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이스라엘의 기원
이스라엘의 역사적 기원
1)1948년 5월14일 건국
2)지리적-아열대 지역에서부터 북위33.4도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후상으로는 1년을 우기와 건기로 크게 나눈다.
3)세 대륙을 연결하는 교차로이며 비옥한 초생달 지역으로 알려진 곳
4) 유대민족-히브리족속이며 아브람함이 조상
B.C1200년경 출애굽
B.C1000년 경 가나안 땅에서 국가를 형성(초대 왕:사울)
5)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
①▶ 유태민족-A.D 70년 멸망할 때까지 약1300년간 필레스타인에서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였다.
②▶북이스라엘 앗수르에게 멸망
③▶B.C 586년 남유다 바벨론에 의해 정복당하여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기를 겪음
④▶B.C 538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당하여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공동체를 건설
⑤▶A.D 70년 로마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까지 거주
⑥▶로마의 지배하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로마제국 도처로 흩어지게 되었다.
⑦▶A.D 600년경 이슬람의 등장
⑧★1096년 1차 십자군전쟁으로 본격적인 반 유태주의가 시작되었다.
(십자군전쟁-이슬람이 동로마제국을 침략 황제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 당시 교황의 권위는 상당하여 전쟁에 지원하며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 하였으나 200년이나 지속되던 십자군전쟁이후 교황의 권위는 떨어지고 왕정의 권위가 부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⑨★1348-1350년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책임까지도 유대인들에게 부과 대량학살을 당함
⑩★1516년 베네치아에 최초의 게토가 설치(게토-서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거주하도록 격리된 지역으로 공간적 의미도 있고 사회적으로 유럽사회에서 배제된 사회적의미도 있다.)
⑪★유럽에서 반유태주의는 갈수록 극심해졌고 "의식적인 살인"이라고 불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등장하게도 되었다.(의식적인 살인-기도교도의 한 아이가 없어지면 유태인 한명에게 그 사건을 연루시켜 유태인이 예수의 희생을 조롱하기 위해 기독교도의 아이를 십자가에 못박고 피를 의식적 목적에 사용하였다는 협의를 부과)
⑫★1791년 9월 28일 그레고리 사제:유대인에게도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이 비로소 근대의 정치 무대로 등장하게 됨.
그 이후 종교적으로는 더욱 배척받게 되었고 타국민에의 동화로 안식을 찾는 유대인과 예속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어 '시온의 땅'을 회복하자는 유대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6)유대 민족주의 발흥
①1881년 호베이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직하여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을 도모
②5차에 걸쳐 이주했고 2차 이주때 이슈브(임시정부)가 건국시기까지 임시정부의 역할을 했다.(1882년-1차 이주 1948년-5차 이주):시온주의
분쟁사
1)제1차 중동전쟁(독립운동 1948년)
①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②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 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인구 1%에 해당하는 6천 여 명 이상이었다.
③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 하였다.
④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2)제2차 중동전쟁(1956년 시나이 분쟁, 수에즈전쟁)
①발단: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지 못했으며, 협정 위반 사례가 빈발 하였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하여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살인과 방해 공작이 목적인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가 날로 증가 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 기지로 변모해 갔다.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생존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②경과: 이에 8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선재공격함.) 방위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③중재: 이집트의 에일라트 만 자유 항해에 대한 보장과 유엔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대한 유엔 긴급 파견군(UNEF) 배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 점령했던 지역에서 1956년 11월 ~ 1957년 3월의 위치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④ 결과: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가 시킬 수 있도록 티란 해협이 개방되었다.
3)제3차 중동전쟁 (1967년 6일 전쟁 )
①발단: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너머 아랍 테러 단체들의 기습이 격화되고, 북부 갈릴리 지방의 농경 정착촌에 대한 시리아 포대의 지속적인 포격과 인접 아랍 국가들의 막대한 군비 등으로 이스라엘의 평온이 깨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사막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1957년 이래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 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고,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였으며,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 받는 아랍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②경과: 1956년 시나이 분쟁 뒤에 합의된 협정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부의 이집트에 대하여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 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 고원에서 저지시켰다.
③결과: 6일간의 전투 뒤 기왕의 휴전선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새로운 휴전선, 즉, 유다 사마리아 가자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 등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촌락들은 19년간 계속되어온 시리아의 포격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적과 이스라엘행 선박의 티란 해협 통과가 확보되었고, 1949년 이래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에 계속 양분되었던 예루살렘이 재통합되었다.
전쟁에서 전쟁으로
4)제4차 중동전쟁(1973년 욤키푸르 전쟁 )
①발단: 3년간 지속된 평화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합동 기습 공격을 가했던 욤키푸르(유태력 속죄일)에 산산조각이 났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넜으며, 시리아 군대는 골란고원을 돌파하였다.
②경과 및 결과: 이후 3주 동안에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제를 역전시켜 침략자들을 격퇴시켰으며,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에 진격하였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20마일 이내까지 육박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부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전쟁동안 점령했던 일부 영토에서 철수 하였다.
전쟁에서 평화로
1973년 10월 전쟁의 비용은 이스라엘의 1년간 GNP(국민 총생산)에 해당되었으나 1974년 하반기까지 경제는 1968~1973년의 경제 회복기에 기록했던 성장과 산업 팽창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으며, 1975년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자의 준회원이 됨에 따라 이스라엘 상품에 대해 새로운 잠재 시장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이 급증하여 이스라엘의 건국 30주년 즈음에는 방문객 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섰다.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걸친 노동당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정당들이 제휴한 리쿠드 연합이 집권하에 되었다. 신임 수상 메나헴 베긴은 그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전임 수상들의 헌신을 되풀이 강조하고, 아랍 지도자들이 협상에 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와 이에 대한 아랍의 끊임없는 거부라는 순환고리는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의 예루살렘방문으로 깨어졌다. 이집트는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내민 이스라엘의 손을 평화롭게 잡은 첫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네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정상 회담이 열렸는데,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타결책이 제시되었다. 평화를 위한 기본 틀이 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다른 인접 아랍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위한 토대의 역할도 하였다. 게다가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1967년 이래로 통치하고 있는 유다, 사마리아, 가자 지구와 그 지역 거주민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위한 상세한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9년 3월 26일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밭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수상은 양국간의 30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10년간에 대한 희망과, 다른 인접 아랍국가 들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1980년 대를 맞이 하였다. 1981년, 세계는 양국간에 강화된 협력을 토대로 마련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관한 양해 각서에 조인하였고, 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수주일 전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하여 이라크 원자로가 파괴되었으며, 그에 따른 핵박멸 위협이 제거 되었다. 이 시기의 10년 동안에 1973년 석유 위기 당시 아랍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유대 관계를 단절했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재수립 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경제적 관계와 과학적, 기술적인 원조에 다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 이집트 평화 조약의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전의 휴전선 및 두 나라가 인정란 국경선에 대한 휴전 조약을 교환하면서 1982년 4월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5)레바논 전쟁 (갈릴리를 위한 1982년 평화 작전)
1948년 독립 전쟁 이후 설정된 레바논과의 휴전선은 결코 어느 쪽에 의해서도 도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강력한 PLO거점으로부터 반복되는 총격, 로켓 공격, 그리고 테러 행위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방위군은 1982년 6월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은 1970년 PLO에 대한 요르단의 추방 이래 남부 레바논에 자리잡은 PLO조직과 하부 군사 조직을 그 지역으로부터 제거 시켰다. 작전은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던 10년간을 종결 시켰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의 무기력으로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5년 초까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들이 안전지대로 설정된 이스라엘 국경의 인접지역에 제한된 수의 군대만을 남겨 놓은 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