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겸이의 손을 잡고 2호선 지하철을 갈아타고..
우리 동네까지 오게 되었다.
겸이는 내 손을 놓기 위해
내가 민망해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온갖 말들을 했다.
예를 들자면..
1. 겸이 왈 "빗물 좀 닦아야겠어요."
- 그러면 나는 어떻게든 겸이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손 뗄가 봐 조바심을 내며)
"닦으나 마나지 뭐. 또 묻을텐데~~" 하고 말했다.
2. 조금 있다 겸이 왈 "우리 가위바위보 할래요?"
- (내 손을 떼어낼 속셈인지 미리 알아채고)
철판 깐 나는 음흉한 목소리로~ 이날의 아줌마 컨셉을 살려가며
"가위바위보 해서 내기 할 거 있 수우우?? 없잖아~~,
내기 할 거 없짜놔아~~? 있수우~? ? 없지?
없지이로옹~~ 있어엉? 없지로오옹?^^"
3. 겸이 왈 "땀나지 않아요?"
- (초췌한 표정으로) 손가락 하나 입에 물고.. 배시시한 눈으로 나 왈 "추워......."
이렇게 나두 티 안 나게 그의 손을
오래도록~~~ 왠만하면 계속 오래도록~~~
잡기 위해 온갖 말 받아칠 때 수많은 답변을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집 앞 지하철 역까지 도착해도..
아까 오던 비는 주룩주룩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실 예전부터 나는 여름비가 오는 날...
남자친구가 생기면 우산을 버린 채 마구 달려가는 것이 작은 희망이었다.
빗방울이 굵게 떨어지는 날..
"아아아~~~~~~~~~~~~~~~~~~~~~~~~~~~~~~~~~~~~~~~~~~악"
하면서 마구 웃으며 달리는 멋진 연인들.....
하긴.. 키도 크고 롱다리 모델 같은 연인이면 몰라도,
나같이 머리 크고, 이빨 이상한 애들 둘이 입벌리고
"아악~~ 하고 달리면
"진상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정말 추하다.."
하고 말할게 자명하지만....
그럼에도 그걸 몰랐을 때.....
예전에 딱 한 번 혼자 그래본 적이 있었다.
1. 1997년...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고, 다시 원서에 도장찍어달라고
고등학교로 가던 추운 겨울날....
2. 명동에서 버스를 탔다. 갑자기 눈물이 주루륵 흘러내렸다.
너무 억울했다. 우리반 날나리들 중 운좋게 수능 잘 본 애가
나랑 같은 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그 애는 붙었다....
매일 잠만 자고, 학교에서 담배피고..
그건 그렇다 치지만, 내가 먹던 딸기우유통에 담배 피고 나서
가래침까지 뱉었던 그 앤데..
그것도 참을 수 있다.
근데 도시락 뺏어먹을 때 숟가락도 안 가지고 와서,
항상 내 숫갈을 "쪽쪽" 빨던 녀석이 말이다....
3. 세상은 너무 불공평했다. 날라리 애는 얼굴도 예쁘다..
몇 년동안 공부한게, 수능 그 하루 때문에 판가름이 나버렸다.
운좋아서 시험 잘본애랑,
히터 옆에 앉아서 윙윙거리는 소리에 시험을 봐야 했던 나랑....
생각할수록 너무 억울했다.
게다가 나는 정말 공부아니면 할 것도 없었다.
4. 그때 난 답답한 마음에 버스에서 내린 갑자기 나두 모르게 길을 달렸다.
5. 한양대학교 옆에 조그만 다리가 있다.
성수대교는 아니고, 작은 다리가...
그곳에서부터 성수동까지 무작정 달렸다.
"아아아악~~~~~~~~~~~~~~아~~~~~~~~~~~~~"
왠지 속이 다 시원해졌다.
뻥뚫린 것처럼...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울면서 달리는게 이렇게 시원한지 몰랐다.
그냥 이렇게 달리면 무언가 해결책이 생길 것 같았다.
"아~~~~~~~~~~~~~~~~~~~~~악~"
6. 그렇게 마구 학교 교복코트 입고 달리다가 스텝이 꼬였다.
횡단보도 근처에는 성수동에는 에스콰이어 매장이 있다.
그눔의 에스콰이아 대폭 정리만 아니었어두....
그 앞에 서성거리는 아줌마들 때문에.....
7. 아줌마들이 하나, 둘 넘어져있는 내 주변으로 몰려왔다.
"아이고! 학생, 사고날뻔했어."
"왠일이래, 추운데 넘어지면 다치지"
"저런.."
부터 시작해서
아줌마들이 다들 한마디씩 한다..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기에...)
8. 흙 뭍은 교복 코트를 털며 일어난 나는....
보폭을 좁혀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남들은 수능이 끝나면 귀도 뚫어보고, 파마도 하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성형수술도 하면서 대학갈 준비도 하고,
아니면 논술 과외받아가며 더 좋은 학교로 진학하려 할 때...
나는 통닭파는 호프집 주방보조로 아르바이트 하면서도
시간당 2,500원 받아가면서 원서 대금 낼 생각만 했었기에.........
한번은.. 호프집 알바하고나서 차끊겨 택시타고 집에 가는데..
1. 택시 탄 나~
2. 아저씨 왈 "학생 뭐 맛있는거 먹었구나?
3. 나. "아니요? 무슨?"
4. 아저씨 왈 " 에이~~ 냄새가 나는데? 맛있는 냄새!"
5. 나 왈 "아녜여. 진짜 안 먹어써여. 여태 일 하고 왔는데..."
6. 이때 내 맘도 몰라주는 아저씨..왈.. "에이~ 통닭냄새 나는데 뭐얼~~~"
7. 눈물을 머금고 나 왈 "네.. 그래요. 통닭 먹어써욧~ 왜요?"
했다..
그래서 그 때 난 먹지도 않은 통닭을 먹었다고 해야했다.. 억울했지만..
여하튼..
그 날 이후로 난 한번도 길에서 달려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겸이는 그 동안 내가 살아왔던 힘든 일들을 한번의 미소로 사라지게 할 것 같았다.
그냥 어렵게 하게 된 소개팅이었기에 난 겸이와 달리고 싶었다.
우산 없이... 편하게 달리고 싶었다. 또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이런 나의 옛 이야기에 관한 설명도 하고 싶었다.
1. 나 왈 "겸아.. 우리 우산 버리고 달릴래?"
2. 겸이 왈. "네? "
난 " 비오는 날 달리는 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 그냥 오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우울해 하며 걷기보다는 신나게 달리고 싶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내 우유부단한 성격 탓인지...
난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이야.."
겸이는 나를 싱겁게 쳐다 보았다.
그런 후 말없이 우산을 폈다.
아빠 우산은 참 좋은 게 뭐냐면..
한번 피면 세 명은 쓸 수 있고, 비가 안오면 지팡이처럼 땅을 집고 가면 된다는 거다.
우산이 무겁다 싶으면 손에 힘을 빼고 질질 끌고 가면 왠지 내가 영화의 슬픈 여주인공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한마디로 독특한 효과를 보여준다.
난 빗길도 못 뛸 바에얀.. 우산이나 같이 쓰자 싶어 술수를 쓰려는데....
겸이도 우산을 폈다.
요즘 가장 많이 쓰는 삼단 우산이지만, 바람까지 불어서 뒤집힐까 걱정이 되었다. 설마 뒤집히기까지 할려나 만은...
그 핑계를 대고 싶었다.
1. 나 왈 "야! 너 우산 뒤집힐거 가터~"
2. 겸이 왈 "설마.. 이런 바람에두요?"
3. 나 왈 "나 저번에 뒤집혀써써.. 그래서 우산 하나 버렸다니깡! ^^"
4, 내가 그렇게 간접적으로 같이쓰자고 표현을 했건만.. 겸이 왈...
"괜찮아요. 바람두 세지 않은 데요. 누나"
마음에 납덩이 하나가 올라와 있는 느낌이다.
내 우산, 그 애의 우산의 거리, 그리고 빗소리 때문에
가뜩이나 조그마한 그애의 목소리가 하나두 안 들렸다.
열받은 나는 아빠 우산을 무기로 사용하기로 했다.
1. 우산을 피면 둘레에 쇠부분이 천을 잡아주기 위해 있다.
빗물이 고여 거기서 도로로 뚝뚝 흘러내리기도 하는 부분...
2. 그 빗물 고이는 부분을 겸이의 어깨 부분에 갖다 놓았다.
(빗물이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3. (사람들이 나를 치고 갈 때 마다) 내 우산으로 겸이의 작은 삼단 우산을 툭툭 찔렀다.
- 겸이가 그럴 때마다 뒤를 한번씩 돌아봤다.
4. 한 다섯 번쯤 하니까 겸이가 내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나의 작전인지두 모르고...)
5. 겸이 왈 "우산이 작아서 그런가.. 비를 자꾸 맞는 것 같아요.
누나 우산 같이 쓰는 게 낫겠어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싸~~~~~~~~~~~~~~~~~~~~~~~~~~~``"
그런데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언니의 굽 높은 샌들을 신고 갔는데....
신발이 아까부터 쭉쭉 미끄러지더니....
샌들을 신으면 원래 세 발가락까지만 나와있어야 예쁜데...
발가락이 샌들안에서 빗물에 미끄러졌다.
다섯 개의 발가락이 샌들 맨 앞으로 다 삐져나오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신발도 컸지만 우리집이 오르락 내리락 길이 있어 발가락에 힘주고 걷다보니..
새끼 발까락이 샌들 앞부분을 뚫을 지경이었다.
엄지 발가락 끝은 내리막길을 걸어갈 때..
이미 길바닥이랑 인사하고 있었다.
집앞까지 다 왔다.
그리곤 집근처에 다시 도착했을 때...
지하철이 집이랑 멀었기에 겸이에게..
1. 나 왈 "내가 다시 데려다 줄게~~"
2. 겸이 왈 "아니예요. 됐어요."
- 내가 질질 끌어 다시 지하철로 갔다...
3.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겸이가 말했다,
"그래도 제가 데려다 드려야죠. 비도 오고, 여기까지 왔는데..."
- 다시 집근처로 왔다.
내가 1. 2. 3. 번을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아직도 겸이가 내 연락처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겸이의 연락처를 물을 자신도 없었고......
그러기에..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겸이두 너무 착한 지라 자꾸 집 앞에 데려다 주었다.
하지만 걱정인 건...
언니의 샌들은 끈 세 개로만 되어있는 얄상한 거다..
근데 문제는 그 샌들도 만원짜리 인지라....
이런 비오는 날은 접착제가 떨어질 것 만 같았다.
아까부터 자꾸 흐느적 흐느적 거리는게......
샌들끈의 구조는 이렇다.
1. 발가락쪽에 수평으로 갈색끈이 있다.
2. 발등 쪽에 수평으로 갈색 끈이 있다.
3. 1)번과 2) 번의 끈을 대각선으로 이어주는 갈색끈이 있다.
이렇게 생긴 샌들이다...
그러다.. 3번째 집-전철역을 왔다갔다 할 때쯤..
오른쪽 발의 샌들끈 중 3번에 해당되는 끈이 떨어져 나갔다.
걸을 때마다 끈이 너덜너덜 거렸다.
아직 겸이는 모른다...
나는 걸을 때마다 티 안나게 오른 발을 360도 돌리면서 걸었다.
그러면 끈이 "휘잉~~~" 하고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대각선 비스꾸리무리하게 멈췄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쯔음......
같은 오른발 1번의 신발 끈이 끊어졌다...
신발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난 걸음을 멈춰섰다...
1. 겸이 왈.. "왜 그래요?"
2. 나 왈.. "시...시..인 신발. 끈이...."
3. (너무 어이없어하는 겸이...) 표정이 압권이었다.
참다 참다 못 참겠는 지 겸이 왈.. "그러길래 아까 들어갔음 됐잖아 욧!"
4. 너무 창피했다.. 이게 왠 망신인지 싶어...
나 왈.. "그...그러게.. 어쩌지..."
5. 겸이는 화를 냈다. "그래서요? 그럼 지금 저보고 업어 달라는 거예요?"
6. 나 왈.. "아니야. (신발 벗어던지며) 그냥 버리고 가지 뭐!"
- 신발을 툭툭 벗어 던지고 들고 가려는데......
7. 겸이 왈 "두개나 떨어졌는데 그냥 버려요. "
난 정말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집이 바로 앞 이길래..
맨발로 걸었다.
갑자기 겸이가 걸음을 멈췄다.
겸이 왈.."아유.. 진짜... 벌서요!"
나 왈 "?? 무.. 무슨... 벌..."
겸이 왈.. "아무튼 1분만 벌서요. 벌..!"
겸이는 우산을 뺏더니 나를 1분동안 빗속에서 맨발로 있게 했다..
너무 추웠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맨발로.. 엄정화 머리 다 망가지고.. 곱슬머리.. 튀어나오고.. 화장 다 지워지고....
그 후 겸이는 말했다.
"업혀요..."
- 빙고... ! !!!! 빙고 빙고!!! -
그렇게 겸이의 등에 업힌 채 현관까지.. 업혀 들어왔다....
내 무거운 몸을 엎고 겸이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남자의 등이 이렇게 따뜻하구나......'하고 느끼게 되었다.
비가 와서인지.. 겸이의 등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난 영화에 나오는 우리나라 신혼부부이 왜 남자의 등에 업히는 장면이 잘 나오는지
이날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드디어 내 뇌세포들이 빨라졌다.
핑계가 생겼다.
이 때 다 싶어 겸이에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난 말했다.
"너한테 업히고...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다음에 밥 사줄게..
꼬옥.. 니 전화번호 뭐야..?"
하고 자연스레 물었다.
98년인 이 때는 겸이는 현대에서 나온 핸폰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보라색 주먹만한 삐삐를 가지고 있었다.
겸이 왈 "삐삐에 찍어 줄게"
하며 겸이는 자기의 핸폰으로 내 삐삐에 연락을 했다.
당시 내 삐삐에 음성으로 들어가는 노래는
최신 히트치던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 이었다....
내 삐삐에 자신의 번호가 찍혔는지 확인한 겸이는
내 삐삐를 보며 한마디만 했다. "노래만 좋네요~~"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난 이덕화가 옛날에 트라이 선전할 때.....
여자를 보내고 나서 왜 엘리베이터 문을 "꽝!!!!!" 하고 쳤는지두...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겸이가 아파트 앞에서 유유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슬리퍼 신고 얼른 아파트 동앞에 가서 아까 벗은 샌들을 다시 주워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