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ssandro Crudele, cond. Orchestra UniMi (Milan State University Orchestra)
1889년에 우선 피아노곡으로 작곡되었다. 라벨 자신에 의한 이 곡의 비평은 매우 엄하다. 「나는 결점을 잘 알고 있다. 너무도 명백한 샤브리에의 영향과 매우 빈약한 형식」. 젊은 시절의 라벨에게는 샤브리에에게 치우친 한 시기가 있었다. 이 곡을 샤브리에의 《목가(牧歌)》가 밑받침이 된 작품이라고 보는 비평가도 적지 않다. 그리고 사실 이 곡의 변주 방법에는 그렇게 새로운 맛은 없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했던 화성이 울리는 순간이 있으며, 라벨이 나중에 부그럽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선율은 감미로운 정감을 자아내고 있다.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는 라벨. 《로만체》의 베토벤, 《트로이메라이》의 슈만, 《월광(月光)》의 드뷔시, 엄한 비평을 하면서도 라벨 또한 1910년에 일부러 작은 관현악을 위한 편곡을 했던 것이다. 애착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제명은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은데, 특별히 문학적인 프로그램은 없고 운(韻)이 있는 어조(語調)가 좋았던 것이 최대의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딘지 곡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듯한 이론이다. 원(原) 피아노곡을 쓸 무렵, 라벨은 에드몽 드 폴리냑 공작부인(Princesse Edmond de Polignac)의 살롱에 자주 나와 공작부인의 요구로 이 곡을 썼다. 따라서 원 피아노곡은 공작부인에게 헌정되었다. 피아노곡의 초연은 1902년 4월 5일, 국민음악협회의 음악회(연주회장 살 플레이엘)에서 리카르도 빈녜스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작은 관현악은 1910년 12월 25일, 아셀만 연주회(Concertos Hasselmans)에서, 지휘는 카젤라(Alfredo Casella)가 맡았다. 자필악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피아노 악보는 1900년, 작은 관현악판은 1910년 모두 드메(E. Demets)에서 출판되었으나, 나중에는 모두 에슁(Eschig)에서 간행되었다.“라벨이 서민인 자기 신분과는 다른 왕녀를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하나의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다. 그는 그림 속 왕녀의 기품있는 얼굴이며 몸의 아름다움에서 남몰래 새로운 짝사랑의 대상을 발견했다.”17세기의 이름 높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끔찍이도 사랑한 모리스 라벨은 흥겨운 관현악곡 '볼레로'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작곡가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미술에도 역시 소양이 깊어 시적이고도 회화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그중 하나다. 라벨은 천재답게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 '왕녀 마가레타의 초상'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24세 때 이 피아노곡을 썼다. 지나치게 깔끔하고 까다로운 편집증적 성격을 지녔던 라벨은 62세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으며 독신으로 살았지만 흠모의 대상이 있었던 베토벤이나 브람스와는 달리 특별히 내세울 만한 연인도 없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아마도 젊은 시절의 라벨에게 있어 그림 속의 왕녀가 풍기는 고귀한 기품과 아름다움이 평생의 연애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