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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86코스 역방향 제1부
이화리종점 버스정류소-남양방조제-
남양호 남안길-원정7리 호암마을-
수도사-봉화재능선-원정5리 산돈원안들
20240522
1.코스 소개
두루누비에서는 서해랑길 86코스를, 평택과 화성의 경계를 짓는 남양호로 향하는 코스, 산업단지와 농촌마을, 방조제 주변을 걷는 코스라고 소개하며, 관광포인트는,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도량 '수도사', 체육시설이 있는 복합 체육공간 '신당근린공원', 간척지 개답과 농업용수확보를 위해 발안천 하구를 막아 축조된 '남양방조제'라고 안내한다. 그리고 수도사에서는 전통 사찰음식을 연구하고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시점은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앞, 종점은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이화리종점 버스정류소 맞은편이다. 주요 경로는 평택항 - 1.8Km - 신당근린공원 - 7.0Km - 수도사 - 1.3Km - 남양방조제 4.0Km - 이화리종점 버스정류소이며, 거리 14.1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난도 쉬움이라고 안내한다.
소개 내용 중 수도사는 원효대사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도량은 아니다. 또한 안내트레킹팀을 따라가는 회원들은 제한 시간 때문에 수도사 사찰음식체험관에서 전통 사찰음식을 체험할 여유가 없다. 소개 내용에 빠져 있지만 꼭 탐방해야 할 곳은, 평택홍보관 포승전망대와 수도사 대웅전 뒤의 둘레길인 것 같다. 탐방을 마친 뒤 이 두 곳을 미리 알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포승전망대보다도 수도사 뒤 봉화재 능선길을 걷지 못한 것이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혹 알았다고 하면 탐방날 이 두 곳을 탐방하였을까? 장담할 수 없다. 이 탐방객은 안내트레킹팀을 따르기에 제한 시간과 느린 속도 때문에 여러 제약을 받아 아마도 그냥 통과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뒷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만약 개별적으로 자유트레킹하는 도보여행자라면 서해랑길 86코스 탐방로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훨씬 많은 것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서해랑길 86코스를 정방향으로 탐방하면, 평택시(平澤市) 포승읍(浦升邑) 만호리(晩湖里), 도곡리(道谷里), 원정리(遠井里)를 거쳐 남양방조제를 건너 화성시(華城市) 우정읍(雨汀邑) 이화리(梨花里)로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탐방하면, 경기도 평택 지역의 탐방을 마치는 성취감과 아쉬움, 새로운 도시 화성으로 들어가는 설렘과 탐구심을 함께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안내트레킹팀에서 87코스와 86코스 두 개 코스를 역방향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87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 뒤 곧바로, 87코스 시작점인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에서 86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하여 남양방조제를 건너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로 넘어가, 원정리와 도곡리 지역을 거쳐 만호리 평택항 국제여객선터미널 앞에서 탐방을 마쳤다. 화성시 1개 里와 평택시 3개 里 지역 탐방과 시계(市界)를 통과하는 탐방을 거쳤다. 그렇지만 탐방을 마치는 도시와 탐방을 시작하는 도시의 경계를 넘는 설렘과 새로움의 물결이 고요했다. 아쉽지만 어쩌랴. 트레킹팀 주최측에서 진행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서해랑길 86코스 역방향 탐방을 2부로 기록한다.
2.남양만 안개와 원효 깨달음의 수도사
제1부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이화5리 남양만 제방 아래에 서해랑길 86·87코스 안내도와 경기둘레길 47코스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이 서해랑길 86코스와 경기둘레길 46코스 종점이며 서해랑길 87코스와 경기둘레길 47코스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서해랑길 87코스 탐방을 역방향으로 마친 뒤 곧바로 서해랑길 86코스 탐방을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서해랑길 86코스 역방향 탐방은 경기둘레길 46코스를 역방향으로 동행하게 된다.
남양만로 기아자동차사거리 회전교차로 앞에서 남양만 방조제 제방으로 올라갔다. 제방은, 북쪽 아산국가산업단지 경기우정지구 기아자동차 아산공장 방향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저곳에 화성시 매향리 고온포구와 석천리 석천포구가 있을 것이다. 고온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강화도로 이송할 때 사용했던 포구라고 한다. 길동무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경기둘레길이 석천포구와 고온포구를 거치는 탐방로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석천포, 고온포를 지나서, 미 공군의 해상 폭격 훈련장이었던 농섬과 방섬을 가까이서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화리종점 버스정류소에서 내륙으로 들어가, 이화리, 석천리, 매향리 내륙을 돌아 고온포 북쪽의 매향리평화생태공원으로 나온 뒤 남양만 해안으로 이어져 있다. 예전의 탐방로를 따라가는 탐방을 상상해 본다. 가보지 않은 길이 더 멋져 보인다. 북쪽으로 주던 눈길을 남쪽으로 돌리면 남양방조제 배수갑문을 거쳐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로 제방이 길게 이어지고 아산만 해안에는 평택화력발전소가 자리하고 있다.
제방에서 남양만 바다로 내려갔다. 남양만은 조선 시대 지방행정구역인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의 남쪽에 위치한 만(灣)이라 하여 남양만(南陽灣)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남양도호부의 읍치는 현재의 남양읍에 있었다고 한다. 그 남양만이 어디일까? 남양만의 위치를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현재 화성방조제에 의해 형성된 화성호 지역을 이르지만, 그 북쪽 대부도로부터 남양방조제 화성호까지를 대체로 남양만이라 이르는 것 같다. 바다가 육지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곳을 만(灣)이라 이르는데, 만은 소규모의 만에서 대규모의 만까지 다양한 규모로 존재한다. 만(灣)을 영어로는 'bay' 또는 'gulf'를 사용하는데, 'bay'는 비교적 작은 규모에 쓰고, 'gulf'는 대규모의 만에 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남양방조제에 의해 형성된 남양호 지역을 더 세분하여 분양만(汾陽灣)이라 이른다. 단정하면 아산만과 남양만은 경기만에 속하며, 남양만에 부속된 작은 만이 분양만으로, 분양만 입구를 가로막은 남양방조제에 의해 남양호가 넓게 형성되었다.
지리지형을 더 탐색하면 화성방조제 위쪽 지역인 화성시 남양읍·마도면·비봉면·송산면·서신면을 남양반도(南陽半島)라 이르고, 화성방조제와 남양방조제 사이의 지역인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 일대를 삼괴반도(三槐半島)라 이른다. 예전에는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 일대를 삼괴(三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삼괴반도라고 이르지만, 이 삼괴 지역의 중심지가 우정읍 조암리(朝岩里)이기에 조암반도(朝岩半島)라 불린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길손은 삼괴반도(조암반도) 서쪽 경기만(좁혀 남양만, 더 좁혀 분양만) 해안 바닷가로 내려온 것이다. 길손은 길동무와 함께 남양만 바닷가에서 풍경을 조망하고 점심을 먹으며 막걸리를 마셨다. 남양만 바다 서쪽에서 안개가 밀려온다. 해무(海霧)는 모든 풍경을 무화(無化)한다. 바다의 점령군 해무는 남양만 서쪽 아산만 당진 해안의 풍경을 두텁게 덮고 있는데, 심훈의 집 필경사와 소설 '상록수'의 영신과 동혁이 만나는 한진포구를 해무 속에서 상상한다. 남양방조제 남쪽을 바라보면 아산만 평택 북쪽 해안의 평택화력발전소 굴뚝들은 해무에 감싸여 거대한 설치예술품으로 보인다. 무화와 몽환적 해무 풍경은 가까이 떠와서는 멀리 물러난다. 막걸리 취기 때문일까? 해무에 감싸여 길손도 남양만 바다에 둥둥 떠있는 느낌이다. 남양만 바다에 펼쳐지는 5월 한낮의 해무 풍경은 샹그리라처럼 신비스럽다. 남양만 바다의 명물은 분명 안개이다.
제방으로 올라왔다. 갯메꽃은 바닷가 모래밭뿐만 아니라 제방에도 지천으로 피어 있다. 길손은 괴테의 시 '제비꽃'의 무정한 양치기 소녀처럼 사랑스런 갯메꽃을 밟으며 제방길을 걸었다. 제비꽃은 양치기 소녀의 발에 짓밟혀 죽은 것을 그녀의 사랑스러운 발이기에 행복했노라고 노래하였다. 갯메꽃은 무정한 길손을 욕하지 않았을까? 들에 핀 볼품 없는 꽃이라 하더라도 조심하여 지나가야지 이렇게 짓밟고 가도 되는가요?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들길을 걸을 때는 무심하지도 무정하지도 않게 따스한 마음으로 자연을 살피며 걸어야 한다. "들길 가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만나거든/ 거기 그냥 두고 보다 오너라/ 숲속 지나다 어여쁜 새 한 마리 만나거든/ 나뭇잎 사이에 그냥 두고 오너라/ 네가 다 책임지지 못할/ 그들의 아름다운 운명 있나니/ 네가 끝까지 함께할 수 없는/ 굽이굽이 그들의 세상 따로 있나니" - 도종환(1955~)의 '들길' 전문
남양방조제 갑문교를 건너면 평택시이다. 발안천(發安川) 하구인 분양만(汾陽灣)을 가로막는 공사를 1971년에 시작하여 1974년에 준공한 남양방조제 건설로,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와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가 연결되었고, 드넓은 남양호가 형성되었다. 남양호 준공 기념탑에는 "오늘 우리는 대자연과의 대결에서 줄기찬 민족의지의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읍니다."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사가 '남양호' 휘호 아래에 새겨져 있다. 남양방조제가 끝나는 지점에서 평택시 아산만 해안에는 평택항 모래부두가 펼쳐지고 평택화력발전소와 평택LNG기지 등 아산국가산업단지 경기원정지구가 있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남양호 남안(南岸)길로 접어든다. 남양호 남안에는 한국석유공사 등 기업들이 들어서 있고, 괴태산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산이 솟아 서해 바다로 내리벋고 있다.
평택에서 화성으로 넘어가야 평택과 작별하는 아쉬움과 화성과 만나는 맞이인사를 나눌 수 있는데, 지난 번까지 탐방한 평택 지역으로 다시 들어왔으니 이제는 낯익은 인사를 나눈다. 평택에 대해 잠시 알아본다. 1995년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을 통합하여 현재의 평택시가 시작되었다. 평평한 땅에 연못밖에 없어서 '평택(平澤)'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대부분의 지형이 평야와 수십m 정도의 낮은 구릉들 뿐이고 평택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해발 208m의 무봉산이라고 한다. 평택에는 시 해외 주둔 미군 기지 중 단일 기지로 세계 최대 규모인 USAG 험프리스(평택 미군기지)와 송탄 쪽에 위치한 오산 공군기지, 1999년 인천에서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로 이전한 해군 제2함대가 위치한다.(나무위키 참조)
포승읍에는 평택항·포승국가산업단지·서해안고속도로·서해대교 등의 산업자원시설들이 있다. 평택항은 2001년 7, 8월에 경기평택항만공사가 설립되고 3만 톤급 2개 선석이 준공되면서 본격적으로 국제항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중장기 계획으로 지속적인 확장공사가 진행돼 동북아 교역의 중심항구로 자리 잡았다. 포승국가산업단지는 대규모 국가산업단지로, 1994년 8월 도곡리·만호리 일대에 공사를 시작해 1999년에 완공했으며 수도권에 인접하고 평택항 및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계돼 현대모비스·금호타이어·동우화인캠을 비롯한 많은 업체들이 입주해 있다. 포승읍 원정리에는 LNG기지와 평택화력발전소, 석유공사와 같은 기간산업 시설들이 있고 만호리에는 만도기계(주)·(주)한라공조와 같은 대기업들이 있다.(평택시史)
남양호 남안(南岸)길을 따라 남양대교를 향해 동진한다. 드넓은 남양호를 남양대교가 가로지르고,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이 간척농지 중에서 남양호 건너편 남양대교 위쪽인 화성시 장안면 간척농지를 특별히 '남양간척지'라 이른다고 한다. 왜 그럴까? 발안천하구의 중심지로서 남양방조제가 완공되기 전 수해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지역으로 가장 넓은 간척농지 지역이 화성시 장안면 남쪽 지역이서일까? 남양호 건너편 화성시 지역은 삼괴반도의 중심지로서 삼괴반도 지명을 유래한 삼괴(三槐) 지역이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에 위치하고 있기에 이 지역을 대표하는 간척농지로서 '남양간척지' 지명을 붙인 것일까? 허겁지겁, 남양호 남안길을 따라 괴태산 능선의 동쪽 봉화재 방향으로 이어간다. 봉화재에 괴태곶봉수대가 있었으며, 원효 스님이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토골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도 그 어름 어디일 것이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그곳에 수도사가 있다.
남양대교 아래서 오른쪽으로 꺾어 남양만로로 나가 국도 제77호선 포승향남로의 원정삼거리 입구에서 포승향남로 옆 보도를 따라 원정7리 호암마을 입구로 진행한다. 길가에 금계국이 노랗게 피어 바람에 날린다. 금계국 노란 꽃이 나풀나풀 시간에 쫓기고 피로해진 길손을 위로해 준다. 괴태산 능선은 높이를 낮추어 낮게 호암마을 남으로 동진하고,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조망 담은 호암마을 안쪽으로 이어진다. 포승향남로 옆 보도에서 호암길을 따라 호암마을로 들어간다. 원정7리 마을회관 앞을 거쳐 호암마을을 통과하여 수도사 입구에 이르렀다. 수도사는 봉화재 능선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원효대사가 해골 물을 마신 곳이라고 하여 유명세를 타고 있다. 수도사 입구에는 일주문이 없고 사천왕 석상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를 지나면 수도사 중창불사를 위해 시주금을 모금하는 안내소가 있다. 종교가 없는 길손은 그냥 통과한다. 수도사의 탐욕은 끝간 데를 모르는구나. 파우스트에 나오는 교회의 물질 탐욕에 대한 구절이 스쳐지나간다. 수도사(修道寺)가 내세우는 사찰음식체험관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고,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은 언덕 위 수도사둘레길 입구에 있다. 길손은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들르지 못하고 허겁지겁 언덕으로 올랐다.
원효스님이 의상스님과 함께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려고 했으나 밤중에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길을 포기하였으며, 의상 스님만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고, 중국의 <송고승전>에 실려있으며, 의상스님의 이야기 가운데 등장한다. 우리는 해골 물을 마신 것을 알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고 있지만 이야기에서는 하룻밤을 더 묵게 된 날이 중요시된다. 하룻밤을 더 묵게 된 날, 전날에는 그 토굴에서 안락하게 편히 잘 수 있었지만, 그곳이 무덤인 줄 알았기 때문인지 원효스님은 계속 귀신 꿈을 꾸고 귀신이 나타날 것만 같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같은 장소인데도 무덤인 것을 몰랐을 때와 알았을 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다른 것을 알고는 큰 깨달음을 얻어서 유학길을 포기했다고 한다. 원효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장소, 즉 오도처(悟道處)가 어디일까? 그것은 원효·의상스님이 경주에서 배를 타러 가려던 항구인 당항진으로의 이동 경로와 맞물려 있다. 그래서 평택 수도사, 화성의 몇몇 장소가 거론되지만 현재는 평택 수도사에서 가까운 지역일 것이라 추정한다고 한다. - 중부일보, 2021. 10.11. 주수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원효가 깨달은 내용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깨달음을 얻은 곳이 평택 수도사 근처 어느 토굴인지 화성 어느 토굴인지 알 수 없다.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딸린 것, 수도사 중심지를 살피지 못하고 지난다. 길손의 마음은 이 탐방의 제한 시간을 맞추는데 온 마음이 미쳐 있다. 수도사를 스쳐서 봉화재 능선의 해군 제2함대 사령부의 철조망 울타리 옆 산길을 걸어 포승읍 원정5리로 내려갔다.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 국도 제77호선 포승향남로와 재회하여 잠시 포승향남로 남쪽 보도를 따라가다가 원정5리 산돈원안들 앞으로 나아갔다. 뒤늦은 모내기를 하는 산돈원안들 논에서 트랙터가 써레질을 하고, 산돈원안들 언덕에 원정5리 고층아파트들이 솟아 있다. 남양방조제 축조에 의한 간척지와 포승지구 산업단지, 평택항과 해군 제2함대 사령부 등이 평택시 포승 지역을 일취월장, 괄목상대하게 변모시켰다. 그 번영의 현장으로 다가간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4.69km 중 7.34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36분 중 2시간 26분
서해랑길 86코스 종점이며 87코스 시작점에 서해랑길 86·87코스 안내도와 경기둘레길 47코스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서해랑길 86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하여 남진한다.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버스 종점 건너편에 서해랑길 86·87코스 안내도와 경기둘레길 47코스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서해랑길 86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하며 서해랑길 86·87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남양만로 기아자동차사거리 회전교차로를 지나 남양만로에서 오른쪽 제방으로 올라간다.
후퍼옵틱 화성기아점 맞은편 남양만로 남쪽 보도에 서해랑길 86·87코스 안내도와 경기둘레길 47코스 스탬프함이 세워져 있다.
이화리(梨花里)는 우정읍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장안면 노진리, 북서쪽은 석천리와 맞닿아 있고, 남쪽은 남양호와 서해이다. 이화리의 행정리는 5개이다. 자연마을로는 느즌고지, 당골, 덕묵골, 맹곶 등이 있다. 이화리의 마을 앞이 바다였는데 배가 마을 앞까지 드나들어 뱃골[舟谷]이라 불리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배다니는 골인 뱃골[舟谷]을 먹는 배인 배골[梨谷]로 잘못 인식하여 이화리(梨花里)로 오기하여 그대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자연마을 중 느즌고지는 배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곶으로 되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골은 불로산 밑에 있는 마을로 신당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덕묵골은 배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뱅곶은 곶으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국가산업단지 경기우정지구 기아자동차 아산공장 앞쪽 석천 선착장에서 제방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화성시 우정읍 이화5리 남양만로 기아자동차사거리 회전교차로를 내려본다.
이화리(梨花里)는 조선 후기 남양군 압정면(鴨汀面)에 속하였다. 압정면은 수원부에 속하였다가 1906년 남양군에 편입되었으며, 이후 소속 동리는 일동(一洞)부터 구동(九洞)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 압정면 일동(一洞)·이동(二洞)과 삼동(三洞) 일부가 병합되어 수원군 우정면 이화리로 개편되었다. 1949년 화성군이 신설되면서 화성군 우정면 이화리가 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었고, 2003년 우정면이 우정읍으로 승격하여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이화리는 북서쪽으로 아산만, 남쪽으로 남양호와 접한다. 서쪽에 보금산[63.9m]이, 북쪽에는 불노산[62.1m]이 있다. 이화리 동쪽에는 안골앞들이 있으며 북쪽에는 가재울골이 있다. 이화리 서쪽에 있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동쪽으로 가마살들, 들엄뱅이들, 신원들, 주답들, 간척지들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점심을 먹기 위해 남양만 바닷가 모래밭으로 내려간다.
제방에서 남양만 바닷가로 내려왔다. 남쪽에는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평택화력발전소가 흐릿하다.
남양만 바다 북쪽에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이 자리하고 있다. 화성시 매향리 고온항과 석천리 석천항이 있다.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남양만 바닷가에서 바다 건너편 서쪽 아산만의 당진시 송악읍 한진포구와 아산국가산업단지 고대지구와 부곡지구를 가늠한다. 짙은 해무(海霧) 때문에 아산만은 보이지 않는다.
남양만 화성읍 이화리 바닷가 모래밭 안쪽에 갯메꽃들이 떼지어 피어 있다. 점심을 마치고 제방으로 올라간다.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남양만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막걸리를 마신 뒤 제방으로 올라와 남양만로를 뒤돌아본다.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남양만 제방에 갯메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제방길을 따라 진행한다.
아래는 남양만로가 놓여 있고 그 안쪽에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간척농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점심을 먹은 바닷가 모래가 곱다. 오른쪽 뒤에 기아자동차사거리, 왼쪽 맨뒤에 기아자동차 화성공장과 보금산이 가늠된다.
화성시 우정읍 남양만 해안의 제방이 동그랗게 돌아가고 맨 위쪽에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고온항, 석천항이 있다. 오른쪽 맨 뒤에 우정읍 이화리와 석천리에 걸쳐 있는 해발 63.9m 보금산이 가늠된다.
남양만에 해무(海霧)가 밀려온다. 날이 맑으면 건너편 서쪽 아산만의 당진시 송악읍 아산국가산업단지 고대지구와 부곡지구, 그리고 안섬포구와 한진포구가 보일텐데, 짙은 해무(海霧)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화리 남양만 제방길을 따라간다. 건너편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아산만 해안에 평택화력발전소가 흐릿하다.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기아자동차사거리에서 출발하여 남양만 제방길을 따라 남양만로와 동행하고 있다.
우정읍(雨汀邑)은 화성시의 서남부 조암반도 끝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아산만, 남양호와 접한다. 대부분 저평지가 발달하며 쌍봉산[117.7m], 봉화산[61.3m], 보금산[63.9m] 등 구릉성 산지가 나타난다. 어은천이 멱우리 동쪽 구릉지에서 발원하여 우정읍의 중앙부를 서류하며, 상류에 멱우지를 형성한다. 우정읍의 갯벌은 강우량이 적고 일사량이 많은 자연조건을 이용하여 염전으로 이용되었다. 우정읍의 면적은 약 61.66㎢이다. 주요 도로로 북동쪽에 평택시흥고속도로가 지나가며, 조암 나들목과 요금소가 주곡리에 있다. 또 국도 제77호, 국도 제82호, 국가지원지방도 82호, 지방도 제301호, 지방도 제302호, 지방도 제310호가 지난다. 우정읍행정복지센터는 조암리에 위치한다. 교육 시설로 공립 초등학교 3개, 사립 중학교 2개, 사립 고등학교 2개가 있다. 산업 시설로 주곡 일반산업단지, 아산국가산업단지[우정지구], 호곡산업단지, 우정공업단지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양만 해안이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석천리, 이화리로 내려오며 서쪽 당진시 송악읍 아산만 해안과 마주하고 있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뒤쪽에 보금산이 솟아 있다.
화성시(華城市) 우정읍(雨汀邑) 이화리의 간척농지가 드넓다.
우정읍(雨汀邑)은 화성시의 서남부에 위치한다. 북쪽과 서쪽으로 화성호, 동쪽으로 장안면, 남쪽으로 남양호와 아산만에 접한다. 우정읍은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1914년 우정면(雨井面)과 압정면(鴨汀面)을 합쳐 새로운 면을 만들면서 두 면의 이름을 따서 우정면(雨汀面)이 되었다고 한다. 우정읍은 고려 시대에 쌍부현(雙阜縣), 조선 시대 수원부에 속하였다. 우정읍은 조선 후기 수원부 우정면(雨井面)과 압정면(鴨汀面)[또는 압장면(鴨長面)] 지역이며, 『화성지』에 따르면 과거 화방면(禾方面)과 팔라곶면(八羅串面)을 우정면에 합쳤다. 1906년 비입지(飛入地)와 두입지(斗入地)를 정리할 때 압정면이 남양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양군이 해체되고, 남양군 우정면과 압정면이 병합되어 수원군 우정면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고 수원군의 일부 지역이 화성군으로 신설되면서 화성군 우정면이 되었다.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고, 2003년 우정면이 우정읍으로 승격되면서 화성시 우정읍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양만(南陽灣) 바다의 명물이 무엇일까? 남양만(南陽灣) 바다의 명품은 해무(海霧)라는 생각이 든다.
남양방조제 제방길을 따라 아래의 남양만로와 동행한다. 건너편 뒤에 평택화력발전소가 있다.
남양만방조제 배수갑문이 앞에 있고, 오른쪽 뒤에 평택화력발전소가 보인다.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과 평택시 포승면 사이에 남양만 하구를 막은 남양방조제는 그 내부를 농지로 이용하기 위해 진행된 국가 주도 대규모 간척 공사로, 1971년 착공되어 1974년 준공되었다. 남양방조제 건설을 통해 2,279㏊의 농지가 확보되는 등 서해안 지역 대단위 농업 개발의 효시가 되었다. 남양방조제는 초기 매립 면허를 받은 개인 사업자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시공하였다. 하지만, 조수 간만의 차가 극심하여 지반의 토사가 유출되어 더 이상 시공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데, 1970년 정부에서 인수하여 국가 주도로 건설하게 되었다. 1971년 3월 23일 착공되어 1973년 12월 20일 끝막이 공사를 마치고 1974년 5월 22일 준공되었다. 농업 용수 공급을 위한 토목공사는 1976년 11월에 끝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양방조제 배수갑문 위쪽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제방길에서 내려간다.
남양방조제 배수갑문 위쪽으로 통행이 금지되어 남양만로로 내려가 남양만로를 따라간다.
남양만로 남양방조제 배수갑문교를 통과하여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에서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로 넘어간다.
남양방조제의 길이는 2,060m에 이르며, 배수갑문의 길이는 84m, 높이 35m, 너비는 상단 4m, 하단 33m이다. 남양방조제는 너비 12m의 도로가 있으며, 각각 50톤을 배수할 수 있는 34.9m 크기의 갑문이 12개 설치되어 있다. 남양방조제 축조와 함께 조성된 남양호는 화성시의 관광지로서 농업 용수 공급은 물론, 연중 낚시꾼이 즐겨 찾는 곳으로 특히 겨울철 얼음 낚시로 유명하다. 남양방조제는 현재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남양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식량 증산에 이바지하였으나, 바다 생태계를 파괴하였다는 환경보호단체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남양방조제를 건설하면서 갯벌을 매립하였고, 복잡한 해안선을 단순하게 만들어 생태계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양만로를 따라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로 넘어간다. 왼쪽에 남양방조제를 관리하는 한국농어촌공사 남양호관리소가 있다.
질주하는 산업용 차량 때문에 남양만로를 따라가기가 힘들어 남양호 준공기념탑 앞에서 제방으로 올라왔다. 남양호 준공 기념탑에는 "오늘 우리는 대자연과의 대결에서 줄기찬 민족의지의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읍니다. 1974.5.22"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사가 '남양호' 휘호 아래에 새겨져 있다.
남양호(南陽湖) 남안(南岸)에는 한국석유공사가 자리하고 있다. 저 산이 봉수대가 있었던 괴태산이 맞을까?
남양방조제 제방길을 따라 남양만로와 동행한다. 오른쪽은 모래자갈 채취업체인 공영해운인 듯.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아산만 해안에 평택화력발전소가 자리하고 있는 듯.
왼쪽 안중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뒤의 건물은 종합건설업체인 와이엠종합건설인 듯.
남양만로를 따라가는 이 길이 위험구간이므로 우회하거나 차량 이용을 안내한다.
남양만로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면 LNG기지 입구가 나오는 것 같다. 왼쪽 남양호 호안(湖岸)으로 나간다.
남양만로 지선(支線)인 남양호 남안(南岸)길을 따라간다. 왼쪽은 남양호, 오른쪽은 한국석유공사이다.
발안천(發安川) 하구를 가로막은 남양방조제에 의해 드넓은 남양호(南陽湖)가 형성되었다.
발안천(發安川) 하구가 있는 남양만(南陽灣) 속 작은 만인 분양만(汾陽灣)에 남양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남양호가 조성되었다. 남양방조제는 1973년 12월 끝막이 공사가 완료되어 1974년 준공되었다. 남양호(南陽湖)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화성시와 평택시에 걸쳐 있으며, 호수의 면적은 209㎢[유역 면적], 방조제 길이는 2,065m이다.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장안면 장안리와 노진리에 걸쳐 있고,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홍원리 등과 접하고 있다. 발안천·세천 등이 남양호로 유입되며, 남양호 주변은 광주 산맥의 말단부로 해발 10~50m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남양방조제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이화리와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를 연결한다. 방조제 건설로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팔탄면·향남면과 평택시 청북면·안중읍·포승읍 등 주변 지역에 많은 간척지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장안면 남쪽에 새로 조성된 간척지 일대가 남양간척지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양호 위쪽에 남양대교(南陽大橋)가 남양호를 가로지른다. 서해랑길은 남양호 남안(南岸)길로 이어진다.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장안리에 있는 남양대교(南陽大橋)는 남양호를 지나가는 교량이라서 남양대교로 이름 붙여졌다. 남양대교는 왕복 4차선이며, 총 길이 1230m, 폭 21m, 높이 13.3m이다. 상부 설계방식은 강박스거더교이며, 하부 설계방식은 구주식교대식이다. 2005년 준공되었고 관리 책임은 국토교통부에 있다. 남양대교는 2000년대의 교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도 제82호선을 신설하면서 국도 77호선과 연결하기 위하여 건설되었다. 남양대교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와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를 잇고 있으며, 국도 77호선과 국도 제82호선인 포승향남로를 연결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양방조제에 의해 남양호가 형성되고 발안천 북쪽의 화성시 지역에 드넓은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그 중 남양대교 건너 위쪽 지역인 화성시 장안면에 새로 조성된 간척지 일대를 남양간척지라 이른다고 한다.
장안면(長安面)은 『화성지』에 장안면 소속으로 기록된 장내리(場內里)가 장안리의 전신이다. 장안리는 과거 마장(馬場)이 선다고 해서 마장리(馬場里)로 불리다가, 마장 안쪽이라는 뜻으로 장내리(場內里)가 되었고, 다시 장안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장안면은 남산[107.3m]·꽃당산[103m]·무봉산·대남산·봉화산·불노산·전통산·농뿌리산 등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나타낸다. 봉담읍 상기리에서 발원한 발안천이 장안면의 동남쪽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 장안면 남쪽에 있는 인공호인 남양호로 유입된다. 발안천 주변인 장안면의 동남부에는 남양간척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남양호는 농업용수, 공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2021년 1월을 기준으로 장안면의 전체 토지 중의 논의 비중은 31.2%로, 화성시 읍면동 가운데 진안동 다음으로 높다. 또 절대 면적으로는 가장 넓은 27.14㎢의 전답지가 있는 화성시의 대표적 곡창지대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물류센터 보세창고인 (주) 남영이 왼쪽에 있다. 계속 남양호 남안(南岸)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잠시 오른쪽 길로 들어간다.
앞에 있는 산이 봉화재가 있는 괴태산이 맞을까? 앞에서 남양만로를 왼쪽으로 따라가도 되지만 서해랑길로 되돌아온다.
잠시 길을 잘못 들었다가 남양호(南陽湖) 남안(南岸)길로 나와 서해랑길을 이어간다.
뒤돌아서서 걸어온 남양호(南陽湖) 남안(南岸)길을 살핀다. 국가기간산업체 한국석유공사 울타리를 따라왔다.
멀리 서쪽에 발안천 하구를 가로막은 남양방조제가 보인다. 남양호 고깃배가 떠 있다.
남양방조제에 의해 조성된 간척지 일대에 남양호는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남양대교 건너 오른쪽 지역이 장안면이다.
남양방조제 건설로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팔탄면·향남면과 평택시 청북면·안중읍·포승읍 등 주변 지역에 많은 간척지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장안면 남쪽에 새로 조성된 간척지 일대가 남양간척지이다. 남양호는 담수호로 관리되고 있으며, 주로 농업 용수로 사용된다. 농업 용수로 사용되는 양은 1년에 5,500만㎥이며, 공업 용수는 650만㎥가 사용된다. 남양호 인근에는 ‘화성 장안첨단제1·2일반산업단지’, ‘평택 어연한산일반산업단지’, ‘평택 오성일반산업단지’, ‘평택 포승제2일반산업단지’, ‘평택 한중테크밸리일반산업단지’, ‘평택 현곡일반산업단지’ 등의 산업 단지들이 조성되었다. 또한, 인근에는 전자 부품 및 자동차 부품 생산 업체인 기아자동차·쌍용자동차·만도기계 등이 입지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호안(湖岸)길을 따라 남양대교 아래까지 이어간다. 남양대교는 화성시 이화리와 평택시 원정리를 잇는다.
남양호(南陽湖) 남안(南岸)길을 따라 남양대교 방향으로 계속 이어간다. 오른쪽에 물류업체들이 모여 있다.
서해랑길은 호안(湖岸)길 남양대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원정리 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남양대교 앞에서 국도 제77호선 포승향남로 아래의 농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남양호 언덕길을 따라 길게 이어왔다. 방금 지나친 물류업체 건물들이 왼쪽에 있으며, 그 뒤의 산은 괴태산인지 궁금하다.
남양호 남안길 남양대교 아래서 평택섶길 5코스 소금뱃길과 만나서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위쪽의 국도 제77호선 포승향남로 아래의 농로를 따라간다.
원정리 봉수대가 있는 봉화재가 왼쪽에 있는 것 같으니 저 산이 아마도 괴태산인 것 같다. 앞에는 물류업체들이 모여 있다.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펼쳐져 있는 농로를 따라 남양만로로 나간다.
화성시 우정읍 이화리 출발지에서부터 동행하다가 남양호 남안길로 나오며 헤어졌던 남양만로 간선과 재회한다.
남양만로가 앞쪽 도로표지판이 있는 원정삼거리에서 포승향남로와 만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책담 옆 도로를 따라 왼쪽의 국도 제77호선 포승향남로와 동행한다.
남양호 남안길에서 농로를 따라와서 남양만로를 건넜다. 금계국 노란 꽃들이 바람에 날린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책담 옆 도로를 따라 원정7리 호암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을 따라가다가 잠시 국도 제77호선 포승향남로 원정삼거리 방향을 바라본다. 남양대교가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왼쪽은 국도 제77호선 포승향남로, 오른쪽은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책담,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이어간다.
원정리(遠井里)는 조선시대 양성현 승량동면 지역이다. 내기리에서 남양만으로 길게 뻗은 반도에는 괴태곶이 발달했고 주산인 괴태산에는 괴태길곶 봉수가 있었다. 머물·번제와 같은 마을에는 괴태곶목장이 있었다. 갑오개혁 후 수원군 승량동면에 통합됐으며 1914년 진위군 포승면 원정리가 됐다. ‘원정’이라는 지명은 원정2리 머물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원정리는 서쪽으로는 아산만과 접했고 북쪽으로는 남양만방조제 및 남양호를 경계로 화성시와 인접했으며, 포승국가산업단지도 인접했고, 해군제2함대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다. 북동쪽으로는 한국전쟁 뒤 염전이 발달했고 1974년 5월 남양만방조제 완공 후 2,285ha의 넓은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화성염전들·당두염전들과 같은 곡창지대가 있다. 멍거니산 일대에는 LNG평택기지·평택화력발전소·기호물류(주)·석유공사 등 기간산업들이 자리 잡고 있다. - 평택시史
이곳이 포승읍 원정7리(遠井七里) 호암마을 입구이다. 오른쪽으로 꺾어 호암길을 따라간다.
원정리(遠井里)에는 모두 8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본래부터 있었던 마을은 원정·번제·곡교·호암뿐이고 쌍용·한일·여술 마을은 남양만 간척 후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원정1리 곡교는 마을 입구에 굽은 다리가 있어 우리말로 굽은다리였는데 음이 변해 ‘고분다리’로 불렀다. 포승국가산업단지가 건설되면서 마을 전체가 원정7리 호암 마을 앞 화성염전들로 집단이주했다. 번제는 머물 남쪽 해군제2함대사령부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해군제2함대사령부가 주둔하면서 마을의 삼분의 일이 잘려나갔다. 번제는 1914년 바닷물이 들어와 넓은 호수를 이룬다고 해서 번호藩湖, 이곳에 제방을 쌓았다고 해서 번제로 불리다가 지명으로 굳어졌다. 원정7리 호암은 우리말로 ‘범바위’다. 범바위는 본래 괴태산 서쪽 해군제2함대사령부 자리에 있었던 마을이다. 농업과 어업, 수산업을 하며 살았던 마을인데 폐동되면서 괴태산 동북쪽으로 집단 이주했다. 원정6리 여술은 여울목의 다른 이름이다. 몇 호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가 한국전쟁 뒤 피란민들이 자리 잡으면서 마을이 커졌다. 1970년대 남양만이 간척되고 당두염전·화성농장들이 옥토로 바뀌면서 마을 규모가 커졌다. 원정4리·5리 한일이나 쌍룡도 간척사업 때 만들어진 마을이다.
호암길을 따라 호암마을을 통과한다.
원정7리 호암은 우리말로 ‘범바위’다. 범바위는 본래 괴태산 서쪽 해군 제2함대사령부 자리에 있었던 마을이다. 농업과 어업, 수산업을 하며 살았던 마을인데 폐동되면서 괴태산 동북쪽으로 집단 이주했다. - 평택시史
원정7리 호암마을회관이 오른쪽 뒤에 있다. 호암길을 따라 원정7리 마을회관 앞을 통과한다.
왼쪽의 파넨슐라타운을 거쳐 오른쪽 부일상회 앞을 지나 호암길을 계속 걸어간다.
오른쪽은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책담인 듯. 호암길을 따라 평온한 호암마을을 지난다.
호암마을을 지나와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호암길39 주택 앞으로 이어간다.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85-3(호암길 58) 지역에 수도사(修道寺)가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수도사에 진입한다.
수도사에는 일주문이 없으며 앞쪽에 사천왕 석상이 있다.
원정7리 마을 안에 있는 수도사는 신라 852년(문성왕 1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절로 알려졌다. 661년 원효가 의상과 함께 도당 유학을 가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견성오도했다는 장소로 알려졌다. 현재의 사찰은 1960년 영석스님이 본래의 절터에서 벗어난 지역에 다시 지은 것이며, 근래에는 주지 적문스님의 사찰음식과 템플스테이로 유명해졌다. - 평택시史
수도사 입구에 수도사 종합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5번 원효대사깨달음체험관 앞을 거쳐 언덕 왼쪽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수도사 종무소, 왼쪽에 초가집 장독대와 사슴 조형물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 건물은 명부전, 오른쪽 건물은 사찰음식체험관이다.
수도사 중창불사를 위하여 시주금를 모금하고 있다.
수도사 중창불사를 위하여 시주금를 모금하고 있는 안내소에 대한불교조계종 수도사 연혁이 붙어 있다. 2016년 기록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경기도 전통사찰 제28호로 지정된 사찰로, 852년(신라 문성왕 14) 염거(廉巨)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661년(문무왕 1) 원효(元曉)가 해골 물을 마시고 득도한 곳이므로 염거가 창건하기 전에도 작은 암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가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중 이 근처 바위굴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원효는 밤에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어 보니 바가지에 물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시원하게 마셨다. 그러나 다음날 일어나 물을 마시던 바가지가 해골인 것을 보고는 구토를 하고 말았다. 이에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에 있음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였다.
창건 이후 사세가 크게 번창하였으나 도적이 들끓어 노략질이 심하고 승려까지 납치하는 일이 발생하여 절이 비게 되었으며, 산사태까지 나서 폐사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곧 복원하였고, 1911년 불에 타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60년 영석(永錫)이 중창하였다. 1965년부터 정암(靜庵)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보전과 산신각·삼성각·요사채 등이 있고 대웅전 북쪽에 정토선원이 있다. 유물로는 염거의 부도로 추정되는 사리탑이 전하며, 절 주위에는 탑재와 석물이 흩어져 있다. 2003년 8월에 수도사에 부임한 적문성인 스님의 원력으로 명부전, 템플관, 33관음전을 중창불사하였고, 2004년 정부지원으로 '전통사찰음식학습체험관'이 건립되어 전통사찰음식으로 유명하다. 현재 2016년에는 '원효대사 오도체험관' 불사가 진행중에 있으며 내년에는 '요사채 신축, 천불전, 삼성각, 사찰음식박물관' 불사가 계속 예정되어 있다.
해골 물을 마시고 원효가 깨달은 내용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다. 원효가 깨달은 내용의 원문을 알아 본다.
이때 원효께서 깨달은 내용이 바로 '일체유심조'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약간 다르다. 이 역시 큰 뜻으로 보면 같은 의미이지만, 원문을 읽고 나면 원효스님이 왜 유학을 포기했는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원효스님은 하룻밤을 더 묵으면서 전날밤 잠을 잘 잤는데 이날 밤에는 흉몽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았다고 한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생겨나면 각각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심멸고감분불이(心滅則龕墳不二) 마음을 멸하면 토굴과 무덤도 둘이 아니네.
삼계유심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 세계는 오직 마음에 딸린 것이며, 현상은 인식에 딸린 것이니
심외무법호용별구(心外無法胡用別求)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데, 어디서 무엇을 따로 구하랴.
-출처 : 중부일보 2021.10.11. 주수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에 들어갈 여유가 없어 그 입구만을 살피고 통과한다.
수도사는 원효대사의 깨달음을 기리고자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대사께서 의상대사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던 중 수도사 부근 토굴에서 해골을 바가지로 잘못 알고 물을 드시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 깨달음을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다.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을 더욱 심화할 수 있는 템플라이프, 템플스테이와 사찰음식 학습관을 운영하고 있다. - 두루누비
언덕으로 오른다. 수도사 둘레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이어간다.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당항성(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는 도중에 토굴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원효는 밤에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어 보니 바가지에 물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시원하게 마셨다. 그러나 다음날 일어나 물을 마시던 바가지가 해골인 것을 보고는 구토를 하고 말았다.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무덤 안의 해골 물임을 알고, "三界唯心(삼계유심) 이 세상 모든 현상은 마음에서 일어나며, 萬法唯識(만법유식)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心外無法(심외무법)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胡用別求(호용별구) 어찌 따로 법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에 있음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였다.
원효대사 깨달음 체험관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와 지나온 수도사와 아래쪽 남양호를 내려본다.
수도사 언덕길을 따라 동쪽 방향으로 내려간다.
수도사 언덕으로 올라와 왼쪽으로 꺾어 언덕길을 내려왔다. 수도사 둘레길은 위쪽에 있다.
오른쪽 숲으로 진입하면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조망 울타리가 길게 이어진다.
길게 이어지는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숲길을 지나다가 원정5리 마을로 내려간다.
길게 이어지던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오다가 숲길에서 내려와 원정5리 마을로 향한다.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숲길을 걸어오다가 오른쪽 길로 내려왔다.
포승향남로 537번길을 따라 아담한 주택 앞을 지나간다. 오른쪽은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철조망 울타리이다.
운송업체 (주)한국물류SKK와 산업용품 업체 광명테크를 지나 대형자동차부품점과 그 앞 원룸·투룸을 지나간다.
포승향남로 537번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포승향남로 진입로를 따라간다. 오른쪽 건물은 수원국토관리사무소이다.
왼쪽에 원정5리 버스정류소가 있다. 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원정6리를 지나 원정7리 마을 입구로 이어진다.
포승향남로 537번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포승향남로 진입로를 따라오고 있다. (주)부성산업 앞쪽에 원정5리 버스정류소가 보이며, 오른쪽에 수원국토관리사무소 건물이 있다. 왼쪽 맨 뒤에 괴태산 줄기가 가늠된다.
왼쪽에 국도 제77호선 포승향남로가 포승과 아산방조제 방향으로 달린다. 서해랑길은 앞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중앙에 보이는 탱크로리 전문 업체 명진특장(주) 건물 앞쪽으로 이어간다. 왼쪽 뒤의 마을은 원정4리 쌍용마을이다.
명진특장(주) 건물 오른쪽 건물에 공장매각 알림막이 붙어 있다. 이 두 건물 뒤쪽은 포승읍 원정5리 일대이다.
중앙 뒤 봉화재 자락의 수도사를 거쳐 왼쪽 뒤 구릉에서 내려와 앞쪽 이레자원 고물상 뒤 포승향남로 537번길을 따라왔다.
포승향남로 남쪽 보도를 따라 걸어오고 있다. 왼쪽 뒤의 봉수대가 있었던 봉화재 자락에 수도사가 있으며, 봉화재 뒤쪽에는 아산국가산업단지 경기원정지구와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중앙 맨 뒤 산자락에 평택LNG기지가 있다.
포승향남로 남쪽 보도를 따라가다가 바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포승향남로 지선을 따라간다.
포승향남로 간선 남쪽 보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포승향남로 지선을 따라간다. 탱크로리 전문업체 명진특장(주) 건물은 오른쪽에, 선박수리 업체 범해토탈 서비스 건물은 왼쪽에, 그 사이의 포승향남로 지선을 따라가다가 앞쪽에서 왼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포승향남로 지선을 따라와서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계속 포승향남로 지선을 따라간다. 뒤쪽의 아파트 건물들이 솟아 있는 곳은 원정5리 지역, 맨 왼쪽 언덕 왼쪽은 원정4리 지역이다. 1970년대 남양만이 간척되고 당두염전·화성농장들이 옥토로 바뀌면서 원정리 마을 규모가 커졌으며, 원정4리·5리 마을도 간척사업 때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한다.
평택시 포승읍 원정5리 산돈원안들이 드넓게 펼쳐지고 언덕에는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아직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에는 트랙터로 써레질을 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산돈원안들 왼쪽 농로를 따라 왼쪽 뒤 언덕으로 올라간다. 목적지인 평택항마린항센터 앞까지는 아직도 7km가 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