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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잘도 뇌까리지만 정작 본인은
니느웨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들의 구원을 바라보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합니다.
말로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기에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다고는 합니다(욘4:2)
그러나 니느웨가 악에서 돌이켜 구원을 받는 광경을 매우 싫어하고 성질을 냅니다((욘4:1)
누구와 비슷하지요? 지금의 기독교가 그러지 않습니까? 자신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랑에 부요하시고 노하기는 더디하시지만 남에게는 가차 없는 요나들이 많습니다.
그건 성경말씀을 현 세상의 교육방법으로 가르치면 사람이 변할 거라는
다원주의의 사상이 교회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와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게 입 맞추지
않는 한 아담 안에 태어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되기는 만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곳곳에 요나 목사, 요나 장로, 요나 권사, 요나 집사, 아니 전 세계에
요나 선교사들이 퍼져 나가 있습니다. 그건 한국교회가 요나 양성소이기 때문입니다.
Q. 왜 유대인의 할례가 무효인가요?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 할례가 되느니라.”(롬2:25)
A. 바울은 너희가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는데
할례를 받았으면 그로 말미암아 율법을 행하는 효과가 나야 그게 참 할례이지 않느냐?
육체만 잘라 버리는 것이 무슨 할례냐 하고 따지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할례나 무 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지은 자 뿐입니다(갈6:15)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 안에 태어난 옛 사람은 잘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재창조가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참 할례입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이며 육의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따르는 십자가의 도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롬2:26)
바울은 이를 염두에 두고 유대인의 할례를 묵사발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 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을 자르던 붙이던 그것으로는 아담 안에서 허물과 죄로 태어난 인간들이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으로 행하므로 말씀이 적용되는 일은 없습니다.
또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를 네가 믿느냐?(요11:25) 물으십니다.
주님이 왜 부활입니까? 왜 그 다음에 생명입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금 나의 생명이요 나중에 나의 부활하면 되지 안 그래요?
주님이 부활과 생명이 되셔야 할 이유는 모든 인간들이
아담 안에서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엡2:1) 이를 동의하십니까?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 분이 나의 부활이 되셔야만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 분이 생명이 되셔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현재 실존하시는 '부활과 생명’이십니다.
지구가 두 쪽이 나도 우리가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는 현재 부활과 생명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면 내가 아담 안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부활입니다.
또 그 분이 생명이기 때문에 산 자에게는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바로 지금 현재 우리들에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었다, 그리고 장차 생명일 것이다가 아닙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시므로 언제나 현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실존이고, 언제나 현재입니다.
앞으로 될 일도 그 분은 항상 현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미 될 것을 작정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된 것도 현재적으로 말씀하시고,
될 것도 현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로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현재형으로 항상 살아계십니다.
이미 되어져 있고, 또 장차 될 것을 '계시니라’로 말씀하십니다.
요10장10절에도 “인자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
따라서 영생을 시간의 길이로만 보지 마세요. 영생 안에 구원의 풍성함이 다 있습니다.
영생 안에 충만 정복 다스림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 영생이란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는데 까집니다(벧전1:9)
사람들이 이 말을 예수를 믿다 보면 맨 나중에 우리 영혼이 천국 간다 하고 말아요.
우리가 아는 히브리서로 말하자면 믿음으로 문에 들어갔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믿음으로 진리 안에 들어갔습니다.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생명으로 아빠 아버지를 부르며 나아갑니다.
믿음으로 어디까지 갑니까? 아버지께 갑니다. 아버지가 없는 천국 보았습니까?
신앙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의 결국(테로스)은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란 책으로 우리에게 소개 된 앤드류 머리는
하나님의 모든 복은 영생 안에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리는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라고 말년에 피력했습니다.
따라서 제발 영생을 시간의 길이로만 보지 마세요.
영생 안에 아버지 앞에 갈 수 있는 사랑의 높이도 있어요.
한 없이 퍼져 나가는 넓이도 있습니다. 영생 안에 다 있어요(롬6:23)
사과 씨 하나 안에 사과나무가 있듯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씨로서 영생의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우리에게 임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영생은 믿음의 기본이며 전부입니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본을 가지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해요. 그 기본이 엄청나게 커져요.
태초(아르케)가 바로 기본입니다. 모든 만물과 함께 인간의 모태입니다.
태초는 모든 만물의 자궁입니다. 그 태초 안에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라 들어간 결국이
그 기본인 겁니다. 그래서 신앙은 기본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영생을 약화시키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가 월급으로 주는 것은 사망인데...
교회는 복음을 전하여 영생을 나누어 주는 생명의 비즈니스를 하는 곳인데
쓸데없는 일을 마구 벌여 사람을 몰아넣어 죽음의 비즈니스를 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계속해서 사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6:23)
이 영생이 보통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 같이
그 배에서 생수에 강이 흘러나리라(요7:38)하십니다. 현재시제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약화시키지 마십시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자랑입니다.
대단히 중요해요. 유대인의 자존심이지요. 유대교로 개종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바울은 할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그 당시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할례를 묵사발로 만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겁니다.
유대인에게 할례하면 최고의 의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유대인의 할례를 뭉개 버리고 말아요. 바로 이겁니다.
우리에게 침례니 세례니 따지는 것, 이것 다 웃기는 얘깁니다.
세례는 한마디로 말하면 그 분의 사랑이 너무 크고 그 분이 너무 위대하시기에
그 분이 같이 죽자 할 때 군말 없이 죽겠습니다 하고 따르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내가 그 분을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죄 사함 받았다
이런 정도가 세례의 전체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러 오셔서 나를 보고 같이 가자고 하시네요
그러면 죽음이란 강을 통과해야 하는데, 주님이 죽는 곳에 나도 죽고,
주님이 사는 곳에 나도 같이 살고 주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죽는 일
외에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다는 룻과 같은 각오가 바로 세례 받는 자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라고 합니다.
과연 자기 무덤이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순장이 된 믿음이 있느냐?
그 무덤 뒤에 비로소 말끔한 죄 사함이 오고 성령이 선물로 임하십니다.(행2:38)
탕자의 이야깁니다(눅15장) 분깃을 들고 나갔다가 돼지하고 먹거리를 두고
다투다가 이제 나의 분깃을 완전히 포기하고 아들이 아니라도 좋으니
먹여만 주세요 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얘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이라고 하고 받아들입니다(눅15:24)
그러나 집 안에 있는 아들은 아들이면서도 염소 한 마리 맘대로 못 잡아먹어요.
지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못 만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거하나니 우리가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16)
하나님 아버지는 바로 나의 아빠다 이 말입니다.
아들의 특권을 가졌는데 왜 염소새끼 한 마리 못 잡아먹어요.
자기를 종으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들인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다보니 사도바울이 그들의 육체의 할례를 묵사발 만들고 있습니다.
Q. 무 할례자가 율법을 이루는 방법과 결과는 무엇입니까?
“또한 본래 무 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롬2:27)
A. 이방인이 새 언약을 받으면 율법이 이루어져 유대인을 판단하게 됩니다.
본래 무 할례자라는 말은 자연적인 무 할례자를 말합니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모시므로
마음의 할례를 받는 새 언약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의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새 언약은 내 안의 법이 되고 내 안의 생각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순종하여 어디든지 어린양을 따르는 양들이 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면 목이 뻣뻣하고 귀가 둔해 입이 벙어리가 됩니다.
귀머거리가 듣지 못하므로 벙어리가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플라스틱 장미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화단에 있는 채송화 한 송이만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는데 나는 마음의 할례를
자랑하겠다 하고 할례를 목숨같이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대드는 겁니다.
그래서“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말씀합니다.
현재 기독교를 두고 말하자면 세례 받았다고 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롬8:9)
결국 행함으로 연결되지 않는 믿음 그 자체는 생명 없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내적인 역사가 없기 때문에 밖으로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이면적 유대인은 속사람 곧 마음속에 숨은 사람은 새 사람입니다.
성경은 겉 사람과 속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후4:16) 고 말씀합니다. 속사람이든 겉 사람이든
우리 안에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세상의 말로 인간의 정신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가 아닙니다. 성경이 육이라고 하는 것은 겉에 보이는
이 몸이 아니고 옛사람 곧 아담의 타락한 형상을 받은 옛 사람을 말합니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종이에 기록이 된 족보가 참 아브라함의 족보가 아니라,
유다 지파로 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령에 새겨진 족보가 진정한 족보입니다.
바로 생명책에 그 이름이 녹명된 거지요. 흰 돌 위에 우리 이름을 기록했다 이 말입니다.
흰 돌, 빛나는 돌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로 인해 주님의 인정하심과 칭찬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8장이나 히브리서 10장, 또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을
확실히 이해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할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그 분이 이루시는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의문의 직분이 아니라 영의 직분으로서
우리가 능히 율법을 완성하고 유대인이라고 일컫는 자들이나 지식인이라고 일컫는 자들,
어느 누구든지 우리가 그들을 능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차원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항상 찬양을 드려야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