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서원경(청주의 옛지명) 남천에 외나무 다리를 놓고 내의 남쪽사람들은 이 다리를 건너 문안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언젠가 어린 아들 하나을 둔 젊은 과부가 시주를 하러 온 대원사 행자승에게 아이를 맡기고 장을 보러갔는데 행자승이 졸고 있는 사이에 아이가 밖으로 나와 엄마가 건너간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냇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문안에서 돌아온 과부는 이것을 알고 아이를 건져 화장하고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아이의 명복을 빌었다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원사주지는 35칸의 큰 다리를 놓아 아이의 명복을 빌었다한다. 그러나 무심천은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른다하여 무심천으로 명명되었다.
*** 어문학적 ****************************************
1906년 대홍수때 청주가 물바다가 되자 일제는 정지작업과 제방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의 무심천을 축조했다. 그리고 새로 막은 제방이름을 무성뚝 또는 무심뚝이라 불렀으나 곧 무심천이라는 이름은 1923년 이후부터 불리게 된 셈이다.
***야사가 말하는 무심천의 유래(박청홍 향토사학자) *****
사실 무심천만큼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명명된 내는 없다고 본다. 평소에는 흐름이 완만하고 물량도 많지 않으나 우기가 닥쳐오면 범람하고 노도의 물세가 양편의 전답을 씻기는 것은 물론, 사람을 앗아가는 형국이 벌어져도 하늘의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내릴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심한 세상을 한탄하게 된다. 인생과 흐르는 물결은 그 행로가 불연속적으로 변하기 쉬운 한숨소리와 같기 때문에 청주의 무심천도 하늘을 원망하는 자조적인 이름으로 언급되다보니 누가 명명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세상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근접한 이야기다.
*** 그외 몇가지 설 **********************************
* 전하는 이야기로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청주를 들러 정진원의 한 여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 뒤 이 선비가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르니 그 여자는 이미 변심하여 있었다. 이를 한탄하여 읊은 시 문구 가운데 무심이란말이 있어 무심천의 지명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 삼국이래 청주를 상당이라 했으니 상당을 중국의 상당이라는 지명에 비하여 그곳의 양두산동남으로 유입하는 심천을 본따서 심천으로 동음이자화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