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에서 바라보는 임진강
임진나루 바로 위쪽에 화석정(花石亭)이 있다. 화석정이 자리 잡은 파주시 파평면 율곡 3리는 조선 중기의 큰 학자였던 율곡 이이가 살았던 곳으로, 그의 호 율곡도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 지명에서 따왔다. 이이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 밤골마을에서 보냈고, 나이가 들어 벼슬길에 오른 뒤에도 황해도 해주의 경치 좋은 석담(石潭)과 함께 이곳을 즐겨 찾아 생각을 정리하였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었다. 율곡 마을 북쪽에 있는 장단 쪽을 바라보며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에 세워진 화석정은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강 건너로 장단평야가 넓게 펼쳐져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학자 야은 길재가 살던 곳으로, 이율곡의 6대조인 이명신이 물려받아 정자를 지은 후 주위에 온갖 괴석과 화초를 심고서 화석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이는 8세에 화석정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늦으니
시인의 정회 다할 길 없어라.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과 연하여 푸른데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에 붉구나.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뱉고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변방의 저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아득한 울음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끊어져버리네.
화석정임진나루 바로 위쪽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에 세워진 화석정은 강 건너로 장단평야가 넓게 펼쳐져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던 정자이다.
화석정에는 이이와 선조에 얽힌 재미난 일화가 내려온다. 율곡은 살아 있을 때 틈나는 대로 화석정 기둥에 기름을 발라두게 하였다. 율곡이 죽고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급하게 서울을 빠져나와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주위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임진강가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강 전체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알고 보니 선조의 피난길을 수행하던 이항복이 기름을 먹인 이 정자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 불빛의 도움을 받아 선조는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다고 한다. 이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까마득히 펼쳐진 하늘 가운데 한양의 삼각산과 송도의 오관산이 머리카락만큼 조금 드러나는데 그 경치가 그토록 빼어났다고 한다. 율곡과 가까웠던 정철이 이곳을 스쳐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산이 서로 등졌지만 맥은 본래 한가지요,
물이 따로 흐르지만 근원은 하나로세.
화석이라 옛 정자에 사람은 아니 뵈니
석양이라 돌아가는 길 혼이 거듭 녹아나네.
임진강과 북한 © 유철상문수산은 김포시 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김포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임진강 하류 너머로 북한 땅이 보인다.
한편 이곳에 내려와 병을 치료하고 있던 이이를 찾아온 사람이 허균의 형인 허봉이었다. 1574년 5월 열사흘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들러서 이율곡을 만난 상황이 「조천기」에 실려 있다.
이른 아침에 파주를 떠나서 율곡에 다다라서 이숙헌(李叔獻)을 방문하였다. 율곡은 파주 서쪽 16~17리쯤에 있는데, 숙헌은 병으로 아직 일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조카를 시켜서 나를 맞이하여 서실(書室)에 들어가 기다리게 했다. 오래 있다가 율곡이 나왔는데, 그의 안색을 보니 전날과는 약간 달랐고, 매우 피로하여 보였다. 그와 마주 앉아서 먼저 시사(時事)에 미쳐 한탄을 하였고, 다음으로는 이(理)와 기(氣)는 한 근원이라는 것,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
해가 이미 높아졌으므로 나는 묘소에 참배하기가 박두하여 숙헌과 작별을 고하고 그 뒤 고개를 넘어서 이른바 화석정이라는 데를 올라갔다. 그 집은 새로 지었는데, 아직 칸막이를 하지 않았다. 임진강이 띠 같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서쪽 경계로는 여러 산을 손짓하는데, 비록 넓게 트인 것 같으나 형세는 지나치게 높고 가파르기 때문에 오래 있기에는 견디기 어려웠다.
대체로 숙헌이 이곳에 온 것은 본래 전원(田園)을 넓게 열고 종족(宗族)을 모두 모아서 같이 살고자 생각했던 것인데, 일은 뜻과 같지 않았고, 집일(家業)이 궁핍하여서 미음죽도 잇지를 못하였으니, 참으로 연민할 만하였다. 지금 같은 때에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에게 궁벽한 산곡 속에서 먹는 것조차 가난하게 하였으니, 세도는 알만하였다.
허봉은 재기발랄했던 사람이자 타고난 풍류객으로서 술을 좋아했다. 3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동서양당의 당쟁에 뛰어들어 세상의 시비(是非)를 받았고, 그 또한 율곡을 배척하였다가 갑산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던 그때의 상황이 『선조실록(宣祖實錄)』 권17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계미년(선조 16)에 북방에 이탕개(尼湯介)의 사변이 있었는데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사세가 급박하여 임금에게 아뢰지도 않은 채 말을 바치게 하고 신역을 면제시켰었으며, 임금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가다가 갑자기 현기증이 생겨 내병조(內兵曹)에서 지체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송응개ㆍ박근원ㆍ허봉 세 사람이 이 일을 가지고 ‘일을 제멋대로 하고 주상을 무시하였다’고 하여 탄핵하다가 각각 회령ㆍ갑산ㆍ강계로 유배당하였다. 이 사건을 계미변란(癸未變亂) 또는 계미당사(癸未黨事)라 하고 이 세 사람을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고 한다.
권력은 씨앗과 같은 것이라서 형제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 그토록 서로를 경외(敬畏)했던 사람들도 정치적 이해 속에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선 중기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자운서원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자운산에는 율곡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이 있다. 1615년(광해군 7) 창건되어 1650년 자운(紫雲)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자운산에는 율곡 이이와 그의 부모인 이원수, 신사임당의 묘소가 있으며, 바로 근처에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수침과 그의 아들 성혼을 모신 파산서원이 있다.
신사임당묘자운서원의 좌우 능선에는 이이와 그의 부모인 이원수,
신사임당의 묘소가 있다. 봉분 오른쪽의 묘비는 후대에 새로 세운 것이다.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