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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쁘신 하나님, 미쁘신 말씀
▪디모데후서 2:8-13▪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8-13)
설교작성 노트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순교 직전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이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주었으며 또 말씀을 기록하여 교회들을 격려하였다.
이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정작 그는 순교를 눈앞에 두고 무슨 말씀을 묵상했으며 순교 형장으로 걸어가면서 무슨 말씀을 붙잡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로 하여금 장엄한 순교를 하도록 지탱시켜 준 힘은 어느 말씀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말씀임에 분명한 것이다.
디모데 후서는 바울 사도가 순교 직전에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신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4:6)고 순교가 목전에 다다랐음을 말합니다.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 바울은 착고에 채인 몸으로 로마의 어느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하고 이제까지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정리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복음 전파에 참여하였던 자들 중에는 완주(完走)하지 못하고 그의 곁을 떠난 자들도 있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1:15)합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4:16)고 말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요청합니다. 편지로는 다 말할 수 없는 마지막 권면을 주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당당한 순교의 모습을 제자의 망막에 사진 박아 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위대한 사도 바울의 만년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외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때 바울 사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잠수 당하는 순간에 그는 무슨 말씀을 붙잡고 있었을까?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을까? 그로 하여금 장엄한 순교를 하도록 지탱시켜 준 힘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딤후 3:1)를 살아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깨달음과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인가 형제가 맞이하게 될 임종 머리에서도 큰 안위가 될 것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이 점에 대하여 본문은 빛을 비춰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11절에서 바울 사도는 “미쁘다 이 말이여”하고 감격을 발하고 있습니다.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신실하다, 확신하다,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미쁘다는 말이 13절에서도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하고 더욱 강조되어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미쁘다 이 말이요”하고 바울로 하여금 감격을 폭발하게 한 미쁘신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11-12)고 사도는 고백하며 확신합니다.
사도가 처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가장 적합한 말씀이 그에게 주어졌으며 사도는 이 “미쁘신 말씀”을 붙잡고 의지하고 확신하고 고백하면서 잠수의 현장으로 걸어 나갔을 것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의 마지막 고백이요, 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말씀을 좀 더 음미해 보아야만 합니다. 원문에는 “미쁘다 이 말이여”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본문이 앞에 문장과 연결된 말씀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앞에 문장을 더듬어보면 8절에서 “나의 복음”이라는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나의 복음이란 바울 자신이 창안해 낸 복음이란 뜻이 아니고 이를 증언하는데 목숨을 걸었던 “내가 전한 복음”(갈 1:11)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란 다윗의 씨로 오셔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8)였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9)고 진술합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이 “복음을 인하여” 매인바 되었으며 고난을 받고 있으며 순교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사도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였다면 이 모든 고난이 그에게 닥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10)하기 위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그로 인하여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과 영광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증언하였으나 지금은 자신이 증언한 “나의 복음”을 “미쁘다 이 말이여”하고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고 확신하며 의지하고 붙잡고 순교에 임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 딤후 2:11-13 -
그러므로 바울 서신의 많은 말씀 중에 이는 사도 바울의 옥중고백이요 순교 고백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고백하고 믿고 붙잡고 순교 당하였던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이 점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그리고 엄숙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 하니라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1-12)고 자신의 사도 됨을 옹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순교를 목전에 둔 바울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붙잡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형제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에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게 해주고 소망을 주며 견고케 붙들어줄 수 있는 것도 표적이 아닙니다. 기사와 이적이 아닙니다. 능력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붙잡고 의지하고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미쁘신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가 순교 직전에 최종적으로 확신을 주고 붙잡고 있는 것은 “미쁘다 이 말이여”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바울의 손을 통하여 행하던 표적도 기사도 지나갔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고 “미쁘신 말씀”의 불변성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미쁘신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천지가 변하여도 “미쁘다 이 말이여”입니다. 이 말씀이 신앙의 마지막 근거요 보루요 권위입니다.
주는 일향 미쁘시니
사도는 순교를 목전에 두고 “주는 일향 미쁘시니”하고 하나님을 “미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일향 미쁘시다”는 말은 항상 미쁘시고 언제나 미쁘신 즉 신실하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이곳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3:3절에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는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합니다. 고린도후서 1:18절에서도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 증언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1:24)고 말씀합니다. 이루시리라는 말은 그 약속을 지켜 주시리라는 뜻입니다. 주는 일향 미쁘십니다.
미쁘신 말씀
미쁘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또한 “미쁘다 이 말이여”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 전 후서를 통해서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말을 5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딤전 1:15, 3:1, 4:9, 딤후 2:11, 2:13). 사도는 하나님을 미쁘신 분으로 그 분의 말씀을 미쁘신 말씀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12)고 확신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표적도 기사도 능력도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씀 한 것은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은 미쁘신 하나님과 미쁘신 말씀을 증언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미쁘다 이 말이여 하면서 첫째로 꼽는 것이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를 꼽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 적절한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죽임을 당한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미쁘신 하나님께서 자신도 살려주실 것을 확신하는 부활신앙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죽었으면”하고 만치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죽음 앞에 초연함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핵심이요, 결론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믿을 만하지 못한 반면 하나님은 “일향 미쁘시니”, 즉 언제나 믿을 만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만 “미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우선하는 것이 자신에 대해서 “미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보증하여 주신 것을 가리켜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히 6: 18)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신실하신가 하면 창세기 2:17절에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즉 죄 값은 사망이라고 선언하신 그 말씀에 충실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용서하시되 그냥 용서하시지를 못하시고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우리 대신 죽음을 당케 하시고야 우리를 용납하실 수가 있으셨던 그토록 “미쁘신 하나님, 미쁘신 이 말이여”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의 뜻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지 아니하신다면 사람에게 거짓을 하신 것 보다 우선하여 “자신을 부인”하신 것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바울은 이토록 “미쁘신 하나님과 미쁘신 말씀”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미쁘신 하나님과, 미쁘신 말씀”을 부인한다면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바울을 하나님께서 어찌 바울을 부인하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순교 마당에서 미쁘신 하나님과 미쁘신 말씀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최우선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미쁘심”을 위해서였습니다.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하고 아버지의 영광, 즉 미쁘심을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시기를 거절치 아니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하고 이 점을 거듭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주셨습니다(빌 2:9).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어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
- 공동번역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증언한 복음이 “미쁘신 말씀”이라는 점을 순교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증언했던 것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을 듣고 믿는 형제들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행 20:32)하고 떠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미쁘신 하나님과 그 분께서 약속하신 미쁘신 말씀을 붙잡읍시다. 환난과 고난과 죽음 앞에서는 표적도 기사와 이적도 능력도 축복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미쁘신 하나님, 미쁘신 말씀"을 붙잡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한 미쁘신 말씀만이 나의 반석입니다. 나의 요새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요. 최후의 보루입니다. 이것이 "미쁘신 하나님, 미쁘신 말씀"입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545장)
첫댓글 목사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