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생각
고정희
아침에 오 리쯤 그대를 떠났다가
저녁에는 십 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꿈길에서 그대를 십 리쯤 떠났다가
꿈 깨고 오 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무심함쯤으로 하늘을 건너
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대를 지나가자
풀꽃으로 도장 찍고
한달음에 일주일쯤 달려가지만
내가 내 마음 들여다보는 사이
나는 다시 석 달쯤 되돌아와 있습니다.
그대 생각
고정희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그대 생각
고정희
유유한 서러움에 불을 지르듯
앞뒷산 첩첩이 진달래 피면
어지러워라 너 꽃불 가득한 4월
그대는 안산 진달래꽃으로 물드네
아련한 기다림에 불을 지르듯
언덕빼기 아롱다롱 과수꽃 피면
찬란하여라 저 비단결 강토
그대는 안산 배꽃 사과꽃으로 물드네
수양버들 자락에 그대 생각 걸어놓고
남쪽 뜨락 까치집 바라보니
이 좋은 봄철에 차마 못할 일
홍도화 붉은 심정 홀로 끄는 일이네
그대 생각
고정희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 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 가장
이쁜 은방울 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