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초기르네상스의 조각 그리고 북유럽의 유화(15세기)
조각가 도나텔로와 화가 얀 반 에이크의 반전~~
르네상스로 진입하면서 대부분의 미술 작품은 예술가에 대한 입지강화와 사회 분위기의 영향으로 기록에 의하여 제작시기와 작가들을 파악할수 있습니다..
수도 없는 예술가들의 기록이 모두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미술사에 명성을 남긴 화가들은 기록은 대부분 남아있고 또한 후대의 평이나 스토리도 서양의 서술가들이 기록한 내용이 많으니 르네상스 이후는 가능한 작품과 작품의 창작배경으로 미술 사조를 설명하는 방향으로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사초에 이어 본격적인 초기 르네상스의 시대로 출발합니다!
부르넬레스키와 친분을 쌓은 르네상스 초기의 조각가는 동료 마사초보다 15살 많은 '도나텔로'였다.
*도나텔로
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이탈리아어: 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1386년경 ~ 1466년 12월 13일)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이다.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 거장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 <성 조르조 상>, <다비드>, <가타멜라타의 기마상> 등이 있다.
도나텔로를 소개하는 장이니 그의 조각 대표작과 評부터 옮겨보면서 인트로를 시작합니다!
그의 작품 연도순으로 감상해보시죠!
1.복음서 저자 세례요한(1408~15)
도나텔로의 초기 작품의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408년에서 1415년 사이에 <복음서 저자 세례 요한>의 모습을 묘사한 거대한 대리석 조형물을 작업했다.
도나텔로는 전형적으로 젊은 남자로 묘사되어 왔던 요한을 성경을 들고 있는 노령화된 예언자로 묘사했는데 범례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재현을 향한 일탈이었다.
조각의 위쪽 절반은 여전히 이상화된 관점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 피사체의 얼굴 표정을 주의 깊게 고려하였으며 다리와 손의 조각은 현실적인 형상을 가리키고 있다.
성자의 다리가 예복 밑에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다리 해부학에 주의를 기울이며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으로 신체를 대표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 전면의 틈새에 전시되었는데, 2세기 동안 가장 중요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프로젝트였다. 피렌체가 유럽 예술에서 우위를 차지하던 고딕 양식을 능가하기 위해 기획한 중요한 도약의 한 걸음으로 보여진다.
관람자들이 아래에서 조각품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몸을 다리보다 불균형하게 길게 만들면서 원근법의 필요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작품으로 보여준다.
큐레이터이자 미술사학자인 다니엘M.졸리(Daniel M. Zolli)가 언급했듯이 조각의 기반이 인간의 키보다 약 4피트 위에 설치될 것을 미리알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비율이 이 각도에서 관찰했을 때 자연에 훨씬 더 가까울 뿐만 아니라 존재는 훨씬 더 어마어마해 보인다.
의복의 직물은 몸체에 무겁게 걸려 있고 전체 구성이 안정된 피라미드 구조로 조직되어있다."
2.성 조오르지오(1415~17)
피렌체에 있는 오르산미켈레
(Orsanmichele) 성당 외관에 비어있는 부분을 파사드로 채우기 위해 14명의 성인 조각이 만들어졌는데 무기 제조업자의 길드로부터 그들의 수호성인인 성 조지의 조각상을 조각하도록 의뢰받았다.
작품은 기독교 성자전 "황금전설" 등장인물 성 조지가 용을 창으로 죽여 공주를 구출한 일화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군인, 기사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던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조각된 대리석 판 위에 우뚝 서 있는 성인의 실물 크기 조각이다.
성 조지의 이러한 일화의 내용은 조각이 놓여있는 벽감의 하단 부분에 릴리에보 스티아치아토(rilievo stiacciato, 평부조) 기법으로 조각되어 있다.
모든 적들에 대항하여 강하게 버티는 피렌체인의 정신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얼굴의 감정에 대한 도나텔로의 꼼꼼한 연출로 인간적 취약성과 부드러움을 드러낸다.
콘도티에로 에라스모 다 나르니( Erasmo da Narni)의 승마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정을 묘사하는데 있어서의 전문성은 전통적으로 보다 이상화된 방식으로 제시되었던 주제를 인간화하는 예술가의 대표 기술이었다.
콘도티에로는 군대를 양성하지 않는 도시국가를 위해 고용된 용병 부대 지휘관을 지칭한다. 작품은 고전 조각의 이상을 되살려내고 이전의 고딕적 매너리즘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사실주의에 전적으로 몰두했기 때문에 조각예술의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식된다. 기반의 대리석 판도 그 자체로 중요한 예술 작품이다.
회화에 시작되던 직선 원근법을 이용해 만들어진 얕은 돋을 새김 조각품의 초기 사례이다.
경험적 원근법에서 시각에서 직선 원근법으로의 전환은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발견 중 하나이다.
친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가 제시한 원근법을 이용한 실험에 익숙했을 것이고, 얕은 돋을새김 조각이라는 도전적인 기술 매체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3.The Pazzi Madonna (1420)
파치 가의 성모상 / 대리석 부조( -독일 베를린 보데 박물관(카이
저-프리드리히 박물관)
도나텔로는 인간의 감정과 표정을 끊임없이 탐구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탁월한 통찰력으로 형식적 표현들을 재현했고 청동, 대리석, 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의 부조는 피렌체의 파치 궁전(Palazzo Pazzi)에 있었다고 한다.
넉넉한구성과 뚜렷한 윤곽을 가진, 그리고 고전적인 유물에서 영감을 얻은
성모 마리아의 옆모습의 애처로움은
14세기 미술의 고딕양식의 성모상의 고풍스러운 기념비를 떠올리게 하지만 직선 원근법의 법칙에 따라 엄격히 조각하고, 자신이 개발한 릴리에보 스티아치아토
(rilievo stiacciato, 평부조)의 기법을 사용하여 완전히 대립하는 듯한 두 가지 측면인 친밀한 측면과 기념비적인 측면을 조정하는 데 성공한다.
<파치 가의 성모상>이 보여주듯이 혁신적인 디자인 능력으로 예술가들 중 당시에는 작품의 구상이나 제작에 비타협적인 사람 중 한 사람이었지만 , 일반적으로 형식적인
아름다움보다 영적인 표현을 우선시했다.
4.Prophet Figure (Zuccone)
(1423-1425)
예언자 (추코네) / 대리석 조각-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예언자 (추코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 St. John the Baptist>, <마리아 막달레나 Magdalene Penitent>에서도 성인을 영웅적이고 이상화된 모습으로 다루는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나 기괴하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루었다.
그가 이처럼 의도적으로 성인을 흉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인물의 심리상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오모(Duomo) 종탑의 서쪽 면 벽감에 놓여있었던 이 작품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하박국(Habakkuk)을 조각한것이다.
하박국이 입고있는 모든 예복의 겹겹과 주름을 보여주는 복잡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어 세부사항들은 마치 조각품이 살아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박국은 그의 몸의 한 면을 감싸고 있는 긴 가운을 걸치고 있고, 머리에는 털이 없다. 머리는 앞으로 향하지만 약간 기울어져있다. 하박국의 발은 조각이 끝나는 그의 긴 예복 아래쪽에서 볼 수 있는데 즐겼던 조각상들의 기법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당시 :추코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추코네'란 바보얼간이'와 같은 뜻으로 대머리에 살짝 벌어진 입,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모습 때문에 피렌체 시민들은 이조각을 비난하는 의미로 이러한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도나텔로는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형상으로 성인을 자주 묘사함으로써 동시대인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기원전 7세기경 예언자 하박국은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한 억압과 착취, 약탈과 폭력을 목격하여 절망에 빠졌다.
인간 사회의 부패와 불의를 하나님께 고발하면서 "왜 이런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인가"(하박국 1장 6절)라고 물었다.
고뇌에 빠진 하박국의 정신적 충격을 묘사하고자 했던 것으로, 당시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 일반화되었던
아름다움의 추구보다 인간 내면의 절망, 고뇌, 슬픔과 같은 심리 표현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도나텔로의 조각은 벽 장식의 일부에 불과했던 조각이 점차 벽감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의 조각으로서의 지위를 갖추기 시작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조각에서도 볼륨감과 동세가 약했던 초기 조각들에 비해 동세가 자유롭고 삼차원적으로 표현되었다. 허벅지를두른 띠 속에 손을 넣은 모습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이 조각이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에나(Siena)의 자코포 델라 퀘르차
(Jacopo della Quercia)가 <자카리아에의 수태고지 The Annunciation to Zacharias> 부조에 차용하기도 했다.
5.Bust of Niccolo da Uzzano
(1433)
니콜로 다 우차노 흉상 / 테라코타(구운 진흙) 조각 -이탈리아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니콜로 다 우차노(Niccolo da Uzzano)는 15세기 초 피렌체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로, 이 도시의 강력한라이벌 가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중재자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도나텔로는 1433년 우차노가 죽은 직후 흉상을 제작했다.
고대 이후 제작된 최초의 민간인 반신상이었다.
조심스럽게 주조된 테라코타 점토, 독특한 얼굴 표정, 다색 페인트를 선택한 것은 모두 이것이 추상적인 리더십이나 미덕의 개념을 나타내는 이상화된 이미지라기보다는 개인의 정확한 초상화를 의도한 것임을 시사한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거나, 예술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꼈던 방식으로 우차노의 인간성과 개성을 강조한다. 피렌체의 휴머니즘 운동과 함께 예술가들은
좀 더 사람들의 실물과 꼭 같게 모사하는 연출로 전환하고 있었고, 왕족이든 평민이든 간에 진실한 표현을 강조했다 피렌체 르네상스 전문가 어빙 라빈(lrving
Lavin)은 하프 흉상이 그 힘의 핵심이며 혁명적 접근법을 강조하면서 그 인물을 제시
한다고 주장한다. 도나텔로는 흉상에서의 형상을 잘라내고 정교한 주춧돌의 전통적인 표현을 피함으로써 진정한 초상화임을 암시하고, 실제 인간을 모방한 표현이다: "임의적인 절단은 보이는 것이 더 큰 전체
의 일부분이며,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암시한다. 신체의 윗부분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것이 단지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는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 흉상은 "평범한 사람'을 구성하는 신체적, 심리적 특성들을 총합한 완전한 개인을 환기시킨다
6.Cantoria (1433~1439)
칸토리아 / 대리석 조각 -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1430년대 초, 도나텔로의 친구이자 또래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는 피렌체 대성당
의 돔을 위한 야심찬 디자인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건물 장식과 유지보수를 담당했던 오페라 델 두오모(The Opera del Duomo)의 실내장식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루카 델라 로비아(Luca della Robbia)에게 내부의 오르간석 중 하나를 설계하도록 의뢰했고 1433년 도나텔로가 로마에서 돌아오자 그들은 즉시
그에게 델라 로비아(della Robbia)의 프로젝트와 큰 대조를 이루는 작업을 의뢰했다. 델라 로비아(della Robbia)가 성당에서 볼 수있는 성가단인 칸토리아(cantoria)의 패널들을 찬송가 150편의 다양한 구절을 보여주는 별도의 장면으로 나눈 반면, 도나텔로는 로프트의 세 개의 시각적 면을 중심으로 흐르는 연속적인 서술로 구성되었다.
관람자를 위한 생동감과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만든 것은 그가 로마에서 접했던 고전적인 프리즈와 고대 석물에서 직접 차용한 차용한 영감이었다.
조각에 대한 숙달과 관람 경험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훈련받은 대표 기법들을 반영하고 있다. 미술사학자 티모시
베르돈(Timothy Verdon)은 "그 조각가의 디자인은 칸토리아의 주 광원을 신중하게 고려했다: 작품 바로 아래에는 한 줄의 햇빛과 촛불이 틀 위에 정교하게 정돈되어 있었다"고 언급했다. 도나텔로는 대리석을 관례적인 광택제로 연마하는 대신 아래에서 올라오는 촛불이 비춰지면 다양한 그림자, 질감, 조명점이 전체적인 구성에 또 다른 요소를 더하도록 거친 부분을 남겼다. 도나텔로가 이 매체로 완성한 마지막 주요 커미션이었던 만큼 이 작품에서 대리석의 물질성에 대해 이토록 고심했다는 점에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7.Madonna with Four Cherubs
4명의 아기천사가 있는 성모상/테라코타부조/베를린 보데 박물관
(1440)
초기 작품 <파치 가의 성모 Pazzi Madonna>에서처럼 이 부조는 도나텔로의 특징인 여전히 고귀한 신의 어머니에 대한 중세적인 표현으로 불길한 예감으로 가
득 찬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후기 작품에서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지치지 않는 친밀감을 유지하면서도 아기 그리스도의 자세를 바꾸어 관람자들에게 구성을 개방했다.
15세기에 도나텔로 특유의 급진주의를 통해, 그 두 사람의 머리는 더 훌륭한 표현력을 위해 선의 어떤 형식적인 균형이나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성모의 왼팔의 위치를 통해, 그들의 모든 손이 구성의 중심에 함께 모인다. 1945년 5월 화재로 부조가 손상되어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그 웅장한 다색조가 벗겨졌다
8.David (1440~1443)
다비드 / 청동 조각-이탈리아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작지만 정교한 청동은 도나텔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은 르네상스 시기 작품으로 골리앗을 제압한 직후 그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동 다비드 상의 주문과 관련된 문서는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5피트 높이로 단독으로 서 있는 고대의 다비드와 골리앗 이야기에 나오는 다비드의 청동 조각상이다.
한 쪽 다리에 다른 쪽 다리보다 더 무게를 두는 전통적인 고전 자세인 콘트라포스토(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인체 표현법)로 서 있다. 권력자로 묘사하는 대신,
승리를 모티브로 한 월계수로 둘러싸인 특별한 모자와 정교한 금도금 부츠를 신고 있는 나체 소년으로 표현되었다.
고대 그리스 도자에 묘사된 전쟁 장면에서 용사들이 옷은 입지 않은 채 헬멧과 부츠를 신은 모습으로 묘사된 것에서 도상적 아이디어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다비드는 고대 그리스의 용사들과 달리 투구를 쓰지 않고 월계수로 둘러싸인 모자를쓰고 있는데 이는 그가 용감한 이임과 동시에 본래 목동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파격적인 배치는 인물의 긴 머리와 섬세한 이목구비, 늘씬한 몸매가 어우러져 작품을 도발적이고 교태적이며 여성적인 조각 작품으로 만든다. 또 다른 이상한 요인은 골리앗의 투구 한쪽 날개가 다른 쪽 날개에 비해 상당히 길고, 사타구니 쪽으로 그 인물의 다리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성적 취향에 대한 논쟁의 핵심 접점
이 되어 왔다. 이러한 추측을 제쳐두고, 도나텔로의 다비드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그리고 그의 주제에 대한 예술가의 처리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이 작품은 고대이후 제작된 최초의 독립된 남성 누드 조형물로, 이교도가 아닌 성서적인 인물로 논란이 되고 있다. 미술사
학자인 베스 해리엇(Beth Harriet) 박사도 미술 누드의 과감한 재도입을 넘어, "조각된 인물들은 마침내 건축으로부터 분리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행해졌던 방식으로 다시 한번 독립했다. 그리고 그가 단독으
로 서 있기 때문에, 더 인간적이고, 더 현실적이다. 이 세상에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며, 물론 그 콘트라포스토 또한 그렇게 보인다."고 이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격찬했다. 본래 조각상은 메디치 궁 정원 가운데에 비문이 새겨진 단 위에 세워졌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조각상이 코시모 메디치(Cosimo de' Medici)에 의해 주문된 것으로 보지만 제작년도는 불확실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작은 키와 위치 때문에, 그 동상은 가족 방문객들에게 친밀한 경험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9.Virgin and Child (The
Borromeo Madonna) (1450)
성모자 (보로메오 성모상) / 테라코타(구운 진흙) 부조( )-미국 텍사스 포트워스 킴벨 미술관
발명의 능력, 표현의 범위, 기술력으로 유명해진 도나텔로는 15세기의 뛰어난 이탈리아 조각가였다. 성모 부조상들은 이 시기에 제작된 가장 흔한 예술 작품들중 하나였으며, 발명의 능력, 표현의 범위, 기술력으로 유명한 도나텔로의 장르 구상인 영성, 자연주의, 그리고 사실상 얕은 평면에 있는 질량과 깊이의 표현은 당대의 가장 주목할 만하고 영향력 있는 업적들에 포함된다. 가족 예배당과 침실, 그리고 주택의 공공장소에 전시된 이러한 신적인 작품에 대한 수요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많이 모방되고 모조되었다.
살아남은 수많은 도나텔레 풍의' 성모 부조상들 가운데 도나텔로가 직접 조각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드물다. 1902년까지
<보로메오 성모상(The Borromeo Madonna)>은 이탈리아 동북부의 도시 파두아(Padua) 근처의 마을인
리사로 디 메스트리노(Lissaro di Mestrino)에 있는 산 조반니 바티스타(San Giovanni Battista) 교회에 있었다.
15세기에 이 교회는 밀라노, 파두아, 베니스의 은행가 및 상인이었던 저명한 보로메오 가문의 독점적인 후원하에 있었다. 안토니오 보로메오(Antonio
Borromeo)와 그의 아들은 1450년까지 완성된 도나텔로의 걸작인 복잡한 청동 제단 조각을 의뢰했던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Sant'Antonio) 성당의 위원이었다. 보로메오 가문의 일원은 1500년경까지는 리사로 디 메스트리노에서 문서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무렵에 아마 킴벨 미술관의 성모 부조상을 취득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조상의 원래의 페인트칠과 도금된 표면은 치장 벽토와 오버페인트 층에 의해 손상
되었다. 오리지널 컬러의 몇 가지 잔존하는 흔적만 남기고, 이러한 이후 서서히 막처럼 생기는 부착물들을 없앤 최근의 손질은 입체감의 질을 드러냈다. 친밀하고 강렬한 감정은 도나텔로의 특징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눈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그의 시선은 십자가형을 당하는 그의 미래의 희생에 대한 여지로 애석해 하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Magdalene Penitent (1453-
1455)
막달레나의 회개 / 나무에 금색, 폴리크롬-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도나텔로가 참회하며 사막을 헤매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실물 크기로 묘사한 것은 그의 가장 감동적인 작품들 중 하나이다.
예술가가 달성한 리얼리즘과 감성 수준은 유례없는 수준이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도나텔로는 그의 주제에 대한 전설과 선입견에서 방향을 바꾸었고, 막달레나(Magdalene)를 천사들과 함께 제공되는 더 흔하고 젊고 아름다운 나체보다는 늙고 굶주린 여성으로 묘사했다. 그는 그녀가 매춘부로서의 이전 삶을 완전히 단념했음을 강조하면서, 그녀 자신의 머리카락이나 헤어 셔츠(과거 종교적인 고
행을 하던 사람들이 입던, 털이 섞인 거친 천으로 만든 셔츠)로 그녀를 가렸다.
그럼에도 미술사학자 베스 브래드필드(Bess Bradfield)는 "성인의 맨살이 이 머리카락에 가려진 만큼 노출된다.."고 지적했지만,이 작품에서 도나텔로는 성서 등장인물들의 인간성을 강조하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성스러운 차원에서 우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차원에서 불쌍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제시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에게 조각이 주는 메시지는 그리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고행의 길을 택함으로써 육체적 욕망으대상이었던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그녀의 정신은 강해지고 고결해졌기 때문이다. 그간의 온갖 고뇌가 묻어나는 그녀의 얼굴과 달리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두 손만은 아름답게 묘사되어있다. 도나텔로는 의도적으로 이 여인의 눈을 푸르게 칠하고, 머리카락을 금색으로 표현함으로써 한때의 화려했던 그녀의 모습을 암시했다. 이 작품은 나무를 조각하여 만들어진 것이지만, 대부분의 세부묘사는 유연한 재질의 재료를 표면에 덧붙여 표현한 것이다. 그 표면에 붓으로 색을 입혀 한층 더 사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도나텔로가 오래가는 대리석 대신에 부패하기 쉬운 나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부패하는 물질성즉 인간의 육체 속에 깃든 불멸의 정신성을 관람자가
꿰뚫어 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나무의 사용은 도나텔로의 여러 가지 재료에 대한 기능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놀라운 선택에서 나무는 성인의 고뇌에 찬 피부 결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그 작품은 도색되어 있었는데, 특히 눈과 눈동자에서 볼 수 있는 전례 없는 수준의 디테일과 사실감을 더했다. 16세기 전기작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이 작품이 피렌체의 세례당모)에서 위치해 있었을 때 이 작품을 보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녀의 신체의 모든 부분이 인간 해부학에 대한 완벽하고 완전한 이해를 반영할 정도로 그녀가 금식과 금욕으로 쇠약해겼기 때문에 도나텔로 자신의 손으로 만든 조각상은, 매우 아름답고 잘 실행된 나무로 만든 참회하는 성 막달라 마리아로 보인다.'
파도바의 산 탄토니오 성당 앞 광장에서 있는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1453)
로마에서 보았던 캄피돌리오 언덕 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을 본으로 한 것이다. 초기 르네상스에 있어서 군상(群像)의 안정과 정밀이란 고전적 효과는 그 양괴성과 평형감으로 표시되었다.
말 탄 자의 수직선, 장군이 가진 칼과 지휘봉으로 구성된 날카로운 대각선, 커다란 말의 수평적인 중량감 및 말의 네 발이 만드는 삼각형이 기묘한 교차를 보여 주고 있다. 왼쪽 앞발 아래에 있는 구슬은 물리적 평형을 갖기 위해서도, 대좌에서 전진하려는 말을 저지시키는 데에도, 실제상의 필요에서나 장식상에서나 다같이 군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마체에도 해부학적인 정확함을 추구했으며 다리와 코에 정맥이 부풀어 나오게 했다. 또 두부의 딱딱한 구조와 피부에도 극명한 현실의 관찰을 볼 수 있으며, 안장의 모포와 갑옷의 옷감 성질에 대해서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둔중한 말처럼 보여 기사에 비례하여 너무 큰 것 같지만 완전 무장한 사람을 지탱하기에는 실제적으로는 이것조차 무리일지 모르겠다. 그는 갑옷과 안장에 풍부한 장식을 다는 것으로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커다란 말에 끌리기 쉬운 사람에게 주의를 쏠리도록 노력했다.
한 사람의 유능한 장군의 풍모를 표현한 점에서 벌써 뛰어난 초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나아가서 고전적 형식을 빌어 하나의 전형적인 인물을 구체화한 점으로 그것은 초상 이상인 것이다. 고대에 대한 공감과 철저한 사실과 근대적 지성, 그리고 인생의 희비극을 뚫어 보는 통찰 등, 이것을 무기로 하여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했다.
도나텔로의 작품들은 피렌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학, 수학, 건축에 대한 관심의 부활에 큰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는 건축작품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얕은 돋을새김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소실점이 하나이며, 화면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집중되는1점 투시도법을 사용하는 것과 그의 인물들에 대한 정확한 해부학적 정확성이 포함되었다.
그 모습은 화가의 숙달의 중심 포인트였고, 그는 사실 누드 조각을 재도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신화적이든 역사적이든 일상적이든 그의 주제들에 대한 현실적인 비율, 감정, 그리고 표현이 더해지면서 그는 이전의 이상화된 이미지보다 진정한 현실을 전달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도나텔로는 돌, 청동, 나무, 석고, 점토, 밀랍을 포함한 많은 매체를 가진 다작의 대가였다
그는 현대 미술가들 중 처음으로 조각의 예술을 묘사했다. 그의 다재다능함과 독창성은 물질적인 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미래의 조각가들을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로마에서 고대 조각을 연구하고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으며 작품 경향은 중세적 자연주의의 전통과 고전의 형태미에 의하면서 차츰 새로운 힘찬 사실주의로 발전하였다. 원근법을 써서 입체감을 나타내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주의적인 표현에 힘썼다. 얕은 돋을새김 조각으로 유명하며, 그의 조각들은 초기 르네상스의 걸작들로 꼽힌다.
도나텔로의 예술을 형성한 데는 브루넬레스키와 함께 로마에 유학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대머리이기 때문에 <로츠코네>(상기 서술)라 불리는 상은 피렌체 대성당 종루의 감실용으로 제작된 것인데(1423∼1425) 그의 철저한 사실을 실증하는 작품이다.
그는 미라고 하는 추상적 표준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억센 인간성을 극명하게 묘사하려고 시도했다. 융기한 목의 근육과 굽어진 손목, 중후한 의상, 응시하는 표정은 과연 힘있는 남성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 상>(1420?), <막달라 상>(1455?), <세례자 요한 상>(1455)은 이것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다.
브루넬레스키와 함께 로마에서 고대 미술을 연구하였으며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재현하고자 하였고 부조 형식의 조각에 원근법을 적용한 최초의 르네상스 조각가로 평가받는다. 생존할 당시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피렌체의 '오르산미켈레 성당' 건축 당시 피렌체 정부로부터 각 상공업 길드들의 수호성인의 조상을 제작해 성당의 외부 파사드에 장식할 것을 요청받아 제작된 14개의 수호성인 중 하나이다.(전술 작품 참조)
*오르산 미켈레 성당..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 (혹은 '성(대천사) 미켈레(미카엘)의 텃밭', 이탈리아어 단어 orto의 토스카나 방언의 축약에서 유래)는 이탈리아 도시 피렌체의 성당이다. 이 성당은 본래 산 미켈레 수도원의 텃밭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오르산 미켈레의 입구
수호성인의 복제조상이 있는 성당 파사드..
피렌체 경제의 상징인 '오르산미켈레 성당'의 건축은 흑사병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해방됐고 주변 강대국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도시 재개발사업'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14개의 조각상이 모두 완성되는 데에는 100년 이상의 긴 시간이 걸렸지만 오늘날
이 성당은 세계 최고의 야외 조각 박물관으로 인정받고있다.
피렌체의 비아 칼차이우올리(Via Calzaiuoli)에 위치하고 있으며, 1337년 건축가 프란체스코 탈렌티와 네리 디 피오라반테, 벤치 디 치오네에 의해 곡물 시장으로 처음 건설되었다가 1380과 1404년 사이 피렌체의 강력한 상공업 길드들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정사각형 건물의 1층 내부는 기존의 곡물 시장의 로자(loggia)를 형성하던 13세기의 아치들이 있는데, 2층은 사무소로 운영되었으며 3층은 기근과 전쟁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피렌체 시영(市營) 곡물 창고였다. 14세기 후반 상공업 길드들은 도시정부로부터 각 길드의 수호성인의 조상(彫象)을 제작해 성당의 파사드를 장식할 것을 의뢰받았는데, 현재 볼 수 있는 조상들은 복제본으로서 원본들은 박물관으로 옮겨진 상태이다.
당시 최고의 조각가로 칭송받던 '기베르티' 또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그와 '도나텔로'의 조각을 비교해 보면 어떤 작품이 르네상스라는 시대정신을 잘 반
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성 요한 by 기베르티 / 1414~16년
세례자 성 요한(St. John the Baptist, 1412–1416)은 이탈리아 피렌체 오르산미셸의 14개의 틈새에 위치한 로렌조 기베르티의 동상입니다.성상은 옷감 상인 길드인 칼리말라 아르테(Arte di Calimala)에 의해 의뢰되었습니다.
화가가 성인의 머리와 옷깃에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한 곡선을 사용한 것은 작품이 탄생할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국제 고딕 양식의 영향력을 보여줍니다.이 작품은 성공적으로 한 작품에 주조되어 이탈리아에서 최소 수백 년 동안 한 작품에 주조된 최초의 청동상이 되었습니다.
*기베르티와 브르널레스키 링크
https://naver.me/FNllFfrT
사조에 등장하지 못하면 기베르티처럼 당대에 최고의 영예를 누리다가 미술사에서는 이렇게 초라한 신세로 전락합니다..ㅠㅠ
성 게오르기우스 by 도나텔로
1416년
한편, 이 시대의 길드(guild)는 예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길드'란, 사업장을 소유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노동조합이라기보다는 오늘날의 경제인 모임과 유사하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해 길드에 소속이 되어야 경제 활동은 물론, 정치 활동도 할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에는 모두 21개의 길드가 있었는데 이는 21개의 직종과 정치 정파가 피렌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7개의 대형 길드에 돈과 권력
이 집중되었는데 법률가, 모직업자, 비단상인, 의류업자,은행업자, 의사와 약재상, 가죽∙모피업자였다. 이 밖에도 대장장이, 석수, 건축업자, 목수, 요리사, 여관업자, 재단사, 무기제조업자, 제혁업자 등이 14개의 군소 길드를 형성했다.
<성 게오르기우스>를 도나텔로에게
의뢰한 길드는 무기제조업자들이었다.
위의 조각품들을 미린이가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한때는 사제지간이었던 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대하는 시각은 사뭇 달라 보이는 해설 옮겨볼까요?
고딕양식의 영향으로 형식적이고 기술적 화려함으로 신성을 강조한 '기베르티'와 갑옷의 형태와 인체의 구조가 조화를 이루고, 인물의 미간을 찡그려 전방을 노려보며 생동감을 살린 '도나텔로'~~
판단은 개인의 시각과 취향이겠죠!
"15세기초 피렌체의 거장들은 중세의 미술가들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공식을 반복하는 것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업실이나 공방에서 모델이나 동료 미술가들에게 자기들이 원하는 자세로 포즈를 취해 줄것을 요구함으로써 인체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다.
도나텔로의 작품을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준 것도 모델을 직접 묘사하는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관심이었다."고 곰브리치는 기술~~1440년경의 청동 <다비드 상>은 독립 조상인데, 종래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 그 평정한 자태의 표현은 고대 양식의 충실한 번역이라 하겠다. 가느다란 팔과 딱딱한 체구에는 우미한 곡선은 없지만 그의 예리한 관찰로 미성숙한 남자상을 남김없이 포착하고 있다. 토스카나 지방의 목동이 쓰는 것과 같은 모자는 다소 기묘한 감을 주지만 그 비고전적인 면모에 내려진 음영에는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특수성과 일반성의 결합이나 나체상에 비범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
도나텔로의 초기 대리석 다비드상(1408년)
르네상스 최초의 조각가, 도나텔로의 최대 걸작은 <다비드>상이다. 그는 평생에 두 번에 걸쳐 이 조각상을 제작했는데 이 중 백미는 청동으로 제작된 <다비드>상으로 고대 로마시대 이후 최초로 제작된 누드 조각상으로 알려져 있다.
도나텔로가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는
15세기초,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부활, 인체의 이상화, 원근법에 중점을 둔 반면,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종교적 주제는 물론, 일상의 세부 표현, 상징적 의미에 초점을 맞춰 발전하였다.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랑드르(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 일부)의 미술가 '얀 반 에이크'를 빼놓고는 논할 수가 없다
무한한 주의력과 인내력으로 현실의 세세한 부분들을 비춰주는 거울을 창조하기 위해 '얀 반 에이크'는 회화의 기법까지도 개량했는데 이것을 "유화"라 부르며, 그가 최초 사용자로 알려져 있다. '유화'라는 물감이 대중화되기전까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가들조차도 템페라나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유화 : 0il painting. 기름을 이용한 안료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으로 유채화(<-수채화)라 함. 그림을 망치거나 번질경우 여러 번 덧칠하여 수정이 용이하고 반짝이거나 털같은 세부 묘사가 가능함
*템페라: Tempera. 유화가 대중화되기 전에 가장 널리 사용된 기법 중 하나. 안료를 달걀노른자 또는 기타유기물(꿀)과 혼합하여 사용. 색상이 선명하나 빠르게 건조되어 수정이 어려움
*프레스코 : Fresco. 건축 표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기술. 벽에 발라진 석고의 상태에 따라 습식과 건식으로 나뉘며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고 세부 묘사가 어려움.
성삼위일체 by 마사초/프레스코화
(전술 참조..)
아르놀피니의 약혼 by 얀 반 에이크/유화
유명한 두 사람의 초상화는 한눈에 보기에도 부유해 보이는 부부가 집 내부에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이탈리아 상인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와 그의 아내의 결혼을 기념하는 작품인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세상의 많은 학자들은 이 그림의 주제에 대해 논쟁하고, 꼼꼼하게 그린 물체들이 어느 정도의 상징적 중요성을 띠는가를 문제시합니다. 하지만 이 매혹적인 걸작이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라는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의 손에서 완벽한 유화 기법으로 구현 가능해진 유례없는 수준의 사실주의와 디테일을 보여준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고 합니다.
아내가 입은 옷을 보고 임신부다 아니다 하는 말도 있었는데, 그건 이 그림이 그려진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볼록 솟은 게 옷의 디자인이라는 거죠.
약혼, 결혼, 부부의 초상등 한글 제목이 분분한데 영어제목은
"The Arnolfini Marriage"로 명시되어 있으며 "루카 출신의 조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조반나 체나미(Giovanna Cenami)의 결혼식 초상화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비너스의 탄생 by 보티첼리/템페라화
15세기 플랑드르(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 정도) 지역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회화가 발달했습니다. 이 지역의 미술은 사실적 디테일과 종교적 상징주의를 조합한 자연주의적 양식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그 가장 대표주자가 바로, 이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그린 얀
반 에이크입니다.
자연에 대한 '얀 반 에이크'의 관찰은 앞서 살펴본 랭부르 형제보다 더 인내심이 있었고 세부 묘사에 관한 지식도 훨씬 정확했다. 물론, 이러한 자연의 모방을 얼마나 정확히 표현하였는가를 가지고 위대한 미술가를 평가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일지 모르나 북유럽 미술이 발전해 나간 방식을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헨트 제단화 세부 by 얀 반 에이크/1432년
, 나무 위 유화, 350x223cm,벨기에 헨트
성 바본성당에 실제로 전시된 방탄유리 안에 전시보관된 제단화 , 성바본성당(St. Bavo Cathedral)
'제대화’는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흔히 제단화라고 불립니다. 교회 동쪽 중심 제단 뒤에 수직으로 서 있는 패널화로, 미사 때 모든 신자가 볼 수 있습니다.
시각적 교화수단으로 만들어졌으며
가장 단순한 것이 한 폭으로 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형식의 ‘팔라(Pala)’입니다. 상단과 주제가 연결되는 하단이 함께 구성되기도 합니다. 수평의 작은 패널로 ‘프레델라’라고 하며, 홀바인의 <무덤 속의 예수>가 그것입니다.
두 폭 제단화로는 작가 미상의 영국 <월턴 두 폭 제단화>가 유명하며, 개폐가 가능한 세 폭 제단화(트립티콘 Trypticon)가 가장 일반적이었습니다.
날개형은 마인프랑크에서 활동한 그뤼네발트가 완성했습니다.
통상 다섯 개 이상의 패널로 구성된 것을 다폭 제단화라고 합니다. 일명 <어린 양의 경배> 또는 <신비의 어린 양>으로 불리는 참나무 12폭의 <헨트 Ghent 제단화(1432) >를 통해 그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15세기 초 플랑드르 지역 헨트시 성 바봉 성당 가족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시장 요스 베이트(Joos Vijd)가 반 에이크 형제(얀과 형 휴베르트)에게 주문하여 만들어졌습니다.
<헨트 제단화>는 닫혔을 때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단에는 봉헌자 요스 베이트-세례자 요한-사도 요한-이사벨 보루트, 가운데는 수태고지 하는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 마리아, 상단은 선지자 즈카르야-이교도 무녀 에리트레이와 쿠마이-선지자 미가 등 한 폭, 한 폭이 마치 개인 초상화처럼 그려졌습니다.
열렸을 때
제단화가 열리면 화면(365x515cm)은 천상과 지상 2단으로 나뉩니다. 하단 다섯 폭은 <어린 양의 경배>입니다. 상단이 복잡한데, 왼편부터 열두 폭을 순서대로 서술하겠습니다.
아담-노래하는 천사들-마리아-하나님-세례자 요한-연주하는 천사들-이브 순입니다.
중앙 인물을 예수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바로 아래 <어린 양의 경배> 위쪽 반원 안의 성령인 비둘기와 연결하면, 아무래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열린 화면의 그림은 도상학적 의미가 매우 복잡합니다만 제단화로부터 인물화, 풍경화 등 회화의 다양한 장르가 파생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부연 설명하자면 중세에는 내세가 중요했기 때문에 인물화에 대한 관심이 없다가 15세기부터 독자적으로 발전한 장르 간 위계질서가 조성됩니다. 1648년 프랑스 왕립미술원에서 그림의 미술사를 공식화하는데, 역사화(성경, 신화, 역사)→초상화→풍경화→정물화→풍속화 순으로 언급했습니다.
17세기에 와서야 네덜란드에서 풍경화와 정물화가 유행합니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미술은 이런 면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차이를 보여왔다. 물건이나 꽃, 보석 또는 천의 아름다운 재질감을 표현하는데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 북유럽 화가중 특히 네덜란드의 화가가 그린 것이고, 반면에 대담한 윤곽선과 원근법이 명확하며 인체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파악한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곰브리치는 서술~~
'얀 반 에이크'의 위대함은 특히 초상화에서 두각을 보였는데 그의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작품 못지않게 새롭고 혁명적인 작품의
로 평가받는다.
카펫, 슬리퍼, 샹들리에 등 이 그림에는 일상의 온갖 것들이 다 있고, 보고 있노라면 마치 아르놀피니의 집을 직접 방문한 느낌으로 15세기 일상생활의 한 장면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약혼식 장면으로 알려져 있는 이 그림은 그림 중앙의 거울 위쪽 벽에는 '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라는 문구와 함께 그 거울에 비친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화가이자 약혼식의 증인으로서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좌), 그림 중 거울에 비친 얀 반 에이크의 모습
by 얀 반 에이크 / 1434년
역사상 처음으로 작가가 직접 목격자가 되었고 그가 직접 그린 그림에서 그를 볼 수 있게 된 우리는 600년 전에 일어난 사실적인 장면 또한 함께 되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림에는 배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물들을 통해 다양한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그림 속의 개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신실함을, 샹들리에에 켜진 하나의 초는 신의 존재와 함께 약혼식의 성스러움을, 오렌지나 예비부부의 모피 등은 이들의 재정적인 여유로움과 그들의 약혼이 사회적/경제적 결합이다고 암시한다.
우찌 학창시절 詩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쪼개고 해부하는 느낌의 評은 저만의 생각인지?
'얀 반 에이크'는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와는 다른 북유럽 르네상스의 독특한 사실주의와 상징주의를 정립했고 종교적 주제뿐만 아니라 세속적 장면과 초상화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중세의 종교 중심 미술에서 벗어나 세속적 주제를 발전시켜 근대 미술로의 전환을
촉진시킨 북유럽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나텔로의 네덜란드의 얀 반 에이크를 중심으로 초기 르네상스의 경향을 소개하며 총총..
르네상스 이후의 글 집필 포멧은 지금처럼 미술사에 등장하는 대표 예술가를 중심으로 시대사와 작품을 같이 소개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