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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한국말의 개념 문제
신운용(안중근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 외대강사)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말과 글 그리고 사람과 소통 3. 하늘과 백성 그리고 정치 4.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세계의 근대사는 동서양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동양침탈은 단순한 무력충돌로만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서양인들의 세계관과 인간관이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결국 침략이라는 현상을 낳았던 것이다. 서양은 우선 많은 새로운 개념으로 동양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허버트 스펜서 등의 서양 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하여 선진적인 서양이 미개하고 후진적인 동양을 계몽된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회진화론을 제공하여 동양침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의 근대사는 동서양 ‘개념들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근대사는 무력을 앞세운 서양의 개념들에 완패한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동양의 개념이 서양의 그것과 비교하여 뒤떨어지거나 없애버려야 할 구시대의 유물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동양의 개념들은 오늘날 미래를 열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반면 침략을 뒷받침하고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이론으로 작동된 서양의 개념들은 이제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를 정확하게 파악한 이가 바로 안중근이다. 그는 철도, 병원, 학교, 위생시설을 만들어조선을 진보시켰다는 서양의 개념을 맹종한 일제의 주장에 대해 “일제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더욱 진보하였다”는 대응논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처럼 그는 다양한 형태의 평화론으로 위장된 서양의 식민지근대화론에 사로잡힌 일제와 ‘동양평화론’이라는 이론으로 무장하여 한바탕 ‘개념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의거도 이 개념전쟁의 일환이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오늘날의 동양은 여전히 서양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대학의 모든 학문개념들은 서양의 그것에 점령당한지 오래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는 계속 강요되어 장차 한국말조차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은 서양인들이 만든 개념에 의해 파생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2007년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에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있음에도 어느 누구도 해결책을 제시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미국의 경제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급급했지 새롭고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다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한국이 외부의 충격에 쉽게 노출되지 않고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개념을 맹종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2007년 미국의 경제위기에서 우리는 새삼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서양의 경제이론으로 초래된 사람들의 존재성 파괴를 막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경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구의 경제개념 핵심은 대체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필자는 경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경제의 우리말 ‘살림’에서 해답을 찾고자 한다. 살림은 동사 ‘살리다’의 명사형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제(학)의 총론으로 “물질적 측면에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이론”라는 개념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각론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한국은 물론 세계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치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의 정치개념 핵심은 “권력의 획득과 지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학자들이 대부분 서구의 이론을 추종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한국의 정치가 발전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따라서 정치개념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찾아내 서구이론의 추종에서 벗어나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사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정치(政治)라는 말을 다스릴 정(政), 다스릴 치(治)로 선조들이 풀이하였다는 사실에서 정치의 개념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다스리다’는 말은 ‘다리다’라는 고어에서 온 말로 ‘다(모두) 살리다’는 뜻이다. 따라서 필자는 정치의 개념을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제 이러한 방법론을 모든 분야로 확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면 우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고 세계를 진정한 의미에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바람과는 너무나 멀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중국인이 만들어 놓은 개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개념을 만들려고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한 분은 세종이다. 세종은 당시의 시대를 장악한 한자 중심의 학문에서 벗어나 역사의 정통을 잇고 나랏사람을 모두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백성을 살리기 위한 정치이론으로『용비어천가』를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에서 세종이 제시한 ‘소통’과 ‘정치’의 개념을 되짚어 봄으로써 서양어의 개념에서 벗어나 나랏사람 모두를 살리는 한국말의 개념을 만드는 기회로 삼고자 이 글을 쓴다. 필자는 이 작업이 새로운 한국말(학문)의 개념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 말과 글 그리고 사람과 소통
조선은 성리학과 단군론을 바탕으로 하여 1392년에 세워졌지만 여전히 사회의 모든 방면에 고려의 영향은 남아 있었다. 조선이란 나라의 안착과 강력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화의 정착은 세종대의 시대적과제였다. 특히 권력의 안정을 다져야 했던 세종은 백성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고 왕권을 견제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과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세종의 정치적 입장은 왕권강화를 통하여 지배력을 높여 정권의 안정화를 꾀하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지대한 관심을 갖고서 한자를 중심으로 한 개념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열망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세종은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소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하나하나 풀어내는데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득권층과의 대립을 극복하면서 시대문제를 해결하여 나라의 발전을 어떻게 꾀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과제를 풀기 위해서 세종은 백성과의 소통을 바탕으로 권력 기반을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배세력에서 백성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지배세력의 사람(백성)에 대한 인식부터 뿌리째 바꾸어야만 했다. 그 방법은 바로 세종 자신의 생각을 지배세력에 주입시키면서 백성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는 백성과의 소통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종은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인 백성 사이에서의 소통을 정치철학으로 역사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소통은 그 나랏사람의 삶과 역사를 담은 말과 글이 있을 때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우고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글이 만들어질 때 계급 사이의 참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글이 모든 말을 쉽게 표현할 수 있을 때만이 나랏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말을 담을 수 없는 글, 자기의 생각을 손쉽게 드러낼 수 없는 말은 소통을 막고 나랏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불러오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랏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담아내고 풀어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은 소통의 물줄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종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바로 백성과 어떻게 소통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백성을 소통의 대상 즉, 말을 함께 섞고, 글을 주고받음으로써 삶을 더불어 열어가는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바로 이러한 세종의 모든 정치철학이 녹아 있는 최고의 소통방법을 제시한 글이었다. 세종은 조선 사람의 ‘말’이 중국‘어’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훈민정음을 시작하고 있다. 이는 한문으로는 조선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이끌어낼 수 없음을 절절히 느낀 결과이기도 하다. 한문으로 백성과 세종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하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글을 새로 만드는 것밖에 없다고 세종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훈민정음 머리에서 소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스스로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 문로와로 서르 디 아니”라고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는 한자본에 “國之音異乎中國與文字不流通”라고 되어 있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세종은 ‘유통(流通)하다” 즉 “소통(流通)하다”를 “서르 다”고 뜻풀이하고 있다. ‘다’는 사무치다의 15세기 고어이다. 사무치다는 “뼈에 사무치다”는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무엇인가 깊이 들어가 있는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나랏말미 中國(듕귁)에 달아 文字(문)로와로 서르디 아니”는 나라의 말과 글(한자)이 서로 달라서 서로의 생각(세종, 백성의 생각)이 백성(세종)의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종과 백성 사이에 소통이 되지 않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더불어 특히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나랏말미’의 ‘나라’와 ‘말미’라는 대목이다. 세종은 조선이 중국과는 역사와 문화가 뿌리부터 다른 나라임을 선언하면서 조선에 알맞은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에 중국을 설명하면서 “皇帝(뎽)겨신 나라히니 우리나랏 常談(쌍땀)애 江南(강남)이라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세종이 ‘우리나라’라고 한 것은 바로 타국(중국)과 구별되는 역사와 문화의 경험을 함께 한 집단으로써 ‘우리’가 만든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피지배계급인 백성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지배계급까지도 아우르는 모든 나랏사람들의 혈맥 속의 피를 흐르게 하는 소통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훈민정음은 우리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여 ‘우리’라는 민족의식을 더욱사무치게 하는 문화의 물줄기였던 것이다. 또한 세종은 말을 소통의 내용물로, 글을 말을 담을 수 있는 소통의 그릇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뜻을 분명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글을 만드는 일은 그의 소통철학을 완성하는 길이었다. 세종이 “이런 젼로 어린 百姓(셩)이 니르고져 홇배이셔도 마내 제들시러펴디몯노미하니라”라고 한 데서 글이 없음을 백성과 소통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으로 판단하고, 더 나아가 이를 ‘한’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종은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서 백성과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통되지 않음의 ‘한’을 풀어내기 위해 세종은 “내 이 爲(윙)야 어엿비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 노니 사마다 수빙 니겨 날로 메 便安킈고져 라미니라”하여 훈명정음 창제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더욱이 여기에서 세종이 ‘사마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통에는 ‘사람사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종과 백성은 서로의 소통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한자본에는 ‘인인(人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人)이라는 한자는 한 사람이 서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사람’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살+암’으로 볼 수 있다. ‘살’의 동사는 ‘살다’이다.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살다의 타동사 ‘살리다’는 바로 이러한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개념화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사람답다’, 또는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을 한다. 여기에서 필자는 사람을 다른 사람을 살릴 때 ‘사람답다’라는 말을 쓰고, 그렇지 않고 죽일 때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을 쓰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의미는 “다른 사람을 살리는 존재”라고 개념지울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세종이 백성을 사람으로서 어떻게 모실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훈민정음을 만들었음도 엿볼 수 있다. 세종은 백성을 오로지 지배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사람’ 즉 살려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은 백성을 어떻게 살릴까 하는 세종의 정치철학의 구체적인 실천 결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임금과 백성 사이의 소통의 ‘한(최고 경지)’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세종은 소통의 개념을 “서로 사무침을 바탕으로 백성과 하나가 되는 것”, “백성을 사람으로 모시는 것”, “백성(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 등으로 뜻풀이를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소통개념은 “모든 사람 사이를 좋게 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3. 하늘과 백성 그리고 정치
백성과의 소통을 정치철학의 으뜸으로 여겨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백성을 살려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 세종은 자신의 조상이 백성을 살린 역사를 이어갔음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밝힌 것이『용비어천가』이다. 용비어천가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극단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용비어찬가가 조선의 정치 입문서라는 데는 두 말 할 필요 없을 것이다.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통하여 정치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며, 그 궁극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스스로 다지면서 후대의 임금들을 가르쳐 나라와 사람들을 살리는 정치를 하도록 이끌려는데 글 짓는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정치의 핵심을 ‘하늘’과 ‘사람’이라고 세종은 보았던 것이다. 말하지만 하늘에 대한 풀이 속에서 사람을 있게 하는 힘 즉 현실 밖의 하늘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역사 현실 속의 하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하늘’과 ‘그 하늘의 뜻’에 대한 세종의 해석은 “狄人(적인)ㅅ 서리예 가샤 狄人(적인)이 외어늘 岐山(기산) 올 샴도 하디시니(狄人與處狄人干侵岐山之遷實維天心) 野人(야인)ㅅ 서리예 가샤 野人(야인)이 외어늘 德源(덕원) 올 샴도 하디시니(野人與處野人不禮德源之徒實是天啓)”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중국 고사에 빗대어 목조와 익조의 고사를 통하여 이성계 가문이 하늘의 뜻을 얻는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세종은 하(하늘의 뜻)을 앞 노래(중국의 고사)에서는 천심으로 뒷 노래(조선의 고사)에서 천계로 따로따로 설명하였다. ‘ 천심’과 ‘천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천심은 단순한 하늘의 마음라고 한다면, 천계는 하늘이 스스로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임으로써 현실의 역사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고 하는지 계시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늘의 뜻’은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계시적’ 하늘의 의지를 담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4장, “狄人(적인)ㅅ 서리예 가샤 狄人(적인)이 외어늘 岐山(기산) 올 샴도 하디시니, 8장 “世子(세자) 하히 샤 帝命(제명)이 리어시 聖子(성자) 내시니다”, 19장 “ 한 도 모샤 보리라 기드리시니 셴 할미 하히 보내시니”, 21장 “하히 어시니 누비 아닌 海東黎民(해동여민)을 니시리가”, 30장 “뒤헤는 도딘 알 기픈 모새 열 어르믈 하히 구티시니”, 34장 “城(성) 높고 리 업건마 하히 도실 론자히 리시니다”, 37장 “나라해 忠臣(충신)이 업고 至誠(지성)이실 여린 하히 구티시니”, 46장 “聖武(성무)를 뵈요리라 하히 님금 달애샤 열 銀鏡(은경)을 노시니 다”, 68장 “한비 아니 그치샤 날므를 외오시니 하히 부러 우릴 뵈시니”, 72장 “하히 獨夫(독부)를 리샤 功德(공덕)을 漢人(한인)도 거니 國人(국인) 미 엇더리고”, 83장 “자로 制度(제도)ㅣ 날 仁政(인정)을 맛됴리라 하 우흿 金尺(금척)이 리시니”, 86장 “石壁(석벽)에 수멧던 녜뉫글 아니라도 하 들 뉘 모리”, 90장 “두 버디 배얀마 미 하 계우니 어마님 드르신 말 엇더시니”, 102장 “모맷 病(병) 업스샤 뎌 지븨 가려시니 하히 病(병)을 리오시니”(밑줄: 필자) 이러한 계시적 하늘의 뜻이 역사 현실 속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세종은 이를 바로 “임금이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때”라고 여기고 있다. 즉, 116장에서 “道上(도상)애 僵尸(강시) 보샤 寢食(침식)을 그쳐시니 旻天之心(민천지심)애 긔 아니 디시리 民瘼(민막) 모시면 하히 리시니 이 들 닛디 마쇼셔”(밑줄: 필자)라고 하여 임금이 백성을 외면하거나 그로 인해 백성이 임금을 외면하는 것과 임금이 하늘의 버림을 받는 것은 같은 의미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백성이 하늘과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118장에서도 “님 德(덕) 일시면 親戚(친척)도 叛(반)니 이 들 닛디 마쇼셔”라고 하여 왕실의 지지조차 임금의 덕에 달려 있다고 세종은 주장하고 있다 세종은 조선의 건국을 하늘의 뜻이라는 계시적이고 암시적인 어떤 힘이 도운 결과임을 중국의 고사에 견주면서 설명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데 세종은 계시적 암시적으로 설명되던 하늘 실체를 120장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어 그의 정치철학의 ‘본’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세종은 120장에서 “百姓(백성)이 하히어늘 時政(시정)이 不恤(불휼) 力排群議(역배군의)샤 私田(사전)을 고티시니 征歛(정감)이 無藝(무예)하면 邦本(방본)이 곧 여리니 이 들 닛디 마쇼셔”(밑줄: 필자)라고 하여 하늘의 실체는 ‘백성’이고 하늘의 뜻이 바로 ‘백성의 뜻’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백성이 곧 하늘이고 백성의 뜻이 바로 하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의 정치철학의 중심은 지배세력이라기 보다 ‘백성’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은 정치의 개념을 “하늘의 뜻 즉 백성의 뜻을 파악하는 일”이고 “백성의 뜻을 받드는 것”이며 “백성을 살리는 행위”라고 정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을 후대 임금들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종의 정치개념은 정치(政治)의 정(政)자와 치(治)자를 ‘다스린다’ 즉, “사람을 살리다”는 뜻으로 세긴 선조들의 그것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인의 정치철학의 개념을 ‘사람을 살리는 이론이자 행위’로 규정지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110장부터 125장까지 “잊지 마소서”로 끝나는 대목에서 정치를 함에 있어 후대의 임금이 꼭 지켜야 할 핵심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125장에서 “千世(천세) 우희 미리 定(정)샨 漢水北(한수북)에 累仁開國(누인개국) 샤 卜年(복년)이 업스시니 聖神(성신)이 니샤도 敬天勤民(경천근민)샤 더욱 구드시리다. 님금하 아 쇼셔 洛水(낙수)예 山行(산행) 가이셔 하나빌 미드니가”(밑줄: 필자)라고 하여 정치의 본을 “경천근민”이라고 뜻풀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현실세계를 있게 하는 하늘을 받들고 현실정치의 실체인 백성을 잘 보살피는 것을 세종은 정치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용비어천가에서는 하늘의 뜻을 ‘하늘’이 어떻게 한다거나 하늘의 뜻이 어떻하다거나 또는 ‘천명(天命)’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천명이라는 용어는 13장, 32장, 37장에서 3번 나온다. 반면 하늘(뜻)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은 약 18번이나 나온다. 이는 천명보다 하늘(뜻)이라는 단어가 조선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점에서 계급을 초월하여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정치적 의미를 두고 있었던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구성하는 핵심단어로 훈민정음에서 한자인 천명보다 한글인 ‘하늘(뜻)’을 골라 쓰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하겠다. 또한 정치적 기반을
지배세력에서 백성으로 옮겨 백성을 살리고자 했던 세종의 열정이 ‘하늘(뜻)’의 사용빈도를 높였던 것이다. 아울러 이는 백성들이 세종의 뜻을 쉽게 이해하도록 한 선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세종은 천명보다 ‘하늘(뜻)’을 정치적 개념으로 사용하였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하늘의 뜻과 관련하여 하늘(뜻)의 전통성을 중국에서 찾지 않고 바로 단군에 직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또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세종은 15장 “公州(공주)ㅣ 江南(강남) 저샤 子孫(자손) 치신 九變之局이 사 디리가”에서 조선의 건국을 구변지국과 관련짓고 있다. 즉, 이 글(구변지국)에서 “우리나라 역대의 도읍이 아홉 번 변한다고 하고, 아울러 본조가 하늘의 명을 받아 도읍을 세운 일을 말했다”고 하여 조선의 건국과 한양으로의 천도는 단군과 연결된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제42장에서도 “東寧(동녕)을 마 아샤 구루미 비취여늘 日官(일관) 從(종)시니”에서 동령의 역사적 연원을
설명하는 주에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내용이 보인다. 이러한 의식은 단군의 영역인 만주 땅에서 이성계 가문이 성장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역사적 정통성을 단군에 잇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13장 “놀애 브르리 하 天命(천명)을 모실 므로 알외시니”의 해설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번에 군중에서도 모두 불렀다. 목자(木子)를 합자면 이자(李字)가 된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놀애’는 이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86장 “石壁(석벽)에 수멧던 녜뉫글 아니라도 하 들 뉘 모리”의 해설에 “이성계에게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서 삼한의 경계를 바로잡는다는 글을 어떤 스님이 주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石壁(석벽)에 수멧던 녜뉫글’은 이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서 목자(木子)는 단군(檀君)의 단자(檀字)의 목(木)과 직결되는 것(木子得國論)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단군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조선 건국의 전통성을 단군에서 찾는 세종의 역사의식을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종은 하늘의 역사적 정통성은 단군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역사의 실체로서의 하늘이 백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세종의 정치철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을 주장한 천도교의 사상으로 이어졌던 점을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세종의 사람에 대한 개념은 “하늘의 본질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의 인식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4. 나오는 말.
겉으로는 한국이 번영을 구가하는 듯이 외부 세계에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안 쌓아올린 대부분의 성과가 서양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는 다른 말로 우리의 개념들이 서양의 그것에 사로잡혀 있어 서양이 몰락하면 우리도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현재 노인문제는 한국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결정짓는 주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소위 서양의 ‘사회복지학’을 가져다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다. 그러나 양로원과 요양원만을 양산하는 것만으로는 노인 문제의 해결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노인문제는 서양의 사회복지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는 것을 극히 자연스런 일로 여겨왔고 불효를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겨온 전통”을 조선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단순히 성리학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조선 사람의 ‘본’을 우리말로 갈고 딱은 의식 있는 조선의 선비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인문제는 이러한 전통 위에 사회복지학을 만들 때만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물론 이는 부모와 자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는 학문적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할 일이지만 우리 자신의 문화로 돌아가는 마음의 길을 잡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서 필자는 서양과 우리 사이에 놓인 개념들의 전쟁을 선언하기 위해서 세종이 중국의 개념과 어떻게 전쟁을 벌이었는지를 ‘소통’과 ‘정치’를 화두로 삼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세종은 정치의 핵심을 ‘소통’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정치 입문서로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에서 중국과 조선은 다른 역사와 문화의 배경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조선의 ‘하늘’인 백성과의 소통을 되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세종은 용비어천가에서 하늘의 실체가 백성임을 보였고 백성을 섬기는 것을 정치의 핵심개념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한국말의 ‘본’을 되살려 백성을 살리려고 하였던 세종은 중국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던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최만리로 대표되는 지배계급과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여러 가지 개념을 만들어 한국사 속에 뿌리는 내렸던 것이다. 끝으로 필자는 외국의 개념과 한 바탕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이 시점에서 세종의 전술과 전법을 익히는데 온 힘을 다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임을 역설하면서 이글을 맺으려고 한다.
자료-우리말로학문하기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