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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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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 혁 -346년(백제 근초고왕 원년) : 赤川縣으로 지명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년) : 朱溪縣으로 개칭 -1414년(조선 태종 14년) : 茂朱縣으로 개칭 -1914년 5월 1일 : 茂朱面으로 개칭 -1979년 5월 1일 : 茂朱邑으로 승격 ▣ 명칭유래 -1414년(조선 태종 14년) 朱溪縣울 朱溪縣으로 고치면서 무주 라는 말이 처음 생겨났다. 茂朱邑(面)의 이름은 茂朱郡(府)의 관청 소재지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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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府內面 邑內로 불리면서 邑內란 명칭이 생겨났고 日政時 府內面을 茂朱面으로 바꾸며 邑內里라 칭했고 茂朱府 城안의 마을이란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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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堂山이란 지명으로 부르다가 남산의 서쪽에 당미산(堂尾山)으로 부르는 당뫼(堂山)이 있어 堂山里 칭했고 堂山이란 지명은 당뫼나 堂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俉山里 |
산의 모양이 자라와 같아 鼇山으로 부르다 산봉우리가 다섯이라서 五山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이 마을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많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吾茂라는 지명으로 통용되어왔는데 俉山里는 吾茂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長白里 |
長白이란 지명은 남대천이 이 마을을 관류하는 데 이 川邊에 하얀 돌밭이 길게 펼쳐 있어 長白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長白里란 지명은 위와 같은 長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內島里 |
금강천이 이 마을을 휘어 감고 돌아감으로 마치 섬같이 보여 내륙속의 섬이란 뜻으로 內島라는 지명으로 칭하게 되었고 內島里란 지명은 위와 같은 內島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大車里 |
大車里는 행정구역이 다른 조선시대 서면의 大車마을과 府內里의 車山 마을이 있는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茂朱面의 같은 행정구역에 속하면서 大府의 大자와 車山의 車자를 따서 만든 이름으로 大車里란 지명은 위와 같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龍浦里 |
龍浦里는 부남을 거쳐 내려오는 금강물이 용처럼 흐르는 곳으로 옛날에는 금산으로 가는 나루가 있던 곳이라서 龍浦라는 지명이 생겼고 龍浦里란 지명은 위와 같은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
佳玉里 |
佳玉里란 명칭은 가랑개골(佳林洞)의 佳자와 더옥골(加玉)의 玉자를 떠서 만든 법정리의 명칭일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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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의 중심인 현내리(縣內里) 부근은 화강암이 침식풍화된 해발고도 400~900m의 분지이고, 그 주위는 해발고도 700~1,000m의 산지이다. 주곡 농업 외에 고랭지채소엽연초 등이 생산된다. 현내리에서 무주김천거창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분기된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에 속했었고 현재도 경상도와 인접하여 언어풍속이 영남권에 가깝다. 삼한시대에는 변진의 감문국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으로 치소(治所)였다. 신라의 변방(邊防)이던 무산은 백제의 적천현과 국경을 이루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무풍(茂豊)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성종 때에는 신라권역의 영남권에서 백제권역인 호남권으로 편제되어 강남도 남원부 진례현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며, 명종 때 실시된 감무제(監務制)에 따라 무풍현의 감무가 주계현의 행정까지 관할하였고 한 때는 병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풍과 주계가 통폐합되어 무주(茂朱)라는 새로운 지명이 생기면서 치소가 주계로 옮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풍은 무주현에 딸린 면(面)단위의 행정구역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무풍의 행정구역은 풍동면(豊東面. 현재의 현내리, 지성리, 금평리)과 풍남면(豊南面. 현재의 철목리, 증산리, 은산리)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별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게 된다. 즉 무주군이 6개 면으로 나뉘게 되는데, 무풍은 풍동과 풍남을 통폐합하고 종전의 횡천면(橫川面, 지금의 구천동덕지리 지역)에 속해 있던 덕동과 오정동을 편입시키면서 옛 명칭을 다시 살려 무풍면이 된 것이다. 1414년 무풍현이 폐지된 후, 500년 만에 옛 지명을 되찾은 것이다.
조선 후기 참위설(讖緯說)과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던 술가(術家)들의 말에 의하면, 무풍은 십승지지(十勝之地)14)의 하나이다. 특히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나온 것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풍으로 찾아와 난리를 피하고 정착하기도 하였다. 즉 무풍은 술가들이 복지(卜地)로 선망(羨望)하던 곳이다. 한편 현내리에는 명례궁(明禮宮)이 있었다. 2001년 현재, 무풍면의 행정구역은 8개 법정리(法定里), 행정상 17개 리, 55반(班), 43개 자연마을로 구획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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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천면의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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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천면 마을별 유래 |
▶가곡리(가곡 문암) |
조선시대에는 현 무주읍의 장백(長白里) 설천면 기곡~진평까지 9개마을을 같은 행정구역으로 구획한 신풍면의 소재지였다. 지역에서는 가장 좋은 터라 하여“터일”이라 불리어오다가 조선후기 기산촌(基山村)이라 불렀다. 1914년 장백리를 제외한 종전의 신풍면 일원이 설천면으로 편제되었는데 그때 기곡은 “문바우”로 부르던 문암(門岩)마을과 함께 같은 현재의 I행정 구역인 기곡리로 편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북쪽으로 흘러오는 남대천이 마을 앞을 지나 서북쪽으로 곡류한 후 무주 방향으로 흘러가는 천변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제원찰방에 속하는 소천역과 연결되는 승장원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처음 들어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사람은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삼암 박이겸으로 전해 오는데 현재 는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는 밀양박씨 동족마을이다. 마을 앞 남대천 건너 삼전산 남쪽에는 순조 12년(1812)에 건립된 박씨효열오정각이 있어 효열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동쪽 위치한 문필봉 계곡에는 옛적부터 문바우라 부르는 마을이 있고 마을입구에 마치 문같이 생긴 2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어 하나는 붓같이 생겼고 다른 하나는 벼루를 닮아 문암(門岩)이라 하여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동으로는 길산리와 인접하고 남서쪽으로는 무주읍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남대천 건너 삼전산 너머로 충북 영동군과 도계를 이루는 중요한 지역으로 1939년 설천공립심상소학교가 간이학교로 설립된 후 지금은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줄어 폐교가 된 기곡국민학교가 1944년 설립됐던 곳으로 교육열이 높고 인간의 최대 덕목인 효를 실천하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마을에는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 있는 두그루 느티나무 아래서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후손들이 당제를 지내오고 있으며, 여름 휴가철이 되면 마을 앞 남대천변 천년된 소나무 아래 모래와 자갈이 어우러져 아담하게 자리잡은 강선대에 피서객이 몰려오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
▶길산리 |
신길 - 정착지, 하길산, 상길 - 신계, 지전 길산리 지역은 옛적부터 흙이 황토로 비가 오면 발이 빠져 농사일을 못할 정도로 질어서 “질번지” 또는 “길산”으로 불려오고 있다. 조선초에는 신풍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설천면으로 편제된 후 종전에까지 신촌에 속했던 질번지와 주막담 그리고 지전마을을 같은 행정구역으로 하여 길산리라 하고 법정리로 삼았다. 그때 질번지는 지금의 하길마을로 주막담은 상길마을로 개칭되어 지전마을과 함께 3개의 자연마을로 구획되었다. 그후 1972년 행정분리 명칭을 자연마을 단위로 바꾸게 되면서“길산”이라 했는 데 1981년 하길산과 정착지를 신길, 상길산과 지전을 합쳐 상길로 구획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고 이때부터 상길산은 신계라는 새로운 자연마을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길산이란 지명은 지역에 높은 산이 없고 야산과 들로만 이루어진 복 받은 땅이라 하여 붙여졌다 전해오고 있으며 동쪽은 무주읍과 청량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적상면과 서쪽으로는 기곡리와 인접하는데 북쪽은 남대 천을 사이에 두고 충북영동군과 도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신길마을에는 전국에서 1위를 차지한 포도가 유명한 농특산물로 재배되고 있으며 상길마을에는 남대천변 고목아래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한여름 지역주민들의 천렵은 물론 휴가철 관광객이 가족과 함께 피서와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다양한 물고기 낚시와 다슬기채취 등 체험관광 코스로 추천을 할 만한 마을로 촌락의 담장이 전부 돌담길로 되어 있고 유산적 가치가 높아 2007년부터 원형복원사업이 추진되는 유래가 깊은 전형적인 농 촌마을로 마을회관 2개를 보유하고 있어 민박도 가능한 곳이다. |
▶청량리 |
남청 - 비례, 하엽, 원청 - 무항, 원청, 진평 - 온평, 진평 청량리는 조선시대에 주계현과 무풍현의 경계를 이룬 곳이었다 하여 무주목이라 불려오다가 1914년 신풍면에 설천면 청량리로 편제되어 청량1리(현재의 진평, 개금벌)와 청량2리(청량, 하엽, 비례미)로 구획되었다가 1972년 청량1리를 진평, 청량2리를 청량리로 불러오다가 1981년 행정분리 명칭을 자연마을로 개칭하면서 원청량과 남청량으로 나뉘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량마을의 유래는 마을의 뒷산인 청량산에 청량사라는 커다란 사찰이 있어 지명이 만들어 졌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구천동 덕유산과 무풍면의 대덕산에서 발원한 맑고 찬 냇물이 흘러 들어와 큰 강폭을 이루며 사람들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씻어 준다 하여 청량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다른 유래설도 있다. 언제 건축이 되었고 폐허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마을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남대천은 지명에서 유래된 근거라도 증명을 하듯 천연기념물 322호인 반딧불이와 그 먹이 다슬기서식지로 환경부로부터 지정되어 보호지역으로 보존되어 오다가 2001년 1월 상류지역 관광지와 무주리조트 운영 등으로 인한 수질오염으로 해지되었다.
청량리 지역은 최근 세계태권도공원이 조성되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고 농촌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됨은 물론 반딧불테마공원 등 볼거리와 즐기거리가 즐비하고 특산물로는 포도와 복숭아가 많이 재배되고 있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웰빙(Wel Being)관광인 농촌체험관광의 적지로 볏짚과 싸리나무 등 우리선조들이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쿠리, 지게, 바지게, 둥구미 등 공예품제작 체험과 구매도 가능하다. |
▶소천리 |
외양 - 양지, 재궁, 내양 - 양지, 학의재, 상평 - 평지, 나림, 하평 - 평지, 이남 - 이남, 신촌, 이미리 소천리는 5개 행정분리로 구성된 설천면의 소재지로 지명의 유래는 본래 지명은 삼촌(三村)으로 제원찰방에 속했던 소천역이 소재했던 곳이라 하여 현재의 소천(所川)이라 불리고 있으나 그러나 과거에는 하천의 물이 눈처럼 맑다하여 설천, 소천역 지명에서 유래된 역말이라 불려왔다고 회자되고 있으나 한편 덕유산에서 발원한 원당천과 대덕산의 남대천, 동북쪽의 삼도봉과 민주지산에서 흘러들어오는 곡류에 위치하는 냇가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하여 소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한다.
외양마을은 양지말 중 바깥마을에 해당되는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72년 양지로 불리어 오다가 1981년 내양지와 외양지로 분리된 후 지금에 이르고 있고 일제강점기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 주요 행정관서와 1922년 설립된 국민학교, 1938년 포교당으로 시작한 관음사 등이 자리잡고 있고, 소천역이 있던 이곳을 지나던 행인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떡전거리” 지명이 지금도 불리 우고 있는 곳이다. 내양마을은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설계 박치원과 그 문중의 효자인 운곡, 박권, 운촌, 박삼 형제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설호사가 현존해 있어 사당은 철종11년 효를 기리고자 그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예전에는 내양지를 밭이 많은 지역이라 하여 다밭골이라 불렀고 뒷산너머 마을을 하그동이라 불렀다. 평지마을은 윗마을인 상평과 아랫마을인 하평으로 나누어진 마을로 과거 서민들의 애환과 영호남을 넘나들며 물물교환의 장이 되었던 설천시장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현대화된 건물로 현존하고 있고, 지명의 유래는 땅이 평평하다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오며 나림마을은 본래 이토질 땅으로 진흙이 많은 곳이라 하여 라니라는 지명이 써오다가 언젠가 나림으로 변형되어 불려지고 있다.
하평마을에는 1953년 개교한 설천중학교가 지금은 설천중고등학교로 새롭게 출발하여 지역 인재육성의 산실로 자리메김하고 있으며, 세계태권도공원조성사업 유치로 신도시개발계획에 따라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마을이다. 이남 마을은 라제통문이 있는 석견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위치 크게 이남과 신촌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마을 명칭의 유래는 설천에서 바라다 보면 저산너머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천동 33경중 제1경인 라제통문 아래로 흐르는 원당천이 잠시 머물며 소를이루고 있는 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 양국 군사들이 전쟁을 하면서 싸우다죽은 시체들이 쌓여 파리들이 들끓었던 곳이라 하여 파리소라고 불리 우고 있는데 조선 영조 대 효자 이만경이 추운 겨울철에 물고기를 구하고자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얼었던 냇물의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튀어나와 병고에 고생하는 부모님에게 달여 먹여 효를 다하게 하였다 라는 전설이 유래되어 빙어약소라는 지명의 전설이 전해 내려 오는 곳이다. |
▶대불리 |
외북 - 외북, 내북 - 내북, 불대, 중현 대불리는 설천면의 최북단 해발 1,242m의 민주지산을 사이에 두고 충북과 도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풍서면에 속했는데, 1914 년 설천면 대불리로 편제되어 대불1리(외북)와 대불2리(내북, 불대)로 구획 되었다가 1972년 자연마을단위로 행정리가 분리되면서 대불1리가 외북으로 대불2리가 내북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명칭은 옛날부터 불교와 관계되는 불대, 불당골, 중현 등과 같은 지명이 전해오고 있으며, 계곡 어디인가 알 수 없는 땅속에서 묻혀있는 부처 님이 땅위로 나올 때는 극락정토가 이루어 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고, 현 재 중현마을에는 대종교가 자리하고 있고, 마을 뒷산 석기봉 정상 암벽에는 커다란 불상이 새겨져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외북마을은 설천의 북쪽에 있는 곳이라 하여 북동 또는 북리로 부르던 마 을인데 후에 내북동과 분리되면서 지금의 외북마을로 불리게 되었으며, 마을 동쪽은 미천리, 남쪽은 장덕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으로는 내북마을과 인접하는데 이 곳에는 1949년 설천초등학교 분교장으로 설립되었다가 1958 년 대미초등학교로 승격하였다가 1988년 또 다시 분교장이 위치했던 마을 로 지금은 폐교가 되었으나 지금도 폐허가 된 건물과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터가 남아 있고 사유화 되어있다.
내북마을 불대와 불당골은 옛날 큰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오는데 마을 서쪽 계곡의 불당골에는 지금도 절터로 보이는 건물지의 기단석과 주초석이 남아있고 탑신, 옥개석,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어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안골짜기 중고개(중현) 정상에는 어느 시대것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두 형상을 하고 있는 마애불상이 석기봉 석벽에 새겨져 있다. 마을 뒷산인 민주지산은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축으로 충청북도와 전라북도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높은 봉우리와 계곡이 형성되어 곳곳에 아름다운 담과 소를 만들어 서쪽으로 흐르다 미천리에서 흘러오는 미대천에 유입된 후 설천소재지 상평마을 앞 남대천에 합류한다. |
▶미천리 |
미천 - 장자동, 중미, 하미 미천리는 설천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전라북도, 충청북도 3개도를 접경하는 삼도봉이 소재하는 곳으로 삼도봉은 고종33년(1896) 전 국의 8도를 13도로 개편할 때 충북 영동군,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전북 무주군이 경계를 이루게 된 역사가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피난지로 명성이 높아 국난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 들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동네를 이루었던 곳으로 지금도 정착지 마을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산림이 울창하고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나도 맑고 아름다 워 미래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운 내가 흐르는 곳이라 하여 미내 즉 미천이라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의 지형이 마치 미륵의 형상을 닮아 언젠가는 미륵이 올 땅이 라고 하여 지명이 붙여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뒷골짜기에는 보사골 이라는 곳이 있고 석기봉 아래 깊은 계곡에 위치한 안골, 지금은 하미로 불 리우는 아랫미래, 중미로 불리우는 웃미래 등 불교용어가 남아있고, 아랫미 래 남쪽에는 장자터로 불리우던 장자동이 있고 무풍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밑에 자리 잡았다 하여 잿말이라 부르던 점말이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해발 1,176m의 삼도봉에서는 매년 10월10일 3개도 자치단체장이 한자리에 모여 동서화합분위기 조성을 위한 삼도봉행사가 펼쳐지는 곳으로 지금은 매년 수백명의 등반객이 즐겨 찾는 명산으로 자리 메김하고 있는 곳이다. |
▶장덕리 |
장덕 - 수한, 장평 장덕리는 설천면과 무풍면의 면계를 이루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 통일신라 이후에는 주계현과 무풍현의 경계를 이루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풍서면에 속했는데 1914년 설천면에 속하면서 장덕리라 칭하 게되었고 지명의 유래는 진들이라 부르는 장평마을의 장자와 엣 지명이었던 덕골의 덕자를 따서 붙여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장덕리의 수한마을은 본래 마을건너 물찬이(물차니)라는 계곡에 위치하여 부르던 마을인데 후에 개울 건너 양지편으로 이주하여 양지담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한 때는 이 곳에 큰 계곡이 위치한다고 하여 덕골이라 했는데 행정 구역 개편당시 옛 지명인 수한으로 바뀌게 되었다. 장평마을은 들이 길쭉하게 생겼다하여 진들이라 부르다가 후에 장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우리지역 특산물인 포도를 관내에서 처음 들여와 전체농가가 재배를 할 정도로 단지화된 지역으로 유명하며 지역농가 주소득 작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무풍면과 면계를 이루고 서쪽은 소천리, 북쪽은 미천리와 대불 리가 인접한 마을로 옛부터 효열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수한 마을 국도변에는 효자 남양제갈공근환지비와 학생경주최씨공영익배유인진양하씨 효열비가 있고, 찬물이 흐르던 물찬이 계곡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관광부로부터 2005년 청정환경 지표곤충인 반딧불이 보호지역으로 지 정 받아 깨끗한 환경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마을이다. |
▶두길리 |
신두 - 신동, 양지담, 정착지, 하두 - 하두, 구산 - 구산, 벌한, 방재, 월현 - 월현, 와석, 마전 두길리는 본래 구천동 심곡과 삼공리 그리고 무풍면 삼거리, 덕지리와 함께 금산군 횡천소에 속했는데 1674년 무주가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무주부로 편입되었다가 그 뒤 1914년 설천면 두길리로 편제되었는데 그때 두길리는 두길1리(상두, 하두)와 두길2리(벌한, 구산, 와석) 두길3리(월현, 마전)로 구획되었다. 그 후 1972년 두길1리는 하두로, 두길2리의 벌한,구산, 방재는 구산으로 두길3리는 월현과 마전 2리에 속했던 와석을 합하여 월현으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1981년 하두마을 중 개울건너에 있는 신동, 정착촌, 양지담을 합하 여 신두마을로 분리시킴으로서 두길리에 속한 행정 분리는 4개마을로 형성 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두길리라는 지명은 동쪽 거칠봉에서 라제통문이 있는 석견산에 이르기까지 북으로 뻗어 내린 능선과 서쪽의 성지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뻗어내린 능선 이 마치 곡식을 담는 거대한 말(斗)과 같이 생긴 형국의 길한 땅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덕유산 국립공원 관문으로 구천동에서 내려오 는 맑고 찬물이 관류하고 있어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있는데 제1경인 라 제통문을 비롯한 은구암, 청금대, 일사대, 함벽소 등 10개소나 되는 명소가 절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동으로는 무풍면과 면계를 이루고 남쪽 거칠봉에서 심곡리와 인접하며 서쪽은 적상면과 북으로는 청량, 소천, 장덕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신두마을은 무주구천동 제1경인 라제통문이 위치한 마을로 자연마을은 신동 양지담, 정착지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금은 폐원이 되었지만 1979 년 설립되어 지역주민에게 의료수혜를 제공하였던 대우병원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고, 하두마을은 신두마을과 함께 구천동 관문을 지키던 마을로 1981년 신두와 분리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고, 벌한, 방재, 구산 3개 자연마을로 형성된 구산리 지명은 구천동에서 흘러내리는 원당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 나가면서 마치 거북과 같다 하여 옛날부 터 불려져 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개울가에는 천상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강선대와 은구암이 자리하고, 동남쪽에 위치한 벌한 마을에는 신라 때의 화랑 4명이 소요했던 곳으로 알려진 사선암이 있고, 겨울철의 강한 서북풍이 불어오는 추운 곳임에도 이를 이겨내면서 살고 있는 지역이라 하여 벌한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전해오고 있고, 구산과 벌한 사이에 방재마을은 본래 무풍면을 넘나들던 고개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음 그리고 구산리에 있는 거칠봉은 일곱 신선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알려져 있으며 동쪽의 청룡한은 벌한마을 왼편에 위치하여 좌청룡에 해당하는 뜻이라고 전해지는 유명한 여름 피서지 이다.
월현은 본래 다르재라 부르던 월현과 눈들이라고 부르던 와석 삼바실로 불려오던 마전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달이 넘어 가는 고개(월현) 누워 있는 돌(와석), 삼농사를 많이 짓던 밭이 있던 곳(마전) 등 지명의 유래 있고 수성대라 부르는 일사대가 유명한데 구천동계곡을 흘러 내려온 원당천이 이 곳 암벽을 휘어 감고 돌아 나가 마치 물로서 성을 이루는 곳이라 하여 붙여 진 지명이라 전해지고 있고, 구한말 애국지사였던 연재 송병선이 관련되어져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선비들은 송병선의 인물 됨됨이가 동방에서 제일가는 선비라 칭하며 동방일사라는 호를 붙여 이것에서 유래됐다고 하는 전설도 있는 곳이다. 그리고 뜸북재는 구천동에 있는 구천명의 승려들이 밥을 짓기 위해 씻던 쌀뜸물이 이곳까지 왔다 하여 뜸물재에서 변형되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
▶심곡리 |
심곡 - 원심곡, 대평, 배방 - 외배방, 내배방, 관서 - 관동, 만선, 등방 심곡리는 설천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금 산군 횡천소에서 무주도호부 힝천면으로 이어져 오다가 1914년 설천면 심 곡리로 편제되었고, 후에 심곡1리(원심곡, 큰번덕)외 심곡2리(배방이)로 구획되었고 1972년 심곡1리를 원심곡으로 하고 심곡2리를 배방으로 하였는데 1981년 배방마을에 포함되어 있던 관동, 만선, 등방을 한 마을로 묶어 관서라는 새로운 행정분리를 3개마을로 구성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에는 구천동 33경중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파회, 수심대, 세심대 등 명소가 즐비하고 특히, 옛 등반 땅의 만선동에 설치된 구제규모의 스키장은 매년 150만이상 내방객이 찾는 4계절 전천후 휴양레져시설이 확충되어 있어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삼공리와 인접하고 남쪽은 향적봉을 사이에 두고 안성면과 면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치마재 너머로 적상면과 면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마전재에서 두길리와 인접한다. 원심곡은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인데 동네어귀 개울가에는 그때 들어 온 사람들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심었다는 400년 넘은 음나무가 있었다. 둘레가 3m가 넘어 천연기념물로 관리되오던 이 나무는 원인 모를 이유로 죽게되어 해지되었는데 최근에 바로 그 옆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 나고 있어 매년 정초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 동제를 지내고 있다. 대평마을 어귀의 송림 속에는 마치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거대한 암석 하나가 마을을 바라보면서 웅크리고 있는데 옛날 마을에는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일이 많아서 전해 내려올 정도로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깊은 곳으로 이와 관련하여 어머니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매산바위가 범바위 모퉁이 산 등성이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지명의 유래는 깊은 산골 마을 앞 들과 (새들) 뒤 들(큰평전)에 큰 전답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구전되고 있다.
배방마을에는 옛날 무주와 안성장을 넘나들던 치마재가 있어 과거 고달프게 살아왔던 애환이 서려있는 곳으로 행인을 위한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주막 담이라 부르는 행길가 계곡에 세심대가 있고 구천동으로 오르는 길가 계곡 옆에는 지금은 도로확포장공사로 인해 사라진 소머리고개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고 이고개가 소재가 되어 서민들에게 불려지던 무주구천동 노래의 가사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기도 한 곳이다. 관서마을은 옛날 안성면을 오가던 검령으로 올라가는 높은 지대에 위치한 동네라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등방이라 불려오다 행정구역 개편 때 개칭되고 만선동은 덕유산 정상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고원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마을로 형상이 마치 신선이 웅거하고 있는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현대인들의 신선놀음으로도 볼수 있는 스키장과 골프장이 만들어져 지명의 유래가 현실화된 곳으로 1990년 스키장 개장 이후 무주군에서 가장 급속하게 발전한 마을로도 유명하다.
심곡리는 그 외에도 무주구천동 아름다운 절경을 못잊어 흐르는 물도 돌아 서 간다는 파회 그 옆에 신라 대 일지대사가 이 곳을 구경하고 가던 길에 소나무 가지 하나를 꺽어 바위 위에 꽂아 놓은 것이 오늘까지 살아 있다고 전해오는 천송암이 있고 바로 그 위로는 절벽산이 물 위에 떠 있는 병풍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것이 마치 금강산과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일명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수심대 등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절경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하다. |
▶삼공리 |
보안 - 보안, 삼공 - 원삼공, 덕유 - 월곡, 인월담 삼공리는 설천면 최남단에 위치하여 경남과 도계를 이루는데 본래 구천동 이라는 지명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지명 유래는 구체적으로 전해 지는 바 없으나 동남쪽 삼봉산에서 발원하는 원당천 계곡과 서남쪽 덕유산 향적봉에서 발원하는 구천동천이 합류하여 배방마을 쪽으로 흘러 나가면서 땅이 똑 같이 세 곳으로 형성된다 하여 삼공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으나, 한편 곰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곰살미라고 불려 졌다고도 전해온다.
조선시대 금산군 횡천소에서 1674년 무주도호부 횡천면으로 편제되어 중 심부 역할을 했던 곳으로 현재의 무풍면 삼오정과 덕지리 일대, 북으로는 라 제통문까지 방대한 면적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설천면 삼공리로 편제 되었는데 당시에는 삼공과 당골(현 월곡)뿐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08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공포된 삼림법에 따라 총독부관할이 되었고 1912년부터 1945년8월15일 해방될 때가지 일본 북해도 제국대 학의 연습림으로 사용되는 비운을 겪은 마을 이기도 하다. 1960년 구천동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급격한 성장을 보여 인구증가에 따라 1981년 삼공리는 원삼공과 보안마을 로 나뉘게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 1986년 군조례 개정으로 원삼공마을에 속했던 관광단지를 덕유라는 지명을 붙여 현재 3개의 행정 분리로 구성 되었다.
옛날 불교 전성기 때에는 이 골짜기에 무려 14개의 절이 있었고 불도를 닦 는 성공불자가 구천명이나 되어 구천둔이라 부르다가 그 이후 구천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보안마을 지명 유래는 마을 건너편에 있는 들의 농사를 위해서 막은 보 안 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보안이라 했는데 1981년 군조례 개정때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보안(洑內)이 보안(保安)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옛 날부터 향교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천연기념물인 반송이 위치하고 있어 구천동을 상징하는 나무라 하여 구천송이라 불리기도 한다. 마을에는 1934년 설천공립보통학교 부설 심곡 간이학교(현 원삼공)로 개설하였다가 1939년 국민학교로 승격된 구천초등학교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고 그 옆 길가에는 구한말 일본과 싸우다가 잡혀 옥고를 치르다 숨진 의 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순국비가 건립되어 있는 교육열과 애국정신이 투철했 던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삼공마을은 구천동으로 더욱 알려진 마을로 맑은 물이 거울처럼 맑다 하여 수경대라고 이름 붙여진 관광명소가 있고 1963년 설치되었다가 1988년도 폐지(당시 현 보안마을로 이전)된 설천면 구천출장소와 보건진료소가 있던 마을로 지금은 농업이 아닌 관광소득을 주소득원으로 하는 상가와 유흥시설 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덕유마을은 본래 삼공리 중에서 당골이라 부르던 월곡마을과 함께 취락이 형성된 곳이나 1975년 국립공원으로 승격 후 관광단지를 조성하면서 새롭 게 형성된 집단시설지구로 과거에는 현재 구천동 상수도가 있던 곳에 인월 담이라는 지명이 있던 곳에 상가지역이 조성되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 게 된 것으로 이 곳에는 지금도 백련사와 인월사 등 주요사찰이 자리잡고 있어 옛날 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이었음을 반증하고 있고, 1,614m의 덕유산 향적봉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주목군총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매년 300여만명의 외래 관광객이 꾸준이 찾아오는 남부 유일의 스키장과 연결된 덕유정상의 곤도라에서 바라본 겨울 설경은 왜 이곳이 설천이라는 지명을 지니게 되었는지 한치의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곳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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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현황 |
면적 |
135.91㎢ (무주군의 21.5%) |
세대 / 인구 |
1,264세대 2,861명(남1,437, 여1,424) |
행정구역 |
8개 법정리, 25개 행정리, 54개 자연마을 |
치안센타 |
적상치안센터 |
교육기관 |
중학교1, 초등학교3, 유치원3 |
의료기관 |
보건지소1, 보건진료소2 |
금융기관 |
농협, 우체국 |
특 산 품 |
마늘, 고추, 표고, 머루, 감자, 삼베등 |
관광사적 |
적상산, 사고지, 안국사, 양수발전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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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특성 |
역사적 : 삼한시대는 마한에 속하고 삼국시대는 백제의 적천현 통일신라 때는 단천현, 고려때는 주계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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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태종 이후 무주현에 속하다 1914년 행 정구역 개편시 적상면으로 개칭 | |
지리적 : 무주군의 중심부에 위치한 적상은 무주, 안성, 설천, 부남간의 도로망 확충으로 교통의 요충지 |
환경적 : 반딧불이가 살아 숨쉬고 자연과 문화 역사가 공존하는 곳 |
정서적 : 온화한 성품과 진취적 기상을 지닌 자긍심과 애향심이 높은 면민 |
면적 및 농특산물 재배현황(7개작목반/230명/77ha) |
합 계 |
경지면적 |
임 야 |
대 지 |
기 타 |
소계 |
전 |
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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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 |
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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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32농가 7ha |
옥수수:63농가 15ha |
산머루:80농가 35ha |
토마토:13농가 3ha |
감자:감자 : 16농가 6ha |
표고:표고 : 15농가 1ha |
오미자:오미자 : 11농가 10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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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회단체장 현황 |
기관명 |
성명 |
전화번호 |
핸드폰 |
비고 |
면장 |
진 용 훈 |
324-6004 |
010-4207-1819 |
|
도의원 |
황 정 수 |
322-0846 |
016-9374-1339 |
|
군부의장 |
이 강 춘 |
324-6162 |
011-209-0701 |
|
군의원 |
이 해 연 |
324-2995 |
011-437-6327 |
|
적상면대장 |
이 수 철 |
324-6113 |
011-7211-6185 |
|
양수발전처 총무과장 |
김 영 호 |
320-3211 |
011-9809-0904 |
|
무주적상농협 |
유 지 수 |
324-5510 |
011-9921-1025 |
|
적상우체국 |
전 영 식 |
324-6001 |
011-675-7333 |
|
적상파출소 |
배 영 선 |
324-6112 |
010-4007-2541 |
|
적상중학교 |
한 송 호 |
324-6111 |
010-3455-2310 |
|
적상초등학교 |
홍 의 두 |
324-6287 |
011-684-7186 |
|
괴목초등학교 |
이 남 선 |
324-0330 |
|
|
삼성건설현장소 |
김 응 진 |
324-0957 |
011-214-5049 |
|
국립공원관리공단 덕유산적상분소 |
최 동 준 |
322-4147 |
016-682-8060 |
|
노인회(적상) |
박 태 서 |
324-6422 |
011-365-6422 |
|
노인회(상곡) |
서 광 열 |
324-7079 |
|
|
청년회(적상) |
황 운 선 |
324-6318 |
010-6477-8266 |
|
청년회(상곡) |
이 성 열 |
324-2265 |
011-400-1818 |
|
지역개발협의회 |
이 해 연 |
324-2995 |
011-437-6327 |
|
상곡지역개발협의회 |
김 용 배 |
324-3500 |
010-2920-2007 |
|
주민자치위원장 |
이 혁 재 |
324- |
011-9908-0400 |
|
이장협의회장 |
이 우 석 |
324-6327 |
016-685-6372 |
|
부녀회장 |
유 옥 자 |
324-6141 |
010-6238-6141 |
|
자율방범대 |
박 병 수 |
324-6577 |
011-655-6577 |
|
축제추진위원장 |
전 병 옥 |
324-6107 |
011-405-6107 |
|
적십자부녀봉사대 |
김 숙 자 |
324-0450 |
010-4528-0450 |
|
농업경영인협회 |
정 재 호 |
324-7275 |
|
|
의용소방대 |
김 영 길 |
324-5560 |
010-9539-5560 |
|
무주한우영농조합 |
박 창 수 |
324-1232 |
011-9926-6343 |
|
적상양돈협회장 |
김 종 갑 |
324-6254 |
010-6284-6254 |
|
새마을협의회장 |
주 락 창 |
324-6378 |
011-9642-6378 |
|
적상농촌지도자회장 |
윤 영 석 |
324-6215 |
011-290-6215 |
|
적상 4ㆍH 연합회 |
김 선 수 |
324-6614 |
011-9425-6614 |
|
민주평통자문위원 |
강 영 만 |
324-6005 |
011-675-6067 |
|
바르게살기협의회 |
김 복 수 |
324-6464 |
016-685-6645 |
|
" |
박 만 술 |
324-3949 |
(괴목) |
|
" |
이 정 석 |
324-1336 |
011-9815-737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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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의 지질은 화강암질 편마암이 심층풍화한 뒤 구리향천에 의해 개석 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3단의 단구상(段丘狀)을 형성한다. 한국 남서부 내륙분지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모식적인 분지이다. 북쪽에는 무주군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를 이룬다. 쌀·보리 농사 외에 잎담배·인삼·약초·고랭지 채소가 많이 생산되며, 장기리에서 집산·유통된다. 동향~안성 간 도로, 진안~장계~무주 간 국도가 통과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남동쪽에 용추폭포와 칠연폭포가 있고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남쪽 입구에 해당하며 관광지로 발전하고 있다. 안성면의 경지 면적을 보면, 농경지가 밭보다 많을 뿐 아니라 논의 비율 역시 무주군에서 가장 높으며, 전체 경지면적 역시 무주군의 다른 읍·면에 비해 압도적으로 넓다. 또한 원통사·칠연의총·칠연폭포·용추폭포 등 관광명소가 있다.
안성면은 본래 대곡소(大谷所)·횡천소(橫川所)와 함께 부리현(富利縣)에 속했던 안성소(安城所)였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백제 때에는 진내군(進乃郡), 통일신라 때는 진례군(進禮郡), 고려 때는 금주군(錦州郡) 또는 부리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금산군(錦山郡)에 속하였으며, 현종 15년(1674) 적상산사고와 관련하여 무주현이 무주도호부로 승격하면서 횡천면과 함께 무주도호부에 소속되었고, 일안면(一安面)과 이안면(二安面) 그리고 횡천면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행정개편 시 일안면과 이안면 전역을 중심으로 유가면의 오동·진원·물리·도치 등 4개 리와 적상면의 사교(斜郊)·사전(斜田)·구교(鳩郊) 등 3개 리를 편입하여 8개리로 개편하고, 옛 안성소의 이름에 따라 안성면이라 하였다. 2001년 현재, 안성면의 행정구역은 8개 법정리, 행정상 36개 리, 115반, 61개 자연마을로 구획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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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바위와 이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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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이웃마을과의 경계로 마을 출입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웃마을에 돌림병이 돌거나 마을에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가장 먼저 이곳을 막아 행인들을 통제했다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마을의 대문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대문 구실을 하는 이 바위를 대문바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어느 해 여름, 대소마을에 사는 머슴총각이 큰 황소를 대문바위 옆에 매어 놓고 풀을 뜯도록 하고서는 더위를 식히려고 강물로 뛰어 들었다. 그런데 강물에서 시원하게 멱을 감고 황소를 매어놓은 대문바위로 온 머슴총각은 하늘이 노오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대문바위에 매어 놓았던 황소가 오간데 없어 진 것이다. 허둥지둥 황소를 찾던 총각은 대문바위 뒤쪽에서 소의 시체를 찾긴 했으나 그것도 소의 몸통은 흔적도 없고 머리만이 피투성인채 뒹굴고 있었다. 너무도 놀랍고 이상한 일이라 마을사람들이 모두 나서 대문바위 근처를 샅샅이 뒤지다 보니 바위 밑 물 속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황소는 이무기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이 후부터 마을사람들은 대문바위 근처엔 소를 매지 않았고 할일 없이 그곳에 머무르는 일도 삼갔다. 또한 날씨가 추워지면 대문바위 근처에는 마치 산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아 연기가 나는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무기가 산 쪽으로 뚫려 있는 굴속에서 뿜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한 때는 이 김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온천이 있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조사 결과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이곳에는 겨울이 되면 땅속에서 김이 올라오는데 마을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무기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
▶대소마을과 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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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인심도 흉흉해져 저마다 생계의 근심과 재앙의 두려움 속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불에 타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마을을 돌아보고 한숨을 지었다. “이 마을에 재앙이 거듭되고 불이 나는 것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화산바위의 기(氣)가 세어 그 지세에 마을이 눌린 탓이로고, 쯧쯧쯧” “그럼 아무런 방책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스님” 스님의 말을 듣고 있던 마을사람들이 기가 막힌 듯 어찌하면 좋을지 방도를 물었다.
“그 기를 막으려면 적어도 십년은 걸릴 터인데…. 화산바위의 기를 누르려면 나무를 많이 심어 화기를 막을 숲을 이루게 해야 될거외다” 이 마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힘을 모아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마을 방행을 바꾸어 집을 짓고 화산바위를 가리기 위해 큰나무를 옮겨 심는데 마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일했다. 나무가 점점 자라나면서 이 마을에는 신통하게도 화재나 다른 재앙이 생기지 않았다. 대소마을은 다시 안정을 되찾고 평화로운 마을이 될 수 있었다. 재난을 딛고 일어선 대소마을 사람들의 인내와 협동의 의지가 승리한 것이다. |
▶봉길마을의 각시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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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중지하던 아들이 나이가 차자 장가를 보내 며느리를 맞고 보니 유일하게 기대어 살아 온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것 같은 질투심에 며느리를 더욱 구박하고 학대했다. 그럼에도 각시 부부는 금실이 좋았다. 남편은 부인을 ‘각시야 각시야' 부르며 다정하게 대했으며 부부간은 더없이 부러울 것 없을 만큼 행복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아들이 며느리를 각시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부부의 다정한 모습만 보면 더욱 며느리를 괴롭히며 공연한 트집을 잡고는 했다. 그러나 워낙 성품이 착한 며느리는 모진 학대를 참으며 정성껏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순종하고 살았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정안수를 더 놓고 천지신명께 시어머니의 만수무강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치성을 올렸다. 새댁이 시집온 지 삼년이 지났다. 그런데 대를 이을 자식이 없자 시어머니의 구박은 더욱 심해졌고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새댁의 고민은 더 할것 없이 큰 것이었다. “여자가 시집을 와서 그 집안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는 것은 철거지악(七去之惡) 중의 으뜸이니 차라리 어디로 나가 죽어 없어지거라. 네년이 우리 집안의 대를 끊어 놓을 작정이냐 네가 없어져야 새 며느리가 들어올게 아니냐!” 시어머니의 열화같은 성화에 새댁은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가슴앓이로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각시는 죽을 결심을 했다.
자신이 죽어야만 새며느리가 들어와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단단히 죽을 각오를 한 각시는 강 건너 바위로 올라갔다. 바위 위에서 뛰어내릴 작정을 한 각시는 마지막으로 바위에 끓어 앉아 천지신명께 자신의 부덕(不悳)함을 용서빌고 집안에 대를 이어 줄 여인이 어서 빨리 들어오기를 간절히 빌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보이지 않자 그래도 은근히 걱정스러워 밖으로 찾아 나섰다. 시어머니는 강 건너 벼랑 위에서 기도하는 며느리를 발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느리가 있는 벼랑 근처에 하얀 구름이 몰려오더니 며느리는 바위와 함께 구름에 가린 채 하늘을 향해 천천히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가! 아니 아가!” 놀란 시어머니가 큰소리로 호들갑스레 며느리를 부르자 솟아오르던 바위덩이는 멈추어 굳어 버리고 며느리는 벼랑에서 떨어져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던 바위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여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형상과 같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恨) 많은 각시가 자신의 생을 마친 곳이라 하여 각시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봉길마을의 매산(梅山)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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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마을은 봉길 마을 보다는 형편이 나아 몇 몇 부잣집을 돌아다니며 일품을 팔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최부자댁 주인 영감이 매산이 어머니를 보고 반하여 매일 일감을 주며 드나들게 하였다.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야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매산 이는 매일 강가의 바위에 앉아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안방마님이 오래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자 참한 여인을 찾아 후실로 들일 생각을 하고 있던 최부자는 때 마침 매산이 어머니를 보고는 그녀를 후실로 들여앉힐 생각으로 끊임없이 호의를 베풀며 그녀의 환심을 사고 드디어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살 것을 제안했다.
외로움과 고달픔을 견뎌내며 힘겹게 살아가던 매산이 어머니는 며칠 동안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고심하다가 마침내 부자 영감의 제안을 승낙했다. 강 건너 최부자 집으로 들어앉을 결심을 굳힌 어머니를 눈물을 머금고 매산 에게 일렀다. “매산아, 날씨가 몹시 추우니 강가에 나와서 기다리지 말아라. 난 오늘 늦을지도 모르니까. 며칠 있다가 좋은 옷을 한 벌 지어 줄 테니 내 말대로 밤에 마중 나오지 말고 집에 있거라” 저녁이 되자 매산 이는 강 건너 마을로 일을 간 어머니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근심이 되어 강가로 마중을 나갔다. 어머니가 마중을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어머니를 기다리는 매산 이의 마음이 방안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게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길이 없는 매산 이는 추위와 허기를 참으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강바람은 살을 에이듯 차가왔고 허기에 지친 매산 이는 그만 강가 바위 위에 스러져 잠이 든후 영여 깨어나지 못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매산이 어머니는 강가로 달려와 매산 이를 부르며 울부짖으니 그 울부짖음이 메아리 되어 온 마을을 울렸다. 어머니는 매산 이가 생전에 바위 위에 앉아 기다리던 모습을 생각하며 강 건너 바위를 향해 “매산아!” 하고 외쳤다. 그러자 강 건너에서 “매산아!” 하고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그 뒤로 마을사람들은 매산 이가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죽은 바위를 매산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매산(梅山) 바위에는 언제부터인가 매화(梅花) 나무 한그루가 자라나 이른 봄이 돌아오면 매화꽃 한 송이가 곱게 피어 지나는 길손들을 손짓한다. |
▶효녀와 상사바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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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병중인 부친 생각에 포기하지 않고 눈보라 속에서 얼음을 깨고 낚시를 드리운 채 수삼일 을 꼼짝도 않고 기다리니 추위 속에 며칠간을 굶어 그만 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잃고 스러진 공은 생사를 넘나드는 꿈을 꾸었다. 공이 깊은 물속을 헤엄쳐 다니다 별천지와 같은 수중 궁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니 궁궐 식구들이 모두 반기며 함께 살기를 종용했다.
그곳은 만난 음식과 편안함이 가득한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부모께 효를 다해야 한다며 그곳의 권유를 뿌리치니 공의 효성이 갸륵하게 여긴 용왕이 타고 나가라며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선물로 주어 그 잉어를 타고 물 속을 가르며 육지로 나오려다 꿈을 깼었다. 공이 꿈에서 깨는 순간 얼음이 소리를 내며 갈라지며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툭튀어 나오니 공은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 암에 보이는 커다란 잉어는 바로 꿈속에서 용왕에게 선물로 받았던 그 잉어였다 것이다.
감사함과 반가움으로 얼른 잉어를 집으로 가져가 병중의 부친에게 봉양하니 잉어를 드신 부친은 그날로 쾌차하여 병석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간절한 효심과 정성이 하늘도 감동을 한 것이었다. 도한 추운 겨울에 모친이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자 애를 태우며 여기저기 구하러 다니던 중 어느 날 밤 꿈의 현몽(現夢)에 따라 외양간에서 수박을 구해 모친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는 효자이다. 고종 9년(1872) 「孝子 學生恩津宋桂元之閭」라고 명정(銘旌)되어 그해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 |
▶송 계원(宋桂元)의 효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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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병중인 부친 생각에 포기하지 않고 눈보라 속에서 얼음을 깨고 낚시를 드리운 채 수삼일 을 꼼짝도 않고 기다리니 추위 속에 며칠간을 굶어 그만 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잃고 스러진 공은 생사를 넘나드는 꿈을 꾸었다. 공이 깊은 물속을 헤엄쳐 다니다 별천지와 같은 수중 궁궐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니 궁궐 식구들이 모두 반기며 함께 살기를 종용했다.
그곳은 만난 음식과 편안함이 가득한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부모께 효를 다해야 한다며 그곳의 권유를 뿌리치니 공의 효성이 갸륵하게 여긴 용왕이 타고 나가라며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선물로 주어 그 잉어를 타고 물 속을 가르며 육지로 나오려다 꿈을 깼었다. 공이 꿈에서 깨는 순간 얼음이 소리를 내며 갈라지며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툭튀어 나오니 공은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 암에 보이는 커다란 잉어는 바로 꿈속에서 용왕에게 선물로 받았던 그 잉어였다 것이다. 감사함과 반가움으로 얼른 잉어를 집으로 가져가 병중의 부친에게 봉양하니 잉어를 드신 부친은 그날로 쾌차하여 병석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간절한 효심과 정성이 하늘도 감동을 한 것이었다. 도한 추운 겨울에 모친이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자 애를 태우며 여기저기 구하러 다니던 중 어느 날 밤 꿈의 현몽(現夢)에 따라 외양간에서 수박을 구해 모친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는 효자이다. 고종 9년(1872) 「孝子 學生恩津宋桂元之閭」라고 명정(銘旌)되어 그해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 |
▶황 효자(黃孝子)와 비조(飛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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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남의 집일을 도와주고 받은 품삯으로 무엇을 사서 부모님께 드려 기쁨을 드리나 하고 고심 끝에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고기를 사다 드리려 마음을 먹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기 음식을 장만해 드리는 것은 평소에 생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는 마을에는 고기를 파는 육고간이 없고 멀리 떨어진 금산이나 무주 같은 큰 마을로 가야만 했다.
마침 그 날이 금산의 장날이라 아침 일찍 서둘러 60리 길인 장으로 가서 쇠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돌아오고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대치재에 이르는 순간 갑자기 큰 새가 나타나 황 효자에게 달려들어 들고 있던 고기뭉치를 가로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시 바삐 돌아가 고기로 저녁상을 봐드리려 했던 황효자는 이 같은 어이없는 상황에 그만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멍하니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참만 에 정신을 차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당도한 것은 밤이 이슥해서였다.
벌서 잠자리에 드셔야할 부모님께서는 두 분이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고 계셨다. 아들이 당도한 것을 안 어머니가 반갑게 맞으시면서 말하기를, “애야, 일찍 돌아왔으면 저녁을 먹고 마실 을 갈 것이지 이 시간까지도 배도 고프지 않느냐”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너무 뜻밖이라 미처 대답도 못한 채 방으로 들어선 황효자는 밥상을 보고 깜짝 놀라, “어머니, 이 쇠고기 국이 어디서 난 것입니까” 라고 묻자, “네가 아까 저녁 무렵에 사다 놓고 마실 갔다 온거 아니냐 애야, 이 귀한 고기를 사왔으면 잘 갖다 놓고 가야지 하마터면 그놈의 큰 새가 물고 갈 뻔 했구나. 무슨 새가 그리도 큰지,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니” 라고 애기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황효자는, “아하 ! 내가 늦게 도착할 것을 알고 그 새가 고기를 물어다 부모님께 미리 가져다가 그린 게로구나.” 하며 자신을 도와준 하늘에 감사드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효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돕는다는 교훈을 일깨우는 이야기로 황효자의 극진한 효행을 말해주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황효자의 효행을 칭송하여 식암마을 클 길가에 효행 비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
▶감악바위와 남선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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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조는 남선의 충절을 높이 사, 몇 차례에 걸쳐 사람을 보내 남선이 다시 한양으로 올 것을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세상을 멀리한 채 굴속에서 살다 죽었다. 남선의 죽음을 두고 어떤 이는 남선이 이태조의 강한 회유를 견디다 못해 감악바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도 하고 굴에서 단식을 해서 죽었닥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어쨌든 남선은 후세 사람들에게 충절의 높은 기개를 일깨웠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그 바위 위에 수절사라는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비석은 없고 그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남선이 기거했다는 감악바위 밑의 굴을 남선굴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감악바위는 땅 위에 보이는 육지 감악바위와 물속에 잠겨 있는 수중 감악바위가 있는데 본래는 모두 육지에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지각 변동에 의해 바위의 일부가 물에 잠긴 것이다. 수중 감악바위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물길이 통과했다고 하나 지금은 워낙 물살이 거세어 볼 수가 없다. 자연 경관이 수려하여 특히 여름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양처로 삼고 몰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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