 본위화폐 주조는 극소수에 머무르고 대부분 백동화 주조에만 주력하여 화폐제도가 충분히 확립되지 못하였다. 1900년(고종 37) 러시아인 알렉세예프의 건의에 따라 <신화폐조례>를 제정하고 금본위제에 의한 20환·10환·5환(이상 금화), 반환·20전(이상 은화), 5전(백통)·1전(적동) 등 7종의 화폐를 만들어 일제가 국권을 빼앗을 때까지 사용하였다. 1902년 <중앙은행조례> 및 <태환금전조례>가 발표되고 중앙은행에서 1, 5, 10, 50, 100환의 태환권 지폐가 발행되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설립되자 화폐의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 중앙은행으로 한국은행을 설립하였으나 은행권을 마련하지 못하여 일본의 다이이치[第一(제일)]은행권이 대신 사용되었다. 한국은행권이 처음 발행된 것은 1910년 12월 21일로 이날 1원권이 발행되고, 이듬해 6월 5원권과 10원권이 발행되었다. 1911년 2월 총독부가 <조선은행법>을 공포하고 8월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하여 구한국은행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승계시킴으로서 한국은행권은 조선은행권으로 인정되었다. 1914년 9월 조선은행이 100원권을 발행하였고, 마침내 1915년 1원권·5원권·10원권을 발행하였다. 그 뒤 조선은행권은 계속 발행되어 중·일전쟁 때 만주는 물론 중국에까지 유통되었으며, 그 발행고는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인계받은 발행고 1180여 만원에서 광복 직전 49억원으로 증가하였다.
광복 뒤 광복 직후 미국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는 1달러에 450원, 1949년 1대 500, 12월 1대 600이 되었다. 6·25가 일어나자 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갔으며, 이때 대구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인 1000원권과 100원권 2종류를 발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행권인 100원·10원·5원·1원권의 4종류와 함께 6종류가 통용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1953년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와 긴급금융조치법이 공포되었다. 이로써 원의 유통이 금지되고 원화 표시 금전채무는 100대 1로 절하되었으며, 화폐 명칭도 <환>으로 바뀌었다. 그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제2차 화폐개혁이 실시되어, 다시 <환>에서 <원>으로 바뀌고 1/10로 명목절하되어 지금에 이른다. 현재 1만원·5000원·1000원(이상 지폐)과 500원·100원·50원·10원·5원·1원(이상 주화) 등이 통용되고 있다. 그 밖에 1970년 이후 국내여신을 각각 통화의 규제대상으로 규정하여 어음·예금증서 등과 금융·증권시장 주식·채권 등도 유사화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