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 앞산에 암매장되어
증언자 : 서만오(남)/정복길(모), 서만복(동생)
생년월일 : 1955. 9. 20(당시 나이 25세)
직 업 : 운수업(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 8
개 요
운수업을 하던 서만오 씨는 동생을 찾으러 나갔다가 교도소 부근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다니는 과정에서 겪은 특이한 내용을 사망자의 동생 서만복 씨가 증언하고 있다. 서만복 씨는 당시 31사단 방위병으로 복무했기 때문에 제대 후에 서만오 씨의 사망 경위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증언자 서씨는 5·18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되기도 했던 과정과 광주상황에 대해서도 증언했다(접수번호 457번 참조).
동생을 찾으러
만오 형은 집안 식구들 중에서도 막내동생(서만재)에게 유달리 정성을 쏟았다. 동생이 어렸을 때, 집 주위의 높은 곳에서 낙상하여 그 후유증으로 가는 귀가 먹었고 말도 더듬었다. 그러한 동생이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음을 가엾게 여겨 형은 막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젖소 5마리를 사주었다.
5월 21일,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동림부락에 석산이 있는데 동생 만재가 그곳에 놀러갔다. 그런데 석산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동림부락 사람들과 만재 친구들이 차를 타고 나가면서, "만재야! 너도 타라." 하니까 만재도 그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평소부터 동생에게 애정을 가졌던 형은 저녁이 되어도 동생이 들어오지 않자 이곳저곳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인 오전까지 기다려도 동생이 돌아오지 않자 형은 일찍 점심을 챙겨 먹고 동생을 찾으러 나섰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정호라는 2년 연상의 친구를 찾아가, "만재가 어제 나가서 안 들어왔다."고 하면서 마침 시내에 볼일이 있는 김정호 씨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영일식품 앞을 지나는데 그때 시위차량이 서 있었다. 형은 전에 영일식품에 근무했던 적이 있었으므로 주위에 안면이 있는 슈퍼마켓에다 타고 갔던 자전거를 맡겨 두고 김정호 씨와 시위차량에 탑승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 다니는 것보다 차량에 탑승해서 수소문하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시위차량은 4.5톤의 트럭으로 창평 쪽으로 나간다고 했다. 함께 탑승한 김정호 씨가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 내리자고 하니까 형은, "동생을 찾아야 하니, 너 혼자 들어가라."며 내리지 않았다. 차는 계속해서 창평 쪽으로 갔고 김정호 씨는 도중에 내렸다.
그날 오후 6시쯤, 동생 만재는 돌아왔으나 이제는 형이 돌아오지 않았다. "너 찾으러 형이 나갔는데, 너 혼자만 들어오냐? 어제 어디에 있었냐?"고 물으니, "도청에서 하룻밤을 잤어 걱정할까봐 전화도 못 했어. 소깔도 뜯어야겠기에 돌아왔어." 하였다.
밤이 되어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일이 많아서 평소엔 하루도 집을 비우는 일이 없던 형이었는데, 3일이 지나도 형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어머니는 큰집 형(서만용)과 같이 찾으러 다녔지만 매번 헛수고였다.
그러던 중 5월 24일 문화동 동사무소에서 형이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다리만 조금 다쳤다는 연락이 왔다. 동사무소에 가보니 사람은 없고 주민등록증만 건네주었다. 동사무소 직원들도 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면서 어떤 할머니가 주민등록증을 가져다주고 가버렸다고만 했다. 다리를 다쳤다고 해서 혹시 병원에 있을까봐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기독교병원, 상무관, 도청까지 찾아다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병이 생겨 출입할 수가 없었고 주로 큰집 형이 찾으러 다녔다. 주민등록증을 가져다준 할머니를 찾는다면 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문화동 동사무소를 찾아가 할머니 인상착의를 물어 찾으러 다녔다. 하루는 문화동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현재의 신진자동차학원 옆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술집은 일반 건물이 아니라 폐차된 버스를 개조한 곳이었다. 술을 마시던 형이 술 파는 할머니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며 만오 형의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니 자 신이 그것을 동사무소에 맡겼다고 하였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주민등록증을 갖게 된 동기를 물었다.
교도소 부근에서 총상 입고 끌려가
그 할머니에게 들으니 문화동에서 창평 쪽으로 나가는 톨게이트 주변에는 계엄군들이 무장을 한 채 매복중이었다고 한다. 그 주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계엄군들이 매복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담양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 차량은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가다가 총격을 받곤 했다. 군인들이 거리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기 때문에 창평 쪽으로 향하는 시민군의 차에게 계엄 군이 매복상황을 알려줄 수 없었다고 한다.
5월 22일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도 갑자기 콩볶는 듯한 총성이 울렸다. 할머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포에 떨고 있는데 갑자기 총성이 그치고 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후 버스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니 웬 젊은이가 피를 흘리면서, "이리 좀 연락해 주시오." 하며 주민등록증을 건네주었다. 그러더니, "물을 좀 주시오." 했다. 할머니는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총을 맞고 난 후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지, "물을 마시면 안 된다. 조금 후면 시민군 차들이 와서 병원으로 데려갈 테니 조금만 참아라." 하고 있는데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겁이 나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버스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있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밖을 내다보니 젊은이가 버스 밑으로 푹 쓰러져버렸다. 그때 군인들이 근처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네 집 주위에는 보리밭이 있어서 시민군들이 그쪽으로 많 이 도망왔다가 잡혀가는 것이 보였다. 계엄군들이 보리밭을 뒤지다가 할머니의 가게 앞으로 왔을 때 젊은이를 발견했다. 할머니가, "사람이 있는디, 죽었는가 모르것다."고 하니 계엄군 두 명이 다리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계엄군이 젊은이를 차에 싣고 교도소로 가고 난 후 할머니는 그 사람이 맡긴 주민등록증을 문화동 동사무소에 가져다준 것이었다.
광주교도소 앞 야산에 암매장된 시체
그 할머니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겠느냐고 하니, "우리 집으로 교도관들이 이틀에 한 번 꼴로 술 마시러 오니까 그 사람들을 잡고 사정하여 수소문을 해봐라."고 했다. 어머니가 몸져 누워 계셨기 때문에, 25일 그 할머니 술집에서 거의 하루를 기다렸다. 교도관 두 명이 술을 먹으러 들어왔다. 그들에게 큰집 형이 사정 얘기를 하고 나서, "22일 총격전에 죽은 사람이 교도소에 있느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그런 일도 없었을 뿐더러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펄쩍 뛰었다. 그 자리에서는 아무런 얘기도 못 듣고 교도관 중에서 한 사람의 주소만 얻어오는 데 그쳤다.
다음날 주월동 신우아파트 근처에 살고 있는 한상범이라는 교도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사람은 자꾸 뭔가를 숨기려고 하면서 얘기를 거부하였다. 큰집 형이 준비해 간 술을 주고받으면서, "같은 광주 사람이고 22일날 분명히 동생이 그 현장에 있었으니, 시체라도 찾아야 할 것이 아니냐?"며 사정사정 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나는 직접 안 봤지만 23일 교도소에서 같이 근무하는 교도관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날 그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 중에 한 교도관이 21일날 교대를 끝내고 나오는데 계엄군들이 죽은 사람들을 바깥으로 싣고 나가더라. 어디로 싣고 가는 지 보고 있는데 교도소 앞에 있는 야산으로 싣고 가더라."는 말을 해주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날 죽은 사람은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시체를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계엄군들이 시체를 묻을 때, 떼를 떼어서 누구나 알아볼 수 없게 감쪽같이 묻은 다음 나뭇가지를 10여 센티미터 정도 꺾어서 꽂아둔다고 했다. 그러니 나뭇가지가 시든 것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형은 이제는 찾았다 싶어 26일 교도소 앞의 400-500평 남짓되는 야산을 혼자서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인부 10명을 일당 3만 원을 주고 사서 다시 찾으러 나섰다. 그 많은 사람이 오전 내내 좁은 땅을 파헤쳐도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준비해 간 술과 음료수를 나눠 먹으며 잠깐 쉬는 동안 논으로 이어지는 비탈진 언덕에 앉아 무심히 발밑을 보니 시들은 나뭇가지가 하나씩 꽂혀 있었다. 그것도 어찌나 교묘히 꽂혀 있던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오전 내내 10명의 인부들이 그 좁은 야산을 파헤치다시피 하면서 평지도 아닌 논과 접하는 비탈진 곳에 묻혀 있을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쉬다 말고 산과 논의 맞닿은 경사진 곳을 파기 시작했다. 겉의 떼를 벗기니 땅이 쉽게 패였고 부드럽게 떼가 일어났다. 곧 시체가 나왔다. 형이 아니어서 바로 옆을 파니 그곳에 만오 형이 묻혀 있었다. 형은 집을 나갈 때 시계를 차고 나갔으나 시계는 없었고 얼굴만 손수건으로 덮어놓은 채 관도 없이 매장해 놓았다. 형은 눈을 뜨고 죽어 있어서 큰집 형이 눈을 쓰다듬으니 눈을 감았다. 형은 생전에 일하다가 오른쪽 검지손가락 끝을 잘려서 군대도 가지 않았다. 그 손가락 때문에 형은 시내 나갈 때나 일할 때는 항시 장갑을 끼었다. 장갑을 낀 손을 확인해 보니 시계는 없고 손가락에 끼어 있던 금반지는 그대로 있었다. 시계는 노출상태여서 계엄군들이 가져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처럼 암매장된 시체는 5-6여 구 정도가 더 있어 보였다. 형의 시체를 조선대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 암매장되어 있던 시체들은 함께 옮길 만한 겨를이 없어서 인부들을 시켜 대충 시신들을 다시 덮어두게 하였다. 큰집 형이 문화동 동사무소에 연락만 해주었다. 시체를 부검해 보니 M16 5발이 하복부에 맞았다고 했다. 큰집 형은 27일 시에 신고를 하고 나서 어머니를 병원으로 오시게 하였다.
시체를 찾고 나니 매장지가 문제가 되었다. 시체 매장이 자유였으므로 자기 선산이 있는 사람은 선산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고있는데 시청 직원인지 인부인지 모르겠으나 누군가 어머니를 쿡 찌르면서, "다른 데로 묻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망월동으로 싣고 가시오. 후에 문제가 있을 때 유리할 것이니 훨씬 좋을 것이오." 하였다. 선산이 있었지만 결혼도 안 했고 병으로 죽은 것도 아니어서 그 사람의 말대로 망월동에 묻기로 했다.
28일 조선대병원에 있는 시체를 모두 시청으로 옮겨서 망월동으로 간다고 했다. 시청에서 내주는 버스를 타고 망월동으로 가서 시체를 매장하였다.
형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형이 타고 나갔던 4.5톤 트럭의 탑승 인원을 알아보니 영일식품 앞에서는 36여 명정도 탔으나 문화동 주위사람들에 의하면 12명 정도였다고 한다. 5·18 이후 곧 바로 제대한 나는 형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큰집 형이 만났다던 한상범 교도관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집에서는 그런 사람이 살기는커녕 세들어 산 적도 없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5·18 이후 어디로 간지도 모르게 이사를 갔다고 했다. 교도소로 가서 알아보니 다른 곳으로 전출갔다고만 했다.
형이 암매장되었던 곳을 가보니 형의 시체를 파낸 구덩이는 그대로 있었으나 주위의 시체들은 처음 상태 그대로 있었다. 큰집 형은 인부들에게 파본 것을 정리를 하라고만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군인들이 처음 해놓은 그대로 나뭇가지까지 꽂아놓았겠냐며 의문을 가졌다. 아무래도 우리가 손댄 이후 군인들이 다시 손을 본 것 같다는 것이었다.
형은 교도소 앞에서 죽었다고 하여 폭도로 몰려 있었다. 형이 폭도로 몰렸기 때문에 나는 형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었다. 수습대책위원회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소연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 보다 빨리 5·18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도 나름대로 설정했다. 하지만 진상규명까지는 생각도 못 했고 뚜렷한 방향도 없었다. 그저 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가 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라 여기는 정도에 불과했다. 부상 자회가 창립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전부터 있었던 유족회에도 참여했지만 각 단체마다 약간씩 문제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족단체들이 한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그래서 전두환이나 노태우, 정호용 등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을 학살한 놈들을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유족 중에서 금전으로 회유하는 것에 휩쓸려 유린당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슴 아프면서도 창피한 일이라 생각한다.
(조사.정리 서삼미)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