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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 힙합에서 보는 한국 청소년과 교육 현실.hwp
18-08 힙합에서 보는 한국 청소년과 교육 현실
교육평론 원고
안재오
1. 서론 - Mnet 방송의 고등래퍼 프로그램
2018년 2월에서 4월까지 방영된 음악 전문 채널 Mnet TV에서는 “고등래퍼 2” 란 방송을 했다. 이는 10대들의 힙합 실력 대항전으로서 비단 10대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 대회에서 1위를 한 가수는 김하온이고 2위는 배연서 3위는 이병재였다. 이 글에서 필자는 주로 이병재의 랩 가사를 중심으로 한국 고교생들의 삶과 꿈 그리고 당면한 문제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병재의 랩공연이 어떠했는지를 알기 위해 어떤 시청자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매주 금요일 고등학생들이 펼치는
랩 배틀 고등래퍼2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 열기는 식지 않고
더 가열되고 있는데요.
어제 고등래퍼2에서는 참가들의
세미 파이널 무대가 있었습니다.
10명의 래퍼들이 있었지만
이날 무대는 이병재가 압도했는데요.
이날 자신의 삶을 주제로 만든
‘탓’ 이라는 무대를 꾸몄습니다.
‘탓’을 통해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자격지심을 느끼는 듯한
가사로 관객과 심사위원들 모두에게
울컥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무대를 마친 이병재 역시
무대에서 울뻔했다고 말할 만큼
본인도 만족한 자신의 무대였는데요.
다른 심사위원들도 이병재가
부른 무대를 보고 무언가 저릿하고
가슴 아픈 무대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병재는 쇼미더머니6에서
우울했던 자신의 인생을 랩으로
절절하게 표현했던 우원재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요.
[출처] 포스트 우원재, 이병재 '탓' 무대로 관객을 홀리다! 작성자 Deanie 네이버 블로그 TrenDean's Life에서
2. 본론 : 우울한 고교생의 자화상
고등래퍼 2의 세미 파이널 전에서 관객들을 울리고 본인도 울뻔했던 이병재의 곡 <탓>을 통해서 한국의 고교생들의 기본 정서인 “우울”이 나오는 출처를 한번 분석해 보려한다. 공부 지옥, 시험 지옥을 살아가는 고등학생들의 무거운
이병재, 일명 빈첸은 인천에서 태어난 고교 중퇴 래퍼이다. 그가 왜 중퇴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학교에서 재미를 못 느끼고 성적 경쟁과 학벌주의 탓에 개성과 자의식이 강한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학교 중퇴를 고려해 볼 것이다. 한국의 교육은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힘이 엄청나게 센 거인이자 노상강도였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언덕에 살면서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상대로 강도질을 일삼았다. 특히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는데,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를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그만큼 잘라내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침대에는 침대의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어떤 나그네도 침대의 길이에 딱 들어맞을 수 없었고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림
한국의 교육사정은 청소년들이 학교 공부 외의 것에는 거의 아무 것도 할수 없게 만든다.
“삼일 회계 법인”의 사장으로 있는 어떤 필자의 고교 동창생 말을 따르면 그 회사의 컴퓨터-인터넷 보안 책임자를 뽑을 때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해킹에만 몰두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데 한국에서는 모두 수능 시험 준비를 한다고 해킹 연구만 할 수는 없다고 한다. 즉 학교 공부 안하고 컴퓨터에만 몰두하는 아이들은 결코 좋은 대학에 갈 수 없고 따라서 컴퓨터=인터넷 해커를 양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한국 교육의 실상이다. 모든 게 획일화, 평균화되어야 한다. 조금만 자기의 특이한 취미나 재능을 살릴 수 없는 구조이다. 뭔가 튀는 인재는 다 그 팔과 다리가 잘려서 나온다. 모두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학교에 들어가서 (정신적) 죽음을 당하고 나온다. 창의성과 도덕성 그리고 개성은 죽어서 나오는 곳이 한국의 교육 시장이다.
한국은 청소년들이 학교 공부 잘하고 시험 잘 치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자유를 주지 않는다.
이는 또한 실업계, 예체능계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시험 중심의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유명한 예고의 경우 입학시험이 소숫점 2자리까지 성적을 매긴다. 여중도 마찬가지 이다.
이렇게 학생들을 모조리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위에 누이다 보니 결국 나라의 꼴이 엉망이 된다. 지식과 기술의 진보가 없게 되고 부정 부패만 들끓게 된다. 지도층들의 갑질로 항상 피곤하다. VIP들은 거의 감방에 간다. 전직 대통령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자살한다. 헬 조선이다. 출산률 감소로 망한다.
특히나 성적 상위 10% 외에는 나머지 90% 모두가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구조 하에서는 - 소위 헬 조선 - 이런 현실을 미리 아는 청소년들은 누구나 정규적 교육이나 학업 진로 등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설령 청소년이 학벌주의 현실을 나름대로 긍정하고 열심히 공부(열공) 하려고 해도 사교육 없이는 10%에 들기는 거의 불가능하니 학교 적응자나 부적응자나 모두 비슷한 상태에 직면한다.
따라서 필자의 관점에서는 이병재가 자퇴한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퇴하지 않는 아이들이 더 큰 문제이다. 그들은 문제를 모르고 있다.
근래에 이병재를 비롯하여 학업을 중퇴하고 음악으로 뛰어드는 아이들이 많은 것은 학벌주의, 강압적, 획일적인 성적 경쟁의 현실에서 나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사실 필자가 운영하는 교습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 나곤한다. 댄스, 드럼 혹은 힙합 쪽으로 한다고 학교 공부를 등한시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부분 실패적이다. 공부 진로가 힘든 만큼 예능 쪽도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이병재의 경우 이런 학업 이탈자 가운데서도 재능이 뛰어난 경우이다. 그는 중학교 때에는 권투를 하여 전국 챔피언이 된 적도 있었다. 가정 환경이 열악하고 성적-강압적인 학교 생활에 혐오감을 느낀 청소년들이 음악이나 다른 재능이 있으면 바로 거기서 승부를 보려고 한다. 이병재도 그런 케이스이다.
그런 면에서 힙합 장르는 집안 가난하고 재능있는 청소년들의 해방구라고 할 수 있다. 또 주변에는 힙합이나 가요 등으로 일찍부터 성공한 아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힙합과 랩으로 진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힙합은 아이돌 교육과는 달리 대형 기획사의 조련이나 음악적인 훈련 - 악기 연주 등 - 이 필요없는 관계로 배고픈 자들의 음악 hungry music 라고 할 수 있다. 힙합의 발상지인 미국부터가 그랬었다.
3. 결론 - 이병재의 “탓” - 이 시대의 실존적인 자기 투사(投射)
한국의 지옥적인 교육 사정과 그 속에서 숨막히는 청년들은 탈학교라는 모험을 감행한다. 필자는 이병재의 랩송 “탓”을 분석하면서 여기서 하이데거와 싸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냄새를 맡는다. 여기서는 주로 가사를 통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그의 음악성은 다른 곳에서 이야기 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 Sein ud Zeit>에서 인간의 실존을 “피투성적 기투”라고 규정한다. Dasein ist geworfener Entwurf. 즉 인간은 항상 어떤 기분이나 상황에 던져 졌다는 것이고 또한 그런 던져져 있음 하에서 또한 자신을 던진다. 이게 “피투성적 기투” geworfener Entwurf 이다.
탓 (이병재 작사)
난 이 늪에 있어 난 이 늪에 있어
모두가 날 내려다보는 이 늪에 있어
넌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랬던 마음
아직 선명히 남아있어 등 돌리던 날
나 혼자 늪에 있어 혼자 늪에 있어
저 래퍼들은 날 비웃고 하늘 날고 있어
난 알고 있어 애초에 알고 있었어
흐려져가는 시야를 탓하고 있어
난 이 늪에 있어 난 이 늪에 있어
아주 더럽고도 추잡한 이 늪에 있어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떨어져 멀리
보이지도 않니 손에 미세한 떨림
넌 변해있어 많이 변해있어
나란 그늘을 치우니 안색이 밝아졌어
위로 혹은 악연으로 포장해낸 것들이
내 탓이라고 말해줘 제발
피해망상 조울증
다 낫기는 무슨 (방에서 팔 긋는) 날 위해
약값을 줘봐 제발
사람을 대하는 게 항상 뭣 같아도
내 친구를 잘못 만났다 생각하진 않아
가끔은 그립네 옥상 아니면 밤에 놀이터
근데 딱히 인천에 걔네가 보고 싶진 않아
내가 돈을 못 버는 탓 우리 엄마가 고생하는 건
알바가 귀찮아서 엄마의 가게에 가는
빈도를 줄였던 건
랩도 못 하는 래퍼들이 100단위를 버는 게
너무 배알이 꼴리고 억울해서
확실히 압살하고자 아빠 손 벌려 잡은 지하방에서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난 기대치를 두 배로 올려
그래야 상실감이 거대해지니까
그래야 사람이 더 초라해지니까
그래야 내가 정말 간절해지니까
아니 얼마나 더 간절해야 합니까
기도 헌금은 누굴 위한 겁니까
성당에 가라는 할아버지 말을
웃어넘기고 대충 끄덕거린 나는 불효자 되는 겁니까?
모르겠네 사람들이 미워 보인 탓
몰라 내가 이 노래를 불러버린 탓
몰라 내가 한심하고 돈이 없는 탓
몰라 내가 여러 기회들을 날린 탓
모르겠네 사람들이 미워 보인 탓
몰라 내가 이 노래를 불러버린 탓
몰라 내가 한심하고 돈이 없는 탓
몰라 내가 여러 기회들을 날린 탓
한국 애들 종특
평가, 유행, 아니면 지 주관밖에
일이라면 씹고 보는 탓
그런 놈이 되기 싫어 괜히 맞는 말을 했다가
이상한 놈으로 낙인이 찍힌 탓
(네가 병신이라 칭한 애도 너를 병신이라 해)
어디를 봐도 모순들만 넘쳐나지 그래
그 자식은 난독증이었는데
아빠는 되려 날 울렸어 그래 내 탓이지 그래
행복은 개뿔 불운도 내 탓이니
벌고서 웃자 그전까지는 척에서 그치니
슬퍼지잖아 내 상황이 싹 다 그저
주변에 대입해 그런진 몰라도 볼수록 뭣같이 느껴져서
내가 날 가둬둔 상황이 위안이 돼 아직 말해줄 게 많아서
모르겠네 사람들이 미워 보인 탓
몰라 내가 이 노래를 불러버린 탓
몰라 내가 한심하고 돈이 없는 탓
몰라 내가 여러 기회들을 날린 탓
모르겠네 사람들이 미워 보인 탓
몰라 내가 이 노래를 불러버린 탓
몰라 내가 한심하고 돈이 없는 탓
몰라 내가 여러 기회들을 날린 탓
마르틴 하이데거 1889.9.26 ~ 1976.5.26 [Martin Heidegger]
요약 : 독일의 실존철학자. 주요 저서는 《존재와 시간》이다. 그가 실존사상의 대표자로 간주된 것은, 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 부분 때문이다. 불안·무(無)·죽음·양심·결의·퇴락(頹落) 등 실존에 관계되는 여러 양태가 매우 조직적·포괄적으로 논술되었다. 주요저서 《존재와 시간》(1927),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1929), 《휴머니즘에 관하여》(1947), 《숲 속의 길》(1950), 《니체》(1961)
이 시의 저자 이병재 학생 혹은 자퇴생은 상당히 똑똑한 학생이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실상 모두가 늪에 빠져 있다. 즉 공부 지옥의 늪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인식하는 학생들은 극소수라는 점이다. 학벌주의에 잘 적응하는 학생들도 못 적응하는 학생들도 모두 늪에 빠져 있다고 봐야 한다. 학벌주의에 부적응자들은 결국 하층민으로 변하게 되고 적응자들은 상류층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 상류층이 창조성과 도덕성을 결여하기 때문에 사회를 더욱 어둡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병재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회는 산소가 부족하다. 여기서 산소는 자유와 창조성 그리고 도덕성 등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으로서의 인간의 고유성을 말한다.
필자의 경우 무려 지금부터 45년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 때 - 고3 - 필자는 학벌주의 부적응자였고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필자의 정신이 잘못이 아니라 상황이 늪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17년이 지난 후인 독일 유학시절이었
다. 그러나 요즘은 청소년들이 부대 상황의 오류라는 것을 좀 빨리 알아챈다. 이는 신문 방송을 통해서 학교의 모순이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보편적인 늪의 의미에 작자의 특이한 상황이 덧붙여 진다. 즉 애인이나 친구의 이별이다. 그리고 랩을 하는 동료들에 대한 원망이나 경쟁의식도 보인다. 아마도 이런 이유는 작자의 불우한 상황 탓인 듯하다.
학벌주의라는 (사악한)시대정신을 떠나게 되면 그 개체는 당연히 주면으로부터 소외가 된다. 즉 가정으로부터도 갈등이나 증오 등이 생기고 여자 친구로부터도 그렇게 된다. 물론 래퍼가 인기가 생기고 돈을 벌게 되면 도리어 주변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소외되고 불편하게 된다. 정규적인 학창시정을 이탈하여 자퇴를 하게 되면 자연이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되고 주변의 관계마저 부패되기 쉽다. 한국에서는 “단선적 학교제도 (single ladder system)” 라는 정규적인 코스(normal course)를 벗어나면 사회적인 생존이 상당히 어렵다.
그래도 요새는 음악 때문에 사회적 이탈자들도 약간 더 자유롭다. 사실 이런 사회적 이탈 현상에서 K-POP 과 방탄소년단 같은 돌풍이 일어났다.
한국 사회는 그러나 여전히 차이와 다름을 잘못으로 보는 경직된 사회이다. 사실 이병재 같은 학벌주의 이탈자들이 아놀드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에 속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국 사회는 창조적 소수들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해체하고 있다.
탓
난 이 늪에 있어 난 이 늪에 있어
모두가 날 내려다보는 이 늪에 있어
넌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랬던 마음
아직 선명히 남아있어 등 돌리던 날
나 혼자 늪에 있어 혼자 늪에 있어
저 래퍼들은 날 비웃고 하늘 날고 있어
난 알고 있어 애초에 알고 있었어
흐려져가는 시야를 탓하고 있어
난 이 늪에 있어 난 이 늪에 있어
아주 더럽고도 추잡한 이 늪에 있어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떨어져 멀리
보이지도 않니 손에 미세한 떨림
넌 변해있어 많이 변해있어
나란 그늘을 치우니 안색이 밝아졌어
학벌주의라는 정규적인 코스를 벗어난 개인들에게 사회는 - 주변의 친구, 애인들 포함 -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자기 탓으로 돌린다. 아직 성찰이 부족한 탓이고 어린 나이를 고려할 때 당연한 현상이다. 이런 주위와의 불일치가 피해망상이나 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런 증세가 심해지면 드디어 자해를 하기에 이르런다. “방에서 팔 긋는 나”로 된다.
여기서 하나 경종은 이런 팔긋기 현상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예측이다. 필자는 주변에서 벌써 그런 사례를 체험했다. 설마 자살소동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면도날 등으로 팔목에 피를 내는 행동들이 자주 보일 수 있다.
빨리 필자가 주장하는 자유교육- 일학습 병진제, 복선적 학제 - 등을 실현하지 않으면 비극이 어디까지 번질지 모른다. 학벌주의 교육은 어린 영혼들을 칼로 베고 찌른다. 아직은 이병재같은 예민한 천재들의 선구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점점 이 추세가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학습은 놀이와 같아야 한다“, ”강제로 배운 것은 혼에 남아 있지 않다“ 라는 플라톤의 자유주의 교육 여건이 이루어져야 한다.
중국에서 유래한 학벌주의, 한국은 고려 광종의 과거제도 도입과 더불어 시작되고 무려 1000 여년 이상 지속되어온 학벌주의는 이렇게 현재 진행형으로 청소년들을 정신적으로 죽이고 있는 것이다.
학벌주의의 억압이 얼마나 심하고 또 이를 도피하려는 개인은 얼마나 큰 자기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지 작중화자는 스스로를 환자로 치부하고 급기야는 자살의 예행연습 - 칼로 팔목 베기 - 을 한다. 이런 일이 한번이 아니라 몇 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자해행위를 이해해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방에서 팔 긋는) 날 위해 약값을 줘봐 제발”
결국 학벌주의 사회 이탈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고통은 이전의 애인이나 친구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온다. 이는 어찌 보면 선각자들이 져야할 희생이라고 보인다.
위로 혹은 악연으로 포장해낸 것들이
내 탓이라고 말해줘 제발
피해망상 조울증
다 낫기는 무슨 (방에서 팔 긋는) 날 위해
약값을 줘봐 제발
사람을 대하는 게 항상 뭣 같아도
내 친구를 잘못 만났다 생각하진 않아
가끔은 그립네 옥상 아니면 밤에 놀이터
근데 딱히 인천에 걔네가 보고 싶진 않아
그러나 학벌주의 이탈자들 사이에도 - 청년 래퍼들 - 경쟁과 다툼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도 불공정이 있고 질시와 자괴(自愧)감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드러내고 있다. 랩으로 돈을 벌어 가난도 벗어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싶은 작중화자는 그러기 위히서 우선은 부모에게 더 큰 부양을 바란다. 즉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알바 등을 하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하기 위해서 돈벌이도 하지 않고 부모의 도움을 받는다. 아마 그래서 지하실이나마 자기 방을 - 아빠의 도움으로 - 구하고 음악에 매진한다. 가라는 학교는 때려치우고 힙합으로 돈 벌어 온다고 했지만 우선 연습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 이럴 경우 실패하면 더 초라해진다.
내가 돈을 못 버는 탓 우리 엄마가 고생하는 건
알바가 귀찮아서 엄마의 가게에 가는
빈도를 줄였던 건
랩도 못 하는 래퍼들이 100단위를 버는 게
너무 배알이 꼴리고 억울해서
확실히 압살하고자 아빠 손 벌려 잡은 지하방에서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난 기대치를 두 배로 올려
그래야 상실감이 거대해지니까
그래야 사람이 더 초라해지니까
그래야 내가 정말 간절해지니까
이런 복잡한 상황을 작자는 “탓”이란 고유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 탓은 주어진 여건에 무조건 순응해서 살수는 없고 자기식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자유 본질의 댓가이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 받았다” 라는 말을 했는데 이병재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그는 많은 동급생들이 학벌주의의 감옥에서도 만족하며 살고 있을 때 이를 감옥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한다. 그는 영화 빠삐옹처럼 절해고도의 감옥에서 빠져 나왔으나 아직 천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거친 풍랑과 싸우고 기근, 갈증 등과도 싸워야 한다. 이런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의 음악적 투쟁에 축복을 빈다.
아니 얼마나 더 간절해야 합니까
기도 헌금은 누굴 위한 겁니까
성당에 가라는 할아버지 말을
웃어넘기고 대충 끄덕거린 나는 불효자 되는 겁니까?
모르겠네 사람들이 미워 보인 탓
몰라 내가 이 노래를 불러버린 탓
몰라 내가 한심하고 돈이 없는 탓
몰라 내가 여러 기회들을 날린 탓
모르겠네 사람들이 미워 보인 탓
몰라 내가 이 노래를 불러버린 탓
몰라 내가 한심하고 돈이 없는 탓
몰라 내가 여러 기회들을 날린 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