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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기념관 겸재실 그림을 읽어주는Docent...
1676년 1월3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 현재 청운동에서 아버지 정 시익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2남 1녀중 맏이로 태어납니다. 정선은 쇠락해가는 선비의 자제로 태어나 아버지마저 일찍 (14세)여의게 되어 고단한 삶을살게 되지만 외할아버지 박자진의 도움으로 이웃에 살던 김수항 자제들 문하로 들어가 농암김창협 삼연김창흡으로부터 성리학과 시문(詩文)을 배우고 노가재 김창업으로부터는 그림을 배우게 되며 숙종연간 어지러운 정세에서 과거를 보지 않고 그림공부에 몰두해 진경산수의 문을 여는 대화가가 됩니다.
조선시대는 신분으로 선비화가와 직업화가가 구분 되는데 정선은 선비화가입니다 겸재와 함께 동문수학한 사천 이병연은 시문에 능해 13,000수의 진경시가 전해오는데 두 분이 진경이라는 시와 그림을 그렸기에 높은 가치로 인정받고 한 동리에서 만년(晩年)까지 (사천 81세 겸재84세) 함께 살며 형제처럼 지내게 됩니다. 많은 그림이 남아있는 금강산을 처음 밟는것은 1711년(신묘)8월에 은사인 삼연 김창흡과 동행을 하고 다음해 1712년(임진)에는 사천의 초청으로 또다시 밟아보며 구름에 가린 금강산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와 20년 후 청하현에서 금강전도(국보217호)라는 명작을 그리게 됩니다
금강산을 동행했던 사천 이병연의 시 빛나는 필력 갖추고 관동에 왔건만 구름과 계곡은 아득하여 종이 비었네 술 취한 화가는 거둔 것 없이 말 타고 돌아갔으나 바다와 산의 참모습은 가슴속에 있으리!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화가로는 풍속화에 능한 관아재 조영석과 인물화를 잘그린 공재 윤두서가 있는데 세분은 각기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의 선두주자로 다음 세대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는 조선후기 삼재라 불리는 분들입니다. 참고로 삼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이 있어요
말징박기 말을 묶어서 나무에 매달아놓고 버둥거리는 말을 한사람은 위협을 하고 다른이는 말징을 다듬어서 갈아주는데 인간적인 모습은 말의 대가리를 가마니로 받쳐주어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 나타나있죠. 그 시대에 자주 볼 수 있는 사람 사는 모습인데 이런 그림을 풍속화라 해요.
공재윤두서초상 그 옆의 초상화는 유명한 공재 자화상인데 처음엔 귀도있고 의관을 정제한 모습이었는데 유탄(버드나무숯)으로 그린 것이 옮겨 다니면서 지워져서 이 모습이며 눈 주위의 얼룩은 안경자국이라고 해요.
백천교 白川橋 백천교는 유점사 아래쪽 냇가로 금강산 관람 후 출산의 아쉬움을 달래는 선비들이 너럭바위에 앉아 담소중이고 가마중들은 남여를 내려놓고 쉬고있고 개울건너에는 한양의 구종(집의노비)들이 나귀와 함께 기다리고 있다.
山백천교 출산시 白川橋 出詩 이병성 산승은 되돌아가고 머슴이 맞이하니 가마에서 내려 말 울음 소리 듣네 계곡 어귀에선 섭섭한 정 일어나는데 솔바람 무수히 불어대고 매미 소리 어지럽네
해산정 海山亭 해산정은 한 폭에 내 외금강산과 해금강이 함께 그려져 있는 모습인데 멀리보이는 상악준의 하얀 외금강 앞쪽의 부드러운 내금강 동해입구의 칠성암등을 안정되게 잡은 구도이며 해산정과 두개의 거북바위 남강가의 대호정까지 모두 표현 했군요
신묘년 풍악도첩 辛卯年楓岳圖帖
금강내산총도 金剛內山總圖 초기작으로서 실경에 가깝게 그린 그림으로 산 봉우리 마다 이름을 적어놓고 길이 보이는 모습은 당시의 회화지도로서 여행객이 지니고 금강산에 갔다면 도움이 됐을거란 느낌
불정대 佛頂臺 이곳은 오르기는 어렵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동해일출이 장관이라고 해요
장안사 長安寺 금강산에는 108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단발령을 통해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절로 이곳의 만천교는 무지개 모양의 아치 형태로 홍예교(虹霓橋)라고도 불렸는데 높이가 상당히 높아 보는 이들이 아찔하단 표현을 했다 하네요
회방연도 回榜宴圖 은암 이광적의 과거급제 60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그린 것입니다. 과거급제를 30세 안팍에 했다고 하면 90세을 넘게 살아야만 누리는 것으로 잔치상을 받은 방안의 선비들과 소반위의 화병과 댓돌 위에는 음식을 들이기 위해 서있는 고운옷의 아낙들음식을 나르는 아낙이 안채와 마당에서 들어오고 사인교를 메고 온 가마꾼들이 서성이는 모습이 조선시대 선비집의 조촐한 잔치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며 이런 그림을 기록화라고 합니다.
쌍도정도 雙島亭圖 이 그림은 겸재가 하양(대구) 현감재직시에 그린 것으로 성주관아 객사인 백화헌 정자로 연못가운데 한쌍의 섬이있고 두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한곳은 버드나무를 다른 한곳은 정자를 지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인데 이곳은 김창집이 사약을 받은 곳으로 그분을 향한 공경의 마음을 담아 그린 것으로 평론가들은 득의작으로 꼽는다.
금강산일대의 그림
구룡연 九龍淵 폭포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천지가 진동 하는 것 같다고 하는 큰 폭포다. 폭이3~4m이며 둥그런소(沼)는 74미터 높이의 물 절구가 만들어낸 절구통이라고하는멋진 깊고 웅장한 연못 이곳이 구룡연이며 대시인들의 시중에 최치원의 시가 있어 옮겨보면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리었는가! 해강 김규진의 미륵불이란 글씨(13m)가 있고 주변엔 조선시대의 각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시중대 侍仲臺 세조 때의 재상 한명회가 이곳에서 벼슬을 제수 받아서 원래 이름인 칠보대에서 시중대라 바꿔 놓은 곳이다.
칠성암 七星岩 기나긴 세월 동안 바닷물에 말갛게 씻긴 일곱 개의 바위가 북두칠성 같다하여 붙여진 제목인데 여러폭의 해산정 그림에는 예외없이 그려져있다. 어쩌면 저리도 곱게 다듬어 졌으며 그린 이는 어찌 저리도 멋지게 표현 했는지!
통천 문암 通川門岩 동해 바닷길의 바위가 기둥같이 있고 그사이를 지나는 여행객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총석정 叢石亭 멋진 바위에 그려진 소나무와 정자 이 그림은 여러 폭이 전하는데 초기 것이 사실적으로 표현 되었다면 후기로 갈수록 추상적이며 생략된 부분이 나타난다.
사선정 四仙亭 이 그림은 삼일포 안의 정자를 그린 것으로 이곳의 전설은 신라시대 4명의 화랑이 유람 와서 너무나 아름다워 삼일을 놀고 하늘로 갔다하여 사선정이란 정자를 짓고 3일을 머물렀다 해서 호수이름이 삼일포로 불린답니다. 토사로인해 호수가됨 (무선대 사선정 단서암 와우섬)
문암관일출 門岩 觀日出 호숫가 옆의 문처럼 보이는 바위 앞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이 장관인 이 그림은 초기의 것으로 앞으로 보이는 바다에 산이 가로 누어있어 시야를 가리는 것은 사물을 빠짐없이 표현해 답답하지만 다른 그림들은 과감히 없애고 바위높이도 변합니다 (옆에 몽천암이있다)
옹천(瓮遷) 동해 바닷가의 바위 벼랑길을 그린 그림으로 점경인물(点景人物)이 그려져있다. 화면 하단엔 나귀를 타고 오르는 선비. 산모퉁이를 막돌아가는 곳엔 세가닥 점선으로 나귀의 뒷다리와 꼬랑지로 그림 보는 사람들을 지루하지 않게 해줍니다.
금강전도 金剛全圖 이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기 전에 민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봐야 된다 금강산을 다녀와 20년이 흐른 59세때 청하현감시절 내금강의 겨울풍경을 그린 것으로 작가가 느낀 감동과 환희까지 그림속에 솔직히 표현 내재된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 그림으로 화면 상단에 자작시가 있고 가슴속에 담아온 모습을 멋지게 재구성한 것으로 이런 그림을 진경산수라 합니다. 주역을 근거해 둥근 구도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잡은 부감법. 왼편의 부드러운 토산은 미점과 피마준으로 표현해 음을 나타내고 오른편의 뾰족한 바위산들은 상악준과 부벽준으로 표현해 양을 나타내고 그리하면서도 산봉우리들을 꽃잎같이 표현하여 한 송이 백련처럼 아름답습니다.
상단에 있는 시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아요. 萬二千峰 皆骨山 何人用 意寫眞顔 衆香浮 動扶桑外 積氣雄蟠 世界 間 幾朶 芙容揚素彩 半林松柏 隱玄關從今脚踏 須今遍爭似枕送看不慳 일 만 이천 봉 겨울 금강산 드러난 뼈를 뉘라서 뜻을 써서 그 참모습을 그려 내리 뭇 향기는 동해 끝의 해 솟는 나무(神木)까지 떠 날리고 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 누리 서리었구나! 암봉(巖峰)은 몇 송이 연꽃인양 흰빛을 드날리고 반쪽 숲엔 소나무 잣나무가 현묘한 도(선사)의 문을 가렸어라 설령 내발로 직접 밟아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 어찌 베개 밑에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오!
단발령망금강 斷髮嶺望金剛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려면 양주 포천 철원 금화 창도를 거쳐 단발령에 당도합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멋진 모습에 취해서 머리깍고 중이 되어 금강산에 살고싶단 생각을 하게되어 부쳐진 이름이고 실제로 신라의 마지막왕자 마의태자는 이곳에서 머리를 깍았답니다. 꼬부랑길을 힘겹게 오르는 여행객의 모습과 멀리보이는 금강산의 모습에 환호하는 선비들의 느낌과 주변 소나무들의 표현이 잘된 그림입니다.
혈망봉 穴望峰 금강전도의 두시방향을 보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나있다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어 놓고 보니 금강산이 너무나 아름다워 세상이 허물어질때 그곳을 줄에 묶어 하늘로 끌어올리려 대비해 내놓았다는 전설의 바위인데 마하연의 망고대에 올라 바라보면 항아리 입모양으로 구멍이 나있어 하늘이 멋지게 보인다함
정양사 正陽寺 이곳은 금강산에 있는 많은 절집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합니다 금강전도를 비롯한 많은 금강산의 모습을 이곳 헐성루에서 내려다보며 구도를 잡았다고 하는 장소이고 금강산의 정맥지점에 있다하여 정양사라 불리고 있고 부채에 그린 그림을 선면화 (扇面畵)라 하지요
비로봉 毘盧峰 1638m 금강산 최고 봉우리이다 항상 구름에 싸여 신비롭게 보인다는 정상은 삼을 널어 놓은듯 피마준으로 표현하고 중향성부근은 상악준으로 처리하였다
청하현감 시절 석류굴 石榴屈 청하현감시절 그린 것으로 울진의 석류굴이다 영남지역을 그려 묶은 그림첩 있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쌍계입암 雙溪立岩 영양지역을 그린 것으로 입암(立巖)의 크기를 사실보다 크게 부각 시켰는데 조선시대의 입석은 남성성을 상징하고 아들을 기원하는 의미로 읽힌다
양천현령시절 65세에 부임하여 5년을 근무했고 경교명승첩과 연강임술첩이란 명작을 만든 때이다 한강유역의 멋진 풍광을 겸재는 그리고 사천은 시로 읇어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한 것으로 매폭 마다 천금물전(千金勿傳)의 인장을 찍어 가보로 남기려했던 그림이다.
행호관어 이곳은 강폭이 넓어 호수 같았고 그곳에서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그리고 뒤로 보이는 집들은 당시 세도가들의 별서입니다
금성평사 지금의 난지도 앞 강변 비단같이 고운 모래가 평야처럼 넓게 펼쳐진 모습으로 한가한 강가의 아름다운 풍경 양화진 양화나루의 모습이고 뒤에 진(津)자가 붙은 것은 모두 나루를 뜻한다. 동작진 현재 국립묘지 앞으로 많은 배가 떠 있고 뒤로는 관악산이 보이고 그림 중앙부분이 현재의 국립 현충원입니다. 송파진 현재 롯데 월드가 있는 석촌 호숫가이고 조선시대 광주쪽으로 나가는 나루 이며 그림에는 남한 산성과 성안의 푸른 소나무 청태종 공덕비각이 그려져 있는데 침략자의 행위가 공덕비라 칭해진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니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요 광진 너른나루 광진은 현재 워커힐호텔 부근으로 아차산 자락에 별서가 들어차 있다 이그림은 토파 와 토산을 아기자기하게 표현했고 다양한 준법을 사용했다 목멱조돈 아침 해가 떠오르는 남산의 모습인데 막 솟아오른 해로인해 산그늘의 표현과 한강의 배가 운치를 더한다. 압구정 세조때 한명회가 지은 정자로 현재 압구정 현대 APT안에 터가 있다 독백탄 두물머리 부근으로 운길산 수종사가 보이고 물살이 센지 배를 끌어올리는 모습이 힘겹다 누군가의 별서가보이고 채색을 해서 밝게 보인다 우천 조선시대 남한강변의 사옹원분원 부근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분원의 규모를 알 수 있고 맑은 청색을 써서 그림이 선명하다
연강 임술첩 連江壬戌帖 웅연계람 우화등선등의 그림이 전하는데 경기관찰사가 연천군수와 양천현령을 불러 달밤에 뱃놀이 하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웅연계람을 보면 횃불과 많은 사람들의 모습속에 시간을 말해주고 머리에 광주리를인 아낙들의 모습이 사실적인 표현이다
양천현아 陽川縣衙 관리들이 모두 퇴청한 고즈넉한 관아의 모습이다 종해루 宗海樓 종해청조는 현령이 동헌에 기대앉아 조수 밀리는 소리를 듣는 그림이다 소악루 小嶽樓 궁산에 있는 작은 누대로 아침 일찍 솟아오르는 일출을 보고 그림을 그리던 장소이다 그 외에 이수정(이덕형정자) 개화사 빙천부신 설평기려등 양천지역의 명소들이 노대가의 손끝에서 원숙하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인왕곡부근 장동첩
청풍계 淸風溪 이곳은 선원 김상용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맑은 바람이 불고 계류의 물소리 또한 맑아 청풍계(淸風溪)라 불리었다 큰 붓으로 쓸어내려 대부벽으로 표현한 바위모습과 짙게 표현한 소나무와 전나무들 세 개의 연못(照心, 涵碧, 滌襟池)과 소박한 초가정(太古亭) 숲 사이 늠연사라는 선원의 사당이보이고 앞쪽으로 보이는 작은 문으로 사람이 들어가고 있다 이집은 조선시대 200년 집권과 60년 세도정치의 산실로 세조때의 스님 학조대사가 잡아준 집터입니다. 풍수의 대가인 그가 잡은 이 집터에서 상용 상헌 수항 그리고 후세대엔 육창(창집의형제들)이 태어나며 많은 학자와 정치가를 탄생시킨 곳으로 율곡학파의 주류들이 모여 학문을 닦고 진경문화를 꽃피운 곳 입니다 겸재와 사천도 이곳을 드나들며 진경 시와 그림을 공부했기에 여러 폭이 전 한다 지금은 청운초교와 정주영가외 몇몇 부호의 집으로 나뉘어져있는 대단히 큰 터였다
육상묘 毓祥廟 이 그림은 영조의 사친(친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짓고 기록으로 남긴 그림이다 영조는 평생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를 격상시키느라 애쓴 임금이다 그림상단 좌목을 보면 도감 좌의정 조문명등 18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지금은 이일에 참여했던 이광기의 9대손 이재곤이 소유하고 있다 참고로 지금 칠궁은 청와대 안에 있고 왕을 나았지만 종묘에 갈 수 없는 사친(친어머니)들의 사당으로 인빈김씨 저경궁, 희빈장씨 대빈묘, 정빈이씨 연호궁, 영빈이씨 선희궁, 수빈박씨 경우궁, 귀비엄씨 덕안궁입니다. 의금부 계회도義禁府 契會圖 의금부시절 근무했던 사람들의 좌목이 함께있는 이런 그림은 계회도라고 합니다 겸재는 동료들의 부탁으로 이런 기록화를 그리기도 합니다. 한양전경 漢陽全景 삼승정 뒤쪽에서 바라본 한양의 전경인데 남대문과 멀리 관악산까지 표현 한양성중을 한 폭에 담는 원숙한 필치로 묘사 자유로운 경지에 든 모습입니다. 서교전의 西郊餞儀 친구 이춘제의 청나라 사행길을 그린 그림 지금의 독립문 부근에서 전별연을 하는 모습 모화관과 영은문 사행길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과 오른쪽의 인왕산이 무겁게 처리된 가감 없이 표현한 기록화입니다. 위의 산수화는 똑같은 제목의 그림인데 진경산수화로 구도가 잘 잡힌 그림입니다 인곡유거 仁谷幽居 70세 이후 인왕곡에 머물며 본인의 집을 그렸는데 조촐한 선비의 집답게 정원의 나무와 사랑채에서 독서하는 자신을 표현한 그림 입니다 유거(幽居)란 마을에서 좀 떨어진 선비가 머무는 조용한 집을 말합니다.
퇴우이선생진적첩 退尤二先生眞蹟帖 네 폭의 이그림은 퇴계 이황이 주자서 절요를 손자 이안도에게 내리고 그가 사위인 홍유형에게 전했고 이것을 그의 사위인 박자진에게 전하게 되고 겸재의 차남 만수가 진외가에서 받아오게 되는데 퇴계가에서 딸에게 전해오는 주자서절요를 겸재의 차남 만수가 외가(풍계유택)로부터 어렵게 가져오면서 그 조성 전수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 화첩을 꾸미게 됩니다. 안동 계상(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이 주자서절요 를 집필하는 모습의 계상정거도, 박자진이 두 번에 걸쳐 스승이 머무는 수원 만의촌(동탄) 무봉산방에서 우암 송시열에게 발문을 받아오는 장면인 무봉산중, 주자서절요에 발문을 받아 꾸며 지니고 있던 외가인 풍계유택 앞으로 소장하고 있을 본인의 인곡정사와 사천 이병연의 축하 시 만수의 발문과 외예(外裔)로 전하는 내용이 수록돼 있는 귀한 자료이며 보물 585호로 지정되있다
계상정거 溪上靜居 안동 계상서당(현 도산서원)에서 대사성(현국립대총장)퇴계가 주자서절요를 집필하는 모습입니다 1000원권 지폐의 도안이 되면서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장소로 다가오는데 낙동강변 깍아 지른 절벽안쪽의 서당과 뒤로 이어지는 강변의 풍경이 정겹다 무봉산중 舞鳳山中 박자진이 수원 만의촌 무봉산방에 머무는 스승 송시열에게 주자서절요를 가지고 찾아가서 발문을 지어 받는 모습입니다. 사방관을 쓴 우암과 갓을 쓴 풍계 수직준으로 그려진 무봉산과 정자옆에 강인하게 서있는 나무에서 송시열의 강직함을 느낄 수 있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재된 마음까지 그려진 작품이다. 풍계유택(외가) 楓溪幽宅 외할아버지(풍계) 박자진의 집을 그린 것으로 외로운 정선에게 의지처였고 청년시절엔 이병연 형제와 외사촌 박창언이 함께 성리학을 읽고 토론하던 장소 풍계유택입니다 근경을 잡은 구도로 규모가 상당히 큰집이며 2층의 안채와 뒤쪽으로 별당과 누대가 보인다 인곡정사 仁谷精舍 본인이 머물던 인왕곡 집인데 뒤울 대나무와 뒷산의 노송이 숲을 이뤄 운치있다 마당엔 김치막이 있고 옆에는 자연석 평온해보이는 꾸밈없는 일상이 그려진그림으로 겸재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정사(精舍)는 글 읽는 선비가 머무는 깨끗한 집을 말합니다
박연 폭포 朴淵瀑布 개성에 있는 우리나라 삼대폭포중의 하나인데 짙게 표현한 묵찰법은 보는이를 압도합니다 못가의 범사정과 서있는 선비들 폭포위쪽의 표주박 바위는 섬세해 서로 대비되는 느낌 이그림은 다양한 구도로 잡아 폭포의 길이는 더욱길고 주변의 바위는 묵찰법으로 표현 웅장하며 주변의 성곽과 문루는 세심하게 표현된 그림이다. 참고로 송도삼절은 화담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이다. 청송당 聽松堂 청송 성수침의 독서당 청송 34세 때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와 벗들이 사약을 받는 화를 입자 출사를 포기하고 독서에 전념하기위해 지은 집 이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후기에 많은 선비를 배출하는 특별한 장소가 되는곳 이 그림에선 솔바람 소리와 더불어 독서하는 결기 굳은 선비의 기상을 느낌
인왕제색 仁王霽色 1751년 겸재 76세 신묘 윤5월 하완 영조 27년 장마비속에 인왕산이 물기를 함박 머금은 모습이며 앞으로 보이는 집 취록헌(翠綠軒)은 평생의 벗 사천의 집이다 절친한 벗의 죽음 앞에 위로의 마음을 나타내려 마을은 모두 안개속에 묻고 취록헌 주변만 울창하고 짙게 처리하고 인왕의 암봉들은 묵찰법으로 강하게 표현해 사천의 쾌유를 염원하며 그린것임을 나타낸다. 세검정 洗劍亭 현재 자하문 터널너머 홍제천 개울가에 있는 정자. 세검은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했다는 의미로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들이 창의문을 나와 이곳에서 칼을 씻음 정자엔 선비 둘이 물가를 내려다보며 담소중이고 담장 밖으론 지루한 듯한 표정의 시동과 나귀가 있고 정자에서 개울로 내려 오는 편문과 냇물의 흐름까지 사실적으로 표현 됐다. 양주 송추도 楊洲松楸圖 84세의 일기를 마치고 겸재가 잠든 곳인데 지금의 쌍문동입니다 뒤로 보이는 도봉산 바위들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손주 정황이 할아버지 묘역을 그린그림 영모도 (翎毛圖) 깃과 털이있는 동물 그린것으로 서과투서 다람쥐 국일한묘 등이 있는데 사실에 가깝게 표현된 멋진 그림들이다
원본실에있는 그림 도연명 귀거래도 이 그림은 평생을 자연과 벗 삼아 살던 도연명이 80일간 관직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 가는길에 읇은시 귀거래사를 도색화한 것으로 세 폭짜리 족자그림 맨 위는 고향에 다다라 동구에서 마을을 휘돌아 나오는 구름을 보고 있고 가운데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상념에 잠긴모습 그림 맨 밑에는 고향이 얼마나 남았는지 길손에게 묻는 그림입니다. 산수도 어느 바람 부는 강가를 섬세하게 표현한 진경산수화입니다. 바람이 세게 불어 버드나무는 몹시 흔들리고 배를 나무에 바짝 묶어놓은 모습은 긴장감을 주고 강 건너는 아스라이 안개로 표현해 운치를 더합니다. 청하성읍도 겸재는 본인의 근무처를 다 그림으로 남기는데 여기는 포항부근이고 양천현아나 의금부 그림도 남아있습니다 정황의그림 양주소추도와 매미 |
첫댓글 그림 없이 올린 내용이라 미흡합니다.
그림없이 설명만 읽으니 긴가민가 하는 군요. 그림책을 놓고 좀더 상세히 짚어가면서 읽어보렵니다. 지난번 화요일에 기념관에 가서 봅지 못하고 다른 해설사니므이 상세한 해설을 받았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