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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지기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의 추모 글
"대학생 때 함께 불렀던 '친구'를
작은 목소리로 혼자 따라 부르다
차마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김영세 대표(오른쪽)는 고 김민기 학전 대표와 함께 서울대 재학 시절 ‘도비두’라는 팀으로 노래 ‘친구’를 불렀다. /김영세 제공우리 모두의 ‘친구’ 김민기를 보내며…..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오
저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친구’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민기와 내가 대학생때 함께 불렀던 노래입니다. 50년이 흘러간 오늘, 친구 김민기를 떠나 보내며 유튜브의 ‘도비두’ 의 동영상에 올라온 나와 민기의 듀엣송 ‘친구’ 를 다시 들어 봤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혼자 따라 부르다 차마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민기가 만든곡의 가사가 ‘눈앞에 보이는 친구의 모습…’으로 이어 나갈 때 나는 50년전 우리 둘의 모습을 떠올려 봤습니다. ‘저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이라는 가사를 노래하는 민기의 음성은 약간 떨리듯 들려와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도비두의 ‘친구’라는 음반은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리고 민기에게는 나와 듀엣으로 만든 유일한 음반입니다.
내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민기보다 일년 늦게 입학했을 때 우리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났고 200명도 안 되지만, 전교생이 보는 무대에서 즉흥적인 듀엣송들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학생들은 수근 거리며 우리들을 ‘도비두’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서울미대 여학생들이 우리들에게 지어준 이름이었죠. ‘도깨비 두마리’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들은 도깨비(?) 같은 대학생활을 했고 김민기의 창작의 일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오늘 참 힘든날을 맞이 했습니다. 이제는 ‘친구’의 대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떠나는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를 이틀째 찾다가 “민기야, 너는 이제 하늘나라에서 마음것 꿈을 이어가 보렴….” 이라는 말을 해주려 합니다.
평생 창작을 이어온 친구에게 어떤 다른 말도 생각 나지 않습니다. 김민기는 열정속에서 평생 창작생활을 했고 땅위에서의 인생은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우리나라 전역에 매우 짙게 깔려있습니다. 사람들은 김민기가 만든 음악들을 기억할 것이며 그가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즐길 것입니다. 김민기는 천재적 아티스트로 태어나서, 아낌없이 창작하면서, 행복한 삶을 마무리 했습니다. 좀 더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채로…..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 평생 이루어온 자신의 작품’을 남긴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 사진 제공. 학전20세 전후에 작곡과 작사를 했던 ‘친구’ 와 ‘아침이슬’ 은 온 국민의 가슴을 흔들었고, 30년전 개척한 ‘학전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대형 연기자들을 배출했죠. 그리고 나에게는 김민기가 그림에도 천재적인 재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된 계기가 있습니다.
내가 민기를 처음 만났을때 우리 둘은 경기고등학교 미술반 학생들이었고, 몇년후에는 서울대학 미술대학에서 다시 만났는데 당시 민기는 그림의 세계에도 미쳐있던것 같았습니다. 민기의 대학시절 그림이 50년이 흘러간 지금도 시대를 초월한 작품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것 같습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 작품은 민기가 내 어머니에게 선물했다고 말했던 작품입니다.
고(故) 김민기가 대학시절에 직접 그려서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에게 줬던 그림(윗쪽)이 김 대표의 미국 캘리포니아 팰로알토 사옥에 걸려있다. / 사진제공. 김영세 대표도비두로 활동하던 대학시절 민기와 나는 함께 우리집에서 듀엣곡들을 만들고 연습하면서 많은 날들을 보냈었는데, ‘늘 밤참을 준비해 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돌봐주신 나의 어머니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자신의 소중한 그림을 선물했었다’고 말할 때 민기의 진심 어린 마음을 보면서 울컥 했던 기억은 잊혀지지 않네요.
서울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의 발인식이 엄수된 24일 오전 고인의 영정이 옛 학전이 자리한 서울 종로구 아르코꿈밭극장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대학을 마친후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민기는 한국에서 엄청난 양의 음악을 창작 했습니다. 김민기의 음악은 그의 가슴에서 튀어 나왔죠. 그리고 가사 하나 하나는 그가 세상에 알리려 했던 ‘절규’와 같았습니다. 그를 대단한 ‘시인’이라고 평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혹자들은 그를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권의 리더’라고 평가 하기도 합니다.
22일 서울 종로구 학림에서 열린 '가수 김민기 별세 관련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운영해온 김민기 대표의 대표작 '지하철 1호선' 포스터 / 사진. ⓒ연합뉴스그러나 나는 김민기를 ‘저항권’에 가둬두지 않기를 호소합니다. 김민기는 천재적 아티스트이고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순박한 사람입니다. 국민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그의 뜻과는 다른 각도로 여론을 일으킨 것은 안타까운 일 입니다. 김민기는 창작의 예술가이면서 박수갈채 보다는, 그의 작품을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났어도 그가 남긴 창작물들의 메아리는 멈추지 않을것 입니다. 그는 하늘이 우리나라에 내린 보물입니다. 내가 추모의 글을 남기는 이유는 김민기의 진면모를 알리므로서 우리나라 후세의 또 다른 창작자들을 배출하는 계기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2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 꿈밭극장(옛 학전)에서 열린 고 김민기의 노제에서 고인의 영정이 놓여져 있다. / 사진출처. 뉴스1한 마디로 김민기를 표현하면 ‘김민기는 천재적 예술가로 태어나서 세상과의 타협 보다는 자신의 진심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창작에 인생의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아티스트,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에 뿌리를 내린 소중한 선구자’ 입니다.
이제 나는 나의 ‘친구’를 보내며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침이슬처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라는 기막힌 한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낸 스무살 때의 당신의 한 마디는 후세의 온 국민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답니다. 이제 당신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있고, 당신에게는 더 이상 서러움도 없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땅에서와 같이 마음껏 창작을 계속하면서 영면하십시오"
2024년 7월 24일 김영세 Dream!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