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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하순이었다. 당시 일본의 패전은 결정적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 무렵, 본토에서는 마쓰오카와 말리크 주일 소련대사의 선에서 고노에 후미마로 공을 모스크바로 밀파하여 스탈린에게 미국과의 정전을 알선해 주도록 비밀 공작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중국에 있어서도 표면으로 가장 고집센 지나(支那) 파견국 사령부에서도 실은 화평공작의 준비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 비밀공작을 획책하고 있던 것은 육군부 내에서도 시바야마, 가게사 두 중장과 함께 중국통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이마이 다께오 소장이었다. 이마이 소장은 당시 지나 파견군 총사령부 참모부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다.
비밀 공작은 남경정부군의 참모총장을 지낸 일이 있는 양 등일 대장의 동생이며 군 참모차장의 현직에 있던 양 중장이 비밀리에 이요라고 이름하는 복면의 한 장교를 이마이 소장에게 만나보도록 주선이 이루어진 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요 대령은 당시 호북성 북부, 하남성 남부의 전선에서 일본군과 대진하고 있었다.
중국군 제10전구 부상령관 겸 제15집단군 총사령관 하주국 대장의 부하로, 하 총사령관의 명을 받아 일본과의 화평교섭을 하기 위해서 남경에 들어와 있던 비밀 공작원이었다.
"이마이라면 말할 수 있다."
고 하여 양 중장은 이요 대령을 이마이 소장에게 만나보도록 했던 것이다.
"하주국 총사령관은 일본과의 화평교섭의 역할을 맡도록 나설 열의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장개석 위원장과도 이미 이야기는 다 되어 있다. 하 사령관과 만나주기 바란다."
이 대령은 이마이 소장에게 하주국과의 비밀 회견을 이야기해 왔다.
이마이, 이 회담은 이마이 공관의 밀실에서 몇 번에 걸쳐 행해졌다.
총군사령부의 벚꽃이 지던 4월 하순경, 이야기는 일단 성립되었다. 이마이 소장이 단신 적지로 들어가 하주국 총사령관과 화평에 대해 합의하자는 총군의 의향이 결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령과 하 총사령관과의 연락은 좀처럼 닿지 않았다. 남경 정부군의 비밀 무전으로 하주국 사령부를 불러도 좀처럼 상대가 나오지 않는다. 이 대령의 얼굴에는 초조와 비관의 빛이 짙어갔다.
5월 중순, 이 대령은 마침내 뜻을 정하고 하 사령부에 연락하기 위해 출발하게 되었다. 그후 약 2주일 동안 총군 내부에서는 비판의 소리도 일어났다. 과연 이요 대령은 진짜 사자였을까, 속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마이 소장은 자신이 있었다.
반드시 연락이 올 것이라고.
6월 중순, 이 대령으로부터 무전 연락이 드디어 왔다.
"하주국 총사령은 총군 대표인 이마이 소장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장소는 하남성 동남부인 주가구 남쪽에 있는 신참주의 하주국 총사령부의 소재지. 회견 날짜는 7월 9일 오전 2시."
라는 것이다.
드디어 날짜가 임박하자 과연 하주국과 만나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로 총군 내부에서는 반대론도 강력히 대두했다. 총군은 중대한 정치적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일본의 패전은 필연적인 것이다. 회견해서 국면을 타개할 수 가 있다면 타개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토와 민족과 천황제, 정치, 군부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 이마이 소장은 직접 곤도 장교를 대동하고 회견 장소인 신참주를 향해 남경을 떠난 것은 7월 5일의 새벽이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방부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여기서 비행기를 수리하는데 하루를 소비했다. 그리고 6일 저녁 무렵, 간신히 하남성의 개봉에, 7일에는 비성으로 날아가 8일부터 트럭을 타고 주가구에 도착했다.
9일 아침, 드디어 피아 양 군의 보초선을 돌파하고 목적지인 신참주를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이마이 소장과 곤도 장교, 싱에이 통역은 군복을 벗고 중국옷으로 갈아입고서 완전한 중국인으로 변장했다.
일본군 보초선은 사전에 은밀한 연락을 해 두었기 때문에 간단히 통과되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드디어 적지인 것이다. 도중에 게릴라 부대라도 만나 습격을 당한다면 개죽음이다. 중대사명을 지닌 책임감과 혹시 혹시 어떨까 하는 불안이 확잡하게 뒤섞인다. 그러나 가도가도 사람 그림자가 하나 없다. 완전히 무인지대다.
걸어가기를 약 10킬로. 수레를 끌고 가는 초라한 중국 사람 하나를 만났다.
"신참주는 아직 멀었소?"
마차꾼을 찾아 길을 묻는다.
"아직 중국 이수로 10리는 되오. 수레를 타고 가면 어떻소?"
싱글벙글 웃으면서 마차꾼은 품 속에서 두 통의 종이쪽지를 꺼내보이며 이렇게 말한다.
내민 종이쪽지의 한 통은 일본군 점령지구 거주의 신분증명서이고 또 한통은 중국측 신분증명서다.
일본측 점령지구와 중국측을 왕래하며 장사를 하고 있는 재치 있는 놈이었다.
이거 안성마춤이라는 듯 그를 길 안내인으로 삼고 수레에 올라탔다. 가도가도 민가는 있으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약 10여 킬로를 갔을가. 갑자기 작은 숲 속에서 "정지!"하는 수하가 있었다. 적의 보초선이다.
"하주국 총사령관과 회견하기 위해 남경에서 온 일본군의 이마이 소장이다."
하고 대답했다.
미리 연락을 해 두었던지 보초는 겨냥했던 총을 옆구리에 끼더니 말없이 앞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신참주의 거리가 보인다. 거리의 정면 문에는 나팔을 든 위병이 20여명 줄지어 서 있다.
일행 네 사람이 그 앞에 이르자 지휘관인 듯한 장교가 차렷!하고 외친다. 그러자 20명 남짓한 위병이 일제히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나팔을 입에 가져갔다. 장교의 안내를 받아 사령부로 들어갔다.
때는 9일 정오였다.
사령부는 목욕물까지 준비된 조촐한 초가집으로 안내한다. 목욕이라고 해도 큰 함지에 따뜻한 물을 넣은 소박한 것이었으나 여행의 피로를 회복하라는 하 총사령관의 배려에 마음 깊이 따뜻한 것을 느낀다.
그날 오후 2시, 총사령관실에서 드디어 역사적인 회견이 있었다.
이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본과 중국과의 화평 교섭을 직접할 수 있을까. 어떻소?"
하주국이 말을 받았다.
"중‧일 간의 단독 화평 교섭은 할 수 없소. 일본은 연합국에 대해서 화평교섭을 해야 하오. 다만 본관은 연합국과 일본의 화평 교섭을 열기 위해 장개석 위원장에게 일본의 의향을 전하는데 인색하지는 않겠소. 일본의 화평 조건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오."
"물론, 본관은 일본의 정식 대표로 온 것은 아니오. 중국 측의 화평 조건을 알게 되면 중국 파견군 총사령부의 의향으로 본국 정부에 그 뜻을 보고하고 선처하고 싶소. 일본 측 화평 조건의 절대적 조건은 일본의 국토와 국민과 천황제를 포함하는 국체(國體)를 지키는 것이오. 남경정부, 만주국의 처리에 대해서 일본측은 최선의 열의로서 선처할 의향이오."
"거듭 말하지만 중국은 일본과의 단독 교섭에는 응할 수가 없소. 화평 조건은 이미 연합국 간에 결정되어 있소. 한국, 대만, 사할린, 지시마의 할양도 그 중의 하나요. 다만 천황제의 종속에 대해서는 장개석 위원장은 깊이 고려하고 있소. 장 위원장은 일본이 패전으로 멸망하기를 절대 희망하지 않소. 오히려 일본의 존재와 민주적인 발전을 바라햐 할 것으로 알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국체 보존은 될 수 있도록 중국측은 노력하고 있소. 일본 영토의 할양과 전력의 해체만은 이미 결정이 끝났소."
"본관은 일본의 정식 대표가 아니오. 오까무라 총사령관에게 보고하고 또 일본 정부에도 보고한 다음 다시 회견하고 싶소."
"이 회견에 대해서는 장개석 위원장에게 보고하겠소. 그런 다음 재 회견을 약속합시다."
회견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서 열렀다.
그러나 교섭은 쌍방이 공히 정식대표가 아니라는 한계와 비밀리 하는 예비 담판이라는 명분 때문에 서로의 속셈만을 탐색하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보고하겠다는 정도로 끝났다.
다음 10일 이른 아침, 다시 나팔대의 환송을 받으며 적진을 떠났다. 그리하여 남경에 돌아온 것은 14일 저녁 무렵이었다.
이마이, 하주국 회담의 내용은 곧 대본영에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본영 및 정부 당국의 회담은 전혀 까마득한 것이 되어 남경에는 소식이 없었고 보고는 헛수고가 되어 버렸다. 대본영이 깔아뭉개고 정부에 보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1945년 봄, 하주국의 밀사 이요와는 별도로 또 다른 한 사람의 밀사가 중경에서 상해로 숨어들어왔다.
밀사는 장숙평이라고 했다. 당시의 상해시장 주불해의 초청을 받고 있었다.
주불해와 중국 파견군 총사령부 사이에는 1944년이 저물 무렵부터 암암리에 화평에 대해서 어떤 양해가 성립되어 있었다. 총군을 대표해서 그 화평 공작을 맡고 있던 사람이 총군 총참모부장인 이마이 다께오 소장이었다.
이마이 소장과 진공박, 주불해, 정묵촌 등 남경정부 요인들 사이에는 그 무렵 종종 화평에 대한 대화가 교환되고 있었다. 그 결과, 중경과의 화평의 실마리를 발견하기 위한다는극비의 사명을 띠고 주불해가 상해시장, 정묵촌이 절강성장으로서 항주에 부임했다. 당시의 신문들은 주, 정 등 거물급 인사의 전출은 남경정부 내의 파벌항쟁의 희생이 된 주, 정의 좌천이라고 비평하고 있었다.
상해의 주불해는 중경과의 연락을 맡았다. 항주의 정묵촌은 강서성을 중심으로 일본과 대진하고 있던 제3전구의 사령장관 고축동 대장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암약했다.
장숙평이 상해로 잠복해 들어온 것도 주, 정의 공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다. 밀사 장숙평과 이마이 소장 사이에 주불해를 중개로 해서 비밀회견이 진척되었다.
7월 상순, 신참주에서 하주국 대장과 회견하고 화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이마이 소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중경과 화평을 성립시켜야지...... 일본의 국토, 국체,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는 화평 이외의 방법은 없다."
결사적인 각오였다.
이마이와 장의 밀회 보고는 주불해와 정묵촌을 통해 중겨과 고축동 사령부로 각각 무전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7월 하순, 「고축동, 이마이 회담」의 주선에 대해서는 항주의 정묵촌으로부터 이마이 소장에게 전해져 왔다.
회담 날짜는 8월 8일, 장소는 항주서남방 동로라는 정도의 의논이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고축동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있어서 회담 장소와 일시가 변경되었다. 8월 중순, 강서성 옥산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이러한 동안에 운명의 8월 15일, 일본은 정식으로 연합군에 대해 항복하고 말았다. 만사는 끝났다. 중국 파견군 총사령부의 공작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그후의 이마이 소장의 공작은 화평으로부터 항복 처리로 변했다.
패전이 결정된 8월 15일, 중국 파견군 사령부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충혈된 눈의 병사들, 창백한 장교들, 눈물짓고 있는 장군들의 얼굴이 총사령부의 현관을 들락거리고 있다.
오까무라 총사령관 방에는 고바야시 총참모장, 이마이 참모부장, 오가와, 혼다, 하시지마, 마에가와 참모 등 파견군 막료들이 오까무라 대장을 빙 둘러싸고 회의를 열고 있었다.
전선으로부터 지시를 요청하는 연락 전보가 연신 날아들었다. 파견군은 독자적인 항전을 계속해야 된다는 전보도 들어왔다.
어수선한 가운데 총사령부 수뇌부는 일본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처사로서 숙연히 투항, 무장해제 명에 복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날 오후 총사령부에 중경 제3전구 사령장관 고축동 대장의 군사가 나타났다. 일찌기 상해로 잠입해 들어와 있던 장숙평 장군과 당유임의 형인 당망 두 사람이었다.
장 장군이 휴대하고 온 고축동 대장의 총군에 대한 지시는 「즉시 오까무라 대장의 대리를 강서성 옥산으로 파견하라」는 내용이었다.
총군은 이마이 다께오 총참모부장을 오까무라 대장의 대리로서 파견하게 되었다. 이마이 총참모부장은 17일 아침 참모인 하시지마 요시오 중령, 마에가와 구니오 소령, 통력 기무라 다쓰오 등 세 사람을 대동하고 항주로 날아갔다.
옥산 비행장은 착률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다. 고축동과의 직접 연락도 안된다. 평소 고 대장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던 정묵촌도 옥산 회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이마이 소장은 정묵촌을 통해서 곧 고축동에게 연락을 했다. 그러나 고 대장으로부터 18일 낮에 이르러서야 옥산 비행장은 파괴되었으니 호남성 지강으로 가라는 연락이 있었다.
이마이 소장 일행은 18일 밤 늦게 상해로 돌아와서 밀사 장숙평과 회견했다. 장 장군에게는 벌써 장개석 위원장으로부터 오까무라 사령관 앞으로 지시가 와 있었다.
오까무라 대장의 대표를 호남성 지강으로 파견하라. 21일 오전 10시(중경시간) 상덕(동정호 서안) 상공으로 비행기에 빨간 풍향기를 달고 나타나라는 것이었다.
오까무라 총사령관은 수석 대표에 이마이 다께오 소장, 수행원으로 하시지마 요시오 중령, 마에가와 구니오 소령, 통역에 기무라 다쓰오를 각각 지명했다. 일행은 20일 아침, 총사령관 전용기인 MC형 수송기로 상해를 출발, 한구로 향했다.
21일 오전 10시, 빨간 풍향기를 단 MC형 수송기는 지정된 시간에 상덕 상공에 나타났다. 그러자 P34형 전투기 6대가 갑자기 나타나 대표기의 전후, 좌우, 상하를 둘러쌌다. 적기의 호위로 날으기를 한 시간 반, 산간에 있는 지강 비행장에 착륙했다.
대표일행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미, 중국의 신문사, 통신사의 카메라 플래쉬가 일제히 대표에게 향해졌다.
그러자 진이라고 자칭하는 두 사람의 소령이 사진반을 해치면서 나타나 대표 일행을 맞이했다. 그 중 한 사람의 진 소령은 이마이 소장과 구면인 사이다.
이마이 소장이 북경 대사관부 무관 보자관 당시 신문기자로 있던 사람이다.(1963년이라고 해서 연도는 뺐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표 일행은 두 대의 찦차에 실려 전후에 경호를 받으며 군용 바라크 숙사에 도착했다. 두 진 소령이 접대역이었는데 네 사람은 보이가 딸린 따로따로의 방, 침대 그리고 새 침구가 주어졌다. 목욕실도 서둘러 만들어져 있었다. 식사도 특별한 배려가 되어 있었고 헌병이 숙사를 경비해 주고 있었다.
출처: 디펜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