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서 독일에 광부로 떠난 배삼득은 자신의 몸무게보다 20kg이 많은 스탬펠을 매일 80개씩 세웠다. 작년 천만 영화가 된 국제시장은 주인공인 덕수는 광부로 떠났으며 그의 아내 영자는 간호사로 떠났다. 독일에서 광부들은 매일 지하 1000m 막장에서 탄가루를 먹으며 노동을 하고 간호사들은 시체를 닦는 일 등 굳은 일을 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계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1억5000만 마르크를 차관 들여왔다. 이때 한국 정부를 지급보증 해줄 은행은 단 한곳도 없어 광부 5천 명과 간호사 2천 명을 서독으로 파견시켜 그들의 노동력을 담보로 서독 은행이 지급보증을 섰다. 그래서 1962년 10월 한국정부는 1억 5000만 마르크를 빌려왔다.
1963년 광부 247명을 처음 서독 땅을 밟았으며 1977년까지 8395명의 광부가 독일로 갔다. 1965년부터는 한국인 간호사의 독일 취업이 허용되어 1976년까지 1만 371명이 독일로 떠났다.
독일로 떠난 광부와 간호사들에게는 가난을 벗어날 황금같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들의 월급대부분은 가족들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화벌이로 자본이 부족하던 한국의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중 대다수의 간호사들은 여전히 독일에 남게 되었고 다수의 광부들 또한 독일에 남아있다.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또는 가족을 먹고 살리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더 나은 지금을 맞이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살아간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우리는 그들에게 항상 감사해야 한다. 그들 모두를 기억할 순 없지만 서독에 광부나 간호사로 파견가신 분들만은 꼭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떠났고 무엇보다 그들의 노동력과 월급을 담보로 우리나라는 1억 5000만 마르크을 빌렸다. 가난한 조국은 그들로 인해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한국의 경제 성장에 이바지했다고 하지만 정작 관심은 없다. 2001년이 되어서야 독일 거주 교포들이 정착할 수 있는 남해군 독일 마을이 생겼고 우리나라에 유일한 남해 파독 전시관은 2014년에 개장되었다. 이제야 그들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파독광부간호사지원법은 아직 추진 중이다. 그들은 돕는 자원봉사단체 ‘동행’은 문을 닫았다.
서독으로 가신 분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나 영화 음악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그들에 관한 자료 또한 적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지에 대한 내용은 찾기 힘들다.
지금 그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면 더 이상 그들과 같이 가족과 조국의 경제 성장을 위해 헌신할 후손이 생길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