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6월25일, 내일모래면 7월이니 상반기 투쟁을 평가하기에 그렇게 이른 때는 아니다. 하지만 조직안팎 사정은 평가를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상반기 투쟁의 알맹이인 임단협 투쟁이 6월22일 현재 금속산업연맹 전체 209개 가맹노조 가운데 76곳만이 타결되었을 뿐, 부도와 파산 등으로 임단협 자체가 어려운 41개노조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 노조는 임단투를 계속하고 있다. 더구나 공안검찰 노동탄압공작을 규탄하며 지금 이 시각에도 명동에서 문성현 위원장등 연맹 지도부가 열흘 넘도록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고, 단병호 지도위원을 비롯한 구속동지들의 옥중단식에 이어 단위노조 대표자들도 동참한 가운데 정부와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다.
어느 때보다 토론도 활발하고 각급 회의도 자주 열리지만 당장 다음주 투쟁계획 세워 '처박기'에 바쁘지, 상반기를 돌아보며 차분하게 따져보고 평가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6월초까지 벌여오던 파업 건수와 참여 인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큰 투쟁을 6월8일 이후 벌여오고 있는 터라 대략 어느 시기까지 잘라서 평가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사정이 이러니 '조직의 공식입장'이나 '평가토론의 부분 반영'은 물론이고 개인의견으로도 '평가' 성격의 글을 도저히 쓸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오래 전에 쓰기로 한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해서, 평가라기보다는 상반기에 금속산업연맹이 어떤 조건 위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사업과 투쟁을 벌여왔는지 되도록 있는 그대로 돌아보려 한다. 물론 개인의견이며, 어쩔 수 없이 평가는 별로 없고, 방식도 깔끔하게 조목조목 정리하기보다는 주로 시간 흐름에 따라 굵직굵직한 사업 중심으로 몇 꼭지 훑어보는 식으로 하려 한다.
2. '시련의 98년'이 넘겨준 과제
1998년 2월 민주금속연맹·자동차연맹·현총련 세 조직이 통합하여 조합원수 20만 규모의 한국 최대 산별연맹으로 탄생한 금속산업연맹은 창립의 설렘을 느낄 새도 없이 IMF 환란이 몰고 온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광풍에 맞서 시련의 창립 첫 해를 보내야 했다.
통합조직을 채 정비하기도 전에 파업준비에 들어가 5월27, 28일과 7월의 두 차례 등 모두 세 차례 집중파업을 벌였고, 현대자동차·만도기계 투쟁 등 하반기까지 투쟁이 그칠 줄 몰랐다. 조합원부터 단위노조, 지역본부와 중앙, 연맹 위원장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뛰었고, '역시 통합하니 힘도 세지고 훨씬 낫다'는 규모를 갖춘 연맹활동도 실감하게 되었다.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활발한 토론과 각급 교육도 활발하게 벌였다. 그러나 98년은 성과보다는 한계와 아쉬움, 아픔이 많은 해였고, 그만큼 무겁기만 한 짐을 99년에 넘겨주어야 했다.
98년의 연장선 위에서 맞이한 99년, 연맹은 크게 네 가지 차원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① 99년에 더 미친 듯이 불어닥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미친 바람을 잠재우고 조합원들의 일자리와 생존권을 지키는 일이다.
한국 최대 산별 금속산업연맹 1년만에 조합원 2만여명 쫓겨나다! 난생 처음 당해보는 고용불안… 정리해고… 실업대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조합원 자신에게도 민주노조운동에게도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였다. 속이 시커멓게 타는 1년이었다. 과연 길은 무엇인가? 정리해고 중단이냐 철폐냐, 교섭권 위임과 중앙교섭전술은 시기집중의 성과가 있었느냐 아니면 투쟁회피를 위한 수단이었느냐, 노사정위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 지에 대해 원칙과 앙상한 뼈대만 있고 실속이 없거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실사구시 정신이 빠진 비난과 논쟁을 위한 논쟁을 뛰어넘어 실제 고용안정을 이루고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투쟁전략과 전술, 교섭전술, 실속 있는 정책대안 - 을 어떻게 갖추고 실제 성과를 낼 것인가, 참으로 절박한 과제였다.
② 98년 투쟁 과정에서 땅에 떨어진 단위노조와 연맹, 나아가 민주노총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어렵고 고통스런 현장 그러나 더 이상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하는 노조와 연맹 그리고 민주노총을 조합원들은 이전과 같은 사랑과 열정으로 대해주지 않게 되었다. 이 문제야말로 98년이 할퀴고 간 가장 뼈아픈 상처였다. 특히 근거 없는 왜곡과 비방을 바로잡는 일을 포함해서 조합원 고통을 줄이고 생존권을 확보하는 힘있는 대안으로 상급단체가 우뚝 서게 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③ 지도집행력과 조직을 꼼꼼하고 튼튼하게 정비해서 (세 조직) 통합을 완성하고, 대응력을 갖춘 20만 조합원의 대표조직다운 연맹을 가꾸는 일이다.
200개 단위노조·10개 지역본부·중앙이 피가 통하지 않는 동맥경화증, 심지어 지도부와 집행간부가 견해와 행동이 달라도 '임기 1년의 과도기니까'로 한숨짓고 넘어가던 일들, 현장에서 일어나는 어렵고 힘겨운 다양한 문제를 끝까지 부둥켜안고 책임지는 일은 '귀찮은 일'이 되어버린 '중앙', 회의가 성원이 안돼 무산되는 일, 실천하지 않고 '나만 옳다'는 식으로 문제제기와 논쟁으로 한몫하는 일부의 사업작풍, 언제부터인가 결정은 많고 책임 있는 집행은 드물어진 풍토, 자기노조가 필요할 때만 연대투쟁을 부르짖는 일, 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래서 연맹다운 연맹을 제대로 만들어야 했다.
④ 산별노조 건설이 구호나 방향 차원이 아니라 실제 사업으로 자리잡게 하는 일이다.
'건설해야 한다'를 뛰어넘어 산별노조 건설을 위해 어떤 조건을 어떻게 극복해서 어떤 길을 지나 언제 만들어야 하는지, 손에 잡히는 일정 위에 올려놓고 간부는 물론 조합원들이 고개 끄덕이고 함께 갈 수 있는 조건과 의지를 만드는 일 또한 99년에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였다.
3. 1999년 활동
① 사업방향과 목표
99년 1월부터 한달여 기간동안 선거운동을 거쳐 2월6일 2기 문성현 집행부가 출범하였다. 연초에 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는 사정으로 2월 정기대의원대회와 3월 임시대의원대회를 거쳐 확정한 사업계획에서 연맹은 올해 사업방향을 다음 네 가지로 잡았다.
● 조직통합을 넘어 단일조직답게 조직내 단결을 강화하고 한 몸처럼 움직이는 지도집행력을 만든다.
● 당장 구조조정투쟁부터 총력투쟁으로 대응하고 통일된 교섭·투쟁방침 아래 투쟁한다.
● 2000년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밑거름을 마련하고 현장 조직력을 강화한다.
● 금속산업연맹이 앞장서서 민주노총 총력투쟁전선과 민중연대투쟁을 강화한다.
또한 사업목표로는 다음 5가지로 잡았다.
● 조직 강화와 확대
● 고용안정·임단협 투쟁 승리
● 산별노조 건설 밑거름 마련
● 사회제도 개혁과 노동법 개정 투쟁 승리
● 정치세력화와 정치전망 마련
또한 기업별노조운동이 안고있는 한계를 뛰어넘고 2002년부터 적용되는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라는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2000년 10월까지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이를 위해 '금속산별노조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기로 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산별노조 건설 방침을 확정하였다.
② 조직체계와 운영
조직체계와 운영에 대해서도 중요한 몇 가지를 손봤다. 300명 규모이던 대의원수를 500여명으로, 중앙위원수도 50여명 규모에서 80명 규모로 늘려 현장 특히 중소노조가 참여할 수 있는 폭을 넓혔으며, 대신 1년 동안 대의원대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으면 다음 회의에서의 피선거권을 제한하기로 하여 책임 있게 참석하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10개국이던 중앙부서체계를 3실 2국체계로 전환하고, 사무처 간부들의 중앙과 지역 순환근무제를 도입하였으며, 3월초에는 조직창립 후 처음으로 전국사무처수련회를 열었다. '한 번 결정한 일은 중간에 바꾸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집행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3월초 1주일동안 11개 지역에서 1,000여 노조간부들이 참여한 가운데 위원장 간담회를 연 것을 비롯해 임원들의 현장순회를 강화하는 풍토를 만드는데 초반부터 힘썼다.
③ 고용·임단협 투쟁
연맹은 상반기 민주노총 총력투쟁과 고용·임단협 투쟁과 관련해서 민주노총 4대요구를 포함해 다음 7대 요구를 정했다.
● 생존권 박탈하는 구조조정·정리해고 중단
● 노동시간 단축
● 고용안정협약 체결
● 사회복지제도 확충
● 산별교섭구조 확립
● 노조경영 참가
● 노동기본권 보장
아울러 99년도 임금인상율을 10.6%를 기준으로 사업장마다 2% 범위에서 조정하여 요구하기로 하고 노조경영 참가 보장 등 공동단협 요구를 확정하였다. 이 요구들은 차츰 '정리해고 철폐'와 '주40시간 쟁취' '임금인상'이라는 세 가지 핵심요구로 좁혀지게 되었다.
특히 사업장별 고립 분산된 투쟁을 극복하고 총자본을 상대로 힘있는 총력투쟁을 만들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단위노조의 교섭권을 연맹으로 위임하고 대정부(민주노총 차원), 대자본을 상대로 한 산별중앙교섭과 함께, 부문별·지역별 집단대각선 교섭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단, 중앙교섭 전술이 기업별교섭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산업별 차원의 고용안정 대책이나 제도개선 문제인 사회보장과 같은 요구를 담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지난 해에 겪었듯이 강력한 힘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당장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에 적극 추진하되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전술 측면에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따라서 중앙교섭을 추진하는 동안 개별교섭을 중단했던 지난해와는 달리 철도차량·발전설비·자동차 등 구조조정이 걸린 사업장끼리 함께 하는 부문별 집단교섭, 지역별로 교섭군을 나누어 집단으로 대각선교섭을 함께 하는 집단대각선 교섭을 일찍부터 추진하여 단위노조의 절박한 공동요구를 중심으로 공동투쟁을 만들어내는 쪽에 무게중심을 두기로 했다.
시기와 관련해서는 당장 대응해야 하는 구조조정 사업장들을 묶어 공동투쟁을 조직해나가되, 5월 시기집중을 목표로 하는 것이 몇 년의 경험에 맞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시기는 구조조정이 발표되면 이미 때를 놓친다는 측면, 서울지하철노조가 5월까지 기다리기 어렵다는 점이 작용하면서 '준비정도'와 '일찍 싸울 필요성' 사이에서 쉽게 결론짓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결국 뒤늦게 민주노총 차원에서 이를 종합해서 4월19일 공공, 5월10일 금속을 중심으로 투쟁시기를 확정하면서 '절충'하게 되었다.
지난 해 교섭권 위임과 중앙교섭 전술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났지만 작년 124개노조에 이어 올해도 110곳이 교섭권을 위임하였고(5월말까지), 경총을 상대로 몇 차례 중앙교섭을 요구하고 4월말 조정신청을 거쳐 5월 이후 공동투쟁을 조직해나갔다. 연초 구조조정 노조간부 수련회, 지역별 합동상집회의와 수련회, 총 80여개 노조 7만여 조합원에 대한 총력투쟁 방침 교육 등 여러 사업도 뒷받침하였다. 물론 단위노조가 참여하는 집단 대각선교섭이나 부문별 집단교섭이 이 시기까지 충분히 이뤄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구조조정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현안이 걸려 일찍 싸움에 들어갈 수 있는 노조들이 이 흐름에 맞췄고, 그렇지 못한 노조는 조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했다.
④ 2·3·4월 투쟁
집중시기를 5월로 잡았지만 싸움은 2월부터 시작되었다. 조건은 우리를 5월까지 충분히 준비해서 힘을 모아 터뜨리도록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이다. 98년말부터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닥친 기아-현대계열사들이 2월25∼26일 파업을 준비하였고, 연맹은 이를 1차 경고파업으로 받아 기아자동차·현대자동차써비스·현대정공울산·기아자판·아시아자동차·아시아자판 노조등 12개노조 2만여명이 4시간∼8시간까지 파업(총회 포함)을 벌였다. 또한 27일에는 전국에서 7천여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종묘에서 '금속산업연맹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99년 투쟁의 힘찬 포문을 열어 젖혔다. 참으로 어려운 조건에서 이뤄낸 2월투쟁은 노조를 제쳐두고 정부와 자본 마음대로 구조조정을 강행하면 결코 가만있지 않겠다는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올해 투쟁을 선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2월투쟁으로 많은 어려움도 뒤따랐다. 27일 집회가 끝나고 행진과정에서 경찰과 벌인 몸싸움과 신고내용과 달리 도로를 넓게 잡아 행진한 것을 빌미로 단위노조 간부와 조합원 20여명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지고 1백명 가깝게 소환장이 발부되었다. 더 큰 문제는 이 파업에 현대자동차노조가 우여곡절 끝에 막판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면서 현대자동차 노조 내부에 후유증을 남기고 결국 집행부가 사퇴하고 선거체제로 들어가게 되고, 공동투쟁과 함께 기아·현대노조 계열사 노조 통합을 준비했던 해당노조들 사이에 틈이 생기면서 연대전선이 흔들려 버렸다. 더구나 기아자동차노조가 현안문제를 타결하면서 노사화합선언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본과 언론이 확대 선전하는 바람에 연맹에서 기아자동차노조를 징계하는 사태로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해서 경고투쟁의 성과는 있었으나 적어도 현대자동차와 기아·아시아자동차노조 등 기아현대계열 대기업노조들이 연맹과 민주노총의 5월투쟁에 참여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이는 상반기 투쟁동력에 커다란 한계로 작용하여 이후 연맹차원의 투쟁을 짜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민주노총이 4월초 총력투쟁 방침을 유지하던 상황에서 연맹이 구조조정 사업장을 중심으로 3.25 징검다리 투쟁을 잡았으나 한국중공업노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힘있게 참여하지 못했다.
1월 한달 선거, 2월초 2기 집행부 출범과 설날연휴를 거쳐 채 조직정비할 틈도 없이 급박하게 닥치는 상황에 대응하는 식으로 2, 3월 투쟁을 마치고 나서 연맹은 대체로 이렇게 문제점을 정리했다. 일관된 방침을 유지하는 것과 함께 이 방침을 단위노조와 조합원들에게 충분히 알리고 토론하고 자기 것으로 삼게 해야 한다. 어차피 연맹 홀로 싸우는 게 아니라 민주노총 차원의 총력투쟁으로 나아가는데 민주노총의 총력투쟁 방침이 시기와 성격에서 주어진 정세는 물론이고 각 연맹과 조합원들의 준비정도를 충분히 따져서 결정되어야 한다. 구조조정 관련 노조들의 투쟁인지, 아니면 정치파업인지, 또 임단협 투쟁과는 완전히 따로 하는 건지 아니면 결합하는 건지 분명하게 해야 한다. 시기도 안팎의 조건을 충분히 감안해서 정해야 한다. 이 당시 민주노총은 4월,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초반에 정치파업으로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어쨌든 시기와 성격을 둘러싸고 민주노총 총력투쟁 방침에 대한 논의와 토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4월을 맞게 되었고, 결국 연맹은 4월19일부터 시작되는 민주노총 총력투쟁 방침에 발맞춰 부족한 준비정도를 최대한 극복하여 5월12일로 정해진 '고지'를 향해 모든 사업을 몰아갔다. 광주 대우캐리어노조가 주40시간 노동제를 따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지만 전체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기아현대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 쪽이 주저앉은 데 이어, 조선 쪽도 집단교섭 준비가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파급력 있는 대공장 노조의 투쟁을 중심으로 중소노조들이 시기를 맞춰 공동투쟁을 벌여온 지난 10여 년에 걸친 투쟁판을 돌아볼 때 '치명상'에 가까웠다. 과연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하고 의미 있는 5월투쟁을 만들어낼 것인지 토론을 거듭한 끝에, 3월에 이미 파업과 동시에 1만명 규모의 중앙상경 농성투쟁전술을 기획하였다. 그리고 4월 한달 동안 임원들은 신발 밑창이 다 닳도록 현장을 뛰었고, 중앙과 지역본부 단위노조가 힘을 합쳐 조합원 교육과 선전사업, 각급 회의, 지역별 수련회등 모든 체계를 다 가동하였다. 경총을 상대로 중앙교섭을 요구하고 부문별 집단교섭과 지역별 대각선 교섭도 최대한 차수를 높여갔다.
이런 상황에서 4월 19일 시작된 서울지하철노조를 중심으로 한 공공연맹 투쟁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일주일을 넘겼고, 연맹은 4월 20∼21일 서둘러 1,000명 규모의 상경투쟁을 조직해 부족하나마 연대하려 애썼다. 4월 20일에는 대우재벌의 구조조정 계획에 회사를 일본기업에 팔기로 한 방침이 포함된 것에 반발해 대우조선노조가 바로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지하철노조에 대한 정권 차원의 총공세가 위험수위를 넘고 그 결과가 이후 노동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될 급박한 상황을 맞아 연맹은 즉각 연대투쟁을 결의하고 대우조선, 대우자동차, 한국중공업, 현대정공창원, 대우중공업, 통일중공업 등 10여개 노조의 파업을 결행하였다. 4월 29일 연맹에서 106개 노조에 대한 조정신청을 내고 5월투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서울지하철노조 투쟁이 권력의 추악한 탄압과 여론몰이, 민주노조진영 전체의 한계와 미숙한 대응으로 눈물을 머금고 여드레만에 끝났지만, 정권에 맞서 8일 동안 완강한 투쟁력을 보여줘 '밀리기만 하던' 금속노동자들에게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5.1절 중앙집회에 연맹에서만 9천여명이 참가하여 이미 분위기는 뜨고 있었다.
⑤ 5월 투쟁
두 달에 걸친 준비 끝에 금속산업연맹은 민주노총 5월 총력투쟁 방침에 따라 5월 3일부터 파업찬반투표를 거쳐 5월 12일부터 15일까지 노조별로 동시파업에 돌입하였다. 또 13일부터는 조합원들이 서울로 올라와 2박3일 동안 용산, 여의도, 대학로, 종로, 명동일대에서 집회시위와 노숙투쟁을 벌였다. 나흘에 걸친 파업투쟁에는 날마다 14개∼20개노조 2만 안팎 조합원이 참여하였으며, 상경투쟁에는 120여개노조에서 '정리해고 철폐 40시간 쟁취 결사대' 8천여 조합원이 참여하였다.
파업과 상경투쟁의 주 동력은 조합원 1천∼4천여명 규모의 한국중공업·쌍용자동차·현대정공울산·강원산업노조등 구조조정등 현안문제가 걸린 노조였으며, 여기에 중소노조 10여곳이 파업투쟁에 결합했고, 상경투쟁에는 130여개노조가 '개미군단'이 되어 참여했다. 주요 요구는 주40시간 노동제 실시, 정리해고 중단을 핵심으로 하는 연맹 7대요구였으며, 주40시간 노동제를 놓고 정부가 민주노총과 교섭에 나서라는 게 압축된 요구였다.
투쟁전술과 관련해서는 파업과 함께 대규모 서울집중농성 전술을 병행한 게 특징이다. 특히 개별사업장을 뛰어넘는 대정부 대자본 요구를 내걸고 연맹의 지시에 따라 파업돌입노조는 전조합원이, 파업이 어려운 노조는 개별 간부나 조합원이 참여한 '산별노조식 파업' 전술이라 이름붙일만 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민주노총 총력투쟁 전선을 지켜내는 역할을 한 금속 5월 투쟁은 조직 안에도 많은 성과를 남겼다. 많은 어려움을 뚫고 파업과 상경투쟁을 성공시켜 이후 임단협을 비롯한 본격투쟁에서 '할 수 있다' '걱정했는데 정말 많이 왔네' '이렇게 하면 되는데' '역시 금속이다' 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연맹의 방침에 따라 중앙은 물론 지역과 단위노조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연맹의 위상과 지도력이 이전에 비해 강화되고,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한 집행체계가 살아났다. 또한 주40시간 노동제 실시를 핵심으로 하는 요구를 안팎에 널리 알렸고, 조합원 자신·민주노총·연맹·재계 등 이해 당사자들만큼은 주40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는 게 실업대란과 노사갈등을 푸는 실마리임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상경투쟁 경비 전액을 전조합원이 똑같이 내는 투쟁기금으로 충당해서, 이전에 투쟁하는 노조일수록 돈도 더 드는 '불합리'를 해결하여 권리와 의무가 공평하게 되도록 한 것도 뜻있는 일이었다.
5월 총력투쟁은 조직과정에서부터 현장에 큰 영향을 끼쳐 단위노조의 교섭력을 강화하고 오리온전기처럼 회사 개악안을 철회시키거나, SJM을 비롯한 몇몇 노조가 기본급 7만원대 인상을 확보하였다. 상경투쟁을 시작으로 5월투쟁 한 고비를 넘어가던 6월8일 현재 임금교섭이 타결된 52개 사업장중 임금을 올린 곳이 29곳으로 동결(11곳), 삭감(10곳) 보다 많고, 인상 사업장의 평균 인상액도 기본급 4만대여서 동결과 삭감이 대부분이었던 지난해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6월투쟁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6월22일 현재 현황을 보면 타결노조 76곳 가운데 임금을 올린 곳이 52곳으로 68%, 동결 또는 삭감한 곳이 24곳으로 32%를 차지해 임금인상 추세는 확고하게 자립잡고 있다. 인상 사업장 평균 인상액도 기본급 4만원(6%)에 이른다)
물론 아쉬움과 한계 남는 문제도 많았다.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파업에 돌입한 대오가 20개노조 2만명을 밑돌아 전체 투쟁의 파급력이 떨어졌다. 2억이 훨씬 넘게 든 투쟁기금을 아직 결의조차 안한 노조가 수십 개에 달해 절반 이상이 빚으로 남았다.
특히 변화된 상황에 맞는 거리시위 전술을 개발하지 못해 효과 있는 일사불란한 행진에 어려움이 많았다. 상경투쟁 둘째날 종로에서 1시간 반 이상을 우왕좌왕하다 경찰과 충돌해 40여명이 연행되고 결국 두 사람이 구속된 일도 그렇고, 사흘 내내 곳곳에서 절대 최루탄을 쏘지 않고 시위대와 시민이 싸우게 하는 경찰의 달라진 전술 앞에서 우리는 그전부터 하던 방식 말고는 참신한 전술을 내놓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다. 시민과 시위대를 분리시키려는 저들의 의도를 무산시키고 우리요구를 널리 알리는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일반시민이 부담 없이 집회와 시위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전술을 빨리 찾아내지 못하고 '가열차게 투쟁해야 한다'는 좁은 투쟁형태 문제에 얽매였다.
5월 16일 공안검찰을 앞세운 권력은 5월 14일 시위를 문제삼아 문성현 위원장 등 연맹 지도부 6명 전원에게 체포영장을 때리는 사상초유의 탄압을 자행하고, 단위노조 간부와 조합원 수십명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이는 신자유주의식 구조조정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민주노총의 주력군인 금속산업연맹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어쨌든 연맹은 지도부 전원이 명동성당에 발이 묶여 활동이 제한된 가운데 6월 10일 민주노총 총력투쟁에 맞춰 다시 조직을 추스르지 않을 수 없었다.
⑥ 6월 투쟁
6월8일 공안검찰 파업 유도 공작 사건이 터지자마다 금속연맹은 이전부터 파업을 벌여오던 노조와 바로 파업에 돌입한 한국중공업노조 등을 묶어 6월말까지 10∼20개노조 1만∼3만명 규모의 파업을 보름 넘게 이어가고 있다.
왜 96∼97년 총파업처럼 멋지게 못하느냐는 식의 언론이나 훈수꾼들의 충고는 뒤로 하고라도, 모처럼 만난 유리한 정세를 비집고 폭발력 있는 투쟁으로 정세를 주도하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작년부터 밀리기만 해온 노동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타격이 심하다. 또 말이 총파업이지 96∼7년 노동법 날치기 규탄 투쟁을 되돌아 보아도 1년 가까이 결의하고 교육선전하고 결단해온 준비기간을 거쳐 된 것이지 어떤 '좋은 계기'를 만났다고 바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주체역량과 조성된 정세가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체념하거나 주저앉을 일은 아니다. 갑자기 감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않는 바에야 준비된 만큼만 싸울 수 있다는 상식을 뼈저리게 확인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 지금 진행되는 투쟁양상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금속노동자들이 이제 98년 이후 계속된 가위눌림에서 벗어나 굳세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 물론 파업에 들어간 노조들은 자체 임단협이나 구조조정·현안문제를 매개로 시기를 집중하고 이 투쟁력을 바탕으로 공안검찰 노동탄압정국에 적극 대응해 나가는 방식이지만, 타결되어 파업을 접는 노조를 빼고도 1∼3만 규모의 파업이 20일 가까이 유지되는 현실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이 흐름을 정확히 보고 7월투쟁과 하반기 투쟁판을 짜야 할 것이다.
물론 이 투쟁은 글을 쓰는 현재 시각에서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설사 단식투쟁은 끝난다 해도 임단협과 현안문제를 둘러싼 7월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또 하반기에는 주40시간 노동제 쟁취를 비롯한 제도개선 투쟁에 모든 힘을 기울여나가게 될 것이다.
6월 투쟁은 투쟁규모로 보나 중요함으로 보나 여러 쪽에서 폭넓고 깊이있게 살피고 평가해야 하지만,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싸움이라 단편으로라도 서둘러 다루기 어려워 자세한 진행경과와 평가 전체를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4. 1999년 상반기 평가
뒤돌아보면 정말 정신없이 99년의 절반을 뛰었다. 선거 끝내고 투쟁 준비하다가 석달이 다 가 벼렸다. 상황 자체가 힘을 모아 더 규모 있고 강력하게 싸우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벌어지는 상황에 그때그때 대응하느라 2월부터 6월까지 달마다 한차례씩 '총력투쟁'을 계속했다. 열심히 뛴 덕택에 '투쟁을 피하려 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없다. 작년에 비교해보면 올해는 훨씬 한 덩어리가 돼서 뛰었고 그만큼 통합력도 높아졌고 믿음도 회복했다. 오히려 99년 새해가 밝고부터 오늘까지 투쟁으로 시작해서 투쟁으로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다. 그러나 아직 조직통합력이 높아지는 단계까지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듯 하다. 또 교섭권 위임과 교섭단위별 공동실천등 '산별식' 일상활동을 결합하고 전체 노동계급의 요구를 내건 총력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2월 기아현대공대위의 파업 결정을 한 개 단위노조인 현대자동차노조가 내부사정으로 번복하게 되듯 아직은 기업별 노조체계의 한계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큰 어려움으로 남아있다.
남은 투쟁도 우리는 그렇게 밀고 나갈 것이다. 힘이 되는 한 선봉에서 싸워나갈 것이다. 이 문제는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기본이다. 투쟁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성과(요구)를 내고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 한 단선이 아니라 입체감 있는 종합전략 속에 투쟁전략과 전술을 펼쳐나가야 한다. 상반기 투쟁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올바로 이뤄낼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눈앞에 닥친 투쟁에 신경쓰다 보니 99년 사업이 짊어진 여러 과제, 조직정비(특히 현장조직력 강화)와 상급단체 신뢰회복, 산별노조 건설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해서 보면 소흘했다. 물론 산별노조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역추진위도 갖춰나가는 단계지만 내용을 채우고 대중화하는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투쟁이 더 계속된다면 자칫 놓치기 쉬운 문제다. 복잡하기만 한 이런저런 문제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정리도 아직 되지 않고 있다.
진보정당 창당 문제도 책임 있게 대응해야 하나 투쟁에 쫓기는 데다 상황에 대응하는 측면이 강조되면서 워낙 급작스럽게 진행되어 충분히 내부논의를 못해왔다. 김대중정권에 실망한 나머지 수많은 노동자를 포함해서 일반 국민들 마음이 떠나고 있지만, 이 마음을 누가 사로잡을 만큼 준비된 세력만이 성과를 챙길 수 있다. 소총(대중조직 그것도 기업별체계인) 들고 싸우고 있는 현실을 넘어 미사일이나 핵무기(정치조직)로 무장할 수 있어야 '싸우는데 의의가 있는' 수준이 아니라 꼭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었는가. 더 이상 미뤄둘 수만은 없는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어쨌든 99년 새해를 맞이하던 당시와 지금 6월말을 비교해본다면 이제 98년 IMF 첫 해의 가위눌림에서 벗어나 힘차게 기지개 켜고 일어설 기운을 얻어 가는 심정이다. 작년에는 벼랑 끝까지 몰리는 분위기였지만, 올해는 있는 힘을 다해 투쟁전선을 만들고 유지하여 그 전선의 울타리 안에서 상당한 임금인상과 정리해고 저지, 노동시간 단축 문제 제기 등을 이뤄내고 있다. 이제 밀리던 추세에서 막상막하 나아가 반전의 추세로 나아가야 한다. 꼼꼼하게 주위를 추스르고 연맹운동이 대중운동인 한 더욱 더 원칙과 함께 현실을 냉엄하게 짚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나간다면, 정말 뿌듯한 마음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