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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남 남인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한시 창작과 내면의식
- 프로파일 류병훈 ・ 2020. 12. 19. 20:31
18세기 영남 남인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한시 창작과 내면의식
이 논문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삼산 류정원의 삶과 학문세계 학술대회’(2020.11.11.)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
최은주(崔恩周, 1975-),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1. 머리말
2. 류정원의 한시 창작에 대한 견해
3. 시 작품에 함축된 그의 내면의식
4. 맺음말
[원문은 아래 파일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릴 때 할배 방에서 어른들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었다. 한때는, 그리고 지금도, 이런 과거 이야기를 하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핀잔을 듣기 일 수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보니, 그런데 이 나이에 생각나는 것들은 별로 없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부스러기로 남아있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트라우마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고, 흐려지고, 변성되고, 압축되고, 변형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이 말하는 그 트라우마 같은 원형(arche)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지워지지 않아서 질병이 되는 경우가 파라노이아라면, 지워져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가끔 분출되며 탈주하는 것이 들뢰즈의 스키조일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이야기를 해보자.
어른들 말씀은 사내로 태어나면 출세간(출세), 즉 세상사로 나가는 것을 원대한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 삼산은 그런데 워낙 골짜기 였다. 지금이야 차가 다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골짜기에서 벗어난 삶을 살려고 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인성과 학문을 갈고 닦고 그리고 세상에 뜻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이 있을때에야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농부가 토지와 함께 살다가 가는 것이지. 세월은 골짜기를 자연스레 골짜기로 두지 않았으니까? 세계사의 산업혁명은 이골짜기에도 다가 왔다. 댐.
내가 들었던 머릿속에 남은 희미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중 떡보의 이야기는 어릴 때 들어도 또 해달라고 하고 또 듣고도 해달라고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다. 시리즈처럼 긴 이야기, 매우 긴 이야기로, 마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만큼 긴 이야기 인데... 명나라 장수가 왔는데, 조정에서 그를 맞이하러 나갈만한 사람들이 모두 사양하였다더라. 그래서 태백산 골짜기의 떡보가 자기가 가서 맞이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제까지 먹고 싶었던 떡이라도 실 컨 먹어보자는 속셈이라 한다. 시루에 담긴 떡을 배터지게 먹고 나섰다. 명나라 장수와 마주하여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서로 사맞디 아니 할세), 명나라 장수가 손으로 네모를 그렸다고 한다. 떡보는 속으로 나는 네모난 떡을 먹고 온 것이 아니라 시루의 둥근 떡을 먹고 왔다고 동그라미를 표시했다고 한다. 명나라 장수가 감탄했다고 한다. 지리를 물으니 천문으로 답한다고 이해했단다. 이 이야기는 트라우마도 아니고 변형을 굽이굽이 거친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원래 매우 긴데, 지금 생각나는 나머지 이야기는 지워져서, 어느 날 다시 솟아날지 모르지만, 지금은 생각이 안 난다.
이런 이야기를 믿고 있던 나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로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책을 읽어 보고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어른들의 술시중을 들면서 사랑방에서 들었었던 요순의 선양, 주나라 문왕의 천문, 춘추전국시대 오패들, 전국시대와 진시황, 장량과 한신, 유방과 항우 대 전쟁, 그리고 잘 알려진 삼국지의 유비와 공명 등의 이야기들에 대해 책을 읽은 적이 없지만, 책 한 두 번 본 사람들 이상으로 흐름을 알고 있었다고 여겼다. 떡보의 이야기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문제 거리라는 것이다. 출세간에서 중요한 것은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화라고 수없이 들었었고, 어른들은 이 셋을 꿰뚫지 못하면, 출세간을 했더라도 귀양가거나 사약을 받는다고 은근히 겁주듯이 이야기를 흘렸다. 세상사에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통달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듯이, 농투성이로 땅를 파고 살아라고 했었다. 그럼에도 어린시절에 붓으로 글자쓰기와 읽기는 가르치는 동네였다. 나이 많은 이들은 심심찮게 천문지리와 주역을 말했지만, 이런 떡보이야기보다 훨씬 흥미롭지 못했다. 출세간의 필수로서 주역에 관한 것인지, 그런 이야기도 지워져 버렸다. 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조 전기의 사화나 후기의 환국으로 인해 영남 사림들이 몰락하였던 것을 배우면서, 어른들은 괜시리 세상사에 나가서 가문의 화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기를 돌려서 했는지 몰라도, 천문지리를 중요시한 것에는 매력이 있었다.
<14세에 주역(周易)을 공부했다. 그는 천하의 이치가 모두 주역에 있다고, 여기고 간혹 밤새 자지 않고 주역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늘 삼산의 곁에서 스승의 역할을 했던 참판공[류석구(柳錫龜, 1673-1737)]이 하루는 아들에게 ‘경일위삼(徑一圍三)’의 뜻을 해석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는 반나절 동안 생각하다가 갑자기 베개 옆의 찻그릇이 있는 것을 보고 줄자로 그것을 재어본 후에 그 법을 깨달았다.> 오용원(吳龍源, 1965-):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삶과 사유세계,3. 가학家學의 계승과 학문수학.
이 이야기는 원의 지름과 원주의 길에 대한 비례관계를 실재적 측량을 발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서양의 수학사를 읽으면 이런 고민은 기원전 5세기 경 고대 그리스 이래로 삼대 난문제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14세에 고민하고 경험적이고 실험적으로 푸는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 천문의 원과 토지 정전의 문제에 관심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흐린 그림자일 것 같기도 하다. (54mkf)]
물론 이런 이야기에서 천문지리까지 확장되는 이야기는 전설과 민담처럼 부풀려지고 변형되고 확장되어 전승되었을 것이다. 왜 천문 지리라고 했을까?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대학원에서 그리스 철학을 귀동냥하면서이다. 박홍규 선생님은 항상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려면 자네 수학을 공부하게. 그런데 그 당시에 인문학에서 읽을 수 있는 수학책 문고본 두 종류이다. 하나는 공간[기하학]의 역사 다른 하나는 수학[산술학]의 약점이었다. 전자의 책에는 그리스의 3대 난문제의 언급이 있었다. 나중에서 무한에 관한 문고본 등도 있었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마치고 강사를 하던 시절에야 “수학의 확실성”이라는 책이 번역되었다[지금은 재역되었다]. 여기에 그리스 3대 난문제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와 수학사에서 이 문제가 19세기 비유클리트 기하학에 언급과 무한이라는 개념의 성립에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나로서는 천문지리라는 문제가 60진법과 10진법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게다가 크리스트교가 말하는 666의 이야기는 요즘 수학사에서 십진법이 60진법의 적용불가능을 몰라서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타자를 악마로 몰아붙이는 광기와 같은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철학한지 40수년이 지나서야 이런 문제는 상층의 철학과 심층의 철학이라는 서로 교환될 수 없고, 적용도 대응도 될 수 없는 전현 다른 사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광기, 폭력, 탐욕, 지배는 한 ‘사고’의 광기가 “같지 않은 사유”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이기심)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게 되었다. 프랑스 철학을 배우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어릴 때 들었던 막연한 이야기들이 무슨 비밀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알 수 없는 이야기 속에 진실을 담고 있다고. 그런 이야기로 공부를 시작하는 이는 드물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문득 흐려진, 또는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먼지가 되어 버린 이야기(이미지)에서 무엇인가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정되어 있다고 여기는 트라우마가 아니라, 흐려져 안보이고 흩어져 먼지 같은 것이 어느 날 조각들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또는 파편이 되고 이것을 이어 절편이 되고 짜맞추기처럼 그림이 되는 회로의 선들이 이어지는 과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로의 선들은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나긴 노력에서 그림(이미지)가 성립할 것 같았다. 지금도 그런 노력을 한다. 그 부스러기 같은 이야기들에서 천원지방, 경일위삼(徑一圍三), 서양의 파이(원주율)의 이야기가 단초가 되어 삼산할배의 사유의 부스러기의 선들을 연결하여 탈주선을 만들거나, 절편들을 평면에서 고원을 형성하는 것은 다음 세대(아제 인간)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거 누가 한다고, 그렇다 누구나 다 하라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욕심이 아니라 욕망과 열망이 있는 소크라테스 같은 자가 ‘보다 잘 아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물어가며’ 배우고 그리고 익힐 것이다. 공자는 이 욕망의 과정을 즐거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배우고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다. 이런 지음지기를 만나면 어찌 약주 한잔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나의 벗 권용원은 일찍이 느끼고 실행했던 실천가였다. 욕망과 열망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먼지가 오래 덮히고 쌓이고 지층이 되면서 나오지 못할 뿐이다. 나오게 하는 것은 문제거리를 진솔하게 대하며, 구체적 경험과 실험으로, 또한 소크라테스처럼 찾아 나서서 노력하는 자에게 ‘불역열호아’가 있다는 것을 철납 49년 동안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기억은 희미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연결하려고 기다리는 삶의 과정 속에 기다리고있다. 그 과정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연결이 없는 것이다. 물체는 연결을 짓지 못한다. 살아있는 연결성을 윤구병은 수학적으로 ‘연산자’라는 표현을 쓴다. 벩송을 빌려서 ‘연관자’로 표현하고 싶다. 탐욕과 오만의 사고에서 관계(관계자)를 정립하는 데 비해, 욕망하며 열망하는 자들에게 ‘연관자’로 이어질 것이다. 이 이어짐을 들뢰즈가 탈주선이라고 했다. 오랜 과정에서 인민 속에 깊이 묻혀 있던 우리말이 쓰여지고 있는 시대에, 한글로 쓰여진 이야기를 통하여 회로를 이어서 탈주선이 그리고 평면를 이어서 고원이 아제인간에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54MKD)
논자는 유정원이 시와 문장을 쓰는 것을 조심했다고, 작문해도(作文害道) 또는‘도본문말(道本文末)라는 용어로서 푼다.나로서는 일찍이 조선조 전기의 사림파들과 사장파들의 차이에 대해 너무나 많이 이야기를 들었었고, 게다가 일제를 거쳐 온 남쪽의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의 검찰개혁과 사법부도 사장파에 머물러 있다고 여긴다. 여기 사림과 같은 학자가 등장하여 외롭게 사림과 사장의 대립각을 만들고 있다.
이런 이야기도 조선 후기의 여러 환국(換局)들의 이야기로 변질되었다.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학창시절에 학교에서 선비는 시서예악사어수(7자)를 공부하며 연마해야 한다고 했다. 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예악사어서수(6자)라고 했다가 무안을 당하고 그 이후는 머리 속에서 거의 지워졌다. 그러다가, 프랑스에서 여러 불불사전을 이리 저리 보게 되었다. 벩송은 주황색은 노랑색과 붉은 색의 중간색이 아니라 그 색깔의 고유성이 있다고 하며, 그 색깔을 다른 생각과 경계지우는 구별선은 없지만 그 자체의 고유성이 있다. 우리의 자아도 마찬가지로 인간 종전체와 경계지우는 선이 없지만 개인의 고유성이 있다고 벩송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서야 기하학과 달리 산술의 개념에 대해 왜 다섯이지. 즉 우리나라나 프랑스나 원래는 무지개색이 다섯 색이라 한다. 왜 일곱 색이지? 프랑스 사전은 무지개 색을 일곱 색이라고 하는 것은 크리스트교 미신(la superstition)이라고 명기해 놓았다. 일곱 색이라. 일곱 자로 인격 도야의 필수를 설명하는 것도 문제로구나. 즉 게다가 시서(詩書)라는 사장을 앞세운 참요를 만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개념을 창안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장이 우선이라. 이에 대해서 답은 관념론이 사장파이며 자연론이 사림파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하자. 이로부터 관념이냐 극우의 것이지만 일반인이 사용하는 일상화된 용어와 개념도 관념에 침 발라져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프랑스 철학을 천천히 읽으면 보인다. 침 발라진 것이 무엇인지는 푸꼬의 광기의 역사를 보면 될 것이다. 미친 짓을 하면서도 미친 자들 속에서 정상으로 보인다. 일제의 법률을 그대로 외워서 사용하는 방식도, 전광훈이 떠드는 하느님의 고함도, 조중동의 신문도 마찬가지로 푸꼬의 해명으로는 광기의 역사이라는 것이다. 아제 인간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한글을 읽은 세대가 그 토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 글을 한자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영어로도 프랑스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태가태 파라삼가태’라고 하든지 ‘가자 가자 만디를 전자서’하든지 같다는 것을 알아챈다. (54M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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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영남 남인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한시 창작과 내면의식
- 최은주(崔恩周, 1975-),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1. 머리말
영남지역의 남인은 중심인물이었던 갈암 이현일이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화를 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여러 차례 환국시기에 남인이 한양에 거주하기 불편하였으리라...]
간단히 언급했지만 영남 남인으로서 류정원의 현실은 녹록치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성리학을 공부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불평의 기운을 글로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부담스러워했다.그나마 자신의 내면 심리를 간접적이나마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시(詩)였을 것이다.
2. 류정원의 한시 창작에 대한 견해
류정원은 주자의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 재앙이 고문과 시문 그리고 과문科文임을 언급했다. 주지하다시피 주희를 비롯한 도학가들은 원론적으로 문학 행위는 학문 정진에 방해가 된다는 ‘작문해도(作文害道)’의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고 ‘문은 도에서 흘러나온다’(文從道中流出)라고 주장하는데 학문 정진에 기반한 내면 수양을 통해 도(道)를 갖추면 훌륭한 문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A4, 3쪽)
3. 시 작품에 함축된 그의 내면의식
그 뒤로 시름겨워하다 술을 흠뻑 마시고 그 속에서 괴로움을 담아 시를 읊조리는 류정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만 그는 여기에서도 그렇게 읊은 시를 티끌에 비유하며 경계하고 있다. 시가 마음을 달래는 수단임을 부정하지 않고 또 스스로 그러한 효능에 의지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끝까지 ‘문은 도에서 흘러나온다’(文從道中流出)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4. 맺음말
정주학을 공부하며 도학자로 자처했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도본문말(道本文末)’의 입장을 표방하며 때때로 ‘작문해도(作文害道)’의 견해까지 내세웠다. 류정원은 특히 주희의 글을 탐독하여 연구하였기에 한시 창작에 있어 주희의 생각에 적극 동조하였고, 이에 따라 학문에 방해가 될 정도로 시 창작에 골몰하는 것을 깊이 경계했다.
(5:18, 54MKF)
** 논자가 본문에서 인용한 한시들 중에서 몇 수를 옮겨본다.
1) 자기 경계(自警)
문집에 첫 번째로 수록된 작품은 1725년(영조 5)[영조1년]에 창작한 스스로 경계하다 라는 제목의 시이다. 류정원은 사람은 선한 성품을 받아 태어나고 그것을 잘 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삶 전반을 관통하지만, 주어진 현실과 제한된 환경 속에서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류정원이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시에 담은 것은 다분히 의식적이었다.
천지로부터 바른 본성 받고 人於天地受中生
내 몸에 짊어진 짐이 본래 가볍지 않다네 擔荷吾身自不輕
우하와 상주는 특별한 시대가 아니고 虞夏商周非異代
낙민과 추노는 떳떳한 법도라네 洛閩鄒魯卽常程
천금으로 삼 년 만에 기예 익혔다 하지 마소 千金莫道三年藝
하나의 거울도 백 번 정밀하게 단련해야 하네 一鑑只要百鍊精
이르든 늦든 돌아와 지결을 논하리니 早晏歸來論旨訣
별과 해처럼 밝은 것이 성명에 있네 昭昭星日在誠明 [ 스물넷]
2) 외부 세계에 대한 내적 자아의 갈등
제목은 네모난 못(方塘) 이다.
돌 다듬고 못 만들어 반 이랑 열리니 裁石爲塘半畝開
흰 구름 걷힌 곳에 달이 배회하네 纖雲捲處月徘徊
넘실넘실 흐르는 물 끝없이 고였는데 盈盈活水渟無盡
제비 날아와 물결 찰까 두려워지네 恐有蹴波燕子來 [방당(方塘)] [쉰다섯]
[통천군수 시절(쉰셋)
눈보라 휘몰아치는 썰렁한 관아에서 北風吹雪郡齋寒
외론 등불 아래 시름겨워 잠 못 이루네 愁伴孤燈做夢難
한 해가 또 섣달이 다하는 것을 보니 太歲又看殘臘盡
덧없는 인생살이 언제나 한가해지려나 浮生能得幾時閒
집 떠난 세월은 터럭처럼 많이 흘렀고 離家日月多如髮
바닷가 강산에서 억지웃음 지을 뿐이네 沿海江山只強顔
초심을 점검해 보니 하나도 말할 게 없고 點檢初心無一道
옷자락 잡고 베개 밀치고 일어나 서성이네 㩜衣推枕起盤桓[우제(偶題)]
[통천군수 시절]
동해에 봄이 왔어도 봄을 보지 못하고 春到東溟不見春
삼월 눈 내린 창가에 누운 기인의 신세 雪窻三月臥畸人
고향 그리는 마음 물과 같아 멈추지 않고 鄕心似水無停住
성상의 은택 산과 같아 황송할 뿐이네 聖渥如山但主臣
시름 뒤에 흠뻑 마시니 이제야 흥취를 알겠고 愁後飮多方識趣
고요히 괴로움을 읊은 시 또한 티끌이 되네 靜中吟苦亦成塵
언제나 굴레를 벗고 돌아가서 何時脫得鞿韁去
길이 강호에서 자유롭게 살려나 長作江湖自在身
이 시는 권정웅(權正雄, 1708~1767)과 이충국(李忠國, 1715~1777)이 보낸 시에 차운한 것으로 3수의 연작시이다.
[세상을 뜨기 전]
① 그대와 한 골짜기를 반으로 나눠 가지고 賸欲與君分一壑
시원한 발 아래서 시와 술로 여생을 보내고 싶네 風簾詩酒度餘年
② 독한 약제에 머리 이미 백발 되어 부끄럽고 豕零自慙頭已白
은둔해 사니 어찌 현묘한 담론을 감당하랴 豹斑那敢口談玄
그저 나무하고 물 기르며 한가한 대화 더하니 無端薪水添閒話
표방하여 세상에 전해지는 게 오히려 싫다네 標牓猶嫌世共傳
류정원이 1760년(영조36) 이민적(李敏迪, 1702~1763)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때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이상 다섯 편을 골라봤다.]
**연관 인물들
1627 이현일(李玄逸, 1627-1704) 갈암(葛庵)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1669 고재(顧齋) 이만(李槾, 1669-1734)에게 보낸 답장.
1673 류석귀/구(柳錫龜, 1673~1737) 삼산의 부친 참판공
1679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
1680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 삼산의 재종 숙부. 용와의 문하에 들어가다.
1684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
1692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삼산의 재종숙.
1694 우천(牛川) 정옥(鄭玉, 1694-1760)
[1698 이천보(李天輔, 1698-1761) 본관은 연안,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庵), 시호는 문간(文簡). 월사 이정귀의 직손이며 증조부는 비변사 당상을 지낸 이일상이고 옥천군수를 지낸 이주신(李舟臣)의 아들이다.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외손자로 숙종비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문학에 힘써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 1739년(영조 15)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40년 홍문관 정자가 되고 교리·헌납·장령 등 언관직을 역임한 뒤 1749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같은해 좌의정에 오른 뒤 영의정으로 임명됐다.]
1702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1702-1761)은 18세기 영남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이다.
1702 이민적(李敏迪, 1702-1763): 류정원이 이민적에게 보낸 편지 1760년(영조36)
1702 (영조 26) 당시 경상감사였던 조재호(趙載浩, 1702~1762)에게 보낸 편지.
1708 권정웅(權正雄, 1708-1767) 안동출신
1711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1715 이충국(李忠國, 1715-1777) 예천 출신 1750년 문과에 급제해 1755년(영조 31)에 전라도도사로 부임.
1724 삼종제 류장원(柳長源, 1724~1796)
[1726(스물넷) [(영조 2)] 겨울 와룡산 현사사(玄沙寺)에서 공부하다. 여럿 동문들을 만나다. [단사(丹砂) 김경온(金景溫, 1692~1734), 백운재(白雲齋) 이정신(李廷藎, 1685~1738), 권정태(權正泰),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 학음(鶴陰) 김경필(金景泌, 1701~1748), 도어재(陶漁齋) 권정시(權正始, 1692~1765), 류태제(柳台齊, 1699~1767), 토헌(土軒) 권치(權緻, 1693~1766), 김경란(金景瀾), 육인재(六忍齋) 김광국(金光國, 1682~ 1755) 등 여러 유생들과 와룡산 현사사에 모여 며칠 동안 묵으며 강학을 위한 회합을 가졌다. ]
전겸(全謙)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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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도연명(陶淵明, 365-427)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 그의 산문시, 귀거래사(歸去來辭): 세파에 시든 몸과 마음을 안식처를 찾아 전원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시이다.
1050 중국 북송의 유학자 사양좌(謝良佐, 1050-1103)
1130 주자(朱熹, 1130-1200)가 장자(張栻)와 남악(南嶽) 형산(衡山)을 유람하고 쓴 남악유산후기(南嶽遊山後記). .. 남악 유람 당시 주희와 장식이 주고받은 시가 140여 수나 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 현재 삼산에 대한 연구자들
1958 우인수(禹仁秀, 1958-) 경북대 사대 교수 <17세기 산림의 세력기반과 정치적 기능, 경북대, 1993, 이병휴.> 조선후기 영남 남인 연구(경인문화사, 2015). “영조대 영남 남인 류정원의 관계 진출과 관직 생활”, 대구사학 140(대구사학회, 2020).
1969 주광호(朱光鎬, 1969-) 동덕여대 교수, <주희 태극관 연구: <태극도설해>를 중심으로, 북경대학, 2005, 朱伯崑> / 주광호, “류정원 역해참고의 성리학적 해석 특징과 의리역학”, 동양철학 42(한국동양철학회, 2014).
1975 최은주(崔恩周, 1975-), 경북대학석박,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17世紀 詩選集 編纂에 대한 硏究, 경북대, 2006, 황위주> “18세기 영남 남인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한시 창작과 내면의식”(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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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골짜기에서 들었던 이야기로 ‘사문난적’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문장과 시문을 쓰는 것을 경계 했었다고 했다. 알 수 없지만, 직접 연관이 없을 것 같다. 단지 나중에 사문난적이란 주자에 대한 이의와 비판을 해서 안 된다는 정도를 넘어서, 대명의 틀에서 벗어나서 안 된다는 소중화의 사상이 노론을 지배했다고 들었다. 가끔 이들이 행한 방식이 일제의 사상탄압,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지금의 검찰도 같은 방식으로 다른 생각하는 자들을 몰아붙이는 것 같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빨갱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문난적이라는 관념 놀이(푸꼬의 입장의 광기)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이야기 했다가 규성선배에게 꾸지람을 들었지만 말이다.
프랑스 철학이 구조주의 시대에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한 것은 정상이란 속좁은 이성이 광기였다. 인민이야 구분을 하지 않고 사는데, 이 구분을 넘어서는 논의가 캉길렘의 별종(l’anomalie)이며, 윤구병의 “같잖은 이야기(nothos logos)”라 여긴다. 같지 않은 생각을 하는 8천만이 계약과 협상, 그리고 양도하지 않은 자연권을 지니고 제도들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루소를 이은 들뢰즈일 것이다. (54MKG)]
* 참조 1.
사문난적(斯文亂賊)
성리학이 교조화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방 붕당의 당인들을 매장시키는 악의적인 용어로 활용되었다. 허목, 윤휴, 윤선도, 윤증, 박세당 등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곤욕을 당했다.
송시열을 비난했던 윤선도가 사문난적으로 몰려서 매장되었고,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정한 윤휴는 비난을 받았다. 주자학을 부정하여 사형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역모에 휩쓸려 죽었다. 송시열도 주자의 한계를 인정했지만 그걸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인의 영수이자 송시열의 정적인 허목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학문도 진리일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하여 사후 사문난적으로 몰렸으며, 윤선도는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송준길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이라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가 사후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관작이 추탈되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스승 송시열과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절교하고 소론의 영수가 된 윤증 역시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후에 이경석의 묘비를 쓰면서 송시열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박세당은 그의 저서 중 송시열을 비판한 내용이 언급된 책 ‘사변록’이 출간되자마자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 당했다.
** 참조 2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조선 정조가 당대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이 참신한 문장들을 패관소품이라 규정하고, 기존 고문(古文)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저항했던 인물로 박지원과 이옥을 꼽고 있다. 박지원은 집안이 어려워서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우게 된다. 덕분에 그의 글은 다른 사람들보다 고전 문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정조는 박지원에게도 자송문을 쓰게 시켰다. 하지만 박지원은 너무 죄가 커서 자송문을 쓸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옥은 과거에서 장원했지만 소품체 문체를 쓴 것을 정조가 찾아 꼴찌로 처리하였다. 하지만 이옥은 소품체 문체를 버리지 않고 결국 벼슬길도 포기 했다. 이 둘은 캉길렘 표현으로 비정상이 아니라 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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