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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비 혁명의 원인과 결과1)
Ⅰ. 들어가는 말
알렉산더 대왕이 주전 332년에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하자 유대인들은 희랍 제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정복자는 전 영토를 희랍 문화로 통합하려 했지만, 그의 짧은 통치기간 동안에 유대인들의 삶은 페리시아 시대와 별차이가 없었다. 주전 323년에 그가 갑자기 죽은 뒤, 거대한 제국은 그의 부하 장군들에 의해서 분할되었다. 팔레스틴 지역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시드 왕조 사이에 끼여 있었기 때문에, 비록 전자의 영토였지만, 이 두 왕조의 영토 분쟁지가 되었다. 이 둘 사이의 전쟁은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Ⅲ, 주전 223-187)가 주전 200년에 팔레스틴을 정복할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서 길고도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쟁의 와중에서 팔레스틴 지역은 황폐화되었고, 유대인들은 전쟁의 고통을 감내해야했다.
셀류시드 왕조의 통치 초기에 팔레스틴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안티오쿠스 3세를 지지했던 유대인들은 승전의 대가로 매우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세금 감면, 성전 지원 등을 포함하는 희망적인 미래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과 보랏빛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잠시뿐이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주 188년), 자기 아들(후에 안티오쿠스 4세가 됨)을 로마에 볼모로 보내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또한 그는 패전 이듬해에 전쟁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엘람의 신전을 습격하다 그곳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이 결과 셀류시드 왕조는 급속히 퇴조하여 로마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유대인의 희망적인 미래는 상실되었다.
유대인들의 암울한 미래는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Ⅳ, 주전 175-164년)의 통치 때에 현실로 나타났다. 로마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온 안티오쿠스 4세는 전쟁 배상금을 물기에 골몰했던 그의 형이 암살된 뒤 왕위에 올라 왕권을 돈독히 하고 이집트를 침공하는 등 세력 확장을 꾀했는데,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시대가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예루살렘 성전이 약탈되었고, 유대 땅에서는 희랍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으며, 반율법적인 이교 의식이 강요되었다. 또한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고, 대제사장권은 권력 암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마카비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마카비 혁명의 원인과 결과를 연구하는 것이다. 마카비 혁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혁명의 성공이 가져다 준 결과는 무엇인가? 이 연구는 이 두 개의 질문 가운데 전자에 초점을 맞추면서 진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답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자들의 연구 역시 대부분 이 문제에 집중되어 왔기 때문이다.
Ⅱ. 마카비 혁명의 원인
1. 고대 자료들의 견해
마카비 혁명에 관한 고대 자료로는 마카비 일서, 마카비 이서, 그리고 다니엘서가 매우 중요하다. 앞의 두 책은 역사서로 마카비 혁명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다니엘서는 묵시 문서로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나 유대 전쟁사도 마카비 혁명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카비 일서를 기본자료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앞의 세 권의 책보다 역사적 가치가 덜하다. 이밖에도 모세의 유언서, 유딧서, 쿰란의 하박국 주석, 희년서(23:11-31) 등의 유대 자료와 타키투스(Histories 5.8), 폴리비우스 26.1) 등의 비유대 자료가 있지만, 부차적인 가치가 있을 뿐이다.
1) 다니엘서
다니엘서는 바벨론과 페르시아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마카비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주전 166/165년경에 최종 편집되었다. 이에 의하면,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는 율법을 어기고 불순종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주어진 것이었다(9:11). 따라서 이 박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면서 그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9:24). 박해하는 악의 세력에 대항해서 물리적으로 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순교라는 수동적인 저항만이 유일한 싸움의 방법이었다. 이와 같은 무저항주의적 견해는 무력을 사용하는 마카비 혁명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신앙 공동체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다니엘서가 암시하는 마카비 혁명의 원인은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였다고 할 수 있다.
2) 마카비 일서
마카비 일서는 마카비 혁명의 성공으로 탄생한 하스몬 왕조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이에 따르면, 이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였다. 안티오쿠스 4세는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은 자기 관습을 버리고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1:41-42)면서, 전 영토를 희랍 문화로 통합하기 위해 모든 백성을 상대로 강제적인 희랍화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러한 정책 추진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관습을 폐지하고자 박해를 가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박해 중에서도, 특히 종교적 박해인 이방 종교 의식의 강요가 마카비가의 강한 저항을 받았고, 결국에는 마카비 혁명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2:15-30)
3) 마카비 이서
신명기 신학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마카비 이서가 제시하는 마카비 혁명의 원인은 다니엘서와 유사하다. 마카비 혁명은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 때문에 일어났는데, 이 박해의 원인은 유대인들의 좌악이라는 것이다. 즉, 희랍화를 추진한 유대인들이 이방 문화와 종교를 장악하려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폐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대제사장을 제거, 살해하고 제사장들이 성전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박해와 수난을 당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박해에 대한 저항으로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4) 기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마카비 혁명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이 미신적이고 혐오스럽다는 것을 알고 이를 보다 나은 희랍 방식으로 바꾸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반유대적인(anti-Semitic)성격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역사적 신빙성이 없다. 또한 폴리비우스에 의하면, 안티오쿠스 4세의 별칭은 원래 신의 현현을 뜻하는 에피파네스였으나 사람들은 이 대신에 정신적으로 미쳤다는 뜻인 에피마네스(Epimanes)로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마카비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가 그의 정신병 때문에 혹은 정신병적인 편견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4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그의 행적은 오히려 그가 유능한 통치자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2. 학자들의 견해
위에서 보는 것처럼, 고대 자료들은 마카비 혁명 이전에 유대 종교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보여 주고 있지만, 그 탄압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마카비 혁명의 원인을 밝히려는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여러 가지 가능한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1) 비커만
비커만(E.J. Bickerman)은 마카비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고대 자료들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종교적 박해였지만, 그 주체는 안티오쿠스 4세가 아니라 유대 문화와 종교의 헬라화를 추진했던 극단적 헬라주의자들, 특히 메넬라오스와 토비아가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했다.2) 그에 따르면, 이들은 예배 의식, 할례, 정결 예식 그리고 음식 예법 등과 같은 유대 종교 의식이 후진적이며,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주변 세계와 단절시키는 요인으로 보았다. 특히 희랍 문화에서 배타주의적인 요소들은 야만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이러한 희랍 문화의 특성을 잘 아는 이들은 유대교의 배타주의적 요소들을 폐지하고, 선진 문명으로 여겨졌던 희랍 문화를 유대교에 받아들여 유대교를 희랍화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개혁 정책은 보수 정통주의자들의 반발에 부딪쳤는데, 이때 전자는 후자를 박해했고, 마키비 혁명은 이 두 그룹간의 충돌로 인하여 일어났다는 것이다.
비커만의 주장은 헹엘(M.Hengel)에 의해서 받아들여졌지만,3) 다음과 간은 질문들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4) 메넬라오스는 과연 열광적인 개혁가였는가? 오히려 그는 권력에 관심을 가졌던 야심가였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성전 재산을 전용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는 신성한 성전을 약탈하게 도움을 준 인물이 아니었던 가? 왜 메넬라오스가 아닌 안티오쿠스 4세가 박해의 주역으로 고대 자료들에 나타나 있는가?
2) 췌리코퍼
췌리코퍼(V.A. Tcherikover)는 마카비 혁명이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 종교에 대한 박해 때문에 일어났다는 고대 자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5) 그러나 그는 그러한 박해가 희랍화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저항에 대응하는 피치 못할 조처였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안티오쿠스 4세가 이집트를 원정 중일 때, 야손은 메넬라오스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성을 차지했다. 그러나 하시딤을 중심한 반헬라주의자들은 기술자, 노동자, 소상인 등과 같은 예루살렘 도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야손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오니아스 3세 때의 상태로 회복시키고자 했다. 유대교의 희랍화를 반대한 평민 계층이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 계층의 희랍화 정책에 대항하여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에서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러 사태를 평정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자 혁명이 재발하여 안티오쿠스 4세는 아폴로니우스와 군인들을 파견하여 예루살렘을 ‘군대 점령지’(cleruchy)로 만들었다. 아마도 시리아 출신들로 구성된 이 군인들은 자기들의 종교 생활을 계속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이방 종교 의식을 거행했다. 이러한 행위는 성전 모독으로 비쳐, 경건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성전에서 예배하지 않았고 저항을 계속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종교가 새로운 혁명의 기반이 되고 율법 준수가 저항의 상징이 되며, 저항의 주요 지도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임을 알고 종교 박해에 관한 칙령을 내려 유대교의 모든 의식을 금지하도록 했다. 이것은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가 유대인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박해가 있기 전 혁명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췌리코퍼에 의하면, 계속되는 하시딤의 저항은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식일에 전쟁을 하지 않았고, 주목할 만한 지도자가 없었으며, 시리아 정규군에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게릴라전을 지휘할 유능한 지도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카비 혁명은 이라한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하시딤 저항 운동이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되는 것이었다.
췌리코퍼의 이론은 다음 몇가지 질문들에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6) 하시딤은 과연 그러한 능동적인 역할을 했는가? 상류층을 헬라주의자들로, 그리고 평민들을 반헬라주의자들로 단순히 이분화시킬 수 있는가? 예루살렘에 주둔한 군인들은 시리아인들이었는가?
3) 골드슈타인
골드슈타인(J. Goldstein)은 마카비 일서와 마카비 이서에 관한 두 권의 주석서에서 마카비 혁명의 원인과 고정을 재구성했다.7) 그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4세는 통치 초기에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희랍 문화를 따를 것을 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도리어 반리시마쿠스 혁명이나 야손의 혁명 그리고 하시딤의 저항 등을 일으켰다. 이때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들의 종교가 문제의 소요와 혁명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유대인들의 제의를 디오니수스 주신제의와 동일시 여기고, 로마에 볼모로 있을 때 보았던 로마인들의 주신제의 근절 정책을 모델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유대인들에게만 유일하게 전략적으로 종교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4세가 강요한 새로운 종교 체계는 메넬라오스가 망설일 정도로 유대인들을 매우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마카비 혁명은 이러한 저항에 불을 당겨 전면전으로 돌입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마카비 혁명은 안티오쿠스 4세가 희랍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제의를 유대인들에게 강요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는 것이다.
골드슈타인의 견해는 비커만과 췌리코퍼의 견해를 상당 부분 절충한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안티오쿠스 4세는 새로운 종교 체계를 만들어 내 유대교를 변혁시키려고 할 정도의 관념론적 개혁주의자였는가? 왜 정치적 성격을 지닌 저항을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는 종교 박해를 통하여 해결하려 했는가? 안티오쿠스는 왜 유대인들에게만 종교 박해를 가했는가?
4) 브링만
브링만(K. Bringmann) 역시 비커만과 췌리코퍼의 이론을 절충하면서, 마카비 혁명의 원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8) 야손이나 메넬라오스의 희랍화 정책은 전통적인 유대 종교에 별다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었으며, 백성들의 직접적인 반발 요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메넬라오스가 안티오쿠스 4세에게 지불해야 하는 과도한 돈 때문에 성전 기물을 팔자 백성들은 저항했고, 반리시마코스 혁명이 일어났다. 메넬라오스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리아의 군대에 의해서 자기의 지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이집트 원정 중일 때, 야손이 반메넬라오스 혁명을 일으키자 그는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러 야손의 혁명을 평정하고 예루살렘에 군사 주둔를 세웠다.(military colony)를 세웠다. 이곳의 군인들은 주로 시리아인들이었으며 자신들의 신인 바알 샤멤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했다. 이러한 행위는 대부분의 유대인에게 성전을 부정하게 하는 것을 비쳤다.
한편,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지위를 든든히 하기 위하여 새로운 제의를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어긋나게, 비세습적을 차지한 자신의 제사상권에 대한 어색함을 떨처버림과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과 전통주의자들간의 연대를 끊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새로운 종교체계를 고안하여 안티오쿠스 4세에게 시행을 건의 했는데, 그것은 시리아적인 것도 가나안적인 것도 아니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 종교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메넬라오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이름으로 공식적인 칙령을 선포하게 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이 지명한 대제사장의 지위가 강화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메넬라오스가 이러한 조치를 시행하자 유대인들은 강력하게 저항했으며 결국에는 마카비 혁명으로 이어졌다.
브링만의 견해는 선배 학자들의 약점을 보완한 것으로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에 매우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메넬라오스가 왜 유대인들이 혐오했던 종교를 만들어내어 강요했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9) 왜냐하면 메넬라오스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런 비정상적인 종교적 조치를 제안했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할례나 돼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유대교뿐 아니라 시리아 종교 제의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었다.
5) 기타
이밖에도 마카비 혁명의 원인과 관련된 학자들의 특색 있는 견해들이 있다. 먼저, 번쥐(J.G. Bunge)10)는 주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4세를 위한 황제 제의가 예루살렘 성전에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왕이 보낸 특사의 요구로 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요구는 많은 유대인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안티오쿠스 4세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겨 종교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크라이지히(H. Kreissig)11)와 키펜버그(H.G. Kippenberg)12)에 따르면, 마카비 혁명은 사회 경제적 위기 때문에 일어난 농민 혁명이었으며, 이 혁명의 성공은 유대 농민들의 삶을 향상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 경제적인 요인들이 마카비 혁명의 주요 발생 원인이었고, 이 혁명에 많은 농민이 참여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혁명 그 자체가 농민 혁명이었다는 주장은 고대 자료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3. 역사의 재구성
마카비 혁명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 학자들은 여러 가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고대 자료들로부터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 자료 자체의 불일치와 불충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의 견해가 모두 완전히 무시될 수는 없다. 그들의 가설들 중에는 배제되어야 할 것도 있지만, 학문적인 돌파구를 찾는 데 기여한 것도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글을 고려하면서 마카비 혁명의 원인을 역사적을 재구성해 본다.
안티오쿠스 4세는 주전 177년 그의 형 셀류커스 4세(Seleucus Ⅳ, 주전 187-175년)의 아들인 데메드리오(후에 데메드리오 2세가 됨)가 로마의 볼모로 대신 가게 되자 자유롭게 되었다. 아덴에 머물러 있던 그는 셀류커스 4세가 부하인 헬리오도로스에 의해 살해되자 안디옥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안티오쿠스 4세가 등극하자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갈등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동생 야손이 새로 등극한 왕에게 그의 형이 바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권을 허락받았던 것이다 (카이13) 4:7).
대제사장이 된 야손은 예루살렘에 경기장(gymnasium), 청소년 훈련소(ephebeion), 안티오쿠스 청년단(Antiochenes) 등을 설립하고 희랍화 정책을 추진했다 (카이 4:9-10). 야손의 정책은 희랍 문화를 유대인들에게 새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이미 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시작된 고대 근동의 희랍화 경향에 노출되어 있었다. 야손이 추진한 정책은 정치‧사회‧종교 제도를 바꾸기 위한 혁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생활 양식을 희랍식으로 바꾸기 위한 것으로, 이를 위하여 교육의 내용과 방식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14) 이러한 정책 추진은 보수적이고 경건한 유대인들의 눈에는 불경한 것으로 비쳐졌지만, 전통적인 종교 의식을 바꾸거나 예루살렘 성전 제의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행동화된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15)
야손은 대제사장권을 돈을 주고 찬탈했다는 점에서 그의 지위에 대한 정통성 시비 여부가 있었지만, 3년 동안(주전 175-172) 별문제 없이 대제사장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안티오쿠스 4세에게 심부름 보낸 메넬라오스가 그보다 300달란트나 더 많은 890달란트를 왕에게 지불하기로 하고 대제사장직을 차지하자, 야손은 요단강 건너에 있는 암몬사람들에게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카이 4:23-26). 이것은 야손이 대제사장직에 있었을 때, 마카비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야손의 뒤를 이은 메넬라오스의 대제사장직 임무 수행 기간에서 그 요인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메넬라오스는 주전 172년에 대제사장이 되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먼저,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정통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당시 대제사장직은 사독 계열인 오니아스가에서 세습적으로, 그리고 종신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는 토비아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혈통적인 정통성이 없었다. 또한 이전의 대제사장들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백성들의 지지 기반을 처음부터 상실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메넬라오스는 성전의 기물을 팔아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을 폭로한 오니아스 3세를 피살시켰다 (카이 4:32-34). 이것은 하시딤과 같은 많은 경건주의자들의 분노를 샀으며, 특히 친오니아스가의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셋째로, 메넬라오스는 야손을 쫓아냄으로써 그를 지지하여 희랍화 정책 추진에 동참한 헬라주의자들의 지원을 별로 받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가 토비아가와 극히 일부 유대인들의 지지만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메넬라오스가 대제사장에 오른 지 2년이 지난, 주전 170년경에 드디어 격렬한 폭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동안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최초의 폭동이었다. 메넬라오스가 그의 형제 리시마코스에게 예루살렘을 맡겨 두고 안디옥으로 가 있는 동안, 후자는 성전 기물을 훔쳐다 팔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그를 살해해 버린 것이다 (카이 4:39-42). 이것은 반리시마코스 폭동이었지만, 실제로는 반메넬라오스 폭동이었다. 유대인들은 야손에 의해 예루살렘이 희랍화될 때는 잠잠했지만, 성전 기물을 약탈한 사건에 대해서는 극렬한 폭동으로 불만을 표출했던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야손의 희랍화 정책을 지지했던 유대인 의회(gerousia)는 세 사람의 대표를 왕에게 파견하여 대제사장을 교체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뇌물을 사용하는 메넬라오스의 계책 때문에 도리어 자신들이 처형되고 말았다 (카이 4:43-50). 이것은 메넬라오스가 헬라주의자들에게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메넬라오스는 안티오쿠스 4세의 지원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주전 169년에 있었던 야손의 혁명으로 말미암아 큰 위기에 직면했다. 이집트를 두 번째로 원정하고 있던 안티오쿠스 4세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떠돌자, 야손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메넬라오스를 몰아냈다. 그리고 그는 “성전문을 불사르고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카이 1:8; 5:1-10). 그러나 얼마 후 야손 역시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야손이 급히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지 않으면 안되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침략 과정에서 군중들을 잘못 다루어 폭동이 일어났던지, 아니면 그가 희랍화 정책 추진의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몰아냈던지, 혹은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을 추정된다.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 사태 소식을 듣고 자기가 임명한 메넬라오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축출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이 사건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그는 이집트를 자기 손에 거의 넣었지만, 로마의 개입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귀환길에 예루살렘에 들러 사태를 평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반란에 참여한 많은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잡혀갔으며, 도시는 그의 군인들에 의해 약탈당했다(카이 5:11-14). 뿐만 아니라 그는 이집트 침공 등 계속되는 전쟁과 군대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 성전 기물들과 보물들을 챙겼다(주전 168년, 카일 3:29).16) 이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성전 약탈로 비쳐졌다.
안티오쿠스 4세가 돌아간 뒤에도 예루살렘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메넬라오스는 왕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하지도 못했다. 당시 대제사장은 세금을 징수해 왕에게 바쳤는데,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메넬라오스가 왕에게 약속한 만큼의 돈을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집트 정복의 실패, 자신의 꼭두각시인 메넬라오스의 불안정한 지위, 계속되는 저항과 소요, 그리고 예상에 못 미치는 조공 등과 같은 요소들은 안티오쿠스 4세로 하여금 두 가지 강압 정책을 유대 땅에서 추진하게 했다. 메넬라오스가 이 정책의 건의자나 입안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이 정책 수립의 과정과 수행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이 정책은 안티오쿠스 4세의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첫째로, 그는 세금 징수관으로 아폴로니우스를 그의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에 보내 조공을 확보하고자 했다(주전 167, 카일 1:29-35; 카이 5:23-26). 아폴로니우스는 예루살렘에 군사 주둔성인 아크라(Akra)를 건설하고 조공 징수관들과 군인들이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군인들의 횡포와 약탈로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다. 또한 아폴로니우스는 자신의 임무인 새로운 세금 징수 정책을 시행했다. 이것은 농산물에 대한 직접세를 늘리는 것으로,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지주들이나 상류계층보다도 시골의 농민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었다(카일 10:29-30 참조).17)
둘째로,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의 불안정과 소요의 근본적인 요인이 유대 종교에 있다고 보았다. 유대 종교가 친셀류시드 그룹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집결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테네의 원로”와 같은 사람들을 보내 유대 종교를 폐지시키기 위한 종교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카일 1:44; 카이 6:1-11). 유대교 율법을 지키는 것이 금지되었고, 유대인들이 혐오스러워하는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 의식과 성창 제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었으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이 정책은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 종교에 대한 편견이나 다른 어떠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틴 지역의 정치적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팔레스틴 지역의 정치적 안정은 안티오쿠스 4세에게 매우 중요했다. 먼저, 그것은 아폴로니우스의 조세 징수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했다. 조세 징수 정책은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이의 성공을 위해서 정치적 안정이 필수적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팔레스틴 지역의 전략적인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시드 왕조의 세력 다툼과 영토 분쟁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지리적으로는 후자의 최변방 지역이었다. 따라서 겨우 자기 아버지 안티오쿠스 3세 때에야 영토로 완전히 편입된 이 지역에서의 정치적 불안은 이집트 정복에 실패한 안티오쿠스 4세에게 심각한 것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종교라고 여겼을 때, 이의 제거를 위한 정책을 강압적을 시행하고자 했을 것이다.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 지역에 대한 이러한 강압 정책의 시행은 크게 두 그룹의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먼저, 하시딤과 같은 경건주의자들의 저항이다. 이들에게 율법 준수의 금지와 이방 종교의 장려는 행동을 수반하는 능동적 저항이나, 혹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광야로 피신하는 등의 수동적 저항을 야기시켰다. 둘째는, 농민들을 포함하는, 강압적인 세금 정책의 피해자들인데, 이들 중에는 농토를 버려 두고 광야 등지로 피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카비 혁명은 이들 저항 그룹들이 결집되어 일어났다(주전 166년). 결집의 주체는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모데인으로 이주해 왔던 하스몬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소외된 제사장 가문이었고 경제적으로는 하류층에 속해 있었다. 마카비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장을 하고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자신들을 진압하러 온 정규 시리아군을 무력화시켰으며, 안식일에도 전쟁을 계속했다.
요약하자면, 마카비 혁명은 메넬라오스의 대제사장권 탈취 이후 진행되어 온 일련의 저항 운동과 이에 대한 안티오쿠스 4세의 강압 정책의 결과로 일어났는데, 특히 종교 정책의 강압적 시행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Ⅲ. 마카비 혁명의 결과
마카비 혁명의 완성을 언제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답하여질 수 있지만, 아마도 시몬 시대인 주전 140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혁명의 주체 세력들은 국가 설립을 공식적을 알리는 연호(年號)를 사용하기 시작했고(주전 142년), 아크라에 남아 있던 셀류시드 군대를 몰아냈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국민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주전 140년). 이제 마카비 혁명의 완성으로 인하여 야기된 유대 사회의 변화들을 살펴본다.
1. 종교적 변화
마카비 혁명으로 인하여 얻은 첫 번째 종교적 성과는 셀류시드 당국이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박해를 중지했다는 것이다(주전 164년 초, 카이 11:27-33). 이 조치에는 혁명에 가담한 유대인들이 사면도 포함되고 있었는데, 유대 마카비 등도 여기에 해당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이 조치는 안티오쿠스 4세의 억압 정책을 폐지하는 것으로, 혁명군이 승리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었지만, 안디옥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셀류시드 당국이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유다 마카비의 혁명 군대가 아크라를 제외한 예루살렘 전 지역을 주전 164년에 장악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정화와 희생 제사의 회복을 공식 적으로 알리는 성전 재봉헌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이 봉헌식날은 마카비 가문에서 대제사장직에 오른 뒤 대축제일로 확정되어 지켜졌으며(카이 1:1, 7-9),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하누카 축제를 통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세 번째로, 대제사장직에 대한 영향이다. 마카비 혁명이 한창 진행 중 일 때, 대제사장 메넬라오스는 셀류시드 당국에 의해 유대 땅의 정치적 불안의 주요 요인으로 여겨져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사독계열인 알키모스가 대제사장이 되었다(주전 162년). 알키모스는 처음에 헬라주의자들과 하시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하시딤 60명을 살해한 뒤 이들과 불화 관계에 있었고 마카비 혁명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알키모스는 주전 159년에 아마도 뇌졸중으로 죽은 뒤(카일 9:54-56), 예루살렘 성전에는 7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었다. 그러나 셀류시드의 정치적 내분은 대제사장직을 다시 정치적 협상의 대상으로 만들고 말았다. 데메드리오 일세와 왕권 경쟁 관계에 있던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Epiphanes)는 팔레스틴에서 군사력을 키워 오고 있던 마카비 혁명군의 사령관인 요나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제사장권을 그에게 넘겨준다고 공포했다(주전 152년, 카일 10:20-21). 마카비 혁명군의 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유대 땅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지만, 하시딤과 같은 경건주의자들이 편에서 본다면, 요나단은 사독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권의 승계에 정통성의 문제가 있었다. 아무튼 마카비 혁명군은 이때부터 대제사장직을 확보했고, 마카비 가문에 의해 세습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2. 경제적 변화
마카비 혁명을 통하여 얻은 경제적 성과는 무엇보다도 셀류시드 왕조에 지불해야 했던 세금과 빛을 면제받았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셀류시드 왕조의 통치하에서 소금세, 왕관세, 곡물세, 과일세 등 각종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카일 10:29-30). 이들 세금은 소농으로 있던 대부분의 농민들의 경제적 상태를 매우 악화시키는 것으로, 마카비 혁명군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세금 정책의 피해자들이었다. 셀류시드 왕조의 세금 면제에 대한 제안은 데메드리오 1세 때에 먼저 있었다. 알렉산더 발라스와 왕권 경쟁 관계에 있던 데메드리오 1세는, 전자의 도움으로 이미 대제사장이 된 요나단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데메드리오 1세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의 제안을 무시했다.
세금 면제는 동생 요나단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시몬 시대에 이루어졌다. 당시 셀류시드 왕조는 트리폰과 데메드리오 2세가 왕권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전자와 불화 관계에 있던 시몬은 후자를 지지하면서 세금 면제를 요청했다. 데메드리오 2세는 이 요청을 즉시 받아들여 유대인들의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주전 142년, 카일 13:36-42). 이것은 마카비 혁명의 매우 중요한 성취 중의 하나로 시몬은 이때를 기준으로 하여 비로소 민족의 독립을 알리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하스몬 왕조는 유대 전통적인 세금인 십일조를 통하여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18) 이러한 세금 정책의 변화는 일반 민중들의 경제적 부담을 훨씬 덜어 주는 것이었고 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향상되는 것이었다(카일 14:8-12).
3. 정치적 변화
마카비 혁명의 성공은 정치적으로 먼저 유대인들의 자주 독립을 가져다 주었다. 주전 142년에 취해진 셀류시드 왕조로부터의 세금 면제는 곧 대제사장 시몬 체제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정치적 독립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대인들은 이제 셀류시드 왕조에 대해서 부담해야 될 어떠한 의무도 없었다. 셀류시드 왕조는 예루살렘에 있는 친위 세력의 거점인 아크라에 대해서도 더 이상 지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몬은 주전 141년에 이곳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시몬은 유다와 요나단에 의해서 계속 유지되어 왔던 로마 및 스파르타와도 외교 관계를 갱신했는데, 이것은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카일 14:16-24).
두 번째로, 정치‧군사‧종교적인 지배권이 하나로 통합되어 마카비 가문에 세습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주전 140년에 열린 유대인들의 회의는 시몬을 비롯한 마카비 가문에게 대제사장권과 유대의 통치권 그리고 군대의 총사령관권을 세습적으로 부여할 것을 공식 결의 하였다(카일 14:25-49). 그러나 이 결정에는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카일 14:41)라는 조건이 있었다. 이것은 비사독 계열인 마카비가의 대제사장권에 정통성의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마카비가와 다른 종파사이에 정치적 타협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19) 시몬 정권은 이제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명실 상부한 독립 정부가 되었다.
Ⅳ. 맺는 말
마카비 혁명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어떤 종류의 혁명이었는가? 마카비 혁명은 농촌에서 시작되었고 많은 농민이 참여하여(카일 14:8,12; 카이 12:1) 귀족 계층 혹은 지배 계층에 항거했기 때문에 농민 전쟁 혹은 농민 혁명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셀류시드라는 외세의 침략과 억압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헬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항전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반외세 전쟁의 요소도 내포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 혁명이 안티오쿠스 4세의 종교 박해에 저항했다는 것과, 여기에 제사장 가문이 지도적 역할을 하고 하시딤과 같은 종교인들이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종교 전쟁의 요소도 있다. 따라서 마카비 혁명이 농민전쟁이냐 반외세 전쟁이냐 혹은 종교 전쟁이냐 하는 것은 이들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그리고 마카비 혁명의 어떤 점을 더욱 강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동학 혁명에서 보듯,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외세의 억압에 대한 저항에 민족 자생의 종교 혹은 민족 종교가 깊숙이 연계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카비 혁명의 특성을 한 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또 다른 요인은 이 혁명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그 진행 과정에 따라 그 특성도 변했다는 것이다. 즉, 초기에는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항거의 성격이 매우 강했지만,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서 외세와 이에 동조하는 자들을 몰아내려는 특성을 띠었으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하스몬 왕조라는 독립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카비 혁명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목표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긴 과정을 통해서 볼 때, 마카비 혁명은 결국 민족 독립 운동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과적으로 유대 민족의 종교적‧경제적‧정치적 독립을 가져다 주었고, 셀류시드 제국의 대리자들을 몰아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독립 운동에서 종교는 민족 세력의 주요 결집원으로 그 역할을 담당했다.
[출처] 마카비 혁명의 원인과 결과 (신학교실) |작성자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