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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영혼, 사랑의 마음
―김희수 시집 『사랑의 화학반응』
―이학영 시집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
이은봉
1. 머리말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그 동안 우리가 남한의 정치체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해온 까닭은 무엇인가. 물론 그에는 많은 원인이 있으리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인……. 국민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정부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수립 이후 국민들의 그러한 기대는 수없이 어긋나 온 바 있다. 무려 50년이 지난 올 봄에야 겨우 국민들에 의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된 새 정부는 지금 주권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처 정권을 인수받기 전부터 IMF 경제체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허우적거려 온 것이 현금 우리 정부이다. 그로 인해 이제는 거듭되는 초국적 자본의 파고에 쫓겨 경제에 관해서는 거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곤경에 처해 있기까지 하다. 조금쯤 과장하여 말하면 IMF 경제체제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있는 것이 지금 이 나라의 정치권이고, 경제 관료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세계사의 전개과정에서 지금 우리 나라는 이러한 단계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형편이 이러하니 근대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국민국가의 형성과 관련된 여러 개념들도 이제는 짐짓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민주화니, 통일이니 하는 개념들도 더 이상 보편적 진리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없게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 문학은 아직 초국적 자본에 휘둘리고 있는 이러한 오늘의 현실을 본격적으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이미 200만 명에 가까운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고, 또 그것의 직접적 원인인 거대자본의 무궤도한 활동으로 인해 미구에 국가라는 강역(彊域) 자체가 사라질 지도 모르는 데도 말이다. 자본의 주된 생산양식이 달라져 그와 틈 없이 맞물려 있는 언어며 의식 자체가 크게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 않은가.
나라의 처지가 이러한데도 모국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는 그저 무기력하기만 하다. 지난 80년대 군사독재 체제에 대한 시의 맹렬한 도전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난감하기만 할 따름이다. 단지 민중현실을 반영하는 데에 급급했다고 하더라도 그 때가 차라리 우리의 시는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당시에는 글쓰기의 의미며 기능이 너무도 확연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논의와 상관없이 김희수, 이학영의 시집은 기본적으로 지난 80년대의 문제의식에 뿌리내려져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씌어진 작품들을 모으고 있는 것이 김희수의 시집 『사랑의 화학반응』이고, 김학영의 시집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아 이들의 시가 다소 갑갑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의성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두 사람의 시집이 제대로 때를 맞춰 발간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2. 민중현실의 형상화, 그리고 깨어 있는 영혼―김희수
김희수의 네 번째 시집 『사랑의 화학반응』의 말미에는 고재종의 정겨운 발문이 붙어 있다. 꽤 긴 분량의 이 발문에 따르면 그가 시작(詩作)에 몰두하게 된 것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리고 그 과정에 절친한 친구 윤상원을 잃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로 인해 시인 김희수는 "거대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획득"하게 되고, 그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시작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출발 과정을 지니는 시인이라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게 될 세계가 곧바로 짐작되지 않을 수 없다. 민중, 민주, 통일 등의 화두가 시의 중심을 이루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의 시 역시 물론 그러하다. 민족민주운동의 연장선에서 시운동을 파악하려 했던 많은 시인들의 경우처럼 그 역시 민중의 생활현실을 형상화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김희수의 시에 드러나 있는 민중의 생활현실은 기본적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고향이 전남 담양의 농촌인 것을 생각하면 시에 나타나 있는 농민으로서의 민중의 생활현실은 대체로 그의 고향 체험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그려져 있는 이들 농민들의 삶이 언제나 보편적인 고향의 정서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희수의 시에 형상화되어 있는 농민들의 삶의 경우 얼마간 개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은 먼저 그가 농민들의 생활공간인 농촌을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물론 근대화, 산업화로서의 중심을 뜻한다. 따라서 근대화, 산업화의 물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은 도시적 삶의 공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뜻을 포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렇다. 농민들의 구체적인 생활공간인 오늘의 농촌의 경우 대부분 젊은이들을 도시에 빼앗기고 노인들만 남아 남아 그 터전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로부터의 소외는 사람으로부터의 소외, 좀더 자세히 말하면 도시로 나가 살고 있는 자식들로부터의 소외가 된다.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농촌에 남아 있는 어머니가 "아홉 자식/소식 그리워" "콩밭을 콩콩/찍으며 우시"는 것도 실은 이에서 기인한다.
콩꽃 흐드러진
언덕배기 가시밭에 앉아
울어메 한나절
사투리 꽃울음 우시네
포플라 신작로 저 너머에
홀씨로 날려버린 아홉 자식
소식 그리워 그리워
피눈물 질금 삼키시네
누가 앗아갔나 피젖은 살붙이들
컴컴 세월 밭두렁 타고 내빼다가
칼바람에 꼬리 잘린 도마뱀 한 마리
울어메 한나절
콩밭을 콩콩
찍으며 우시네
―「콩꽃」 전문
이 시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포착되어 있는 묘사의 대상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이 시에서 "신작로 저 너머"의 도시에 앗겨 버린 "피젖은 살붙이들"이 그리워 "콩밭을 콩콩/찍으며 우시"는 인물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고 보면 자식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에서의 삶이 어머니를 이처럼 그리움으로 "피눈물 질금 삼키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이라고 해서 이러한 그리움과 전혀 무관한 채 무한히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너도나도 도시로 사람살이의 공간을 옮겨 온지 오래지만 근대화, 산업화의 직접적인 현장으로서 도시에서의 삶은 겉보기와 많이 다르다. 오히려 공동체적 일치의 기쁨, 즐거움 등과는 먼 파괴적 불안과 고통이 만연해 있는 것이 도시에서의 삶이다. 따라서 시인 김희수가 「시골의 말」에서와 같이 도시적 삶 일반에 대해 그다지 선망의 자세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추석 명절이라고 달 보러 와서/논두렁 한번 둘러보지 않은 놈덜"이 살고 있는 곳이 도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이와 반대로 농촌의 삶에서 바른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는 농촌에서의 삶 역시 형편없이 소외되어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농촌에서의 삶에 대해 변함없는 애정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무엇보다 농촌에서의 삶이 갖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에 대한 깊은 관심을 통해 확인이 된다.
어릴 적 씨름 잘해 애장군이라고 소문났던 친구 놈은 동구밖 당산가에 딸기알만한 어린 것들 줄줄이 퍼질러 놓고 남의 논 부쳐 먹으며 한세월 살았다.
그러던 어느 봄 하우스농사 망치고 소주에 농약 타서 후루룩 마시고 세상 떠버리자 그의 아내 골목이 훤하도록 분바르고 때깔 벗었다. 눈 까고 머리털 노랗게 볶아 지지고 막차로 술집 갔다.
죽은 놈만 서럽다며 말 많은 아낙들 풍기문란 어쩌구 손가락질하면 "누가 네 서방 달라더냐아 내 새끼들 밥 먹여 달라더냐아―" 온몸 가득 푸른 가시 세우고 바락바락 달밤 뚫어 내빼는 것이었다.
밤내 고픈 애울음소리 질퍽한 울타리
허여연 찔레꽃만 뱀허물처럼 부셨다.
―「찔레꽃」 전문
응축된 서사를 포유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전형적인 이야기시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시가 그렇듯이 이 시 역시 인물형상을 그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때의 인물형상은 살아 있는 생활현실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농민이다.
이 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하우스농사를 망치고 소주에 농약 타서 후루룩 마시고 세상 떠나버"린 그의 "어릴 적" 친구 "애장군"이다. 하지만 그렇게 드러나는 "애장군"이 이 작품에서 그가 정작 주목하는 인물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애장군"의 경우는 "풍기문란 어쩌구 손가락질하"는 "아낙들"과 함께 단지 부차적인 인물로 자리하고 있을 따름이다. 실제로는 남편인 "애장군"이 세상을 떠버리자 "막차로 술집"에 나가기 시작한 애장군의 아내가 이 시의 중심인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에서 애장군의 아내는 마을 아낙들로부터 심하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 김희수가 보기에 "눈 까고 머리털 노랗게 볶"고 애장군의 아내가 술집에 나가는 것은 남아 있는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에 불과하다. 객관적인 묘사로 일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가 애장군의 아내에 대해 변함없이 애정을 기울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장군의 아내에 대한 애정을 통해 시인 김희수가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여자를 통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민중의 악착같은 생명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시는 농민들의 삶에 내재해 있는 끈질긴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작품인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에서 농민들의 삶은 대부분 강인한 생명력을 표상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 비추진 농촌의 경우 전적으로 황폐화되어 있다고 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의 시에서 농촌은 언젠가는 회복되어야 할 공동체적 삶의 터전, 곧 화평의 공간으로 자리해 있기도 하다. 다소 우회적인 경로를 밟고 있기는 하지만 「소나기」 「농부의 싸움」 「빈집」 「옛적 마을」 등의 시에서 다름 아닌 그러한 면모를 확인할 수있다.
시인 김희수는 이처럼 농민의 삶과 관련하여 본원적인 기대를 잃지 않고 있다. 그가 보기에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끝내 꿈을 잃지 않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농민인 것이다. 물론 농민들의 삶을 그가 이렇게 파악하는 것은 시인으로서 그의 의지의 한 표현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현실의 반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본래 시라는 것이 대상에 시인의 관념을 투사하여 형상화하는 것 아닌가. 이로 미루어 보면 그의 시에 형상화되어 있는 농민들의 삶에는 얼마간 시인으로서의 자기다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돼지굴 똥무더기 속에서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야 희망 있나니
사람 사는 마을이라야
골목에 개똥꽃 피고 어허둥실 달은 뜨고
밤 늦도록 수캐도 짖나니
누가 하늘 한번 못 보았다 푸념하는가
누가 한숨으로 하늘 무너져라 절망하는가
내일은 검은 비가 올 거라고
건방지게 세기말을 부르짖는가
오늘, 크르릉 보듬고 사랑하여라
벌컥벌컥 숨쉬고 꾸역꾸역 퍼먹어라
끙끙 똥누고 대지에 콸콸 오줌 쏟아라
오늘은 빛나는 내일의 약속이어니
오늘, 바라바락 악쓰고 삿대질하여라
―「사람 사는 세상이라야」 부분
이 시는 응축된 힘으로 한꺼번에 몰아 부치는 호연지기의 기세가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웅혼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기본적으로 청유형 명령의 어조를 취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의미로만 보면 그러한 청유형 명령의 주요 대상은 보편적인 민중 일반이다. 하지만 조금쯤 거리를 갖고 살펴보면 시인 김희수 자신이 그 대상일 수도 있다.
강인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사람 사는 마을", "크르릉 보듬고 사랑"하는 마을을 세우라고 하는 것이 이 시에서 그가 행하고 있는 청유형 명령의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그러한 마을을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도시적 자아를 기반으로 세울 수는 없다. 따라서 그가 이러한 마을의 모형을 농민적 자아의 삶의 터전인 농촌에서 찾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시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희망 있"고 "꿈 있"는 궁극적인 삶의 공간이 이른바 '마을 공동체'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그의 시는 얼마간 시의성이 떨어지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IMF 경제체제하의 민중현실과 관련해 보면 더욱 그러한데, 물론 이러한 지적은 이 시집의 시들이 창작된 시기를 도외시할 때나 가능하다. 어쩌겠는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전반에 씌어진"(「후기」) 작품들로 채워진 이 시집의 발간이 너무 늦어진 것을 탓할 수밖에.
물론 시인 김희수가 이러한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현실적 여건이 그의 시를 단지 우리 사회 출판문화의 후미진 귀퉁이로 밀어 넣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는 사실 "영혼이란/때로 슬픔의 손수건으로 닦지 않으면/후미진 귀퉁이마다/퍼런 곰팡이가 피어 썩"(「봄비」)게 마련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3. 실천하는 삶, 혹은 사랑의 마음―이학영
시인 이학영은 지난 1975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 시작한 이래 줄곧 민족사의 바른 진전을 위해 투쟁해온 사람이다. 시인으로서보다는 변혁운동을 위한 실천가로, 활동가로 이 땅을 살아온 것이 그이다. 따라서 그는 시적 성취보다는 시적 진실을 좀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시적 진실은 지난 시대를 풍미했던 민중 주체의 민족민주운동을 올곧게 받아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간과해서 안될 것은 이 시집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가 1984년 문단에 데뷔한 이후 그가 처음으로 간행하는, 이른바 그의 처녀시집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의 경우 시적 성취에 비해 시적 진실이 과도하게 앞서 있다는 지적을 면하기가 어렵다. 「더욱 건강한 다리로, 아우야」 「우리가 이루어 가는 세상에」 「바가지가 쫑그락지에게」 「스포츠 공화국」 「TV 앞에서」 「산수유꽃 피는 봄에」 등의 작품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들 시에서 우선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과도한 계몽적 열정으로 인해 미처 그것이 시의 경지에 이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학영의 시들이 모두 이러한 정도의 정신 차원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의 문제의식이 높은 미학적 성취를 통해 승화되어 있는 작품들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시는 농촌의 정서에 토대를 두고 있다. 농촌의 정서는 본래 고향의 정서이기도 하고, 우리 시의 본원적 정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말을 그의 시가 이른바 향토의 세계, 전통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시에서는 언제나 농촌이 실제의 삶의 공간, 생활의 공간으로 드러나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구체적인 사람살이와 맞물린 채 나타나 있는 것이 그의 시의 기본 정서라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그의 시라고 하여 오늘의 농촌이 특별히 활력 있는 생산의 공간, 생명의 공간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서도 역시 오늘의 농촌은 그저 불모의 땅으로 자리해 있을 따름이다. "제 소를 때려죽"인 농부가 "제 목숨을 도끼날로" "스스로 끊어버"(「어떤 농부」)리는 곳이 그의 시에 인식되어 있는 농촌이다. 따라서 그가 "체념의 깊은 베개를 베고/우물 속 같은 정적의 어둠을 맞는"(「귀향」) 자신의 고향에 대해 짙은 연민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가져갈 것 하나 없는 데도
자물쇠에 잠겨 방문은 굳게 닫히고
뽀얗게 먼지 낀 마루 위에
점점이 찍혀 있는 발자국
누구네 집 고양이였을까
이제 물고 갈 생선 한 토막 없구나
소금에 재인 간고등어 한 쪽이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알았던 어머니
장에 가실 때면
열쇠 넣어두던
볼 터진 대바구니
선 반 위에 그대로 놓여 있는데
무너진 흙벼랑박일망정
기대고 서 있는 쇠스랑 한 자루 없고
단단하던 타자마당은 녹슨 보습처럼
버짐 같은 마른 이끼로
봄을 맞고 있구나
―「빈 집에 돌아와서」 전문
시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그의 고향집의 모습이 제법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용악의 「낡은 집」 이래 김관식, 최두석, 이재무 등도 유사한 소재를 다룬 바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성취에 이르고 것이 이 작품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취와 관계없이 이 시에서도 농촌은 형편없이 소외되고 파괴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농촌이 이처럼 불모하고 피폐한 모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근대화, 산업화의 과정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구의 도시 집중화 때문이다. 좀더 나은 의식주를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것이 삶의 실재이고 보면 인구의 도시 집중화는 결국 '역사적 자본주의'의 시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좀더 나은 의식주를 찾아 고향인 농촌을 떠나 다다른 곳이 도시라고 하더라도 도시에서의 삶이 특별히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저 험한 도시"(「그냥 그렇게 보내어 버린 나」), "이 너른 도시"(「눈 내리는 날」) 등 불안한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 것을 보면 그의 시에 인식되어 있는 도시의 삶 또한 불모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가 보기에 도시는 "맞벌이 일을 나가기 위해/제 자식을 죽"(「1989년 서울」)일 수밖에 없는 곳으로, 서민들에게는 여전히 고통의 공간일 따름인 것이다.
이처럼 시인 이학영은 도시의 삶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적 시각을 감추지 않고 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삶 또한 농촌의 삶과 마찬가지로 피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결국 자본주의적 근대를 구성하는 오늘의 현실 전반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오늘의 현실에 대한 그의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는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좀더 나아가 도시적 문물 자체에 대해서도 근원적인 회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이다. 그에게는 좀처럼 적응할 수 없는 것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한 것이 근대적 문명인 것이다. 그의 시에서 이들 문명은 일단 '양변기'로 상징되고 있다. 양변기를 소재로 하여 그는 얼마간 문명 비판까지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이사온 전셋집
그나마라도 어엿한 양변기에 앉아
똥을 싼다. 제법 신문지를 펴들고
점잖게
소득 삼천불 이상의 나라
시민답게
여기서 한 시간 거리만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시골 어머니집 똥간은
아직도 오가리 위에
판자 두 쪽 걸쳐놓은,
비라도 오면 빗물이 고여
똥물이 되려 똥구멍을 찌르는
비료푸대 마다리포 문짝 달린
칙간이다
그럴싸하게 쏘세지도 먹고
식후 디저트라고 사과도 먹고
바나나도 먹을 때는 잊어버리는데
아직도 화장실에 가
똥 싸려고 앉아 있노라면
어머니집 쓰러져 가는 칙간에서
덤벙덤벙 똥 떨어지는 소리 들려온다
그저도 달걀귀신이 살고 있는지
낄낄낄
네 에미 좇이다
아나 똥,
똥보다 못한 것들.
―「양변기에 앉아」 전문
이 시는 무엇보다 해학적 자괴감을 주조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을 통해 그는 여기서 자신도 모르게 점차 길들여져 가는 도시 문명에 대한 자기 반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도시 문명에 대해 이처럼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인간의 자아를 끊임없이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도시 문명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급기야 그는 도시 문명에 의해 훼손되는 자아 일반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그가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한 자아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역사적 자본주의'의 시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의 시 「도시의 밤」이 특히 이러한 자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것은 공히 분열되고 파괴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어 주목이 된다. 언제나 "떠돌이 소용돌이 바람으로/비척거리"(「도시의 밤」)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보편적인 오늘의 자아인 것이다.
이렇게 존재하는 자아의 일상이 결코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는 마땅히 극복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누구라도 하루하루의 생계를 도시적 공간 안에서 버텨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령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온갖 생명들과 더불어 참답게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며 살기는 오늘날 거의 어렵다. 농촌에서의 삶도 지금 당장은 자연의 온갖 생명들로부터 턱없이 유리되고 분리된 채 유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현금의 인간이 삶 일반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불모성과 피폐성을 온전히 수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근대의 완성과 근대의 극복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백낙청 등의 노력도 다름 아닌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이 혼신의 힘으로 애를 쓰고 있는 것도 실은 이러한 문제의 바른 극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현대인의 자아가 이처럼 파괴되고 분열되게 된 것은 공동체적 연대의 기초를 이루는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마음은 물론 누천년 인류의 본원적 심성에 뿌리박고 있는 일치와 화합의 정신, 조화와 중용의 정신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고 있는 두레의 마음, 영성의 마음, 하나됨의 마음 등도 물론 같은 맥락에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요컨대 사랑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자아가 안고 있는 황폐성을 바르게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는 이미 시인 이학영도 잘 알고 있다. 이는 우선 그가 '아가'에 대해 집중적인 탐구를 보여주고 있는 통해 확인이 된다. 「말 배우는 아가」 「아가의 첫 나들이」 「아가의 잠」 「초저녁」 「백년의 세월」 「아가의 첫겨울」 「장난감」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인데, 일단은 '아가'의 마음이 시원(始原)의 마음, 즉 동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가의 마음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분열되고 해체되기 이전의 온전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가'는 동시에 믿음과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오늘의 "찬 바람 부는 이 아비의 세상"(「아가의 잠」)을 바르게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 '아가'이다. "말을 배우"며 "골목이며 놀이터로 세상 나들이를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렵"(「말 배우는 아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가 '아가'에 대해, 즉 '아가'로 상징되는 온전한 자아에 대해 주목하게 된 계기는 비교적 단순해 보인다. 아마도 '아가'에 대한 사랑을, 아니 '아가'로부터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반대로 사랑으로부터 '아가'를 깨달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사랑을 내면화하면서 그의 시는 한층 더 높은 품격을 획득하게 된다. 또한 그의 사랑의 정신은 지난 시대 내내 그를 사로잡았던 투쟁의 정신을 딛고 일어서면서 좀더 능동적인 정서의 깊이를 얻는다. 이는 구체적으로 그가 "오월의 따스한 햇살이 무너지다 만 옛 흙담의 한 귀퉁이에서/민들레 노란 꽃 한 줄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당신"(「찬가」)을 발견하고 있는 것에서 확인이 된다. 미물에 불과한 민들레 노란 꽃잎의 움직임, 곧 미세한 자연의 움직임로부터 마침내 그가 사랑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윽고 시인 이학영은 「겨울 숲」에 이르러 "사람이 없는 데도" 저 스스로 "살아" 숨쉬는 숲 자체를 사랑으로 경배하게까지 된다. 인간의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더라도 저 스스로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는 가운데 "안식의 길을 떠나는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안고 있는 것이 그가 인식하고 있는 자연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드러나고 있는 그의 사랑의 정신은 이밖에도 「밤에 부치는 노래」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 「각시꽃」 등의 작품을 통해 점차 심화, 확산되고 있다. 그의 사랑의 정신은 이제 사람살이의 바른 실천을 위한 무한한 진리로까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살아 남아서
이 봄을 맞은 죄로
아려오는구나, 사랑이여
눈물도 묻혔다 피어나면
선연한 핏빛으로 오는가
불타버린
어느 옹기막 자리에선들
저리도 붉은 꽃 피어날 수 있을까
―「각시꽃」 전문
이학영의 시 중에서는 드물게 아름다운 작품이다. 일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무구한 이미지들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로부터 그의 올곧게 영근 사랑의 정신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해맑은 마음으로 '각시꽃'과 조용히 화응하는 가운데 생명에의 무한한 경외감, 즉 사랑의 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그가 시를 통해 추구하는 이러한 사랑의 마음은 「성묘」 「어린 날」 「밤에 부치는 노래」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 등의 작품에서도 확인이 된다. 때론 안쓰러움으로, 너그러움으로, 그밖에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의 마음으로 전이되어 드러나고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들 시와 관련하여 혹자는 힘이 빠졌다며 폄하하는 말을 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내뱉는 췌언에 불과할 따름이다. 오히려 그는 이들 작품으로 하여 비로소 시인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4. 맺음말
‘역사적 자본주의'의 한 시기로서 근대를 참답게 완성하고 극복하기 시인들의 뜨거운 노력과 관계없이 IMF 경제체제에 편입된 나라의 형편은 여전히 힘들기만 하다. 물론 나라꼴이 이렇게 된 책임을 현재의 김대중 정부에게 물을 수는 없다. IMF 경제체제는 이미 김영삼 정부 말기부터 구체화된 바 있지 않은가.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그 수습의 책임을 떠안고 출발한 것이 오늘의 김대중 정부이다. 따라서 구태여 그 책임의 소재를 묻자면 응당히 과거 김영삼 정부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대응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IMF 경제체제는 기본적으로 초국적 자본의 만행과 그에 따라 증폭된 경제 상황에 대해 당시의 김영삼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발생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관련하여 김영삼 정부를 무조건 단죄만 할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곧 팍스 아메리카나 전략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문건에는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에 의한 세계패권전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고 하지 않은가. IMF 경제체제는 결국 21세기에도 계속해서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미국 중심의 거대자본이 이루는 지칠 줄 모르는 자전성(自轉性)의 산물이라고 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IMF 경제체제의 조기종식을 위해 다양한 방법적 탐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방법적 탐구와 관련하여 가장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지속적인 재벌개혁과 외자도입이다. 재벌개혁을 통해 세계의 독점자본을 끌어들이자는 것인데, 그것으로 과연 IMF 경제체제를 정상화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오히려 그로 인해 IMF 경제체제가 더욱 구조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재벌을 대신해 세계의 재벌이 나라의 경제를 장악했을 경우를 떠올려 보라.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었을 때의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생각하면 아뜩하기만 하다. 결국은 국가 자체가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되돌려진 홍콩 정도만큼이나 정체성이 남아 있게 되면 차라리 다행일 듯싶다.
아직도 자본주의적 근대를 완성하기 위해 시인이 할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제대로 된 국민국가의 내면을 이루는 일과 결코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학영의 시와 관련하여 사랑의 정신을 강조했던 것도 실은 그것이 참다운 근대적 시민정신의 구현 속에서 가능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오늘날 시인이 해야 할 일은 좀더 명료해진다. 국가를 초월하여 활동하는 면이 좀더 넓어지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21세기의 삶일 것이다. 통일의 문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우리가 함부로 세계화라는 허구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화라는 슬로건의 배후에 미국이라는 초국적 자본의 종주국이 도사려 있지 않은가.
이제는 우리의 시도 IMF 시대라고 하는 변화된 사회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좀더 안목도 높이고 운신의 폭도 넓혀야 한다. 어차피 시가 계몽적 열정을 내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일반대중보다는 앞선 자각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깨달음을 담아낼 수 있도록 일로 매진해야 하리라는 것이다.(199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