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묘와 남관묘 ―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영향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서는 큰 전투가 없었지만 이 전란은 한양의 공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중 하나가 관왕, 즉 관우의 사당 건립이다.
명나라 유격장 진린陳璘은 관왕에 대한 신앙이 지극했다.
그가 총상을 입은 전투는 선조30년(1597) 겨울에 벌어진 울산전투였다. 일본군을 쫓아 남하하던 명군은 가토 기요마사의 주진지인 울산으로 집결해 그곳에서 일거에 섬멸할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적의 결사항전과 혹한 때문에 고전했고 12월 24일, 25일의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때 선봉에 선 진린도 25일의 전투에서 총탄을 맞아 서울로 후송되어 요양하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 군영은 남대문 밖에 있었다. 정확한 장소는 지금의 도동(桃洞. 남창동南倉洞; 선혜청 남쪽에 해당) 일대로 남대문경찰서 부근이라고 한다. 진린은 접반사 이흘李忔의 부축을 받으며 매일 군영 뒤에 있는 관왕묘에 참배했다. 이때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 군영 뒤에 모신 관왕묘에 참배를 해야겠어요.”
“언제 관왕묘를 세우셨습니까?”
“관왕묘를 세운 게 아니라 군영 바로 뒤에 민가가 한 채 있어 그 집을 사서 제단을 만들고 관왕의 소상을 모셨지요.”
“저 소상은?”
“부하를 시켜서 조각하게 했는데 부족합니다. 본래 관왕의 소상은 얼굴빛이 무르익은 대추와 같고 수염이 두 자나 되며 눈은 봉의 눈을 하고 있어요. 이 병사, 어제 양호楊鎬 장군께서 다녀가셨는데 임시 관왕묘를 보고는 군영 뒤에 넓은 터가 있으니 그곳에 새로 지으라며 은전 50냥을 주고 가셨습니다.”
“양 장군께서요? 장군의 소원을 들어주셨군요.”
“그렇습니다. 관왕을 가운데에 모시고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을 좌우에 모실 수 있는 전각을 새로 짓고, 좌우에 긴 회랑을 만들어 철마다 제사 드리는 물건들을 준비하게 하고, 또한 정면에는 중문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장군. 일이 이 정도라면 우리 조정에서도 그대로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인이 곧 문서를 올리겠습니다. 큰 도움을 준 명나라 군문을 돕는 일이니 조정에서 어찌 그대로 있겠습니까?”
“관왕묘를 세울 비용은 마련됐습니다. 다만 목수와 미장이 등 귀국의 장인들을 얻어서 썼으면 합니다. 귀국에 관왕묘를 세우는 것은 오직 명나라 군문만이 아니라 귀국의 대사이기도 하니 국왕 전하께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흘이 글을 올리니 선조는 도감을 설치해 관왕묘의 건립을 돕게 했다. 본전과 좌우 쪽에 장랑(줄행랑)을 짓고, 앞에 중문을 세웠으며, 선조31년 5월 13일 관우의 생일을 맞아 준공 축제를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