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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작은모임(young570519) 원문보기 글쓴이: 선월
6070년대의 고고와 트위스트춤을 회상하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얼마전에 제가 6070년대의 국민학교와 중,고교시절의 추억아린 사진과 글을 올렸더니 반응이 너무도
뜨거서 나자신도 놀랐습니다,
음정원 카페에서는 접속자 인원이 800명이 넘었으며 다른 카페도 300명이 넘는분이 접속을 해주셔서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사실 1960년대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억압되고 힘들었는데 유일한 탈출구는 모내기나 추수에 나가는
농활이 끝나고 오는길에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막걸리집에 가서 밤새도록 먹거나 소풍에는 야외전
축을 가지고 와서 알지도 못하는 팝송의 내용을 들으면서 와지나 와지나, 울리불리, 샹하이 트위스트
곡에 무조건 몸이 흔들리는대로 막춤인 고고나 트위스트를 추는 것이 당시의 고교생들의 유일한 낙이
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나팔바지나 7부 바지가 유행이였고 담배를 피지 못하면 범생 취급을 받았고 학생들
이 갈수있는 유일한 장소인 빵집에서 여학생들을 몰래 만났으며 한달에 한번은 극장에 단채로 관람하
며 영화의 클라이막스나 끝날때는 박수와 횟바람을 불었으며 졸업후에 동창들이 사관학교나 군대에
가면 송별화라는 미명하에 남녀 동창들이 모여서 안주는 라면땅이나 과자 뿌스라기를 멱으면서 밤새
도록 술먹고 토하고 말도 안되는 개똥철학으로 인생은 무엇인가?(What Is Life)를 외치면서 연신 건배
를 외치고는 일어나서 다시 고고춤을 추었던 기억이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50년이 지났으니 세월이
정말 빠르다
내 생각에 고고와 트의스트 춤은 60년대 중반에 태동하여 70년대말 까지 지속 되였다고 생각하는데
근거로는 군대에서도 장교와 사병을 막론하고 회식때는 술이 얼큰하면 당연히 고고 음악이 흘러나왔
으며 텔레비젼에서도 백댄서는 현란한 트위스트를 추었고 사회의 전분야에서도 고고와 트위스트는
어느 자리에서나 모두가 즐기는 놀이 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시절을 회상할수 있는 좋은 추억거리를 찿던중에 다른분이 올린 내용이 두편이 있어서 여기
에 올립니다, 지금은 칠순나이에 접어드신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때를 회상 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미
소가 흘러나올 것으로 생가괍니다,,,,
추신
아래의 두편의 작품은 다른 카페에서 퍼왔지만 글 내용이 너무 리얼하고
흥미진진하게 쓰셨기에 가능하시면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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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 학창시절에 야외전축에 흔들어대던 고고춤에 대한 추억
트위스트에 대한 그리운 추억
그옛날 우리들의 야유회에는야외전축과 상하이트위스트, 울리 불리,히피히피쉐잌등이수록된 LP레코드
가 필수품이었다.
야외전축과 레코드판은 항시 자칭 알란들론이라고 떠벌이던 정기모라고하는 친구의 몫이었다. 그는 친
구들이 아무리 핀잔을 주어도 자신의 얼굴이알란들론에 버금가는 미남이라며 우리들을 피곤하게 했다.
또한 그는 항상 자기가 야외전축과 판을 제공하므로회비의 면제를 주장했다. 그와의 논쟁이 귀찮기도
하려니와 몇푼 안되는
회비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럴때마다 장모라는 소금쟁이할배쯤 되는 짠
돌이 친구의 짜증섞인 반대논리에 밀렸다.
어차피 집에 있는 것을 가지고 오는데 친구지간에 그정도 희생도 못하냐는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반대하
다 보면 잘못 휘말리다간 파렴치한 친구가되기 십상이므로 대개는 그에게 뜻을 굽힌다.
그래서 "말도 안돼 임마!"라는 장모의 말은 언제나 우리들의 논쟁을종결시키는 일테면 판결문 같은 성격
을 지닌 강력한 뉴앙스를 지녔다.
그는(장모)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식사시간에 놀러 가면친구들이 보는(군침을 흘리며) 앞에
서도 혼자서 유유하게 그리고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식사를 하는 뱃장을 지녔다. 통상 빈말이라도식사
했느냐고 묻는데 일언반구 없다.친구들이 식사를 했어도 재미로 뺏어 먹으려 하면 육두문자가 오고가고
쟁탈전에 쌈박질이 난다.
돌아서서 먹기도 하고 도망도 다닌다. 그래도 안되면 밥그릇에 퉤하기도하는데 막무가내다. 그것도 뺏어
먹기 때문이다. 그렇게 먹는 것이 어찌나 맛있었던지.그의 모친이 아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보낸 따대
기를 살짝 푼 칼국수맛은지금도 혀끝에 아른거리는 것 같다. 그렇게 핏대에 쌍욕까지 거침없이 해대며쌈
박질을 하다보면 금새 우정에 금이 갈것 같았으나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우정이
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어쨌거나 어쩌다가 정이 사정이 있어 못 가는 날엔 우리중에 팝송을 끝내주게
부르는 김광모라는 친구가 전축을 대신했다. 정은 지가 가지 못하면전축을 빌려 줄 수도 있건만 그것만
은 죽었다 깨도 안된다고 했다.소주가 한순배 돌면 공춘 모라는 친구가 지흥에 겨워 학생모를 거꾸로 돌
리고시작한다. "어이 김광모선생!불러봐!"
"장장장- 장, 장장- 장, 자앙, 자앙, 자앙, 자,자, 장,자라, 장,장!"김광모군이 흥겹게 입으로 읊어대는 돈에
디의 상하이 트위스트의기타소리다. 거기에 맞추어 임하룡이 춤추듯이 공춘모군의 개다리춤이판을 주
도한다."장자라 장장장!"하고 상하이 트위스트가 끝나면쥐약먹은 개처럼 돌아 다니던 공춘모군은 혀를
반쯤 빼어 물고는축쳐져서 주저앉는다.
"아이고 죽겠다!"하며 퍼져서는그 다음곡 이 나오기를 기디린다.다음곡은 "울리 불리"다.
우노,더,완,뚜,뜨리,꽈뜨롱!"김회모군이 울리불리 첫부분을 소리쳐 외치면 김광모군의리드보컬소리와 공
춘모군의 반합딱까리를 이용한 드럼비트가 함께어우러져 멋진 하모니를 연출한다.
"해리 톨 매리!(Harry told Mary)어바러 쏭 쉬 쌩(about a song she sang)레쓰 나 비어 쎄븐(Let's not
be a seven)카몬 울리 조(Come on Wooly Joe)울리 불리---------(Wooly Bully)울리 불리, 울리 불리,
울리 불리-예~~ 와지나 와지(Yeh watch it now, watch it now)"이때 쯤이면, 우리들의 등산리더인 양풍
모군이 등장한다.그는 어려서부터 보이스카웃이었고 힘이 무식하리만큼 장사였다.교실에서 쉬는 시간
에 그와 작난이라도 몸싸움 한번한 친구들은 다시는작난을 하지않는다. 그야말로 작난이 아니었기때문
이었다.
무슨 짚단에 붙어 있는 벼이삭 털듯이 패대기쳐가지고는머리를 콘크리트 교실바닥에 사정없이 부닥트
린다. 죽는다고 소리쳐도아랑곳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항복 수단은 더 죽인다.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남성을 구성하는 세부분중 하나를 검어쥐고는점차 조여간다. 그리고는 속
삭인다. "터뜨려?"그의 팔씨름 실력은 전교 최고였고 손아귀 힘은 거대한찌께같았다.
여기에서 항복 안하면 아프기도 아프거니와 잘못하면 남성을잃기때문에 100프로 항복한다. 그런 그였지
만 등산이나 야유회를 갈때면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다.
등반장비는 물론 식사준비는 모두 그의 몫이다. 그의 춤은 리듬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너무 재미있어
웃다가 김회모군은 턱이 빠질 뻔도 했다.지금까지 TV에서 많은 스타들이 그옛날 우리들의 학창시절에
추었던 춤들을흉내내는 것들을 수없이 보았으나 양풍모군 같은 춤은 없었다.그의 춤을 누군가가 재연
하면 틀림없이 그것만 가지고도스타의 대열에 끼어들 것이다.
풍덕군의 춤과 광식군의 흥겨운 노래소리, 귀를 찟는 반합드럼비트,춘근군의 괴성,우리들의 손뼉소리---
가난과 공부, 틀에 밖힌 학교생활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는그당시 우리들의 유일한 수단이었다.이렇게
우리가 공부하기 싫을 때 자주 찾던곳(관악산기슭)에는서울대학교가 들어섰다.
우리중에 김광식군과 양풍덕군을 제외하고는모두가 시골 출신인 촌놈들이었다.출신분포를 살펴 보면 충
청도가 압도적으로많았다. 표지완군,정기봉군,김기홍군등이 충청도 출신이었는데충남 서산,홍성,당진이
그들 각자의 고향이었다.
그외에 김회동군이 경기 이천, 공춘근군이 경남 창녕 그리고 짠돌이장현덕군이 경북 예천 출신이었다. 우
리가 어떻게 해서 모이게되었는지 정확지 않다. 확실한 것은 정기봉군을 제외하고는우리 모두가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겠지만 1학년 일학기때는개별플레이나 다름 없었다. 탐색전이라고나 할까 처음에
는 주로짝지와 같이 다니다가 어느정도 서먹한 분위기가 없어져 갈 때 쯤이면점차 주위의 애들과 어울
리며 진정한 우정을 나눌 친구를 찾게 되는 것이다.우리도 그랬다. 우리들 각자가 1학기때에는 함께 만
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것이 2학기에 접어들면서 부터 점차 모이는 회수가 잦아져 갔다.우리를 모이게 만든 친구는 김광
식군이다. 우리 모두의 각자가 그를 만남으로해서 서로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들
모임의 일등공신인셈이다. 그는 호방한성격으로 누구나가 좋아하는 팔방미인형의 사나이였다.
호방한 성격이지만 감정도 풍부하여 음악,영화,소설등에 능통했고 특히 영화에는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와 결정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것은 어느 여름날오후였다. 쉬는 시간에 교실 뒷편에 몇몇 친구들이
모여 김광식군의 이야기를재미 있게 듣고 있었다. 영화이야기였다.그가 그날 들려 주던 영화 벤허에서의촬톤 헤스톤에 대한 연기평가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이야기를 아주 실감있게 잘했다. 마치 자기가 영화의 주인공인양 표정연기도 곁들이는가하면 어느
부분에 가서는 액션까지 흉내내어 우리를 영화속으로 몰고 갔다.
영화라면 사족을 못쓰던 내게 그의 그런 모습은 우정이라보다는 차라리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함께 거의 광적으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우리의 화제는 항시 영화로 시작되었고 영화로 끝이 났다.그당시 광식군은 종로 원서동에 살았고 난 마포
공덕동에 살고 있었다.우리학교는 마포 대흥동이었으므로 난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한편 광식군은 이대앞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는 학교까지 한 1km쯤을걸어 다녔다. 그런데 나를 만나고 부
터는 더 많은 시간 영화얘기를나누기 위해 함께 공덕동로타리까지 한 3km를 걸어가서는 거기서 종로가는
버스를 탔다. 그것도 아쉬워 통상 버스를 바로 타지 않고 한 열대쯤 보내고나서야 마지 못해 아쉬움을 뒤
로 한채 버스에 오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우정이라 해야 할지 애정이라해야 할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다.
어쩌다가 용돈이라도 좀 생기면 우리는 로타리근처 국화빵집으로 갔다.
그때 그 재미있는 영화 얘기와 함께 먹던 국화빵 맛 또한 지금도 혀끝에삼삼하다. 우리는 용돈이 넉넉지
않은 관계로 개봉관 영화는 잘 보지못하고 2류나 한꺼번에 2개씩하는 3류영화관을 즐겨 찾았다.
우리가 주로 애용하던 영화관은 국제극장 옆의 시네마 극장이었다.우리는 어떤때는 차비를 털어서 까지
도 영화구경을 다녔는데 요기는해야 하므로 마포에서 국화빵으로 배를 채우고 차비가 없어서 청계천7가
에 있는 청계극장까지 걸어서 간적도 있다.
이정도면 지금쯤 우리는 영화감독이나 영화평론가정도는 되어 있어야하는데 지난번에 "시네마 천국"이라
는 영화를 보니 우리정도 가지고는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광식군과 내가 어울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현덕군이 합류했다.그리고 또 얼마 되지 않아 우리의 주인공 표지완군이 팀에 들어 왔다.
얼마전에 유행했던 설운도씨의 "사랑의 트위스트"라는노래에도 상하이 트위스트가 등장한다."샹하이, 샹
하이, 샹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온동네를 주름 잡았던--"그래서 잘모르는 요즘 사람들은 샹하이 트위스트
가 춤의일종이 아닌가 생각하지 싶다.
샹하이 트위스트는 기타를 메인으로 하는 4인조밴드 벤처스(Ventures)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음악이 60년대 후반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트위스트춤에 반주음악으로 애용되기 시작하
면서 트위스트춤은물론이고 그당시 젊은이들의 춤문화를 상징할 정도로 크게 유행했다.원래 트위스트춤
은 처비체코라는 가수가 개발했다.그는 "The twist"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이춤을 추었는데독특한 그의 춤
과 함께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노래는 빌보드챠트에 2년동안 두번씩이나 10위권(1위, 3위) 내에오를 정도로 크게 히트했다. 그렇
지만 우리에게는 처비체코의 트위스트보다는 샹하이트위스트가 훨씬 유행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술취한
사람들비틀거리듯이 흔들어대는 트위스트춤의 스텝에 벤쳐스의 기타반주가기가 막히게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명 개다리춤이라고 하는 춤이 전형적인 트위스트춤인데우리중에 이춤의 선구자는 원래 표지완군이었
다.그는 어느날 갑자기 관악산 입구의 묘지터에서 중풍걸린 사람처럼다리를 꼬아가며 이춤을 추어 대어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표지완군의 개다리춤은 일단 오른쪽 어깨를아래로 떨어 뜨린뒤(음악:장장장장) 손바닥을펴고 손목을 바
깥 방향으로 꺽으면서(음악:장장장)시작된다. 뒤이어 오른쪽 다리를 들었다가오른쪽 무릎을 안쪽으로 꺽
으면서 내리는 동시에왼쪽 다리를 들어 올린다.(음악:장장)
다시 왼쪽 다리 꺽어 내리고 오른쪽 다리 들어 올렸다내리면서 다시 왼쪽다리 들어 올린다(음악:자자)그
리고는 왼쪽 다리를 내리면서 앞으로 나간다.(음악:장자라)이때 왼쪽 발의 위치는 오른쪽 발의 앞에 위치
한다.다시 오른발을 왼쪽 발앞에 놓는다.(음악:장장)그런 다음에는 위와 같은 엑스자 형태의 스텦을음악
에 맟추어 밟으면 된다.글로는 실감이 안날테니 음악을 들으면서 한번 밟아 보라.
낙원동 뒷골목에서 배운 오리지날 트위스트 춤을 추자면꼭 일자바지에 흰양말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 표
지완군의한결같은 주장이었다.그는 그춤을 김한섭씨(일명 트위스트 김:트의스트춤의 대가)로부터전수 받
았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그의 춤실력은 인정하지만 당대 최고의 춤꾼에게 전수받았다
고는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허구헌날 상급생들에게 터지고 다니던 그때문에 우리들이 덕을 보기시작한 것은 지긋지긋한 2학기 중간
고사를 마칠 무렵이었다.그당시 학교 정문옆의 수위실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상급생들
에게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끌려 들어가서얻어 터지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교복카라의 훜을 잠그지 않았다거나 단추가 떨어졌다거나 하면영락없이 그곳으로 끌려간다. 걷는 폼이
이상하거나 상급생을똑바로 쳐다 봐도 마찬가지이다.수위실에서도 상급생의 비위를 거슬리는 정도에
끌려가는 곳이 달랐다.
단순 복장불량 정도는 이를테면 좀도둑처럼 분리되어수위실 뒷켠에서 엎드려 뻗쳐를 하거나 좀 심한 경
우빳다를 맞았고 폼이 이상하거나 건들거리는 친구들은 그들의 권위를 건드리는 것으로 분리되어 수위
실 안으로끌려들어가 몰매를 맞았다.
표지완군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은 간혹 수위실 뒷켠으로 끌려가 엎드려 뻗쳐 정도의 기압은 받았지만 수
위실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그래도 그 수위실은 쳐다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나중에 우리가 고3이 되면서 그곳을 자유롭게들락거리기 전까지는 그랬다.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표지완
군이 그 수위실에를자유롭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표지완군이 허구헌날 수위실에 끌려가얻어 터지다보니 수위아저씨도 측은하게 생각했던 모양인지"재는
도저히 안되니 이제 그만 패라"고 상급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상급생들도 아무리 때려도 개선이 안되어 마침고민하던차에 수위아저씨가 한마디 하니 에라 잘됐다고
환영하였다. 그뿐아니라 너같은 놈은 생전 처음 봤다며그때 부터는 오히려 귀여워 해주었다. 그래서 표
지완군은우리들의 성역이나 다름없는 수위실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며상급생들의 시다바리(꼬붕) 노릇
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우리들도 가끔 수위실에를 들락거릴 수 있었고상급생들을 알게 되어 수위실에 끌려
가는 일이 없게 되었다.사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특혜였다.
하급생으로서 상급생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학교 정문을 마음놓고드나 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례
표지완군은 우리에게 영웅이 되었다
우리들중에 김호동군은 기병대 모자가트레이드 마크였다. 기병대모자는 모자의 하단부부터상단부까
지의 폭이 일정한 것이 특징이었다.신파극에 나오는 대학생 모자같은 것이 그당시 고등학생들간에유
행이였었는데 그 모자는 아래가 좁고 윗부분이 넓었다.
그것을 기병대 모자같이 만들려면 윗부분을 줄여야 하는데그렇게 만들자면 세탁소에가서 수선을 해야
하기 때문에없는 용돈에 그것은 엄두도 못내고 모자속에 신문지를 말아넣어서 모자의 아래 위를 똑같
게 했다.
따라서 김호동군의 모자속에는 항상 똘똘 말은 신문지가 들어있었다. 그때문에 김호동군도 등교할때면
수위실에 끌려가는단골 손님중에 하나였다..
어쩌다가 수위실이 만원이어서 살짝도망치듯이 옆눈질을 하며 게걸음으로 가다보면 또 영락없이훈육
주임선생님한데 걸린다. 훈육주임 선생님은 김군의 모자를 벗기고는그 똘똘말은 신문지를 빼어서 냅
따 따귀를후려갈기고는 그것도 성에 안차는지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그래도 김호동군은 그 기병대 모자를 포기하지 않았다.그다음날도 신문지를 말아서 모자에 넣고 등교
하곤 했다.훈육주임선생님은 만날때 마다 매타작을 되풀이 하면서 말했다.
"에이그 지겨워, 넌 도대체 어떻게 생겨 처먹은 놈이냐.니머리 속엔 뭐가 들어 있냐 이자식아." 하면서
두들겨 팼다.
김호동군의 또하나 주특기는 학생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그것도 매일 수위실과 훈육주
임선생님에게 깨지는또하나의 구실이었다. 그가방은 직사각형의 까만 천가방으로그당시 대학생들이 많
이 가지고 다녔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아침 조회시간에 그가방을 단속했다.김호동군은 속으로 투덜대었다."엠병할, 아침
에 수위실에서 깨지고 왔는데 또 깨져야 하나."하옇든 담임선생님이,"야,이눔들아,까만 가방든 놈들은 다
나와!"하고 소리쳤기 때문에 그 가방을 소유한 애들 4-5명이 비실 비실담임 선생님의 교탁앞으로 나갔다.
아마도 그날 아침에 교장선생님한데서 한마디 들은 것 같았다.어쨌던 김호동군은 제일 앞장서서 나갔기
때문에 자연담임 선생님으로 부터 제일 가까운 위치에 서게 되었다.담임선생님은 박달나무로 만든 짧은
지휘봉같은 모양의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일단 그것으로 앞에 나간 죄수(?)들의손바닥을 5대씩 후려
갈겼다.그러면서 훈계를 시작했다.
"야 이눔들아 너희들이 지금 폼 잡을때냐."하시면서 손에쥔 막대기로 바로 앞에 있는 김호동군의머리통
을 후려 갈겼다. 그러면서 훈계를 계속했다."그가방에 신경쓸 머리로 공부나 하란 말이야. 알았어?"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호동군의 머리통에서 또 딱하는둔탁한 소리가 울렸다."이런 제기랄, 왜 나만 때려."김호
동군은 거기 있다가는 머리가 깨지겠다고 판단하고는슬금 슬금 옆으로 게걸음으로 피해갔다.
"김호동, 넌 공부좀 하는 놈이 왜그래."하면서 담임 선생님의 막대기가 또 다시 허공을 날았다.그러나 그
때 김호동군의 머리는 그자리에 없었다.와~하고 반 전체에 폭소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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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작은모임(young570519) 원문보기 글쓴이: 선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