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심언(金審言)은 정주(靜州) 영광현(靈光縣) 사람으로, 처음에 상시(常侍) 최섬(崔暹)에게서 배웠다. 최섬이 앉아 졸다 꿈을 꾸었는데, 김심언의 정수리 위에서 불이 나오다가 그 기운이 하늘 한 가운데로 붙으니, 이를 이상하게 여겨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우보궐 겸 기거주(右補闕 兼 起居注)가 되었다.
〈성종〉 9년(990) 7월에 봉사(封事)를 올리니, 왕이 교서를 내려 칭찬하여 이르기를,
“짐이 등극한 뒤로부터 성업(盛業)을 이룩할 것을 생각하여, 중앙에는 관료들을 두고 지방에는 수령을 배치하여, 지방관[分憂]의 임무를 비우는 일이 없게 하고, 풍속을 이롭게 하는 방책을 베풀고자 하였다. 어찌 과인[冲人]의 어리석음으로 정치와 교화가 쇠퇴[陵夷]함을 생각하겠는가? 앞서 우보궐 겸 기거주(右補闕 兼起居注) 김심언(金審言)이 올린 봉사 2조를 살펴보았다.
그 첫째 조에 이르기를, ‘주(周)가 왕업을 여니, 주공(周公)[姬旦]이 「무일편(無逸篇)」을 올렸고, 당(唐)이 중흥의 시대를 맞으니, 선종(宣宗)이 백관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설원(說苑)』의 6정(六正)·6사(六邪)에 관한 글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대체로 신하의 품행에는 6정과 6사가 있으니, 6정을 바르게 행하면 곧 번영하고, 6사를 범하면 곧 수치를 당한다. 무엇을 6정이라 말하는 것인가? 첫째, 아직 싹이 트지 않고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흥망의 기미를 혼자 훤하게 알고서 아직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그치게 하여 임금께서 초연하게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니, 이 같은 사람은 성신(聖臣)이라 한다.
둘째, 마음을 비우고 뜻을 깨끗이 하여 선으로 나아가 도리를 환히 깨달아서 예의로써 임금을 권면하고, 훌륭한 계책[長策]으로 임금을 인도하여 장차 좋은 도리를 따르고 나쁜 행동을 널리 고치게 하는 것이니, 이 같은 사람은 양신(良臣)이라 한다.
셋째,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며 어진 이의 천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옛날에 행한 사적을 자주 드러내어 임금의 뜻을 격려하는 것이니, 이 같은 사람은 충신(忠臣)이라 한다.
넷째, 성패를 밝게 살펴 미연에 방지하여 고치고, 화를 복으로 바꾸어 임금으로 하여금 종신토록 근심이 없도록 하는 것이니, 이 같은 사람은 지신(智臣)이라 한다.
다섯째, 예의[文]와 법도[法]를 지키고 받들고 직무에 책임을 다하며 녹과 상을 사양하고 음식을 절약하여 검소하게 하는 것이니, 이 같은 사람은 정신(貞臣)이라 한다.
여섯째, 국가가 혼란할 때 행위에 아첨이 없고, 감히 임금의 엄한 안색을 거슬려 가면서 임금의 잘못을 면전에서 말하는 것이니, 이 같은 사람은 직신(直臣)이라 한다.
이들을 6정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육사(六邪)라 하는가?
첫째, 편안하게 벼슬하며 녹(祿)만 탐하고 공무에 힘쓰지 않으며, 세속 형편에 따라 변하고, 이리저리 관망하는 것이니, 이 같은 자는 구신(具臣)이라 한다.
둘째, 임금이 말하면 모두 옳다 하고, 임금이 하면 모두 좋다 하며, 사사로이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구하여 바치며, 임금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구차하게 부합하고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며 임금과 함께 즐거워하고 뒤에 올 해악을 돌아보지 아니하니, 이 같은 자는 유신(諛臣)이라 한다.
셋째, 속마음은 실제로 음흉하고 교활한데, 외모는 조금 근면한 듯하며, 말을 듣기 좋게 말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면서, 착한 사람을 시기하고 어진 사람을 미워하며, 추천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좋은 점만을 드러내고 그 나쁜 점을 감추며, 물리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허물만을 드러내고 그의 좋은 점을 감추어, 임금으로 하여금 상벌이 부당하게 하고 명령이 실행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 같은 자는 간신(姦臣)이라 한다.
넷째, 지혜는 족히 〈자신의〉 잘못을 덮어 꾸밀 만하고, 언변은 족히 자신의 주장을 펼만하여, 안으로는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이간질하고, 밖으로는 조정에 분란을 만드는 것이니, 이 같은 자는 참신(讒臣)이라 한다.
다섯째, 권력을 독차지하고 세력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에 가치[輕重]를 두고 사사롭게 도당을 만들어 자기 집을 부유하게 하며, 임금의 명령을 제 멋대로 사칭하여 자신의 부귀와 현달을 도모하니, 이 같은 자는 적신(賊臣)이라 한다.
여섯째, 임금에게 아첨과 간사함으로 비위를 맞추어 임금을 불의에 빠뜨리며, 붕당은 편파적으로 도당을 맺고[比周], 임금의 총명을 가려 〈그에게〉 흑백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게 하여, 임금의 악이 나라 안에 퍼지게 하고 주변 나라까지 전파되게 하니, 이 같은 자는 망국지신(亡國之臣)이라 한다. 이를 6사라 하는 것이다. 현명한 신하는 6정의 길에 처(處)하고, 6사의 술책을 행하지 않으니, 그리하여 위에서는 편안하고 아래에서는 잘 다스려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서(漢書)』의 「자사6조정(刺史六條政)」을 살펴보니,
「첫째는 백성들의 질고(疾苦)와 실직(失職)을 살필 것이고, 둘째는 묵수(墨綬)를 〈받은〉 장리(長吏) 이상의 관리들의 정사를 살필 것이며, 셋째는 백성을 해치는 도적과 크게 간교한 사람을 살필 것이고, 넷째는 토지에 대한 법을 범하거나 사시사철 지켜야할 금령을 어기는 자를 살필 것이며, 다섯째는 백성들 가운데 효도·공경·청렴·결백하고 품행이 바르며 재주가 특출한 사람을 살필 것이고, 여섯째는 관리가 돈과 곡식을 장부에 기입하지 않고 고의로 흩어 버리는 행위를 살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청하건대 「6정·6사문」과 「자사6조」를, 유사(有司)에게 맡겨, 2경·6관·여러 서(署)와 국(局) 및 12도(道)의 주현(州縣) 관청의 당벽(堂壁)에 각각 그 글을 써 붙이게 하여, 출입하면서 살펴보아 귀감으로 삼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둘째 조에 이르기를, ‘관직을 설치하고 임무를 분담하는 것은 제왕의 영전(令典)이고, 수도를 세우고 여러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고금의 통규(通規)입니다. 우리나라의 서경(西京)은 경계가 황해[鯨津]에 접하고 땅이 북쪽 국경[雁塞]에 닿아 있으므로, 견고한 성지[金湯]를 본떠서 요새를 만들고, 철옹성(鐵瓮城)을 모방하여 성을 쌓았으며, 여러 관료들을 임명하고 만호(萬戶)를 배치하여 분사(分司) 문무 관료가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염치 있는 인물을 〈왕에게〉 천거하여 아뢰는 사람이 없고, 잘못한 사람들의 죄상을 조사하여 탄핵하는 사람도 없으니, 탁류와 청류[涇渭]가 함께 흘러 선인과 악인[薰蕕]이 하나가 됩니다. 청컨대 당 낙양[東都]에 지대어사(知臺御史)를 설치하였던 예에 따라 사헌(司憲) 한 명을 배속하여 다스릴 수 있게 한다면, 아랫사람들의 사정이 윗사람에게 상달되고 상벌이 명확하여 만물이 태평하고 시대가 화평해지는 일을 가까운 시일 내에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소한 글이 이와 같으니, 내가 이를 심히 가상히 여긴다. 그대는 마음으로 국정을 보좌하고, 뜻으로 시국을 바로잡으려고 정(正)과 사(邪)의 두 이치를 기록하여 내 마음[襟懷]을 깨우쳐 주었다.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청들로 하여금 이를 권선징악으로 삼게 하리니, 내사문하(內史門下)에 내려 보내 모든 관청에 반포하여서, 아뢴 글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종 때 주목(州牧)이 되어 〈지방으로〉 나가서 농사에 힘쓰고 백성을 구휼함으로써, 당시에 큰 명성을 얻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발탁되었고,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옮겼다. 현종 5년(1014)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전직되었으며,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부임하였다.
〈현종〉 9년(1018)에 〈김심언이〉 죽으니,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