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평신도 희년(2017. 11. 19 ~ 2018. 11. 11)을 맞아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는 한국 레지오의 뿌리를 찾고자 2018년 9월30일 기준 50년 이상 근속 단원(1968년 9월30일 이전에 입단한 단원)을 찾아 나섰다. 2018년 10월3일 목포 실내체육관에서 실시할 한국 평신도 희년 묵주기도 은혜의 날에 교황님 강복장(降福狀)을 수여하여 그들의 노고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이다. 14명의 단원이 접수되었는데, 그 중 한 단원의 화려한 프로필에 이끌려 1958년 8월28일 성 비오 10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설립된 목포 북교동성당(주임신부 진우섭 폰시아노)을 찾았다.
만으로 80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다부지고 활기 넘치는 권근수 마태오 형제는 하느님 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건강과 친교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는 1954년 12월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1956년 5월 하늘의 문 Pr.에 입단한다. 1959년 서울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입학하여 신학생으로 생활을 하다 장협착증을 앓게 되어 휴학하고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예비수사생활을 한 후 군에 입대했다. 결국 그는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마칠 순 없었지만 이후의 삶은 그가 꿈꾸었던 사제의 길보다 더 많은 활동으로 채워진다.
그는 제39사단에서 군복무를 할 당시 창원공소를 돕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다. 동료 사병들을 동원해 작업한다는 사실이 들통나 외출금지처분이나 체벌받기를 수십 번. 그러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이맛살을 찡그리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 공소를 위해 일한 동료 사병들의 간식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제대를 앞둔 병사들이 제대 비를 수령할 때 필요한 나무도장을 파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가 무단으로 외출하다 적발될 경우 사건처리를 담당하던 사령부의 장교(대위)에게 직접 교리를 가르쳐 영세시켜 대자로 삼았다. 헌병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안후부터는 그의 무단 외출을 적발하지 않았고, 그는 공소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그분의 도우심이 충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도구이며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제대 후 마산교구 주교좌성당인 남성동성당 창원공소에서 2년 동안 사무장 겸 전교회장으로 봉사를 하였다. 전교회장으로 근무할 당시 수당으로 3천원을 받았는데 그는 그 수당의 일부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였다. 이때 2개의 봉투를 전하였는데 하나의 봉투에는 먹고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을, 또 하나의 봉투에는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 판매하여 생활비를 직접 벌어 쓸 수 있는 종자돈을 넣어 전했다고 한다.
창원공소에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목포로 돌아와 한국통신 목포전화국에 입사하게 된 그는 전화국에서 가장 노른자라고 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부여하는 부서에서 근무하던 터라 술자리도 많았다. 일단 술좌석을 함께 하긴 하였지만 그곳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성당을 향했다. 청탁을 통해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30여 년 동안 무사히 근무를 마치고 정년퇴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삶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는 전화국에 근무하면서도 북교동성당의 하늘의 문 Pr.의 단장을 맡았고 그 후 그리스도의 도움 Pr. 단장, 하늘의 문 Cu. 단장, 모든 성인의 모후 Pr. 단장, 매괴의 모후 Co. 단장, 그리고 사도들의 모후 Pr. 단장을 맡아 봉사하였고 정년 후 현재까지 사도들의 모후 Pr. 단장을 3번째 맡아 봉사하고 있는 북교동성당 아니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산 증인이다.
그는 바른 말 하기 좋아하고 올곧은 행동 때문에 주변인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 허다했다. 본당 사목회장을 맡았을 때 성당 내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시기와 질투를 이겨내야 했고 진리가 승리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그는 60년 이상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삶의 원칙을 실천했다.
1992년 5월14일 그가 매괴의 모후 Co. 단장 시절 한국 레지오 도입 40주년 행사를 목포 KBS 홀에서 개최하였다. 이때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님을 비롯하여 광주 세나뚜스 단장 등 많은 인사들이 함께하였고 본당별 장기자랑을 통해 다가올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을 준비하는 밑그림을 완성하였다.
“레지오 단원들은 선교가 주된 활동이 되어야”
그는 정년 퇴직후 사회 및 성당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목포대 사회교육원 원우회장을 비롯하여 북교동 사무소 자치위원장을 역임하였고, 본당에서는 노인 신심 활성화를 위해 마니피캇회를 창설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마산교구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교구장으로부터 공로패를, 광주대교구에서 선교사봉사 감사장과 예비신자 교육 봉사 표창을 수상하였다. 아울러 하느님 사업을 위해 선교사, 웃음지도사, 노인여가활동지도사, 레크리에이션지도사, 장례지도사 등의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성가지휘자 과정도 이수하였다. 그의 화려한 프로필은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함이 아닌 하느님께서 하시고자하는 일의 도구로 쓰이기 위한 노력의 결실로 이루어진 목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비 오고 바람 불 때일수록 더 열심히 주회에 출석해야 하고,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참여하는 평신도로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했으면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아울러 레지오의 각급 단장님들에게도 “레지오 단원들이 본당에서 청소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합니다. 선교가 주된 활동이 되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꾸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권유함으로써 선교가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알고 단원들을 이끌어야 합니다.”라고 거침없이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