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 지파와 멜기세덱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참으로 영적으로 깊은 이해가 아니고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멜기세덱 반차와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인가?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편에 다윗이 언급한 다음에 히브리서에 등장합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고는 사라졌는데 이 멜기세덱은 어디 있는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라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이건 듀스라는 뜻입니다.
듀스는 한 번씩 기회를 더 주는 것을 말합니다. 한 번씩 성경에 떠 올리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걸 증거하는 겁니다.
우리가 할 말, 곧 ‘호 로고스’를 가지고 있으나 말하기 참 곤란하다고 말씀합니다.
왜 사람들이 듣기에 둔하므로... 아브라함에게 한 번 나타시고 사라진 다음에 계시를 가진
다윗이 언급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던 멜기세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계시록 2,3장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이렇게 나옵니다. 귀 있는 자만 멜기세덱 반차에 대한 제사장의 계통을 이해하게 됩니다.
12절 “때가 오래되었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처지이니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지금 때가 어느 때 인줄 아느냐 하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스승입니다.
그리스도가 스승인 것처럼 성령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됐다면
그 분과 함께 부부교사(?)가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도 진리에
대한 스승이 되는 것은 마땅하지 않느냐? 그런데 젖만 먹고 어린아이처럼 논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단단한 식물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기독교가 말씀의 초보를 배우고 있습니다. 목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라는 말을 하고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자 하는 유치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는가 하고 또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물질을 많이 쌓으면 영혼까지 편안해 질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실정입니다.
13절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어린 아이들은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진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고린도교회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젖만 먹는 육체에 속한 어린아이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 믿음이 없습니다.
그로 인해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이 되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씨로 임하셔서 형체가 되고 영광이 되므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진화되는 과정을 모릅니다. 어쩜 지금의 기독교가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를 영접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모르니
믿음에 의해 나타나시는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의 역사가 없어 은사나 표적을 보는
성령의 나타나심만 좇을 뿐 하나님의 은사인 영생이 그 속에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그로인해 기독교의 표지인 말씀과 세례와 성찬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비밀이 없어 진리를 순종하므로 영혼이 깨끗하게 되어 뜨겁게 사랑하는
신앙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나는 표적을 좇는 신앙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리의 지식을 배워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화합이 중요합니다.
14절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신앙에 있어서 반드시 지각이 사용되어야 됩니다.
영으로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는 이들이 적잖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영을
따라 우리의 지정의가 집중에 되어야만 육신도 영을 좇아 성령충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각이 있어야만 생각이 분류가 됩니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의 경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묵상과 기도로 말씀이 소화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영의 직관력에 영향력을 줘야 됩니다. 직관력에 영향을 준 것이
내 양심에 들어와야 됩니다. 이걸 비로소 거듭난 신앙양심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양심으로 분변하는 겁니다. 직관은 양심에 영향을 주는 겁니다. 물론 직관으로 주님과
교제도 합니다만 직관이 양심에 영향을 주어 선이신 하나님과 악인 인간의 관점을
분변하게 되는 겁니다. 지각으로 인해 영과 육, 생명과 사망, 빛과 어둠을 분변합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을 성경은 장성한 자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