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영화감상 후기 글 / 박성규
삼일절 문화생활 겸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보려 했는데 매진되어 탕웨이와 현빈이 출연한 영화 “만추”를 관람했다. 영화가 시작되자 애나 첸(탕웨이)의 헝클어진 몰골과 불안한 걸음걸이 그리고 눈 주위의 움퍽 음영을 드리운 곳곳에 멍 자욱이 클로우즈 업 되면서 짙은 회색으로 채색된 안개와 비의 도시 시애틀의 암울하게 가라앉는 분위기가 배경 음악과 함께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얼굴을 일시에 침통하게 만든다. 잠시 후 누군가 죽은 듯 누워 있고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배경이 감옥으로 바뀐다.
살인죄로 7년 째 수감중인 죄수번호 2537 애나는 호출을 받고 전화를 받는다. 전화 저편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오빠가 보석금을 내었고, 3일 간 조문할 수 있도록 말미를 얻어 놓았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탄 시애틀행 버스 오랜 동안 사회와 격리된 탓에 낯설기만 한 버스에 빛바랜 코트를 걸친 애나는 버스 뒤 켠 의자에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길게 몸을 기댄다. 잠시 후 쫓기듯 차에 탄 훈(현빈)에게 버스기사가 68달러를 요구하자 차비가 모자라 버스 안을 훑어보더니 애나 앞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며 30달러를 빌려 달란다. 한참을 바라보던 애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귀찮다는 듯 30달러를 건네주자 훈은 기사에게 돈을 건네며 여자친구가 표를 잃어 버렸다고 말한 뒤 애나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시계를 풀어 주는 훈, 훈은 사랑이 필요한 여자들에게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는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다.
훈은 휴게소에서 애나 뒤를 따라간다. 애나가 무뚝뚝하게 왜 그러느냐고 따지자, 시간을 묻는 훈, 애나가 시계를 되돌려 주며 쌀쌀맞게 털자 훈은 돈을 갚고 찾아가겠다며 억지로 시계를 다시 채워주고서 자신에게는 의미 있는 시계이니 다시 찾을 때까지 잘 간수하라며 핸드폰 번호를 묻는다. 애나가 정색을 하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 애나 손에 쥐어 준다. 잠시 후 만나자고 제의하는 훈, 내가 나오리라 생각하느냐며 애나가 되묻자 훈은 특유의 장난기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 답한다. 집에 들어가기 전 핸드폰 번호 쪽지는 휴지통에 버려지고, 애나는 돌아선다.
집에 들어가자 7년 만에 만난 가족도 어머니가 남긴 유산에 관심이 있을 뿐이고 자신의 동의 서명이 끝나자 슬슬 자리를 피한다. 자신이 소녀였을 때 목숨이라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던 오빠 친구인 왕징은 이미 가정을 꾸렸고, 시애틀의 거리도, 자신을 불편해 한다. 팽개쳐진 애나의 삶 외에는 모두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고, 모든 것이 변해 버려 낯설기만 한 애나는 거리를 배회하다가 얼마 후 쇼 윈도우에 비친 옷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시 후 애나는 짧은 치마와 멋진 윗옷을 걸치고 얼굴 화장에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선, 귀걸이까지 멋지게 걸어 변신을 한 뒤 사뭇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며 기분전환을 해보지만 그마저 낮 설기만 하다. 낡았지만 익숙하게 걸치던 옷으로 갈아입고, 버스정류장에서 돌아가 버릴까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린 터미널에서 훈을 다시 만난다.
전 날 훈은 연상의 여자에게 서비스로 밤을 새우고 용돈을 챙겨 나온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시작된 둘의 하루. 시애틀을 안내하는 훈과 함께 묻지 마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수륙양용 버스기사의 재담에 애나의 얼굴에도 잠시 웃음꽃이 핀다. 장면이 바뀌고 애나는 당신이 나를 원하느냐고 묻고, 잠시 후 그들은 호텔에서 어색한 사랑 행위를 시작하지만 그마저 낯설어 애나는 갑자기 훈을 밀치고, 훈은 넘어지며 조명등을 망가뜨린 황망한 얼굴, 애나는 옷매무새를 수습하며 미안하다고 한다. 그러자 훈도 옷을 걸치며 “나랑 만나서 즐겁지 않은 손님은 처음이니까, 할인해 줄게요, 오늘 하루” 하며 애나를 놀이공원으로 안내하지만 문은 닫혀있다. 훈은 범핑카가 있는 곳으로 애나를 안내하여 둘만의 놀이에 열중한다.
한참 후 갑자기 경직된 애나의 무표정한 얼굴, 시간이 멈춘 듯 앉아 있는 애나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훈. 갑자기 닫혀있던 빗장이 거두어 지고 남녀 2인의 무언극이 열린다. 여심을 잘 아는 훈이 남자 배우의 몸놀림에 맞추어 독백을 한다. 그러자 애나는 오랫동안 담아 두었던 마음속의 절규를 여자 배우의 몸놀림에 맞추어 토해낸다. 그리고 훈에게 자신이 남편을 살해한 죄수이며 죄를 짓게 된 배경을 독백처럼 읊조린다. 장면이 바뀌어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장 예식이 끝나고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왕징(김준성) 부부, 애나, 훈, 아무 상황도 모르는 왕징 부인은 차를 건네며 애나에게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 중국에서 무얼 하느냐고 묻는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대신 훈이 큰 식당을 하고 있으며 얼마 후 자신과 결혼할 예정이라고 대신 답한다. 잠시 후 애나와 왕징 부인이 자리를 뜨자 왕징은 훈에게 애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왕징이 애나가 목숨을 걸고 사랑했으나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고, 애나도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는 중에 찾아 왔었으며 도망가서 살자고 한걸 남편이 눈치 채고, 왕징을 살리기 위해 죄를 짓게 된 걸 들었기 때문에 일부러 시비를 건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지자 조객들이 당황하며 둘을 말린다. 애나가 훈에게 무엇 때문이냐고 묻자 어이없게 훈은 왕징이 자신의 포크를 쓰고서 사과를 하지 않아서 그랬다며 흥분된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자 애나는 왕징에게 소리소리 치며 왜 사과를 하지 않았느냐고 땅을 치며 운다. 당황한 왕징은 얼결에 애나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남편을 살해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에게 사과를 끌어내어 마음속에 한을 조금은 덜어 준 그 장면에 관객들은 웃음을 날린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며 대나무 숲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왕 전용 이발사의 후련한 마음이 그 순간 애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중간 중간 2537번 죄수에게 주어진 72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을 핸드폰으로 위치보고를 강요하며 긴박감을 더한다. 마지막 복귀하는 날 버스에 오른 애나를 배웅하는 여심 에스코트 서비스의 완결자 훈은 밖에서 배웅하지 못하고 안달하다가 차에 오른다. 안개가 자욱이 낀 도로는 버스가 순조롭게 진행하도록 두지 않는다. 기사는 안개가 걷힐 때까지 휴게소에서 잠시 쉰다는 안내방송을 한다. 안개 속에서의 훈과 애나의 진한 입맞춤 짧은 시간 운명은 둘을 잿빛 안개 속에서 사랑의 불꽃을 피우게 한다. 그리고 여심 사냥꾼 훈은 그를 쫓던 옥자의 남편이 처 놓은 덫에 걸렸음을 안다. 그리고 훈은 애나에게 나오는 날 이곳에서 만나자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애나가 잠든 사이 코트를 벗어 덮고 시계를 채워주고 애나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영화는 시작할 때처럼 싸이렌을 울리며 인사 없는 작별을 예고한다.
2년 뒤 애나는 밝은 얼굴과 산뜻해진 차림으로 다시 약속했던 곳을 찾아 자신의 뒤에서 발자국 소리로 먼저 다가온 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발자국 소리가 날 때마다 뒤를 돌아보지만 훈은 없고, 독백한다. "안녕" "오랜만이에요" 자신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한 훈, 애나는 낯설기만 하던 가족과 세상에 어색하지 않고 멋지고 당당하게 살 준비가 된 다시 태어난 애나를 예고한다. 결국 만추는 잿빛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작은 배려와 관심을 기울여 상처를 치유하고 사회에 적응할 희망과 힘을 줄 수 있도록 권장한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수인번호 2537을 해석해 보면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추측해 본다.
2 : 2년 후 희망을 가지고 53 : 오세요 7 : 7년 과거는 잊어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