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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신석기 유물
* 현생인류의 출현
우리나라 구석기시대는 단양 도담리 유적으로 보아 약 70만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기와 중기구석기의 원시인류는 주로 깬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후기 구석기시대(4~1만 년 전)에 이르러 현재 인류의 조상인 현생인류가 출현한다. 그들은 돌날을 이용해 돌날문화를 열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수렵도구를 제작하였다. 돌날기법은 몸돌에서 연속적으로 돌날을 떼...
어낼 수 있는 기술이다. 이들은 정착생활이 아닌 계절적인 이동생활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호모사피언스 곧 현생인류가 한반도에 나타난 것은 후기구석기 시대이다.
유전자 Y염색체로 본 인류의 이동 경로를 보면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인류는 ‘메소포타미아’ 부근에서 추위에 적응한 후 세 갈래로 나누어 졌다. 그 중 한반도로 온 현생인류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문화를 후기 구석기문화라 한다. 이들이 한반도에 들어 온 시기는 약 3만 5천 년 전으로 바로 한국과 일본에 처음으로 후기 구석기인들이 나타난 시기와 일치한다.
그런데 최근에 현생인류에 대한 학설이 수정되고 있다. 사실 초중기 구석기 시대의 인류는 우리와 관계없는 원시인류로 오래전 전멸한 인류이며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는 원시인류로부터 현생인류가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다. 최근의 학설에 의하면 양자가 모두 같은 종류로서 이들의 혼혈이 현생인류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 한반도에서 세계 최초의 2만 년 전 신석기 유물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인류가 최초로 뗀석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약 250만 년 전인데, 뗀석기에서 간석기로 발전하는 데에 무려 250만 년 가까이 소요되었다. 인류는 99.5%를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셈이다. 인류고고학에 의하면 약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인류는 티그리스ㆍ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비옥한 초승달지대에 정착하고 일부는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약 1만 년 전쯤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구석기시대는 끝나게 된다. 그리고 간빙기의 새로운 환경 하에서 신석기시대가 시작된다. 이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인 간돌(마제석기)이 여러 점 출토되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1만 8500년 전∼2만 55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장흥군 신북마을의 후기구석기 유적에서 간돌 7점과 이를 만든 숫돌 2개 등 신석기 유물이 출토 됐다. 이 유적의 중심연대는 약 2만2천 년 전이다. 발굴된 마제석기는 도토리 등을 갈 때 쓰는 갈돌 1점, 큰 동물을 자르거나 나무를 다듬을 때 쓴 간돌 자귀 2점,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홈석기 5점 등이다. 홈석기는 돌의 위나 아랫부분 또는 테두리 부분이 홈처럼 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뭔가를 빻고 곱게 가는 데 쓰인 도구로 추정된다.
그간 한반도에서 간돌 유물로 가장 오래된 유적은 1만 2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제주 고산리 신석기 유적이다. 따라서 이보다 1만년이나 앞선 유적에서 신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마제기법이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사용됐다는 학계의 통설과 달리 이미 후기 구석기시대에 간석기를 만들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고고학계는 ‘1만 년 전 신석기혁명’을 통하여 처음 신석기를 쓰게 됐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무려 2만 년 전 신석기가 발견됨으로 해서 ‘1만 년 전 신석기혁명’ 이론을 무색케 했다.
* 신석기 유물의 의미, 최초의 농경 시작
이때의 신석기 유물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음을 뜻한다.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고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기르는 등 식량 생산단계에 접어 든 것이다. 이는 ‘신석기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인간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경제사를 제도발전 차원에서 다룬 공로로 1993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버클리 대학의 더글러스 노스 교수는 1만 년 전 신석기혁명이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큰 변화로 보았다. 그래서 이를 1차 경제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산업혁명을 2차 경제혁명으로 보았다.
수렵채취 사회는 부족원이 다 같이 사냥하고 채취하여 나누어 먹는 원시 공산사회였다. 인류의 역사를 350만 년이라고 보면 349만 년 간 평등한 공산사회에 살았다. 비록 배고픈 평등이었지만 말이다. 이에 반해 농경사회는 사적재산권을 인정해줌으로써 효율과 생산성을 높였다. 사적 소유제라는 유인으로 인류가 놀랍게 진보하였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용도에 맞추어 돌을 갈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돌괭이와 돌칼 등을 만들어 땅을 파고 야생 곡물을 심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들에 의해 인류 최초의 농경이 시작된다.
참고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는 약 기원전 9500년경부터, 인도에서는 약 기원전 6000년경부터, 고대 이집트에서는 약 기원전 5000년경부터, 그리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세계 최초의 쌀농사
우리의 벼농사는 중국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아니었다. 고대 한국의 쌀농사가 중국보다 앞서 시작됐다. 쌀에 관한 한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농사가 시작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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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창과학산업단지가 들어선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구석기 유물들과 함께 고대 볍씨들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볍씨는 야생 벼가 아닌 재배 벼였다. 고대 우리나라에는 야생 벼가 없었기 때문에 분명한 경작의 흔적이었다.
서울대학교의 방사선탄소연대측정실험과 미국 지오크론시험소 유전자분석결과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 1만 5000년 전의 볍씨로 밝혀졌다. 양국의 공인기관이 인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왔던 10500년 전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보다 적어도 3천년 이상 앞선 것으로 공식 확인되었다. 곧 한반도의 쌀농사가 중국보다 3000년이나 앞서 시작된 것이다.
쌀농사가 세계 최초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나름 의미가 크다. 농경을 위한 마을 공동체가 빨리 정착되었을 뿐 아니라 한반도가 곡창지대라는 뜻이다. 밀농사와 달리 쌀농사는 까다롭다. 기후, 수량 등 천혜의 조건이 맞아야 한다. 그 만큼 인간이 살기에 좋고 농경 조건에 적합해야 한다. 서양에서도 쌀농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낙차가 크지 않은 포강이 흐르는 밀라노 인근 롬바르디 평야의 곡창지대였다.
*고대 한국, 왕국의 출현도 중국보다 빨라던 듯
한반도에서 세계 최초로 이루어진 쌀농사는 가족농과 씨족 체계의 형성발전과도 큰 관련이 있다. 모내기와 벼 베기, 물 관리 작업에 있어 두레와 마을 등 공동체가 형성된다. 쌀농사의 규모가 커지면 물 관리와 관개시설이 필수다. 동양에서 치수는 곧 정치였다. 고대 한국이 이러한 씨족 공동체의 발달과 사회 형성 그리고 치수사업으로 고대국가의 등장도 주변에 비해 빨랐음을 뜻한다. 환인, 환웅, 단군을 신화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모시고 나와야 하는 이유이다. 고조선이 부족연맹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에도 최초로 세습이 시작된 중국의 하 왕조 보다 100년이나 앞서 왕조가 시작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본격적인 정치조직인 고대 왕국은 농경의 시작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는 것이 세계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수로와 저수지 등 관개시설 건설과 다리 등을 놓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인력 동원이 필요했다. 또 많은 인력이 효율적으로 작업하기 위해서는 정치조직이 필수적이었다. 이후 고대 봉건국가에서는 물을 다스리는 치수가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이자 왕의 업적이 되었다. 중국 사료에도 동이족은 예로부터 치수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도 물길을 잘 다스린 것으로 알려진 요와 순 임금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세계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한탄강변 유적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구석기 문화가 없어 우리 문화는 모두 신석기 시대에 중국이나 시베리아로부터 전파되어 온 것인 줄 알았다. 식민사관은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한반도에서 구석기 문화가 꽃 피워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로 퍼져 나갔다.
인류가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한 것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때...
부터 자유롭게 양손을 활용하여 ‘도구’를 쓸 수 있었다. 인류는 도구를 사용하여 투입노동력 대비 생산량을 늘렸다. 이것이 인류 경제사의 출발이다.
처음에는 나무막대나 돌 같은 자연 그대로의 것들을 도구로 썼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돌을 용도에 맞추어 ‘깨트려’ 사용했다. 이른 바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대략 25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전기 구석기는 초기 인류에 의한 최초의 분업이 이루어진 증거와 석기 사용이 고고학적 기록에 나타난다. 30~3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진화적 변혁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충북 단양 도담리 금굴 유적이 70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유적이다.
한반도 구석기문화는 1963년 북한 웅기 굴포리 유적 발굴과 이듬해 미국인 대학원생 앨버트 모어가 공주 석장리 금강 변을 답사하던 중 깬석기를 발견함으로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충북 청원군 두루봉 지역에서 채석작업을 하다 우연히 구석기 유적지가 대거 발굴되었다. 1976부터 8년간 발굴한 이 유적에서 6개의 동굴유적이 발견되었다. 동굴에서는 옛 코끼리의 상아를 비롯하여 20종의 동물화석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불에 그을린 뼈연모가 많았다.
동굴만이 구석기 시대의 주거지는 아니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곧 두물머리 지역은 구석기 사람들이 동굴 밖으로 나와 강가에 집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이후 구석기 집단거주 유적이 강가나 물줄기 언저리를 중심으로 발견되었다. 사람들이 주로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냥도 협동하여 한 것 같다.
이어 세계 구석기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연천 한탄강변 구석기 유물이 그것이다. 이 유물은 1977년 한 미군병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한탄강에 놀러왔던 글랙 보웬이라는 미군병사가 이곳에서 네 점의 석기를 주워,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고고학과에 다니다가 학비를 벌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동두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 겨울에 데이트하러 나왔다가 강변에서 한국인 여자 친구가 깬석기 하나를 발견했다. 한 눈에 보아도 분명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다. 그는 여자 친구와 함께 이곳을 더욱 샅샅이 뒤져 아슐리안형 석기 여러 점을 추가로 발견하고는 발견지점을 지도에 기록했다.
그는 발견내역을 적어 사진과 함께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전문가 보르드 교수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 본 교수는 이를 한국의 고고학자 김원용에게 신고하라고 권했다. 이 석기들은 서울대학교로 보내졌고, 이를 계기로 10년에 걸쳐 발굴이 진행됨으로써 거대한 구석기 유적지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지금까지 8500여 점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과학적인 연대측정법을 통해 약 30만 ~ 4만5천 년 전으로 밝혀졌다.
이 전곡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그동안 세계 고고학계의 정설을 뒤엎는 아슐란형 주먹도끼도 끼어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여겨졌던 유물이었다. 세계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 고고학계는 유럽·아프리카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지 않아 찍개류의 석기문화만 존재한다는 모비우스 교수의 ‘구석기문화 이원론’이 정설이었다. 찍개류와 달리 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는 프랑스의 생 아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이다.
교수는 동아시아에 주먹도끼가 없는 이유로 고인류 단계에서부터 이 지역은 서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쳐진 상태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보웬이 전곡리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경지 정리를 하면서 중요한 유적이 모두 사라질 뻔했다. 보웬의 발견 이후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임진강 유역에서만 60여 개의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다.
* 동북아에서 가장 진화된 인류가 살아온 한반도
한반도 구석기시대 유적은 기원전 70만 년 전의 충북 단양 도담리 금굴유적 등 한반도 전역에서 현재 약 90여 군데가 발굴되었다. 전곡리 주먹도끼는 전기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이다. 끝부분이 뾰족하고 몸체는 둥근 형태로 석기의 양 측면에 날카로운 날이 서있다. 그래서 나무가공, 도살, 가죽가공 등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어 구석기 시대의 만능석기로 불린다.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되는 주먹도끼들은 유럽-아프리카 지역에서 발견되는 주먹도끼와 동일한 제작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이 자존심을 걸고 아슐란형 구석기 유적을 찾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 한 상태다. 이는 동북아에서 한반도가 오래전부터 가장 진화된 인류가 살아 온 지역이란 뜻이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일본의 한 고고학자가 역사 콤플렉스에 빠져 구석기 유물을 날조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 구석기 유적 발굴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도호쿠 구석기 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 부소장이 구석기 유물을 스스로 파묻고 이를 발굴한 것처럼 속였다. 자신이 소장 중이던 구석기 유물을 새벽 유적지에서 혼자 구덩이를 파고 파묻는 장면을 마이니치 신문이 비디오로 촬영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세상에 폭로될 수 있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상을 호령하다
지금으로부터 1만 2천 년 전 쯤, 빙하기가 끝나면서 날씨가 따뜻해져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일 년에 5cm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때 완만한 대륙이었던 곳에 황해가 생겨났다. 동해는 최대 수심이 3000미터가 넘지만 황해는 최대 수심이 100미터를 넘지 않고 평균 수심이 44미터에 불과해 세계적으로 얕은 바다로 유명하다.
이곳 대륙붕의 수심은 발해만 부근이 가장 얕아서 대부분이 20...
m 이하이다. 그 다음으로는 양쯔강(揚子江) 하구에서 가장 얕은 수심을 보인다. 고대의 고기잡이와 염전이 고조선의 발해만 부근과 양자강 입구의 주산군도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이유이다.
* 배 만들기도 한민족이 세계 최초
우리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바다를 통한 항해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바다를 지배한 나라가 강대국이 되었다. 우리나라 조선업은 세계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는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일어난 성과가 아니라 오랜 세월 해양강국으로 자리 잡아온 결과물이다.
우리 건국신화에 보면 고기잡이와 소금장사 이야기가 곳곳에 나온다. 당시 그만큼 어업과 염전이 발달해 있었다는 이야기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8천 년 전 배 2척이 2005년 경남 창녕 비봉리 패총 신석기 유적서 발견됐다.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이다. 조선(朝鮮)에서 조선(造船)이 탄생한 것이다.
국립김해박물관은 통나무로 만든 목선 발견지점이 비봉리 유적 아래 신석기 초창기 층 위인 점을 감안할 때 이 선박이 8000년 전에 제작되어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에선 상고시대의 통나무배가 더러 발굴되었는데 일본보다 앞선 해양 국가였던 한반도에서 유물이 없어 애탈 때였다.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보다 더 오래된 통나무배가 발굴된 것이다. 이배는 이집트 쿠푸왕 피라미드 고선박 보다 3400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 유적 보다 1000년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배다.
창녕 비봉리 패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내륙의 패총유적일 뿐 아니라 저습지유적이기도 하다. 항상 다습한 상태가 유지되는 저습지유적의 특징은 유물들이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여기서 망태기까지 발견되었다. 망태기 같은 유물은 매우 썩기 쉬워서 발굴되는 예가 극히 드문데, 신석기시대의 그것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비봉리 목선은 통나무를 파내어 만들었는데, 길이 310㎝, 최대 폭 60㎝, 깊이 약 20㎝ 정도의 규모이며 배의 재료는 수령 200년 된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원래 길이는 4미터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배는 불로 나무를 그슬린 뒤 날카로운 석기로 제작되었다.
그 무렵 강의 상류에서 하류로 물건을 운반할 때에는 통나무배가 아닌 뗏목을 만들어 물의 흐름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칡넝쿨로 통나무를 엮어 만든다.
울산 반구대암각화에서 보이는 8000년 전의 통나무배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타고 있다. 고래잡이를 하는 용도로 보이는 배에는 무려 18명이나 타고 있으며 11명이 타고 있는 배도 보인다. 이러한 점은 반구대암각화가 조성될 시절에 이르러서는 바다에서 고래잡이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의 규모가 더 커진 것을 의미한다.
한민족의 기원, 황해가 생겨나다
한반도 북부 해발 200m가 넘는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빙하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가 빙하의 주변지역이었음을 뜻한다. 그 무렵 빙하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서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열도, 대만 등이 서로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1만 3천 년 전 동이족 최초의 토기는 이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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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0년 전 즈음에 알 수 없는 이유로 혹한기가 찾아왔다. 이때 대륙의 동물과 식물 자원의 몰락은 인류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하였다. 이후로 인류는 수렵채취 생활에 의존해서는 겨울에 살아남을 수가 없고, 농사 지어 수확하고 저장하는 종족만 살아남게 된다.
당시 황해는 대륙이었으며 동해는 호수였다.
지금으로부터 1만 2천 년 전 쯤, 빙하기가 끝나면서 날씨가 따뜻해져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일 년에 5cm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간빙기에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해안선에 큰 변동이 있었다.
이때 완만한 대륙이었던 곳에 황해가 생겨 오늘날과 비슷한 지형이 형성되었다. 동해는 최대 수심이 3000미터가 넘지만 황해는 최대 수심이 100미터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평균 수심이 44미터에 불과해 세계적으로 얕은 바다로 유명하다. 특히 완만한 서해 갯벌이 세계 5대 갯벌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이다.
이로써 서해에 어족이 풍부하여 배가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고기잡이가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해안 하천가에서 소금 생산이 이루어져 근처에 비해 고대 문명이 가장 먼저 자리 잡게 된다.
질적으로 앞선 고조선의 청동기
숯과 화덕에 눈뜨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을 가장 잘 다루었던 민족은 불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알려진 북경 사람들(북경원인)이 아니고 고조선 영역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숯을 쓰면 불의 온도를 높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숯은 나무를 불완전 연소시켜서 만든다. 하지만 숯을 만드는 게 그리 간단치 않다.
숯은 보통 황토 흙으로 만든 숯가마에 나무를 넣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든다. 나무가 재가 되어 산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구를 밀폐하고 약 15일 간 800℃ 이상의 열을 가한 후에야 "숯"이라고 하는 "목탄"을 얻을 수 있다. 지극 정성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게 숯이다. 이렇게 숯이란 ‘나무를 숯가마에 넣어서 구워낸 검은 덩어리’로 재가 되기 이전의 탄소 덩어리를 말한다. 숯의 까만색은 바로 탄소 성분 때문이다.
숯을 500배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관찰하면 벌집 같은 무수한 구멍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산소와 쉽게 결합하여 높은 열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참숯은 참나무를 태워서 만든 것이다.
숯은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의 주요 수출상품이었다. 중국이 우리의 수출시장이었다. 이로 미루어 우리의 불 다루는 기술 곧 제련기술이 중국 보다 훨씬 앞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련에 필요한 높은 불은 나무를 태워서는 얻을 수 없고 숯을 이용해 피워야 한다. 숯으로 강한 불을 만드는 것이 청동과 철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또 이런 불은 노천에서 불을 피워서는 얻을 수 없다. 밀폐된 공간에서 송풍관을 이용해 바람 잘 통하는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워야 한다. 제때에 송풍을 잘해서 불길을 끌어 올려야 한다. 고대에 동북아에서 이러한 화덕을 처음 만들어 낸 민족이 동이족이다.
우리 민족이 불을 잘 다루었다는 것은 역사 곳곳에 쓰여 있다. 한민족의 불의 역사는 곧 우리의 기술사이자 경제사였으며 군사력이었다.
* 동이족, 중국보다 먼저 무기를 만들다
청동기 시대부터는 불을 다루는 기술이 중요해진다. 구리는 1085도 이상의 불을 때야 녹아 나오기 때문이다. 이후 구리와 주석을 함께 넣어 가열하면 구리가 녹는 온도보다 낮은 온도인 800~900도에서 녹으면서도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청동이다.
철은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더 높은 온도인 1130~1539도가 되어야 녹는다. 인간이 도처에 산재하는 철을 두고 청동 야금술을 먼저 개발한 이유는 바로 이 녹는점 때문이다. 불을 다루는 기술이 앞선 동이족은 중국 보다 앞서 청동무기를 만든다. 이러한 광물의 사용으로 경제사에 ‘기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기술의 발전이 군사력을 결정짓고 더 나아가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질적으로 앞선 고조선의 청동기
기원전 2000년경의 중국 청동기는 거의 자연동에 가까운 성분을 보인다. 제대로 된 제련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에 반해 고조선 청동기들은 구리, 주석, 아연의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각 성분은 기물의 용도에 맞게 함유량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아연이 섞여 있는 것이 중국 청동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고조선의 청동기에는 초기부터 많은 양의 아연이 들어있다. 아연은 청동기를 황금빛으로 빛나게 한다. 한결 품위를 높여주었다. 구리에 아연만 섞으면 금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빛나는 황동이 된다. 게다가 아년은 주석과 함께 청동합금의 강도를 높여주고 녹스는 것을 방지한다. 우리의 청동검이 중국 보다 강했던 이유이다. 더구나 아연은 주석과 함께 구리의 녹는점을 450℃까지 획기적으로 낮추어 준다. 따라서 중국보다 더 다양한 용도의 무기와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고조선의 청동검은 주석 13~19%, 아연 6% 정도로 만들어져 있다. 현대 과학으로 확인해도 청동은 주석이 13~19%였을 때가 가장 단단하다고 한다. 여기에 아연을 섞음으로써 청동을 더 쉽게 만들뿐 아니라 탄성이 생겨 중국 청동검 보다 더 단단하면서도 탄성이 좋아 충격이나 휨에 강했다.
우리나라가 고대부터 이렇게 제련기술과 광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조건은 우리 조상이 창조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던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불을 다루는 기술이 앞서 있어서다. 경제사에서 불을 다루는 기술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 당시 고조선에는 다양한 광물자원이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고 매장량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쉽게 채굴할 수 있는 노천광산이거나 일부가 노출되어 찾기 쉬운 노두, 표사광산이 비교적 많았던 덕이다.
청동문화의 전파는 고대한국으로부터
* 동이족이 주도한 청동기 문화
(초원길 위주로 발견되는 청동기 유적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발명이 신석기시대의 토기라면 청동의 발견은 본격적인 인류 문명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기술사가 고대 경제사를 주도하였다.
우리의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 건국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황하 유역이나, 시베리아에서 청동기문화가 한반도로 전파되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아니었다. 식민사관의 덫이었다. 우리 청동기 유물의 연대를 측정해 보니 오히려 거꾸로 한반도와 만주에서부터 황하와 시베리아로 청동기문화가 전파되었음을 말해준다.
고조선은 애초부터 강력한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태어났다. 건국 당시부터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는 이미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수백 년 앞서 있었다. 당연히 합금기술도 뛰어났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본격화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나마도 몇 년 전에 500년을 슬그머니 끌어 올린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도 빨랐다.
전남 영암군과 경기도 양수리에서 발굴된 청동기와 함께 나온 숯의 경우, 방사성 탄소측정 결과 기원전 2500년으로 나타났다. 또 만주 요녕성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의 비파형 청동검은 기원전 2410(+-14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평양시 상원군 룡곡리 4호, 5호 고분에서 비파형 창끝과 청동단추가 발견되었는데 유물과 인골을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 4539(+-197)년 전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청동유물의 연대도 기원전 26세기경 이다.
또 1987년 내몽골 서대(西臺)유적에서 작은 청동장식을 주조했던 토기 거푸집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청동 제품을 만들면서 생긴 찌꺼기(슬래그)가 같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3000~3500년으로 추정되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청동기시대와 같은 시대다. 동북아에서는 동이족이 최초로 청동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또 북한 고고학계의 발굴보고에 의하면, 평양남도 덕천시 남양 유적 16호 팽이그릇 집 자리에서 나온 청동기 유적의 측정연대가 무려 기원전 38세기라 한다. 또 90년대 중반에 발견된 평양시 부근의 상원군 장리 1호 고인돌 무덤에서 청동방울 2개, 청동 2인 교예 장식품 1개, 청동 끌 1개를 비롯한 청동 제품과 활촉 70여개가 나왔고 군사 지휘봉인 별 도끼만 3개가 나왔는데 국왕 급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의 절대 연도는 기원전 3000년 전반에 해당한다. 북한은 기원전 40세기에 대동강 유역에서 이미 청동기가 사용되었고, 기원전 30세기 초ㆍ중엽에 청동무기가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한다. 이외에도 평양의 단군릉 금동유물은 기원전 3000~3500년경이고 평양 용곡리 고분, 평남 백원리 고인돌 등에서 나온 비파형 청동창끝 유물들을 현대과학으로 측정한 결과 기원전 2600년경이라 한다.
* 중국 내륙 황하 이남에서는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중국 내륙 특히 황하 이남에서는 청동기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황하유역의 유일한 청동기문화인 하, 은 시대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는 기원전 2200년경이며,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문화는 기원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또 일본은 기원전 300년 무렵에야 청동기문화가 시작되었다. 고대한국의 청동기문화 연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훨씬 앞선다. 뿐만 아니라 청동기 유적 분포지역도 다양하다.
한반도의 청동기는 기원전 3500년경에 꽃핀 수메르인의 청동기 문화가 초원길을 따라 전파되어 왔을 개연성도 있지만 그 보다는 고대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청동기 문화가 개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류 역사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동서양이 비슷한 모습으로 진화해 가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인 특성이 유사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야기되는 측면도 많지만, 이에 못지않게 경제사 측면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유사한 진화과정을 보여 왔다.
고대로부터 뗏목 배가 교역과 물류를 촉진시키다
(1960년대 초까지 있었던 한강 한남동 나루터 뗏목배)
고대 배의 원조는 통나무배다. 하지만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파도에 약하고 안전성이 없는 통나무배로는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통나무를 여러 개 옆으로 이어 엮은 뗏목 배였다.
압록강, 두만강, 한강에서는 소나무로 만든 뗏목 배가 발달했다. 강의 상류에서 소나무 목재 자체를 운반하기 위하여 만든 것은 ‘뗏목’이라 하고 고기잡이를 하거나 물건을 ...
운반하거나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은 ‘뗏목 배’라 하였다.
칡넝쿨로 엮어 만든 뗏목 배는 너비가 넓어 비교적 안전했다. 삿대와 노를 만들어 뗏목 배를 저어 움직였다. 통나무배에서 뗏목배로 발전하는 데는 긴 세월이 걸렸는데 뗏목 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말인 기원전 3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기원전부터 우리 민족은 통나무배와 뗏목 배를 타고 어로 활동을 했다. 뗏목 배는 고물에 노를 설치하여 가까운 거리를 왕래하는 등 쓰임새가 많았다. 선미의 노가 키의 역할도 했다.
뗏목 배는 겉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만들기 쉽고 의외로 부양성이 뛰어나 널리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뗏목 배에 평상을 설치하여 수로 및 연안운송에 사용했다.
주로 모피, 비단, 소금, 곡물과 철광석 운반 등에 활용했다. 이것이 물류를 촉진해 상업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고조선이 교역과 물류가 발달한 이유의 하나이다.
뗏목 배는 완전한 형태의 배가 출현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함께 사용되었다. 뗏목 배는 최근까지 압록강이나 남한강 등지에서 볼 수 있었다.
먼 항해 때에는 뗏목 배에 돛을 달았다. 사람들은 돛을 단 뗏목 배를 ‘떼배’라 불렀다. 보통 떼배 한 척 제작하는데 길이 5m 정도의 통나무 8~14개 정도가 사용되어 만들기도 쉬웠다. 통나무의 직경은 25-40cm이고, 구상나무가 재료로서 좋으나 삼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구상나무는 가볍고 단단하며 물에 강하고 부력이 좋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떼배를 이용하여 일본에 가기도 했다. 먼 바다 항해 시에는 여러 척의 떼배를 연결하여 대형 떼배를 만들어 운행했다. 이를 연선(連船)이라 한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 천황의 초빙으로 285년 떼배를 만들어 영암의 상대포에서 도자기와 철공 그리고 기와기술자를 태우고 천자문 1권, 논어 10권을 가지고 건너가 백제문화를 전달했다.
당시 왕인박사가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갔던 떼배인 `티우`는 고증에 의하면 직경 30cm의 삼나무 11개를 엮어 만든 길이 약 7m에 너비 약 4m의 배로, 나무로 엮은 평상을 위에 설치하고, 너비 3m에 높이 3.3m인 황포 돛 1개를 달아 노를 저어 가는 뗏목 배였다. 왕인박사가 도공 등 45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는 걸로 보아 큰 떼배로 출항한 것으로 보인다.
45명을 태운 떼배가 한일 간 해협을 건널 수 있을까라는 나의 어쭙잖은 의문은 아래 사진 한 장으로 불식되었다. 족히 백 명은 넘게 탄 것 같다.
한반도에서 퍼져 나간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시베리아와 유럽으로 전파)
약 2만 년 ~ 1만 2천 년 전의 빙하기 에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120m 가량 낮아, 황해 전 지역은 큰 강들이 흐르는 평야였다.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이 시기에 질퍽했던 황해 평원 보다는 한반도 쪽이 살기 좋았다 한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여러 문명의 이기가 탄생하게 된다. 그 하나가 8천 년 전의 한민족이 만든 토기로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와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가 있다....
그 뒤 이것이 대륙으로 퍼져 나간다. 예전의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를 필두로 청동기문화 등 대부분의 문화가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시베리아로부터 한반도에 유입되었다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정설로 배웠다. 아니었다. 식민사관의 덫이었다. 발해 연안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가 탄소연대측정 결과 시베리아와 동유럽의 것보다 천년이상 앞선다는 것이 밝혀졌다.
빙하기가 끝나고 날씨가 따듯해지면서 인류는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마 정착생활이 시작된 듯하다.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토기를 만들어 썼다. 이른 민무늬토기였다. 그러다가 토기 표면에 흙을 찍어 붙이거나 띠를 만든 것이 덧무늬토기고, 이후 토기 겉면에 금을 그어 문양을 장식한 것이 빗살무늬토기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과 발해 연안에서 출토되었다. 발해 연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천 년 전쯤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는 135개에 달한다. 중국 내륙에는 없는 토기다. 채도(彩陶)에서 흑도(黑陶)로, 다시 백도(白陶)로 전승되는 중국의 토기는 우리의 토기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때문에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한국 빗살무늬토기는 뾰족바닥의 반 달걀 모양으로서, 이것은 빗살무늬토기의 원초적 형태이다. 빗살무늬토기가 뾰족한 것은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주로 강가 근처에 살다보니 굽이 뾰족한 토기를 모래에 푹 박아 놓으면 넘어질 염려도 없어 사용하기 편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는 8천 년 전부터 초원길을 따라 몽골과 동북아 그리고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어 갔다. 뾰족바닥의 빗살무늬토기는 위도 상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바닥이 평평한 형태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정주생활’이 넓게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또 토기 그릇 종류도 독 모양의 큰 것을 비롯하여 항아리·단지·대접·보시기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용도별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신석기 문화가 한반도에서 발흥하여 동북아 대륙과 시베리아를 거쳐 북유럽으로 퍼져 나갔음을 의미한다. 이를 증명하듯 현재 유럽에서 통용되고 있는 언어 가운데 헝가리어, 핀란드어, 에스토니아어는 인도유럽어가 아닌 아시아계 언어다. 또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사람들의 반 정도는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토기들의 공통점이 있다. 한반도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의 입 가장자리나 아래 부분에 구멍이 한두 개 이상 뚫려 있다. 이러한 구멍은 북방 유라시아의 빗살무늬토기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이 구멍의 쓰임새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다. 아마 뚜껑을 비끄러매거나, 어디에 달아매기 위해서인 것 같다. 여하튼 토기를 다루는 풍습이 비슷했다는 이야기다. 또 그 지역이 알타이어족의 세력권과 겹치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이러한 공통성과 유사성이 바로 우리의 빗살무늬토기가 지닌 세계성이며 초원길을 통해 교류를 같이 해 온 한 뿌리의 족속인 것 같다. 이른바 동이족의 발자취 아닐까?
당시 이 지역들은 황해 바다가 생기기 전이라 서로 떨어져있지 않고 붙어 있었다. 게다가 동해 쪽에는 해상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 이외에 조몬 시대에 환동해 교류의 흔적으로 꼽을 수 있는 유물로 ‘옥(玉)’제품이 있다. ‘옥’은 서일본 원시유적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유물이다. 당시 ‘옥’은 일본에서 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아시아 대륙의 어딘가에서 유입된 것이다. 일본에서 경옥 산지가 발견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또 옥 유물이 동해를 면한 일본의 서쪽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동해를 통한 해상교역의 산물로 보인다. 환동해 지역에서 ‘옥’은 조몬 시대에 서일본 지역과 한반도 그리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물이었다.
초원길은 교역과 문명전파의 고속도로
초원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북위 50도 부근의 북방 초원길은 고대의 교역과 문명 전파의 고속도로였다. 왜냐하면 아시아 내륙은 곳곳에 우거진 산림과 험준한 산악 그리고 황량한 사막이 혼재되어 있어 근거리 교통 이외에는 사실상 장거리 통행이 어려웠다. 게다가 맹수와 도적떼도 많았다. 그래서 강이나 하천 그리고 연안항로 등 뱃길이 일찍부터 애용되었다. 더구나 서로 대립하고 있는 부족들이 통행...을 막았다.
하지만 초원은 기동성이 뛰어난 유목민족들이 개척한 길이라 통행 속도가 빨랐다. 기원전 8000년경부터 우리 빗살무늬토기가 초원길을 통해 북유럽으로 전파된 이유이기도 하다. 또 기원전 4천~3천 년경에는 수메르의 채도문화가 이 길을 거쳐 서아시아에서 중국 및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길을 '채도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초원 길 양쪽 끝에 홍산문화와 수메르문화가 있었다.
채도란 질 좋은 진흙으로 만든 약 1000도의 온도에서 구운 채색토기를 말한다. 대체로 붉은 바탕에 검정색과 누른색, 갈색 같은 여러 색깔과 문양을 넣어 윤택하게 연마한 아름다운 토기다.
중국의 하남성 앙소의 채도(채색 토기) 곧 앙소문화의 편년은 기원전 3500년 정도인데, 이 시기에 나타난 중국의 채도는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텔 하라프, 니네베, 사마라 등지에서 출토된 수메르 채도보다 편년 상 2000~3000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그래서 스웨덴의 앤더슨(1874~1960)은 '중국 채도 서방 기원설'을 제창하게 된다. 수메르의 자모르 채도는 이미 기원전 7000년 전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또 채도와 함께 수메르의 농경문화가 중국으로 전해져 왔다고 주장하였다.
알렉산더 대왕과 한 무제가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이전에는 초원길이 동서 간 문명 전파의 유일한 통로였다.
기원전의 항해혁명, 돛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4000년경에 파피루스로 배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 뒤 이 배에 돛을 단 역사상 최초의 돛단배를 선보였다. 그들은 이배로 기원전 3000년경 소금을 구하러 멀리 페니키아까지 왕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배를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더 튼튼한 배를 만들 필요성이 생겼다.
그들은 기원전 3000년부터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했다. 사막 한 가운데 피라미드를 지으려면 멀리서 육중...
한 돌을 대량으로 날라 와야 했다. 불행히도 이집트에는 우거진 숲이 없어 배를 만들 크고 좋은 나무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아카시아 나무를 짧게 켠 뒤 이를 이어 붙여 배를 만들었다.
기원전 2600년경부터는 페니키아로부터 백향목이 수입되어 길이 60미터의 대형선박 건조가 이루어졌다. 이들의 배 만드는 기술이 페니키아에 전수되어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러서는 스페인 카디스에 서구 최초의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멀리 영국에서 주석을 싣고 오는 등 페니키아가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서양은 배에 대한 글과 유적이 남아있어 그들의 고대 해양역사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은 불행히도 당시의 글과 유적이 없어 선박 발전에 대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고조선의 수상교통은 선박의 자료 또는 유물, 기록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추적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선박을 이용해 일찍부터 행상교류가 있었던 중국과 일본을 연관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고조선은 중국과 인접해 초기부터 서로 교역을 했고, 일본과의 교류는 구석기시대인 기원전 1만 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청동기시대 고조선 초기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바위에 그려진 암각화에는 배를 타고 고래잡이를 하는 그림이 있다. 배에 6명이 탔고 배꼬리와 뱃머리가 활처럼 구부러진 것을 보면 상당히 큰 구조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3000년경의 함경북도 서포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고래 뼈로 만든 노(櫨)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고대 시대 구조선과 노의 존재는 확인되었다.
일부 우리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000년경 즉 고조선 초기부터 돛을 단 돛단배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조선 초기부터 고조선을 이루고 있던 거수국(제후국)들은 중국 상고시대의 나라들과 육상 및 해상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한다. 중국의 순(기원 전 2209년)에서부터 시작하여 하, 상, 주, 춘추, 전국, 진, 전한 나라들과 고조선은 교역을 중심으로 정치, 문화 교류도 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돛배가 처음 나타난 것은 상나라 때인 기원전 1600년경이었고, 주나라 시대인 기원전 1100년경에는 돛배를 항해용으로 본격 사용했다는 기록이 중국사기에 있다. 이로 미루어 돛배의 사용은 교역의 주체였던 고조선이 빨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이 바람의 힘을 이용해 만든 효율적인 수송수단이 돛단배다. 해류에 능한 고조선 사람들이 '돛'까지 개발해 노·키·돛을 갖춘 완벽한 배를 만들어 바람을 이용해 바다 운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돛을 달아 바람을 동력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이었다. 이로써 먼 거리 항해가 가능해졌다.
돛은 처음에 뗏목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배도 뗏목배와 비슷한 무렵에 돛을 단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배는 노와 키, 그리고 돛의 3요소를 갖춘 노형 해선으로 바람이 없을 때에는 키를 거두어 노를 젓고, 바람이 불 때는 키를 장착해 돛을 달았을 것이다. 나무배는 양쪽 뱃전의 노 걸개에 노를 매어 달고 노를 저어 이동하였으며 배 한가운데에 돛대를 세우고 돛을 달아 해안과 강에서 어로 활동도 하였을 것이다. 돛단배는 적당한 바람이 불 때면 기계선 못지않게 속력도 냈지만 바람이 없는 날엔 노 젖는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바람과 바닷물에 따라 움직이던 돛단배는 범선이라 불리며 오랫동안 해상 교통수단 역할을 담당했다. (참고;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기원전 4세기에 쓰여 진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 사람들은 물위에 산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산해경 해외동경편에는 ”대인국(大人國)이 있는데 사람들이 위대하고 앉아서 배를 만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고대의 산해경도 고조선의 특성으로 해양생활과 배를 거론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에 고조선의 준왕이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뱃길로 마한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그 무렵 고조선이 수천 명의 군사를 태울 수 있을 만큼의 다량의 배들을 건조할 능력이 있고 또 그 많은 배들을 정박시킬 수 있는 항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대는 아는가? 고조선의 흑요석을.
흑요석(黑曜石, obsidian)은 신이 축복한 나라에 주는 선물이다. 이 돌은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할 수 없다. 대륙이 갈라질 정도로 화산 용암이 격렬하게 분출한 지역에서만 생성된다. 그것도 중요한 결정체가 생기기 전에 급격하게 냉각된 화산 용암이라야 한다. 그래서 고대의 흑요석 산지는 극히 드물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동이족의 근거지인 한
반도 백두산 일대와 일본열도, 유럽문명의 발생지 그리스, 노아의 홍수 근거지 터키의 아라랏산과 티그리스 강 상류 아르메니아 등 과거 화산 분출활동이 격렬했던 문명의 발생지 몇 군데서만 발견되었다.
강렬한 화산 분출의 선물, 흑요석
흑요석은 날카롭게 깰 수 있어 구석기시대부터 부싯돌과 화살촉 그리고 자르개 같은 여러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이른바 고대의 반도체라 불리는 세석기이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 유물에도 화살촉, 돌칼, 돌도끼, 자르게, 긁게, 밀개 등 다수의 흑요석 석기가 발굴되었는데, 흑요석 산지는 대부분 백두산이었다. 자르개는 고기의 비늘을 벗기거나 살을 저미는 것이고 긁개와 밀개는 동물 가죽을 벗길 때 쓰는 도구이다. 고조선이 흑요석 화살촉 덕분에 활을 발명하고 흑요석 칼과 도구 덕분에 모피 수출대국이 될 수 있었다.
초원길 최고 인기상품, 고조선 담비모피
* 동과 서를 연결한 유라시아 초원
채도문화 이후에도 수메르문화가 많이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인더스문명은 수메르문명의 판박일 정도로 유사하다. 벽돌로 집 짓는 모습까지.
...
기원전 3500년경에 시작된 수메르의 청동기 문화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 뒤 기원전 2700년경에 발명된 수메르의 전차와 기원전 2350년경의 아카드 복합궁이 초원길을 통해 유목민족들 간에 전파되었다.
고대의 교역루트는 북방은 초원길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내륙에 동서 간 실크로드가 개설된 건 기원전 2세기 한 무제에 이르러서다. 그 이전에는 초원길이 동서 간 대륙의 유일한 통행로이자 교역루트였다.
이 초원길은 수메르문명과도 연결되었다. 초원길과 연결되는 이른바 메소포타미아로는 흑해와 카스피해 중간지대에 있는 카프카즈(일명 코카서스) 북부를 거쳐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따라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 항까지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수메르문명이 개화한 지대를 지나는 이 길은 고대문명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
서쪽의 초원길은 흑해연안에서 시작해 드넓은 키르키즈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아래 분지를 거쳐 몽골 고비사막의 북단 오르혼 강 연안을 지나 고조선으로 연결된다. 그 무렵 초원길을 통해 동서양의 문물이 많이 교환되었다. 그 중 최대 인기상품이 고조선 모피와 흑요석 화살촉이었다.
당시 고조선은 최대의 모피 수출국이었다. 특히 담비모피가 유명했다. 이 초원길을 따라 고조선의 모피교역이 활발하여 초원길을 일명 모피로(毛皮路)라고도 한다.
초원길로 전해진 고조선 모피가 워낙 유명하여 훗날 서기 200~1000년 사이의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들은 북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별도의 ‘흑담비길’을 만들어 고조선의 모피를 수입하였다. 이 길을 발견한 건 우리 학자가 아니라 러시아 학자였다.
여기서 조심스럽지만 초원길 교류와 연관된 우리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 수메르어는 우리말과 뿌리가 같은 교착어
초원길과 연결된 수메르 문명은 동양문명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기원전 3500년경 최초의 청동기문화를 열어 약 1200년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던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수메르 학자 크래머는 수메르인들의 뒤가 편편한 두개골 모양(편두)과 검은머리 등으로 미루어 동아시아 민족 중 하나가 문명을 갖고 갑자기 나타나 세운 것이 수메르 문명이라고 보았다.
수메르 문명과 우리 민족의 문화가 유사한 것이 많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들의 편두와 검은 머리뿐 아니라 인류 최초의 언어인 수메르어가 셈이나 함 어족과는 다른 언어로 우리 한글과 어순도 같고 토씨를 같이하는 교착어다. 수메르어는 그 어순이 우리 한글과 비슷하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다. 그뿐만 아니다. -'가', -'을' 등의 토씨를 붙여서 말을 구성하는 교착어다. 이것은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알타이어의 큰 특징이다. 또 단어도 비슷한 게 많다. 1인칭을 ‘나’, 3인칭을 ‘그’로 지칭하는 것을 비롯하여 엄마를 ‘움마’로 그리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 때는 '아비'라 하며,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 뒤에 '님'자를 붙였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였다.
미국의 언어학자 고든박사는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고유한 문자인 설형문자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동방의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을 아버지라 불렀고 선생은 제자를 아들이라고 했다.
이 외에도 그들은 음력을 사용했다. 수메르 우르에서 출발한 아브라함의 유대력이 음력인 것은 그 때문이다. 60진법과 토기사용, 묘장제도, 순장풍습도 한민족과 연결된다. 결혼 전에 함지는 풍습까지도 비슷하다.
기원전 2400년경의 수메르 구리향로와 고구려 각저총 고분벽화의 왼씨름 자세가 똑 같다. 왼씨름은 한민족 전통의 씨름 형태이다. 우리와 유사한 그들의 풍속이 우리 재야사학자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흑요석을 토해 낸 영험한 정기를 띤 백두산
고대로부터 백두산은 영험한 정기를 띤 산이다. 호랑이의 포호하는 입에 해당한다.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민족이 배달민족이다.
단군조선이래로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환웅이 내려오신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숭상되어왔다. 그 뒤 부여와 고구려도 백두산 기슭에서 둥지를 틀었듯이,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자 역사의 발원지로서 겨레의 숨결을 간직한 성산이다.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
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날을 잡아, 귀한 흰 소의 머리(白頭)를 명산대천에 제물로 바쳤다. 백두산(白頭山) 이름의 유래이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 읍루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도 백두산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받들었다.
백두산은 지금도 내부에서 화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단지 쉬고 있는 휴화산일 뿐이다. 중국과 시베리아를 포함한 동아시아 대륙에서 유일하게 흑요석이 발견되는 곳이 백두산이다. 백두산은 화산 폭발 때 흑요석을 사방에 흩뿌리지 않고 묘하게도 백두산 이남지역에만 토해 냈다. 백두산의 흑요석 유물이 한반도 곳곳의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이미 구석기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 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970년에 인류 사상 2번째의 대분출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백두산 화산폭발 때 화산재가 멀리 일본 홋카이도까지 날아가 1㎝나 되는 화산재 층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대단한 폭발력이었다.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폭발이 이어져 마지막 분화가 1903년에 있었다.
* 한반도가 세계 대륙의 중심
더구나 한반도가 세계 대륙의 중심이란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지구상의 대륙은 우리가 느낄 수 없지만 매우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한다. 뜨거운 지구 내부가 천천히 이동하는 탓에 겉가죽에 해당되는 대륙 역시 덩달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대륙은 서로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하는데, 대략 3억∼4억 년에 한 번씩 모든 대륙이 서로 이어지며 초대륙을 만든다. 현재와 같은 대륙의 모습은 약 3억 년 전 생성된 초대륙 판게아(Pangea)가 갈라지며 형성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한반도 산맥들이 바로 초대륙 판게아의 중심 산맥이란다. 2억 년 전 화산 분출을 시작으로 초대륙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화산활동이 격심했던 시절 우리나라에 살고 있던 공룡들도 많이 놀랐을 법하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에 설치된 초정밀 연대측정분석기를 통해 점차 밝혀지고 있다.(출처; 조문섭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 강렬한 화산 분출의 선물, 흑요석
대륙이 갈라질 정도의 강렬한 화산 분출의 선물이 흑요석이다. 흑요석은 하늘로 솟구친 용암의 급속한 냉각에 의해 생성되는 자연산 유리이다. 흑요석은 날카롭게 깰 수 있어 구석기시대부터 부싯돌과 화살촉 그리고 자르개 같은 여러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이른바 고대의 반도체라 불리는 세석기이다.
자르개는 고기의 비늘을 벗기거나 살을 저미는 생활 용구로 사용된 석기이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 유물에도 화살촉, 돌칼, 돌도끼, 자르게, 긁게, 밀개 등 다수의 흑요석 석기가 발굴되었다. 고조선이 흑요석 화살촉 덕분에 활을 발명하고 흑요석 칼과 도구 덕분에 모피 수출대국이 될 수 있었다
고조선 국력의 근본, 활
고조선 국력의 근본이 활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활이 없었다. 중국에서 활이 처음 선보인 것은 기원전 6세기경이나 그나마도 우리 활에 비하면 그 성능이 형편없었다.
* 동이족, 활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지다
동이족이 활을 잘 쏘는 이유는 간단하다. 활을 제일 먼저 만들어 사냥과 전투에 썼기 때문이다. 중국 하남박물원 홈페이지에 동이(東夷)에 관한 소개가 있다. “동이족 사람들은 깃털달린 화살과 활을 발명했으며, 문자를 창조했고, 청동기를 제작하고, 철을 단련했으며,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
백두산 장백산맥 일대에는 석기시대부터 검푸른 돌 ‘흑요석’이 있었다. 다른 곳에는 없는 돌이었다. 돌을 깨서 쓰던 석기시대에 이돌은 대충만 깨도 날이 날카롭게 섰다. 흑요석은 무척 귀중한 소재였다.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은 만들기도 쉽고 무엇보다 예리했다. 이 흑요석 화살촉이 가벼운 나뭇가지와 결합해 여러 용도로 쓰였다. 새나 토끼 잡는데 쓰는 손 화살, 고기잡이 작살 그리고 나무 막대기와 결합해 창으로도 쓰였다. 그 뒤 손 화살이 발전해 동이족에 의해 활이 개발되었다.
활의 개발은 인류사에 또 한 번의 변혁을 가져다주었다. 사냥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그렇게 되면서부터 인류가 만물의 우위에 서게 되었다. 더욱이 활은 수렵뿐만 아니고 고대 인류의 전투 무기로서 다른 부족에 대해 절대 우위를 점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무렵 중국은 활이 없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동이족은 가벼운 대나무나 싸리나무로 화살을 만들고 여기에 깃털을 붙여 안정적으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화살을 보통 죽시(竹矢)라 부른다. 원래 이름은 유엽전(柳葉箭)이었다. 유엽전(柳葉箭)은 화살촉이 버드나무 잎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살은 화살촉과 살대, 깃, 오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살대는 대나무, 오늬는 싸리나무로 만들고, 깃은 꿩과 같은 새의 깃털을 썼다. 오늬는 화살 머리를 시위에 걸 수 있도록 에어 낸 부분이다. 화살촉은 주로 백두산 흑요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활은 단단하고 질긴 박달나무로 만들었다.
* 배달민족의 나무, 박달
박달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나무 가운데 가장 무겁고 단단한 나무다. 잘 부러지지 않고 질기기 때문에 강도를 필요로 하는 곳에 많이 사용되었다.
고조선의 활은 박달나무로 만들었다. 이를 박달나무 단(檀)자를 써 단궁(檀弓)이라 한다.
박달나무는 나무의 결과 내구성이 특히 좋다. 그 견고성, 내구성, 굴곡강도(屈曲强度) 등의 장점 때문에 예부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목재는 아주 단단하여 건축재나 가구재로 쓰인다. 예전에는 명주 옷감을 감아 다듬이질 할 때 쓰던 홍두깨와 다듬이 방망이,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빨래방망이나 디딜방아의 방아공이와 절구공이, 여인의 손때 묻은 함지박 같은 목기류와 미모를 가꾸던 얼레빗 등이 모두 박달나무로 만들어졌고, 옛날 나졸들이 들고 다니던 육모방망이도 박달나무로 만들었던 것들이다. 또 단단해 수레바퀴 등을 만드는 데도 사용했다.
유명한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神檀樹)가 바로 '박달나무'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의 '단'은 박달나무란 뜻이다.
단군(檀君)이란 신단수라는 거룩한 나무 밑에서 제사를 인도하던 신정일치 사회에서의 천군(天君)을 뜻한다.
박달나무야말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나무다. 애초 '박달'이란 이름의 어원부터가 '백달', '배달'에서 유래되어 우리 민족의 정기를 표상한다. 배달은 밝음을 나타내는 ‘배’와 땅을 뜻하는 ‘달’이 합쳐진 말로서 ‘광명한 땅’이란 뜻이다.
고조선 시대의 단군은 제후국에 왕족을 보내거나 부족장을 제후로 임명해 통치했다. 이 때문에 제후국 호칭이나 소왕에는 단(檀)씨가 많았다. 예컨대, 선비족의 왕은 단석괴(檀石槐), 유연은 대단(大檀·아발), 흉노 왕의 호칭은 단우(單于·‘선우’로 읽는 것은 후의 변화) 등이었다. 이들 조상의 뿌리가 고조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달나무는 참나무 목 자작나무 과에 속하며 겨울에 잎이 지는 넓은잎 큰 키 나무이다. 박달나무로 만든 단궁의 길이는 1m 20cm 정도였다. 아무리 커도 2m를 넘지 않았다. 그래서 ‘짧은 활’ 단궁(短弓)으로 분류된다.
과거 몽골이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성능 좋고 휴대에 편한 단궁 때문이었다.
* 공포의 독화살
화살촉은 돌, 뼈, 금속 등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동이족은 주로 백두산에서 나는 특수한 푸른 돌(청석)을 썼다. 삼국지 위지 읍루전에 “한번 쏘면 사람의 눈을 뚫을 정도로 활을 잘 쏜다. 활의 길이는 4자(1m20cm)나 되고, 그 활의 힘은 마치 쇠로 된 활과 같다. 화살의 길이는 1자8치(55cm) 싸리나무로 만들었고, 푸른 돌로 촉을 삼고 촉에는 독을 발라서 맞은 사람은 모두 즉사한다.”는 기록이 있다.
진서 숙신 전에는 “이 나라의 동북쪽에 산이 있어 돌이 나오니 그 특징이 쇠를 뚫으며 이 돌을 캘 때는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푸른 돌 청석이란 바로 흑요석을 말한다. 이는 중국과 그 주변국에는 없는 광물이다. 이와 같은 화살촉에 맹수 사냥을 위해 독약을 발랐는데 매년 7, 8월이 독약 채취의 적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료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화살촉에 바른 독약은 치명적이어서 주변국들이 감히 고조선을 넘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