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권선문에 중국 지도자들의 불교에 대한 명언이 있어 옮겨놓는다. 중국 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손중산:
불교학은 철학의 어머니다. 불교학 연구는 과학의 한 부분을 메울 수 있다.
모택동:
우리는 다시 눈빛을 크게 뜨고 중국을, 세계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불교의 교의에는 바로 이런 사상이 있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가 중생을 널리 구할 것을 주장한 것은 당시 인도에서 압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표한다.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그는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집을 나와 불교를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불교인과 우리 공산당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중생, 곧 인민 군중을 압박하는 고통을 풀어 없애기 위해 이점 공통적이다.
주은래:
말을 타면 적을 죽이고, 말에서 내리면 불교를 배우자.
강택민:
민족 종교에 작은 일이란 없다.
우리는 위에서 본 자료 말고도 염불하는 사람들이 천념을 하고 한 점을 찍어 102만 번을 염불하는 ‘아미타점불도’도 받았는데, 여기 염불인 들이 이 A3 연꽃 그림 하나 가지고 100만념불(2만념은 덤)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그림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극락 가는 증명서’를 소개해본다.
아미타불 점불도로 부지런히 염불하여 1,000번 염불하고 한 점을 찍는 것이 밝은 구슬이라, 서녘으로 가는 길에 증명서가 되고 저승 문 앞에서 사면장이 된다.
연지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이 그림에 따라 염불하여 한 바퀴를 돌면 영원히 윤회를 면하고, 염불하여 두 바퀴를 돌면 어버이를 제도하고, 염불하여 세 바퀴를 돌면 시부모를 제도하고, 염불하여 4~5바퀴를 돌면 9대 선조들을 제도하며 스스로 성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오로지 믿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염불하면 저절로 바라는 바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봉비사 방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국 불교를 아는데 도움이 되었다. 안타까운 측면도 있었다. 관정 큰스님을 비롯해서 많은 대중들이 부자나라 한국에서 온 스님 일행이 봉비사 불사에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이때 찾아온 스님들은 당시 한국에서 스스로의 절을 일으키기 위해 열심히 불사를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봉비사 불사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그 뒤 관정 스님이 2003년과 2004년 4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불사금을 모으려고 노력 하였으나 그 액수는 많지 않았고 결국 2005년 병환 때문에 활동을 중지하면서 봉비사 불사를 도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다 관정 큰스님은 2003년 구선산 영취암사가 불이 타버려 다시 재건하느라 모든 힘을 그곳에 쏟아야 하기 때문에 봉비사를 도울 겨를이 없었다.
이제 이미 큰스님께서는 내일은 일절 순례 일정이 없다고 하시며 말씀하셨다.
“모레 귀국해야 하니 내일은 기념품을 사는 일정이다.”
그래서 불구와 기념품을 사기 위해 포전현에서 가장 큰 절이 있는 광화사 근처 불교용품상에 가기로 하였다. 운전수는 우리를 포전에서 가장 크다는 광화사 산문 앞에 내려주었다. 우리는 먼저 광화사를 참배하기로 하였다. 많은 이들이 아침부터 산문입구에서 입장 대기하고 있었다. 단체로 학생들도 경건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광화사는 역사가 매우 깊고 규모와 짜임새에서 완벽하리만치 흠잡을 데 없는 명찰 고찰이었다. 광화사를 참배하고 나서 산문 앞에 늘어서있는 불교용품점에서 몇 가지 불구와 기념품을 샀다. 그리고 염주를 비롯한 선물들을 필요한 만큼 구입하였다.
광화사에서 일을 마치고 났을 때 큰스님이 오셔서 함께 점심공양을 하러 갔다. 이미 시간은 오후 2시가 넘었다. 모처럼 채식식당에 가서 맛있는 요리를 시켰다.
공양을 마치고 채식식당에서 큰스님이 출생하신 포전시 성관진이 이곳이니 안내해줄 것을 부탁드렸으나 무슨 사유인지 그리 내키지 않으신 것 같아서 그냥 선유현 봉비사로 돌아왔다. 봉비사에 와서 큰스님과 도량 뒤편을 둘러보고서 마지막 날 밤을 또 봉비사에서 보냈다.
6) 순례를 마치고 귀국
11월 16일 토요일, 아침에 좀 일찍 출발하여 공항 식당에서 제법 괜찮은 공양을 하기로 우리끼리 의논하였다. 우리는 너무 지치고 밥맛을 잃었기 때문에 마지막이라도 한번 제대로 먹어보자는 색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이었다. 우리를 큰스님은 우리 멋대로 놔두시지 않으셨다. 끝까지 큰스님 방식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공항에 식당이 없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공항에서 먹을 생각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큰스님은 공항 가는 길에 우리를 어느 허름한 동네의 시장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이름도 모르는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다. 큰스님은 혼자서 맛있게 드시면서 먹고 싶으면 먹고 아니면 먹지 말라는 식으로 밀어붙이셔서 어찌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본의 아니게 5박 6일 동안 첫날 저녁을 빼고는 아주 훌륭한 단식을 하였고, 밤에 잠을 잘 못자서 낮에 차로 이동할 때 자는 힘든 여행을 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생활이 바로 큰스님의 의식주에 대한 진면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십억 불사를 하시며 큰돈을 만지면서도 철저한 청검 정신으로 생활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관정 큰스님이 중국에서 얼마나 많은 불사를 했는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정말 격의 없이 큰스님과 함께 한 사찰 순례는 항시 내 인생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뒤로 모든 생활을 정토선과 함께 하는 나로서는 어려울 때는 늘 6일간의 성지순례를 떠올리며 용기를 얻곤 한다.
나모아미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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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늦더위에 건강 관리 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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