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혁명과 단두대를 떠올리게 하는 ‘프랑스 혁명’은 18세기 끝자락의 세계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약간 이름이 다른 ‘프랑스 5월혁명’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는 세계사를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사례의 하나인 듯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말할 때의 그 ‘역사’는 국가주권을 빼앗긴 식민지시대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68년 5월 프랑스 사람들은 드골 정부의 실정에 저항해 궐기했다. 드골 정부는 군대 동원과 의회 해산으로 맞섰다. 우여곡절 끝에 드골은 그 이듬해에 결국 물러났다. 이야기가 이 정도에서 끝나면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던 ‘막장 드라마’에 불과하다.
5월혁명 때 사르트르는 청년들에게 주체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세계 지성’ 사르트르의 참여는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썼던 그대로 언행일치를 실천했던 것이다.
“도구와 같은 존재에 있어서는 본질이 존재에 앞서지만, 개별적 단독자인 실존에 있어서는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우선 실존하고 그 후에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의 행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정부 요인들이 드골에게 사르트르 체포를 재촉했다. 이때 드골은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이야 진작부터 알았지만, 한때 독재의 길을 걸은 드골도 예사 정치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1980년 4월 15일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우리나라 4월혁명 20주년 기념일인 1980년 4월 19일에 치러졌다. 5만 인파가 장의차량 뒤를 따르며 “나는 잡종처럼 나의 철학으로 내 삶을 나중에 옹호하려 하지 않으며, 현학적으로 나의 철학에 내 삶을 맞추려 하지도 않는다. 삶과 철학은 하나이다.”라고 천명해온 사르트르를 추도했다.
사르트르의 묘비명은 ‘Jean-Paul Sartre, 1905-1980’가 전문이다. 1964년 사르트르는 노벨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을 때 “어떤 인간도 생존해 있는 동안 신성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며 거부했다. 우리나라에는 살아생전 호사를 즐기고, 죽어사후 천당 또는 극락에서 영생을 누리려는 자들이 많다. 평생 부귀영화를 만끽했어도 사르트르의 책은 읽지 않았던 모양이다. (*)
오늘(2023.4.15.) 오후3시
경상감영(공원)에서
현진건학교 유튜브 대구여행
제2차 시험 촬영이 있습니다.
출연을 희망하시는 분께서는
시간 맞춰서 현장에 오셔요.
출연료도 없고
참가비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