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교회의 표지
신학교를 다닐 때 참 교회의 3대 표지(標識, Marks)를 1) 말씀의 참된 전파, 2) 성례의 올바른 집행, 3) 권징의 신실한 시행으로 배웠다. 가르치던 교수는 기도가 여기에 더해질 수 있었지만 더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배울 때는 정말 몰랐다. 교회가 그런 곳이라고 알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고민과 방황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이제 나는 참 교회에 대한 이해도, 교회의 표지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참 교회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 나라이며 성령공동체인 교회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스스로를 참 교회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모른다. 최근에는 하나님 나라 전문가들이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나 강의를 많이 하기도 하지만 막상 설교나 강의를 하는 본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교육은 아무리 받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이며, 작은 자들의 나라이다. 나는 이런 내용을 지난 이십 여 년 간 끊임없이 글로 써왔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를 잘 아는 동기 목사 하나가 나를 초청하여 강의를 하게 하였다. 그런데 내 강의가 끝난 후 그는 나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가 한 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도대체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가 한 말은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는 교리로 무장된 단단한 조직이다. 강력한 이기심과 욕망이 거기에 더해져 오늘날 교회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성례를 행하며, 권징을 시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참 교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참 교회의 3대 표지(標識, Marks)라는 것이 결국은 교리에 함몰된 변질된 그리스도교의 열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회의 표지가 이런 것이라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나 복음과는 상관없는 교회가 된다. 그런 교회는 결코 성령공동체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방식도 살아낼 수 없게 만든다. 결국 그런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 맘몬의 신전이 될 수밖에 없고, 나는 그렇게 맘몬의 신전을 참 교회로 신봉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을 보고 있다.
적어도 3세기까지는 신약교회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들 간의 어떤 조직이나 연합체 없이도 다른 교회들 간에 긴밀하고 친밀한 성도의 교제가 유지되었다. 무질서하게 보일 수 있어도 그들은 생명으로 이어진 유기체였다.
우리가 사도행전과 여러 서신서에서 바울을 포함한 바울의 동역자들이 깊은 형제애를 가지고 여러 교회를 방문하는 것을 찾아보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바울은 이 동역자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가? 그래서 서신서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 동역자들을 소개하거나 이들의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서신을 종료했다. 이것이 단순한 립 서비스처럼 보이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였으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 살면서 서로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성도들이었지만 성령과 주님 안에서 그들의 심령을 지배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형제애”였다. 그 사랑은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던, 혹은 가까이 있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문화가 달라도 그들의 속한 교회가 어디이건, 누가 개척한 교회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었고, 하나의 공동체였다.
이런 이들을 생각할 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는 공교회는 얼마나 허약한가? 얼마나 가식적인가? 이런 사실 앞에서 갈가리 찢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그 사람 역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집회는 늘 성도들의 가정이나 셋집, 아니면 야외에서 열렸으며 특별한 건물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 사실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건물이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은 특별한 건물을 애초에 거부한다. 성전에 갇힐 수 없는 하나님은 특히 신약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시다. 하나님은 건물에 갇히실 수 없다. 성전은 무너졌고, 다시 세워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거대한 성전들을 다시 세웠고, 건물 안에 갇히실 수 없는 하나님을 다시 건물에 가둬두었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결국 건물에 갇힌 교회는 성령의 역사와 무관하다.
나는 얼마 전 가톨릭 신부인 역사학자가 쓴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읽었다. 그곳에서 나는 초기 그리스도교에도 유대인의 회당과 마찬가지로 곳곳마다 예배처소인 건물이 있었다는 내용을 읽었다. 건물에 경도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그는 대변하고 있었다. 성당은 없다. 대성당은 더더욱 없다. 그것들이 역사의 유물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몇 년 전 화재에 의해 무너진 노틀담 성전은 우리에게 상징적이다. 대성당이나 교회 건물 역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져야 한다. 그것이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 건물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건물에 갇힌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진 것은 당연하다.
서로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동일한 생명과 동일한 성령의 내주를 강조하는, 어떤 조직에 의해서도 통제받지 않는 자율적인 통일성이 그 특징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특징이 그들로 하여금 무수한 박해를 극복하고 구원의 소식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초석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탄생한지 200년이 넘지 못해서 교회 내에는 치명적인 “교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교리는 채 200년도 못 되어서 감독들이 지배하는 성직제도가 성행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서 생긴 인간이 만든 조직과 종교형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조직과 종교형식은 성령의 능력과 성경의 지도하심을 대신하게 되었다.
감독이 지배하는 성직제도는 이제 바꿀 수 없는 완벽한 조직을 이루었고, 그리스도교는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그리스도교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성직제도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직제도가 허문 것이 바로 “서로”라는 관계성이다.
로핑크는 늘 신약에서 가장 중요시 다루어지고 있는 코이노니아라는 용어에서 벗어나 알렐론, 즉 서로라는 상호대명사의 용례를 들어 서신서에세 강조된 공동체의 정신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 용어를 통해 코이노니아란 용어에서보다 더 1세기 신자들의 공동체 정신의 실상이 정확하고 인상적으로 드러난다고 고백하고 있다.(롬12:10,롬 12:26, 롬15:7, 롬16:16, 고전11:33, 고전12:25, 갈5:15, 갈6:2, 데전5:11, 데전5:13, 데전5:15, 엡4:2, 엡4:32, 엡5:21, 골3:13, 약5:16, 벧전1:22, 벧전4:9, 벧전5:5, 요일1:7)
적어도 AD200년이 다 가기까지는 이러한 초기교회의 정신은 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특히 기독교가 국교가 된 이후 교회 공동체는 제도 교회의 형식으로 변화하면서 일반적인 교회의 분위기는 이미 그러한 공동체 정신을 더 이상 그리스인의 표지가 될 수 없게 변질된 것 같다.
나는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도 바로 이 사실을 확인했다. 유기체로서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고, 오늘날도 그러한 교회들은 건재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은 유별난 사람들이거나 이단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서 참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지를 다시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
세속교회와 구별되는 참 교회의 표지는 “성령의 공동체”요, “소유를 나누는 사랑”이다. 성령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는 섬김과 삶이야말로 참 교회의 진정한 표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