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잎은 힘없이 떨어졌다. 그 붉은 흔적 아래로 연록의 새잎이 돋았다. 세상은 잠시, 아주 잠시 붉게 물들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승자는 거칠지도, 강하지도 않은 신록이었다. 시인 서정주는 이런 세상 이치를 알고 있었을까. '신록'이란 시에서 그는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닢은 떨어져 나려/ …/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 …/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라고 외쳤다. 승자를 찬양하는 시인의 마음이 아릿했다.
바닥 의외로 미끄러워 주의해야
밀양철교 열차 지나는 풍경도 구경거리
추화산 봉수대 주변은 철쭉꽃 천지
조선 선비들의 '시크릿 가든' 월연정
바위 위 석축·누각 예사롭지 않아
정상만 향하는 산행선 생각지도 못했던
산·강·들 두루 즐긴 매력적인 여행
신록을 좇아 경남 밀양 추화산과 아리랑길을 걸었다. 아리랑길은 밀양강을 따라 흐르도록 해 놓아 전체 구간이 16㎞로 상당히 길다. 햇빛이 점점 두려워지는 계절임을 감안해 일부러 강변 구간은 줄이고 숲길을 끌어들여 10.8㎞를 걸었다. 그럼에도 4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밀양시립박물관을 들머리 겸 날머리로 삼은 것도 아리랑길과는 조금 달랐다.
경로는 밀양시립박물관∼봉수대∼추화산∼월연정∼금시당∼밀양철교∼삼문송림∼영남루∼밀양읍성∼밀양시립박물관 순으로 짰다. 자동차가 없다면 밀양읍성에서 마침표를 찍어도 된다.
산&길이 기획한 이 루트는 장점이 많다. 산과 들, 강을 두루 즐기면서도 아리랑길 세 코스의 핵심 구간을 놓치지 않았다. 밀양철교∼삼문송림 구간에서는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징검다리 보를 건너는 이색 체험도 할 수 있었다. 정상만 향하는 산행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자동차 여행에서는 접근이 쉽지 않던 월연정과 금시당을 걸어서 둘러본 것도 숨은 매력 중 하나였다. 이러니 늦봄을 만끽하는 꽃과 곤충, 새들과의 조우는 덤이라고 해야 할까.
■추화산과 봉수대
추화산(推火山·242.4m) 정상을 향하는 길은 대략 6갈래다. 그중 밀양시립박물관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짧다. 짧다는 것은 가풀막지다는 의미로, 들머리부터 약간의 땀을 흘려야 한다.
봉수대 주변은 꽃 사태였다. 밀양시청이 몇 해 전 심어 놓은 철쭉이 올해 봉수대 주변을 완전히 감쌌다. 주말까지는 꽃구경이 가능할 것 같다. 봉수대에서 풍경 사진을 찍는데, 석축 아래의 틈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요즘 찾기 힘든 토종 개구리였다. 주변에 물이 없는데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했다.
추화산 정상은 봉수대에서 멀지 않다. 정상 아래에 '창훈문(彰勳門)'이라는 글씨가 쓰인 붉은 벽돌 폐건물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러시아 기술자들이 지은 서낭당이라고 밀양박물관 관계자가 설명했다. 추화산은 높지 않다. 하지만 밀양강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고려 때부터 군사요충지로 주목받았다. 그 흔적이 300m가량의 성벽으로 아직 남았다. 원래는 동서남쪽 3곳에 성문이 있었고 성벽도 1.4㎞에 달했다고 전한다.
■월연정과 월연터널
성벽에서 월연정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 한갓졌다. 숲 그늘도 적당해 한여름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그 길을 느긋하게 걸어 월연정에 닿았다. 월연정은 배낭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 선비들의 '시크릿 가든'이다. 추화산에 막혀 밀양 시내에서 들어오는 길이 아직도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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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와 석축, 기와지붕, 배롱나무의 조합이 자연스러운 월연정. |
바위 위에 석축을 쌓아 누각을 올린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바위와 석축, 누각이 오랜 세월을 버티면서 한몸이 됐다. 주변에 백송과 오죽이 있는데, 나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눈길조차 주기 어렵지만 전국의 유명 수목원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희귀 소나무와 대나무다. 월연정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에도 종종 비교된다. 하지만 부산에서의 접근성과 자연미 등을 감안할 때 오히려 점수를 더 쳐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월연정에서 밀양강 쪽으로 붙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 나오면 월연터널을 찾을 수 있다. 월연터널은 폭 3m의 쌍굴로, 굴과 굴 사이에 하늘로 뻥 뚫린 공간이 있다. 터널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처음 놓일 때 뚫렸는데, 철도 이설 후 일반도로의 터널이 됐다. 지금은 인근 마을로 들어가는 차량이 간헐적으로 지나는, 별 볼일 없는 교통시설로 전락해 차량을 조심한다면 터널 안도 구경할 수 있다.
■징검다리 보와 삼문송림
심경루와 활성교, 금시당을 지나면 산성산 등산로를 따라 밀양철교로 내려설 수 있다. 도중에 담쟁이덩굴과 기와가 절묘하게 어울린 천경사 뒷담도 구경할 만하다.
밀양철교에서는 징검다리 보를 건너야 삼문송림에 이른다. 보는 콘크리트 요철로 만들었는데, 물이 많이 불지 않았다면 맨발로 건널 수 있다. 취재팀도 지친 다리를 마사지할 겸 등산화를 벗어 목에 걸었다. 단, 어린이를 동반하면 주의해야 한다. 바닥이 의외로 미끄럽다. 보를 건널 때 밀양철교 위로 열차가 자주 지나는데, 그것도 큰 구경거리다
삼문송림부터는 밀양아리랑길 1코스에 속한다. 1코스는 밀양강을 따라 우회하는 구간으로, 취재팀은 이를 다 버리고 삼문송림에서 곧바로 영남루로 향한 뒤 밀양 출신의 작곡가 박시춘 생가와 밀양읍성을 들렀다. 밀양읍성 끝자락에서 용평로와 밀양대공원로를 따라 15분여 걸으면 밀양시립박물관으로 돌아올 수 있다. 문의:전준배 산행대장 010-8803-8848. 위크앤조이팀 051-461-4095.
글·사진=백현충 선임기자 cho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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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중 자주 만나는 '밀양아리랑길' 레터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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