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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시 홍윤숙
12월의 시(詩)
내가 집을 떠날 때
집은 여명(黎明) 속에 빛나고
포도밭은 이슬에 젖어 있었다
바람은 숲 속에
색색의 꽃을 피우고
밤은 은밀히 새벽을 차리는
별들의 찬란한 식탁(食卓)이었다
나는 철없이 노래하고 마시고 잠들었다
시간은 아름다운 칼을 갈아
곳곳에 복병(伏兵)을 숨겨 놓고
한 밤을 밝히던 황금의 촛대와
삼천(三千)의 꽃송이를 쓰러뜨렸다
십이월(十二月), 한랭(寒冷)한 제국(帝國)에
쓸쓸히 운명하는 수만의 병사(兵士)
사살(射殺)된 여름
죽은 미래(未來)들
마지막 전선이 무너지는데
누구인가 그 속에 홀로
무너진 제국(帝國)의 밤을 지키고
죽은 여름을 다스리는 이
마지막 남은 이
침묵의 나그네
겨울의 주인이신
맨발의 분
내가 아직은 만나보지 못한 분
문 밖에 서신 분
12월, 한랭(寒冷)한 제국(帝國)을
다스리시는 분
하지제, 문지사, 1978
가고 싶다 폐허로 변한... 홍윤숙
가고 싶다 폐허(廢墟)로 변한...
원제 : 가고 싶다 폐허(廢墟)로 변한 거리일지라도
가고 싶다
폐허(廢墟)로 변한 거리일지라도
이제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황막(荒漠)한 폐도(廢都)일지라도
그 곳은 태양(太陽)과 꽃들이 뜨겁게 포옹하는
원시(原始)의 수풀
꿈결에도 사무쳐 불러보는 목숨의 거리기에
명동(明洞), 충무로(忠武路), 아니
그러한 호사스런 고장이 아니라
차라리 젊은 미망인(未亡人)처럼
애끓는 길이 있다
장충단(獎忠壇) 고개 넘어 성벽(城壁) 쌓인 산(山)길이며
한남동(漢南洞) 넓은 신작로(新作路)
태양이 부서지는 뜨거운 열사(熱砂)엔
노을이 꽃 피고 어둠이 오고
눈 먼 노파(老婆)의 걸음걸이처럼
나릇이 계절(季節)이 걸어오면
마을 한가운데 우람히 뻗어 오른
플라타너스 우거진 가지에도 조락(凋落)은 온다
바람 부는 날엔 거리의 전선(電線)이
부엉이 울음 울고
소스라쳐 높이 솟은 가로수(街路樹) 가지엔
잿빛 작은 새들이 까맣게 모여 오고
그러면 나는 얕은 창(窓)가에 턱을 고이고
긴 세월(歲月)을 손꼽아 헤이며
조용조용 지나간 이름들을 불러보곤 하였다
한여름 떼구름 몰아치는 처절한 포화(砲火)에
푸른 평화(平和)는 땅 위에 깨어지고
몇 번인가 까무러치듯 숨 죽던
서울의 하늘을
끝내 지키던 처하(凄夏)의 기억(記憶)
그것도 이젠 아득히 먼 옛일 같은데
오늘도 전화(戰火)에 젖은 북(北)쪽 하늘엔
환난(患難)의 별들이 솟아오른다
이제사 내 낡고 기울어진 지붕이며 썩은 돌담
오랜 홍솔나무 기둥들
그 모든 것이 포탄(砲彈)에 흔적 없이
부서져 없어졌다 한들
더는 슬퍼하지 않으리라
오직 그 곳에 한 조각
타다 남은 기왓장이건
한 포기 눈물 같은 꽃이 피어
가난한 주인(主人)을 맞아 준다면
폐허(廢墟)에 토옥(土屋)을 세우고 씨를 뿌려
다시는 수난(受難) 없이 살고 싶음이여
아, 한 번은 돌아가고 싶다
폐허(廢墟)로 변한 거리일지라도
이제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황막(荒漠)한 폐도(廢都)일지라도
그 곳은 언제나 그리움과 노래와 싸움이 있어
뜨겁게 가슴 태우는 목숨의 거리기에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가을의 기도 홍윤숙
가을의 기도(祈禱)&
나의 글이
당신의 가슴을 뚫으는
화살이 되온다면
남은 한 세상
못다한 말들 솔잎 같은 말들
당신의 가슴에 쓰고 또 쓰리다
촛불 한 자루
마지막 불을 켜드는 마음
나에게
살아 있는 의미(意味)를 알게 하소서
목숨으로 비롯한 목숨의 환희(歡喜)
새삼 황홀한 낙엽(落葉)의 아름다움을
눈으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온몸의 핏줄로서
저리도록 느끼옵던 그 무량(無量)한 감읍(感泣)
이제는 다만 적멸(寂滅)한 자비(慈悲)의
미소(微笑)로 하여
희미한 길을 밝혀 주시는
당신은 나의 마지막 지혜(智慧)
어느 날 회진(恢盡)할 귀로(歸路)에
깜박이는 등불
사철의 바람과 낙조(落照)에 묻어 온
갈피없는 소망과 미운 마음들
단풍처럼 물들인 죄(罪)많은 꿈도
이제금 백포폐립(白布弊笠)에 손 모으는
수도승(修道僧)의 마음으로 참회합니다
눈물보다 어려운 웃음의 저의(底意)
짐짓 바다만한 슬픔을
한 입 엷은 미소(微笑)에 담는
고독한 아침의 차운 분장(粉粧)도
소심한 여인(女人)의 허세(虛勢)인 것을
눈물이라니 그리움이라니
지나온 시간(時間)들은 너무도 허전한
시절(時節)들이매
짤리운 나무의 생생한 연륜(年輪)을
다시 새기듯
흰 원고지(原稿紙) 까맣게 먹물 풀어
쓰고 또 써도 풀리지 않는
목마름이여
풀게 하소서
나에게 이 타오르는 목마름을
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의미(意味)를 알게 하시고
한 방울 이슬 같은 해탈(解脫)의 문(門)을
열어 주소서
야윈 어깨 위에 야윈 어깨 위에
한 장 가랑잎같은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풍차, 신흥출판사, 1964
가을 집짓기 홍윤숙
가을 집짓기
돌아가야지
전나무 그늘에 한 겹씩 엷어지고
국화꽃 한두 송이 바람을 물들이면
흩어졌던 영혼의 양떼 모아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서 한생애 버려뒀던 빈 집을 고쳐야지
수십 년 누적된 병인을 찾아
무너진 담을 쌓고 창을 바르고
상한 가지 다독여 등불 앞에 앉히면
만월처럼 따뜻한 밤이 오고
내 생애 망가진 부분들이
수묵으로 떠오른다
단비처럼 그 위에 내리는 쓸쓸한 평화
한때는 부서지는 열기로 날을 지새고
이제는 수리하는 노고로 밤을 밝히는
가을은 꿈도 없이 깊은 잠의
평안으로 온다
따뜻하게 손을 잡는 이별로 온다
사는 법, 열화당, 1983
겨울, 사랑의 일기 홍윤숙
겨울, 사랑의 일기(日記)
1
새벽 다섯 시
굽은 등어리에 밤새
돋아 내린 여린 실뿌리들
엉키어 깊은 잠에 묻혀 있는데
나는 뿌리를 자르는 결단(決斷)의 낫을 들고
일어나야 한다
한밤을 배회하며
복수의 칼을 갈던 한 무리의 바람이
싸늘한 비수(匕首)를 들이대는
캄캄한 적지(敵地)에서
숨은 복병(伏兵)을 끌어내듯
가스를 킨다
한 그릇의 쌀을 씻어
냄비에 얹고
한 토막 생선의 뼈를 발라
하루의 도시락의 영양(營養)을 가늠하는
침묵의 반복(反復)
그 나날의
사랑의
아픈 의무(義務)여
어린 아들의
예지(叡智)처럼 빛나는
겨울 하늘에
혈관마다 저린
손을 담그면
사랑은
눈 속에 더욱 푸른
한대식물(寒帶植物)
어디선가 샘 솟는
눈물이 된다
□ 2
황량한 겨울이 와서
한 자쯤 눈이 내려
길이 묻힐 때
바람이 습관처럼
거리를 부랑(浮浪)하고
벗은 지붕들이
숨 죽여 이마를 마주 댈 때
어디선가
사랑이
만조(滿潮)의 배를 타고
눈길을 온다
와서
아는 이 없는 겨울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저 혼자 충만한다
쓸쓸한 겨울 오지(奧地)
겨울 온실에
푸른 식물(植物)들이 모여 사는 집
사랑은
눈 속에 더욱 눈부신
햇살이 되고
비애(悲哀)는
말갛게 머리 빗고
나들이 가고
새하얀 창가에
금빛 새 한 마리
날아 오른다
밤이면
별들이 수런수런
뜰에 모였다
바람도 과일을 깎으며
함께 웃었다
십리(十里) 밖
먼 여항(閭巷)에서도
창마다 밝은 연꽃 등(燈)
물에 어리고
사철나무 푸른 그늘
뜰에 지는 집
피리 불던 아이들
고운 잠 들고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읽으시던 어머니
깜박 조으시면
벽의 산수화(山水畵) 혼자
밤을 지켰다
탄피(彈皮) 뿌리는
겨울비 속
캄캄한 12월(月)의 표류(漂流)를 타고
마지막 차로 돌아가는 집
사랑은
내가 내 생애(生涯)를 걸어서
도착하는 집이다
하지제, 문지사, 1978
겨울 나무 홍윤숙
겨울 나무
떨어버리는가
마지막 한 잎을
한 잎의 아픈 미련(未練)까지를
무지(無知)와
수치로
물들었던 여름
상(傷)한 여름의 기억들을
병든 사랑의 환부(患部)를
나무여
그리도 찬란히 베어내는가
은빛 바람의 칼로 베어내는가
네가 말하는 혼신(渾身)의 말
땅 위의 윤리(倫理)를
아름다운 상실을
나무여
내가 배운다
겨울이 되어
겨울의 견고한 나목(裸木)이 되어
다시 우러르는 하늘
그 끝없이 빈 충만(充滿)의 그릇
차고 투명한 유리의 지혜
네가 꾸미는
이리도 고독한 희열(喜悅)의 잔치에
내가 섰노라
겨울 나무여
하지제, 문지사, 1978
겨울 포플러 홍윤숙
겨울 포플러
나는 몰라
한겨울 얼어붙은 눈밭에 서서
내가 왜 한 그루 포플러로 변신하는지
내 나이 스무 살 적 여린 가지에
분노처럼 돋아나던 푸른 잎사귀
바람에 귀앓던 수만 개 잎사귀로 피어나는지
흥건히 아랫도리 눈밭에 빠뜨린 채
침몰하는 도시의 겨울 일각(一角)
가슴 목 등허리 난타하고
난타하고 등 돌리고 철수하는 바람
바람의 완강한 목덜미 보며
내가 왜 끝내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모든 집들의 창은 닫히고
닫힌 창 안으로 숨들 죽이고
눈물도 마른 잠에 혼불 끄는데
나는 왜 끝내 겨울 눈밭에
허벅지 빠뜨리고 돌아가지 못하는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사는 법, 열화당, 1983
그림자 홍윤숙
그림자
길을 가다가
문득 돌아보면
그림자 하나
기척도 없이 따라온다
겁 먹은 듯
여윈 어깨 힘 없이 웅크리고
불빛 아래
무심코 보면
어두운 얼굴 수심에 쌓여
보이지 않고
적막하여 아는 척 손 흔들면
고개 돌리고 말이 없다
슬픈 나의 동행(同行)
오랜 벗이여
결코 말하지 않는 인종(忍從)이여
생각에 골몰하여
오던 길 돌아서면
어느듯 내 앞에
나보다 앞장 서고
서서, 근심스러히
나를 기다린다
머리 기우뚱 숙이고
말없이 기다린다
어진 나의 동행(同行)
하지제, 문지사, 1978
꽃들의 생애 홍윤숙
꽃들의 생애(生涯)
□ 1
바람이 종일
산 하나를 헐어내고 있다
쉬엄쉬엄
숲을 찍어내고 있다
여기 저기 단명(短命)한 꽃들이
아름다운 소문을 피워 놓고
돌아오지 않는 아침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다
아직은 이별을 모르는
행복한 눈매들이 웃고 있다
이제 곧 종이 울리고
커다란 손이
그들의 눈을 감길 것이다
□ 2
아무도 그 손의 임자를
본 적이 없다
아침에 분홍빛 장미를
축복 속에 피워놓고
저녁에 지체없이 걷어 가는 손
꽃들은 이유없이 태어나
유예없이 간다
눈물도 사치한 모일(暮日)이 오고
순명(順命)의 아픈 지혜
가시로 꽂히는 저녁
더러 맑은 혼(魂)들이 무리를 빠져나와
차디찬 이슬로 맺히기도 하지만
이내 작은 바람을 놓아
허실(虛實)의 꿈을 일깨운다
참 이상한 손
손의 임자다
□ 3
노을이 저녁 뜰에
샛빨간 유서를 뿌리고 돌아간다
꽃들이 아름다운 최후를 진술(陳述)하고
두꺼운 책장을 하나씩 닫는다
뜰은 남은 이야기를 지우며
커다란 손으로 묵화(墨畵)를 친다
혼자 사는 사람의
정결한 눈매로 묵화(墨畵)를 친다
슬프지도 않은 비극(悲劇)이
날마다 반복되고
살아남은 꽃들이
무서움도 없이 어둠 속에 웃는다
누가 저 어둠 뒤에 숨어
꽃들의 희망을 흙으로 덮고
다시 하얗게 바랜 새벽의 시체를
널고 있는가
참담한 것은
아무도 그 손의 집행(執行)을
의구(疑懼)하지 않는 일이다
아침이면 말갛게
꽃들의 죽음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하지제, 문지사, 1978
낙엽의 노래 홍윤숙
낙엽(落葉)의 노래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달빛도 기울어진 산(山)마루에
낙엽(落葉)이 우수수 흩어지는데
산(山)을 넘어 사라지는 너의 긴 그림자
슬픈 그림자를 내 잊지 않으마
언젠가 그 밤도 오늘밤과 똑같은
달밤이었다
바람이 불고 낙엽(落葉)이 흩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길을 잃은 밤
너는 별을 가리켜 영원(永遠)을 말하고
나는 검은 머리 베어 목숨처럼 바친
그리움이 있었다 노래가 있었다
몇 해가 지났나
자벌레처럼 싫증난 너의 찌푸린 이맛살은
또 하나의 하늘을 찾아 거침없이
떠나는 것이었고
나는 나대로 송피(松皮)처럼 무딘 껍질 밑에
무수한 혈흔(血痕)을 남겨야 할 아픔에
견디었다
오늘밤 이제 온전히 달이 기울고
아침이 밝기 전에 가야 한다는 너
우리들의 부르던 노래 사랑하던 노래를
다시 한 번 부르자
휘뿌여히 아침이 다가오는 소리
닭이 울면 이 밤도 사라지려니
어서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
너와 나 낙엽(落葉)을 밟으며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낙조 홍윤숙
낙조(落照)&
나는 오늘
강(江)가에 뒹구는 여름 낙조(落照)의
쓸쓸한 얼굴을 보고 왔다.
초췌(憔悴)한 모습 여윈 어깨에
부숴질 듯 타버린 저녁 해를 걸치고
아직 피지 않은 강(江)뚝의 코스모스 행렬(行列)을
커다란 눈으로 굽어보고 있었다.
짙푸른 청록(靑綠)의 젊은 설레임을
꿈인양 잠잠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속에 누군가 숨어 함께 보고 있었다.
우리가 지새던 한낮의 강(江)을
강(江)변의 사념(思念)을 뜨겁게 불사르며
낙조(落照)는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도시(都市)를 빠져 나온 한 떼의 구름을 만나
지친 듯 그에게 몸을 던지고
망설임 없이 강(江)을 건넜다.
나는 그 옆에서 계속 실물(失物)을 하고 있었다.
타관의 햇살, 유림문화사, 1974
내가 오는 가을산 눈부심을 홍윤숙
내가 오는 가을산 눈부심을
지난 여름, 내가
떠도는 한 점 구름으로
지새던 만리 이역의 들에
사막의 고독한 혼처럼 피어
발이 시린 나그네의 길을 막던
라벤다의 들에도 지금 가을이겠지
코끝에 스며 오는 마른 약쑥 냄새
기억의 벌판에
한 덩어리 영혼처럼 무리져 오는
보라빛 들국화 점점이 피는
내 나라 산야에도 지금은 가을
흐느끼며 가슴 떨며
여윈 볼 쓸쓸히
성긴 깃발 앞세우고
바람 앞세우고
추억의 수레 끌며
종일을 먼 길에
네가 오누나
산머루 검게 익어 떨어지고
가랑잎 비에 젖어 썩는 숲길에
우리들의 여름날 묻으며 묻으며
익숙한 몸짓
언제나 말보다 더 확실히 말하는
분명한 걸음으로 네가 오누나
그저 그런 거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삶에도 사랑에도 가을이 오고
과일밭에 빛나는 과일도
잠시 충만하다
이윽고 북풍에 떨어져 가는
이별과 침묵의 완성이라고
빗발로 가르치고
바람으로 일러 주며 네가 오누나
그럼에도 어찌할까, 나를
물 같은 추억에도 가시처럼
아픈 살을
이 나이에도 철없이 신열 올라
그리운 배고픔에 살이 내리는
가을산 눈부심을 어찌할까
사는 법, 열화당, 1983
누군가 이 겨울 홍윤숙
누군가 이 겨울
누군가
이 겨울
눈 덮힌 창가에 나를 세우는 것은.
내가 밤새워
창 밖에서 비를 맞을 때
그는 내 안에서
깜박이는 눈길로 창을 닦고,
내가 아침 기차(汽車)를 타고
미지(未知)로 떠날 때
그는 바람으로 부풀던 지연(紙鳶)이더니,
오늘
얼어붙은 삼동(三冬)의 아침
그는 쓸쓸하게 늙은 눈매를 하고
눈 덮힌 창가에 나를 세운다.
건너온 강(江),
아득한 산(山),
나부끼는 깃발들이 하나씩 지나가고
몇 개의 여름,
약속과 이별,
변질한 우정(友情)들이 차갑게 떠오르는
겨울의 지도(地圖)
그는 오늘 아침 잠잠한 눈길로
조용히 모든 것을 전송하라 한다.
부동(不動)의 자세로 찬란한 유혈(流血)을 결행(決行)하라 한다.
남은 겨울은 결별(訣別)을 위해서만
빛나는 시간이게 다짐하라 한다.
어디선가 조용히
끄덕이며 문을 닫는 내가 있다.
쓸쓸한 눈매로 잠잠히 지켜보는
당신이 있다.
타관의 햇살, 유림문화사, 1974
눈물 홍윤숙
눈물&
한 방울 눈물의 무게를 알았음이오
어느 날 강(江)물에 잃어버린 지환(指環)의 무게
그 아픔이 가슴에 별 같은 금을 박는
수정(水晶)의 끌
한 방울 눈물의 빛을 보았음이오
국화(菊花) 잎에 서린 맑은 이슬의
그보다 더 정한 새벽 바람의
가슴에 서려 오는 회오(悔悟)의 빛
목숨을 허문 날에 돌아온 마음
붉은 단풍잎처럼 굴르는 밤에
한 방울 눈물의
뜨거운 소리를 들었음이오
`잊지야 않았었지 잊을 리야 없지
네 목숨 내 것처럼 믿어 왔을 뿐'
슬픔을 주느니 차라리 받음보다 더한
미쳐 몰랐던 세월에 지은 죄(罪)
이제는 돌아와 여기 앉았노라
네 옆에 아기처럼 유순히 살겠노라
눈물은 눈물로서 씻어야 하는
말끔히 씻고 나면 거기 또 하나
목숨을 허물도록 허망한 날이
살수록 조금씩 더해 가겠지
풍차, 신흥출판사, 1964
늙은 비애 홍윤숙
늙은 비애(悲哀)
겨울 가로수(街路樹),
유랑민(流浪民)처럼 늘어선 해질녘 거리
옛날의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다.
속으로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다.
아득한 기억(記憶)의 눈길을 돌아
먼 길을 돌아
빈 방, 잠긴 빗장을 따면
기척없이 기다리는 늙은 어머니,
어머니 같은 모습이다. 그 비애(悲哀)는……
겨울 밤 북국(北國)을 달리던
청청한 기적(汽笛) 소리
동구(洞口) 밖에 울리던
곡마단(曲馬團) 나팔 소리
그렇게 젊던 나의 비애(悲哀)야,
오늘은 내 늙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를 보누나
나도 너만큼 지쳐, 너를 닮은
한 쌍의 겨울 나무
끝내 함께 갈 우리는 혈연(血緣)이다.
타관의 햇살, 유림문화사, 1974
다시 삼월에 1 홍윤숙
다시 삼월에 1
내가 어렸을 때
삼월은 봉원사 뒤뜰 깨어진 종신(鐘身)에
한 오백 년 묵은 상처나 슬슬 문지르며
헐벗고 굶주리고 피맺힌 강산에
목소리 죽이고 숨 죽이고
버선발로 살얼음판 기어서
울아버지 한밤중 싸리 바자울 아슬아슬 넘어오듯
그렇게 앞뒤 입막고 숨터지게 왔어요
할아버지 여덟새 무명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주 북간도 피멍들어 넘나들던
객관의 주막 서러운 봉놋잠 깨울까봐
깨어서 다시 불붙는 통한의 불기둥 될까봐
제국주의 창검 아래 썩뚝썩뚝 잘리는 생초목 될까봐
할머니 긴 밤 심지불 돋우며
아주까리 기름등잔 바작바작 태우던
근심으로 왔어요, 눈물 한숨 단근질로 왔어요
그때 삼월은
사는 법, 열화당, 1983
무용한 햇살 홍윤숙
무용(無用)한 햇살
한여름
길은 아득히 구름에 걸려 보이지 않고
숲 속의 이름 모를 잡초(雜草)들 아름다운 손
발목을 감고 놓지 않았다
부끄러운 죄(罪) 몰래 숨어 짓듯
벗은 발 간지리며 간지리며 달아나던
금은(金銀)의 이슬들
시간(時間)은
꽃같은 흉기(凶器) 바람에 숨겨 놓고
머리채 뭉턱뭉턱 잘라 버리고
무성한 꽃송이들 떼죽음 하고
들끓는 신열로 몸져 앓아 눕던
황홀한 역질(疫疾)
아름답던 병(病)
모두 썩썩 베어 버리고
빛나던 구름의 광맥(鑛脈)도 묻어 버리고
오늘은
한 포기 잡초도 나지 않는
벗은 돌담 갈라진 철조망에
쓰일 데 없는 한 섬의 햇살을 쏟아 붓는다
허실허실 괼 데 없이 흘러 내리는
무용(無用)한 햇살의 어지로움이여
하지제, 문지사, 1978
사는 법 1 홍윤숙
사는 법(法) 1
잠자는 법 눈뜨는 법
걸음 걷는 법
하루에 열두 번도 하늘 보는 법
이를 빼고 솜 한 뭉치 틀어막는 법
한 근씩 살 내리며 앓는 법 배워요
눈물의 소금으로 혓바닥 절이며
열 손가락 손톱마다 동침 꽂고 손 흔드는
이별법도 배워요
입술 꼭꼭 깨물며 눈으론 웃고
목구멍 치미는 악 삼키는 법 배워요
가슴 터져나도 천리(千里) 긴 강물 붕대로 감고
하루에 열두 번씩 죽는 법 배워요
사는 법, 열화당, 1983
사는 법 2 홍윤숙
사는 법(法) 2
날지 못할 날개는 떼어버려요
지지 못할 십자가는 벗어놓아요
오척단신 분수도 모르는 양심에 치어
돌아서는 자리마다 비틀거리는
무거운 짐수레 죄다 비우고
손 털고 돌아서는 빌라도로 살아요
상처의 암실엔 침묵의 쇠 채우고
죽지 못할 유서는 쓰지 말아요
한 사발의 목숨 위해
날마다 일심으로 늙기만 해요
형제여 지금은 다친 발 동여매고
살얼음 건너야 할 겨울 진군
되도록 몸은 작게 숨만 쉬어요
바람 불면 들풀처럼 낮게 누워요
아, 그리고 혼만 깨어 혼만 깨어
이 겨울 도강(渡江)을 해요
사는 법, 열화당, 1983
사는 법 6 홍윤숙
사는 법(法) 6
보아요
우리들이 떠나온 그날로부터
숯불 같은 산하를 맨발로 걸어온
40년의 광야
아직은 가나안 바깥 어둠이지만
예리고의 성 밖을 돌고 있지만
때가 오면 관솔에 기름 부어
한 솔기 불꽃으로 길을 밝히고
눈부신 이마로 신들메를 매어요
가슴에 금빛 단추 반짝이는 불을 켜고
들찔레덩굴로 허리 동이고
바람 부는 벌판에 장대로 서서
한 시대 어둠을 허물어내요
두 팔에 집채 같은 밤을 함께 안아요
어디서나 우리들의 언어(言語)는 빛이었어요
사는 법, 열화당, 1983
사는 법 7 홍윤숙
사는 법(法) 7
이승 끝에 서서 보아
날마다 이승의 끝이라 생각하며 보아
영혼이 비에 젖어 널처럼 무거운 밤
숱한 구둣발이 가슴을 밟고
천군만마로 지나가는 밤
한 시절 불을 놓아 우리를 키워준
무성한 어둠의 갈대숲을 보아
이를 빼는 아픔도 사치롭던
비애의 칼을 갈던 신명의 나날
포도의 즙을 짜듯 마른 살을 짜고
돌로 돌을 치며
고독한 자해(自害)에 피 흘리던
무성한 어둠의 갈대숲을 보아
바람에 찢기우며 키가 자라고
불볕에 타면서 영혼이 익던
야행성(夜行性) 불면의 여름 유적지
그 숲에 지금도 댕댕댕 종소리 울리며
조근조근 일러주는 이 세상 율법의
삭은 말씀 들어보아
살결마다 울리던 생의 벨 소리
새순처럼 목을 감던 웃음 소리
자잘한 희망과 눈물의 꽃방울들
아직도 강변에 피어 흔들리는 모습 보아
날마다 이승의 끝이라 생각하며 보아
사는 법, 열화당, 1983
생명의 향연 홍윤숙
생명(生命)의 향연(饗宴)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리
기다리지 않아도 좋으리
우리는 지상에 떨어진 수 만의 별들
제각기의 길을 가는 각각의 그림자
나와 더불어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살아 있다는
다만 살아 있다는 그것만으로
다행한 우리들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씨를 뿌려
가히 허무의 열매를 거두며 살아왔거니
서러워하지 말자 언젠가 다시
해후(邂逅)의 약속 없음을
굳이 바래옵거니
시공을 넘어선 무상(無想)의 언덕 위에
무심히 마주 선 한쌍의 은행이기를
구원(久遠)한 마음의 하늘 수정의 바다를
머리에 이고
아득히 바라보는 바래움 없는 위치에서
묵묵 자성(自盛)하는 나무의 역사(歷史)
살아 있음은 오직 하나의 권능(權能)
우리 옆에 이웃 있음은 또 하나
다사한 영광(榮光)
내 마음 줄 그 한 사람 있음이리
크나큰 생명(生命)의 향연(饗宴)이어니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리
기다리지 않아도 좋으리
나와 더불어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살아 있다는
다만 살아 있다는 그것만으로
다행한 우리들
우리는 욕망의 밭에 핀 흰빛 허무를
거두며 살아온 무상(無償)의 원정(園丁)
서러워하지 말자 언젠가 다시
해후(邂逅)의 약속 없음을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소리 홍윤숙
소리&
벌판에 서면
와랑와랑 길도 없이 달려오는
한 떼의 바람소리
바람 속에 들끓는 상한 영혼의 소리
겨울 아궁이 지신(地神)처럼 타오르는
마른 장작불 관솔 개비 탁탁 튀던
젊은 날 소리들을 내가 듣는다
흰 이빨 갈며 갈며 하얗게 부서지던
겨울바다 목숨의 소리들을 내가 듣는다
깊은 밤 잠든 귀 두런두런 밟고 오는
뜨겁고 쓸쓸한 소리들의 현악을
갈대와 들국화 서로 얽혀서
해질녘 들길에 살 부비던 소리
잎새들이 떨어지며
하늘에 그리는 아라베스크
그 자욱한 가을날 목숨지던 소리도
내가 듣는다
모든 떠나고 맞이하는 소리들의 화음
이 저녁 지체없이 다가오는
이별의 단음(短音)도 내가 듣는다
종소리 지고 꽃들이 울려 대는 저문 벌판에
허문 육신 섬으로 부려 놓고
겨울로 떠나는 뼈들의 탄식을
내가 듣는다
사는 법, 열화당, 1983
시의 슬픔 홍윤숙
시(詩)의 슬픔
오래 품어
사슴같이 길러 온
말 한 마디
꽃잎으로 에워 싼
노란 암술 하나
한 가슴에 받들듯
긴 세월 남몰래 키워 온 말입니다
해와 달이 바뀌어 가는
일월(日月)의 창(窓)밖에
사철의 화색(花色)이 스며드니
달랠 길 없이 터 오르는 목줄기
머리채 검고 눈빛 젖은
나이 찬 계집애로 자라나서
막을 길 없이 달려가눈요
어느 날 내가 당신 앞에
그 말 한 마디를 드리고 나면
나는 그만 하늘 끝에 닿버린
저녁 해
까맣게 타버린 꽃씨입니다
그 말 한 마디만이
그 가슴에 남아
뿌리 고운 사슴으로 살아 주기를
오래오래 향기되어 피어 주기를
나야 검게 영근 씨방 하나
가지에 남기고
뚝뚝 떠러져 가버릴
오월(五月) 어느 날의 꽃잎이어도 좋은……
풍차, 신흥출판사, 1964
여름 나그네 홍윤숙
여름 나그네
저물어 가는 여름 어느 날
새벽은
반짝이는 알미늄 빛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지중해(地中海) 해협(海峽)의
진남색 바람으로
밤새워 씻어내린 거리와 지붕
가랑비 섞인 정결한 평화(平和)가
은빛 안개 속에 피어나고 있었다.
우리들 마음은
자주 바다를 떠나온 갈매기 같은
향수에 젖어
아침이면 반짝이는 알미늄 빛의
대기(大氣) 속으로
줄 끊어진 연(鳶)처럼 풀려 나갔다.
거리 어디에서나
갓 피워낸 맑은 향(香) 섞인
안개를 마셨고,
안개 속에선
잘 익은 청포도의 즙(汁)이 서린
8월(月)의 아침 냄새가 물씬거렸다.
푸른 포도즙(汁)이 밴
안개 속에서
우리의 식욕(食慾)은 왕성했고
신선한 공복감(空腹感)에 충만했다.
세계(世界)는 그때 가득히 고인
달콤한 과즙(果汁)으로
우리의 폐부(肺腑) 안에
용해 되어 갔다.
타관의 햇살, 유림문화사, 1974
여인좌상 홍윤숙
여인좌상(女人坐像)
무변한 해원(海原)에 바람을 의지하는
한 잎 갈이파리
아무도 한 여인(女人)을 엿보는 이 없는
암흑의 밤기슭에
목숨 같은 검은 머리 풀어 헤치다
치렁치렁 검고 숱한 머리
궂은 벌처럼 휘 휘 목에 감고
가릴 바 없는 새빨간 알몸 하나
붉은 단풍잎처럼 타오르는 밤
아직도 푸른 잎 이슬지는
송백(松栢)의 청청한 젊음이 목에 겨워
질탕한 탕녀(蕩女)처럼 목에 겨워
유리 한 조각 입에 물고
와드득 깨물어 죽지도 못하는 미련일래
밤을 지새워 통곡하노니
목 노아 통곡하노니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너를 섬김이……그 너를 섬김이
언젠가 나의 하늘 한이었거늘
사람도 신(神)도 없는
무변한 밤바다에
한 방울 수은(水銀)처럼 굴러가는 몸
사람의 목숨 하나가
온통 슬픈 바램으로 빚어졌다면
신(神)은 인간(人間)을 빚으시고
그 소망 지워주심을 잊으셨어라
밤을 세워 받혀 든
하얀 백랍(白蠟)의 타는 촛불 같은
한쌍의 손
검은 머리 감아 올릴
그 뉘를 위해 감아 올릴
마지막 축원(祝願)의 촛불 같은 손이랴
풍차, 신흥출판사, 1964
오라, 이 강변으로 홍윤숙
오라, 이 강변으로
오라, 이 강변으로.
우리는 하나, 만나야 할 한 핏줄,
마침내 손잡을 그 날을 기다린다.
그날이 오면, 끊어진 허리
동강난 세월들 씻은 듯 나으리라.
너의 주름과 나의 백발도
이 땅의 아름다운 꽃이 되리라.
오늘도 여기 서서 너를 기다린다.
1989
경의선 보통열차, 1989
우리들 시대의 아들아 2 홍윤숙
우리들 시대(時代)의 아들아 2
마루 아래 벗어 놓은 한 켤레 군화
간밤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
젊은 피 뜨거운 밤을 밝히고 왔는가
누런 황토흙 쩍 벌어진 앞부리
네가 묻혀 온 이 땅의 흙빛깔이
피처럼 아프구나 내 아들아
강바닥 진흙 구덩이 지뢰 묻힌 휴전선 155마일
죽음과 삶의 갈림길 밟고 온 너
벗은 발이 풀잎처럼 밤이슬에 젖어 슬픈 어미들
날마다 등허리 벗어지도록 짊어진
천리 국토의 무게 자유의 중량
온밤 잠들지 않기 위해 신끈을 풀지 않고
꿈꾸지 않기 위해서 밤을 밝히는
시대의 파수꾼 작은 별들아
태어나 처음 쓴 진달래빛 연서며 푸른 설계도
순금의 날개 함께 침묵으로 접어서
빈 방 깊은 서랍 추억의 책갈피에
불씨로 묻어 두고 떠난 너희들
조금씩 작아지는 꿈의 키를 가슴으로 버티며
날마다 일념으로 산 하나를 넘고 있는
우리들 시대의 장한 아들아
이 밤 네가 흘린 피값으로 나는 잠들고
네가 바친 젊음으로 나는 노래한다
천근의 기쁨과 천근의 아픔으로 너를 꿈꾸며
아들아 묻지 말자
지금은 어떠한 질문도 응답도 얼어붙는
적진 최전방 눈내리는 전선 155마일
너는 두 어깨 탄탄한 철근 콘크리트
자유를 수호하는 만리장성
우리들 시대의 마지막 보루(堡壘)다
사는 법, 열화당, 1983
우리들 시대의 아들아 홍윤숙
우리들 시대(時代)의 아들아
아들아
가시철망에 찢어진
아침 햇살을 보라
유혈(流血)하는 햇살의 비명(悲鳴)
비명을 분쇠하는
바람의 포격(砲擊)을 보라
긴 밤
불면의 겨울 숲을 헤쳐나온
기아(飢餓)의 새
새들이 떼지어 사살(射殺)되는 건
그들이 매도(賣渡)하지 않는 날개 때문이다
이 아침 살아 남아
살아 남아 노래하는 건
오직 너,
너의 팽팽한 가슴
근육(筋肉)마다 튕기는 고발(告發)의 탄력(彈力)
아들아
오늘도 무거운 장총(長銃)엔
충분한 실탄(實彈)
배낭(背囊)엔
꿈도 가득 채웠는가
포위망을 뚫고
가시철망을 끊으며
녹쓴 빗장을 제끼는 손
내일을 여는
확신(確信)의 손에
끝없이 밝은 집단(集團)의 햇살이 튄다
어디서나 쏟아지는 함성(喊聲)이 되고
어디서나 산화(散花)하는 꽃잎이 되는
우리들 시대(時代)의 아들아
너 가는 천지
굽이쳐 강물로 흐르는 내 사랑은
아픈, 맨발의 백의종군(白衣從軍)
날마다 희디 흰 붕대(繃帶)를
가슴에 감는다
하지제, 문지사, 1978
원색의 회랑 홍윤숙
원색(原色)의 회랑(廻廊)
이 넓은 땅 어디엔가
한 줌의 꽃으로 피어날 순 없을까
남몰래 산(山)에 피는
가을 패랭이꽃으로라도
한세상 쌓여 온 서리
이슬져 풀리는 신화(神話)의 봄언덕
파란 새순인 양 돋아난 내 마음
지금은 황엽(黃葉)의
숨 깊은 가을
하늘과 땅과 아픈 가을의 소리
가득 찼는데
내 마음 온통 핏빛 살비아로 피어 나거니
긴 시절 몰아몰아 막바지로 피어나는
정념(情念)의 꽃
목숨의 하찮은 근원을
이제사 알게 하는
목숨의 허실(虛失)한 세월을
이제사 울게 하는
원색(原色)의 회랑(廻廊)
별을 헤이며 살아온 마음이
우물처럼 고여
떠가는 구름이랑 낙엽(落葉)이랑
비치며 살아온 마음이
이제금 다시 흔들리는 목숨의 지층(地層)
불의 골짜기
여른여른 불길 져 타오르는
정념(情念)의 고비길 가을 회랑(廻廊)에
눈도 없이 멀어가는 치인(痴人)의 꿈
풍차, 신흥출판사, 1964
일몰 홍윤숙
일몰(日沒)&
어느 그날에 무딘 목숨을 받았는가
이 강(江)기슭 허구 많은 옛말과 함께
흘러오고 또 쌓여 온 모래밭을 어머니 삼아
치근치근히 곱지도 못한 뿌리를
펴온 나무들
잎마다 가지마다 바람과 비와 우뢰(雨雷) 같은
그러헌 고난(苦難)에 찌들고 주름잡혔음에도
애써 위로 위로 하늘이 그리울사
뻗어 오른 잎이며 가지며
모두 다 무수한 그날을 견뎌 왔음에랴
오늘은 낡은 태양(太陽)이
빛도 없이 낡은 태양이
오랜 묵은 하늘에 가슴 앓듯
앓아 누웠고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도 않은 슬픈 낙일(落日)의
아득히 저물어 가는 어둠을 뚫고
태양의 죽은 넋을 조곡(弔哭)하는 까마귀 울음
가없는 하늘가에 끊일 듯 스쳐가고
이제사 저녁이라
물안개 자욱한 강(江)언덕엔 나룻배 돌아가
세월(歲月)과 같이 찌들고 손때 묻은 노를 저어
잃어버린 노래도 찾을 길 없이 아비는
돌아가--
강(江) 건너 마을엔 가난한 아낙이
십년 설움에 절은 손등을 부비며
한숨만한 연기(煙氣)를 올리나니
어느새 마을엔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끊인지 오랬어라
아비의 얼굴이며 어미의 얼굴이며
다시는 서로들 알아 볼 수도 없으리만큼
무딘 눈 눈망울 속에 그래도 남은 것
슬픈 목숨이여 불 붙는 원한(怨恨)이여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입동 홍윤숙
입동(立冬)&
입동이 오는 밤
육십 촉 알전등에 김이 서리고
사마리아 여자의 겨울 꿈이 춥다
얼어붙은 영하에도
눈 감고 지어보는 집이 있어
홀로 물을 푸고 자갈밭 일구고
푸르던 여름날 숲을 찍어 벽을 쌓는다
창가에 아이비 덩굴 올려 축복을 빌고
새 한 마리 찾으러 산길 헤매다
헤매다 눈을 뜨면 밤은 이승 끝
벌판에 바람소리, 집은 간 데 없고
종점 어디엔가 버려진 나를 본다
무수한 산을 넘던 여름날이 보인다
깨진 무릎에 말라붙은 흙
선명한 꽃으로 되살아나고
수없이 기워댄 신발의 뒤축도 눈물로 핀다
등불을 끄고 돌아 누우면
칠흑으로 에워싸는 오전 두 시의 영원
무겁게 가라앉는 영혼의 선체
죽음도 그처럼 평안히 올까
사는 법, 열화당, 1983
저무는 10월 뜰에 홍윤숙
저무는 10월(月) 뜰에
저무는 10월(月) 뜰에
장미는 아직 붉고
담쟁이는 물들고 벽을 덮었다
사랑은 이미
입추(立秋)의 언덕길을 저 혼자 돌아가고
추억을 줍는 금빛 낙일(落日)은
마지막 창을 닫으며 일어선다
바람은 금잔화 누른 잎에
잠이 들고
비애(悲哀)도 그 곁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이제 곧 눈부신 겨울이
하얀 크레용을
작은 창(窓)마다 문지르고
잠자던 바람이
전나무 가지 끝에
포효(咆哮)할 것이다
장미의 목은 부러지고
추억은 흙 속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아무도
연록(軟綠)의 숲길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제, 1978
지난 여름 야영은 1 홍윤숙
지난 여름 야영(野營)은 1
하느님
지난 여름 야영(野營)은
아름다왔습니다
이슬에 젖은 백색 샤쓰는
초록빛 풀물로 함빡 물들고
군데군데 패랭이꽃 부끄러운
진분홍 꽃물도 몰래 들이고
해가 뜨고 지는 몇 개의 언덕을
무엇인가 노래하며 넘었습니다
넘어져 깨진 무릎의 피
꽃처럼 말려 배낭에 넣고
때묻은 오늘 열심히 빨아
풀도 먹이고
비탈진 길
지구의 사면(斜面)에 비가 내려
우리의 야영은
늘 어딘가 한 구석이 젖었습니다
사는 법, 열화당, 1983
지난 여름 야영은 2 홍윤숙
지난 여름 야영(野營)은 2
가을
우주의 황혼이 오고
지구가 황금의 추억으로
술렁거릴 때
넣어 둘 집이 없는
마음 하나
광야를 헤매는
바람의 끝도 보았습니다
땀과 눈물 소금으로 버캐 낀
순금의 소금밭 겨울 오지(奧地)
문득문득
하늘로 가는 길도 보이는 아침
하느님
늦은 날에 떠 주신
물 한 그릇
서천(西天)의 나날이 그 안에 넘칩니다
사는 법, 열화당, 1983
지명의 겨울 1 홍윤숙
지명(知命)의 겨울 1
지난 여름 한때
도처에 벌어졌던 장미의 난(難)
진실이며 눈물이며
무더기로 토벌되어 형지로 실려가던
우리들 시대의 황폐한 불을 나는 보았다
예고없이 시작된 어두운 계절의 징후
거리거리 골목마다
지천으로 버려져 바겐세일하던
색색의 훈장 만능의 행복서를
포장된 희망들이 팔려가는 행렬을
눈보라길 끌려가며 끌려가며 돌아보던
고려 공녀(貢女)의 혼
날마다 만원 버스에 짜부라진 얼굴들을
낙엽처럼 부서져 간 195X년 부다페스트
소녀의 가슴을, 진달래빛 하늘을,
릴케의 장미는 이미 죽었다
사는 법, 열화당, 1983
지명의 겨울 4 홍윤숙
지명(知命)의 겨울 4
생애의 골목길을 무수한 여름들이 지나가고
지천으로 버려졌던 장미도 간 데 없고
남은 해 아직 끝나지 않은 악기(樂器)처럼
벌판에 울리는데
우리들의 야영은 겨울로 떠난다
눈 속의 산행(山行)이 시작된다
최후의 패(牌)를 떼어 버린 시간
별을 정한 자는 돌아보지 않는다고
바람 출렁이는 자일 위에서
가시로 일어서는 지명의 겨울
비로소 생애를 관통한 한 발의 총성을
나는 듣는다
열 갈래로 찢어졌다 다시 하나로 모이고
모여서 끝내 흔적없이 사라져 가는
저 이름 지울 수 없는 부재(不在)의
찬란한 총성
사는 법, 열화당, 1983
지명의 겨울 5 홍윤숙
지명(知命)의 겨울 5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하면서
나는 걸었다.
넘어지는 돌부리
떨어지는 벼랑마다
캄캄한 어둠으로 발을 지지며
한 솔기 바람으로 다시 아물며
한 생애 홱Â 것 밖에는 믿을 것이 없었던
고독한 피의 내림
그것은 잠들 수 없는 자의 눈물이었다
보이지 않는 제 얼굴을 찾아
들쥐처럼 헤매던 광야의 밤
캄캄한 젊음의 갱도는 늘 비어 있었고
날마다 헛되이 지나가는 쓸쓸한 미명과
일몰의 설레임
불면의 오지(奧地)에선 이따금 눈보라의 예감에도
가슴 뛰었다
굶주린 자의 황폐한 허기는
파멸을 알면서도 금단의 열매로 공복을 채웠고
허망의 늪에 두 손 짚고
점점이 살을 깎는 풍화(風化)에 날을 지샜다
언제나 조금씩 핏발 서 일어서던 광기의 바람
불온하게 눈뜨던 야성의 억새밭에 그러나
바람은 서서히 운명해 가고
곤두서던 치욕의 가시도 목을 넘기고
어느덧 물같은 나이
새파랗게 불을 켜던 강변의 한(恨)들을
하나씩 소등(消燈)했다
출렁이며 가라앉는 흑백의 수면 위에
비로소 떠오르는 지명의 얼굴
구멍난 영혼의 성벽 위에
오늘은 유서처럼 펄럭이는 기를 꽂는다
내 생에 바치는 평화의 항서(降書)
이제야 따뜻하게 옷을 벗는 허무를 만나
아름다운 거리(距離)로 손잡는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마지막 사랑의 동행을 시작한다
사는 법, 열화당, 1983
지치고 아픈 날에 홍윤숙
지치고 아픈 날에
인생(人生)을 유행가(流行歌)처럼 살 수도 있을까
약간의 흥분과 코에 걸린 애수(哀愁)
손끝으로 희롱하는 바닷물의 감각(感覺)
일본(日本)의 시인(詩人) `탁목(啄木)'의 노래였지
한 자락 떨치고 일어서면
구름 같은 몸인 걸
돌에도 나무에도
붙일 데 없는
꽃은 스스로의 가시에
목이 메는가
하늘과 땅 사이
두고 온 인연(因緣)의
메아리 소리
풍차, 신흥출판사, 1964
타관의 햇살 홍윤숙
타관(他關)의 햇살
□ 1.여일(麗日)
우리의 여름은 길고 뜨거웠다.
서향(西向)한 집은 잠시 불 타다 스러질 것이며
선량(善良)한 마음들은 어둠을 향해
경건한 십자가(十字架)를 그을 것이다.
오늘 아직은 타관에
낭자(狼藉)한 새소리에 잠이 깨고
드높이 계단(階段)을 오르내리고,
아이들과 태양(太陽)을 강(江)으로 보내고
부숴진 하루의 문을 여는
유예(猶豫)된 시간을 우리는 소유(所有)한다.
균열진 마른 땅에
하얗게 표백(漂白)한 백색(白色)의 일광(日光)이
외로이 뒹굴고,
무게도 없이 일어서는 투명한 과거(過去)가
반짝이는 눈물로 사라진다 하드라도
우리는 남은 날을
한 조각 구름이 되어 자유(自由)로히 흐르다.
해바라기 탐스런 꽃잎에 앉아
화려한 웃음소리 햇빛 타는 소리를
잠잠히 듣고,
잃어버린 시간의 유실물(遺失物)을 찾아
조용히 꽃잎을 뒤집어 보는
아름다운 시간을 갖지 않았는가
겨울엔 겨울의 태양이 있고
마른 잎엔 대지(大地)의 잠이 있다
우리의 타관은 아직 빛나는 햇살 속에 있다.
□ 2. 가을․도시(都市)․입구(入口)에
어느 날
이 도시(都市)는 불 타고 있었다.
태양(太陽)은 어디서나
시뻘겋게 부란(腐爛)하는 도마도처럼 터지고,
아침마다 배달하는
신선한 우유와 몇 포기 야채들은
금시금시 숨 막히는 열기(熱氣) 속에
썩어 갔다.
여신(女神)을 닮은 늠름한 해바라기들도
끝내 쓰러져
앙연히 대지(大地) 위에 숨져갔다.
어디서나
참담한 여름이 운명해 갔다
그리고 어느 날
도시(都市)는 문득 살아나기 시작했다.
헐떡이던 창(窓)들이 조용히 닫히고
식탁(食卓) 위의 우유가
알맞게 차가웠다.
말끔히 단장한 햇빛과 상점(商店)
새로 피어나는 꽃들
곳곳에 봉인(封印)이 찍힌
가을․도시(都市)․입구(入口)에
사람들은 처음 온 나그네처럼
말을 잃었다.
어디선가 무겁게 회전(廻轉)하는
지구(地球)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약속도 없이
가고 또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지나가는 타관의 거리였다.
타관의 햇살, 유림문화사, 1974
파계 홍윤숙
파계(破戒)
돌 틈 바위 밑
자갈을 가르며 흐르는 산수(山水)
그 사철의 산수(山水) 같은 마음으로
살아 왔거니
냉냉히 빈 방에
씻은 듯 정결한 가슴 한 세상
빛 바랜 지창(紙窓)처럼
향(香)도 가시고
청옥빛 수련히 가라앉은 우물 밑에도
다스릴 바 없는 한 잎 갈이파리
떠도는 마음
모두 다 무심한 일월(日月)에 삭혀 왔는데
무얼까 새삼 꽃 속에 숨은
밀(蜜) 같은 서러움
이 한밤에
사람도 신(神)도 사연도 없는
아득한 세월들이
한 아름의 마른 나목(裸木) 덤이로
타오르는 밤
차라리 죄(罪) 하나
못 벗을 죄(罪) 하나 가슴에 짓고
마지막 목숨을 파계(破戒)하는
꽃으로 질까
풍차, 신흥출판사, 1964
포도주 익어 홍윤숙
포도주(葡萄酒) 익어
산호(珊瑚) 붉은 수림(樹林) 흔들리는 잔(盞)속에
넘치는 이 한 잔 술은
오늘 당신께 드리는
가을 남국(南國)에 익은 밀감(蜜柑) 같은 내 마음
감미로운 선율 고여 흐르는
선홍(鮮紅)의 빛은
여름을 전원(田園)에……가이없는 전원(田園)에
태양(太陽)을 잉태한 채 검붉은 유두(乳頭)처럼
부풀어 익어 온 알알의 꿈들이
한데 엉킨 유한(遺恨)의 강(江)
이제 다감한 여인(女人)의 살내음 같은
이 방향(芳香)한 주훈(酒薰)에
흥그러이 잠기는 시간
일몰(日沒)이 우리의 머리 위에
종일(終日)의 피곤을 씻어 주는 해풍(海風)처럼
싱그러우니
잠시 고요한 회상(回想)의 뜰에
잠은 눈시울 노을처럼 더워옴은
그날에 남긴 흙의 아픔때문
그 숱한 열매를 익게 한
대지(大地)와 마른 나무들의
모진 인고(忍苦)를 생각함에서요
또한 한 알의 포도 파르라니 설어
성숙(成熟)을 기다리던 가지마다
눈물과 기원 그리고 불 같은
갈망(渴望)의 골짜기를 넘어왔거니
어둠에 삭힌 목숨의 다한(多恨)한 호소
빛의 영롱한 결징(潔澄)
들어라 높이 축제(祝祭)의 계절(季節)에
회귀(回歸)와 기다림의 시간(時間)에
풍차, 신흥출판사, 1964
풍경 홍윤숙
풍경&
초췌한 겨울이
골목안 담벽마다 말라붙어 있었다
키 큰 향나무들이 시퍼렇게 얼어
철조망 담 안에서 벌을 쓰고 있었다
바람이 곤두박질 썰매를 타고
아이들이 빼꼼히 문틈으로 내다보고
모든 것이 지난 해 그대로
정지(靜止)한 그 길
눈 먼 추억(追憶) 하나
떨면서 그 길을 내려 갔다
핏기 없는 노을이 그 뒤를 따라
느릿느릿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나는 등잔에 기름을 쳤지만
심지에 불 붙일 성냥이 없었다
하지제, 문지사, 1978
풍차 홍윤숙
풍차(風車)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時間)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妓女)의 마음일까
그리움에 맴도는 나뭇잎 하나
붉은 색지(色紙)처럼 손끝에 돌리며
멋없이 멋없이 배회(徘徊)하는 날
외로움이 진하면 거울을 보고
거울 속 눈물에 번져나는
희미한 얼굴
붉은 연지 꽃처럼 진하게 칠하며
웃어도 보는
뉘라서 알까만 배율(背律)의 수심(羞心)
보라빛 새 옷이랑 갈아입고
검은 머리 꽃이나 꽂고
나비 같은 마음으로 나서 보건만
짐짓 갈 곳이 없는……
너 없는 이 거리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내 마음은 부칠 데 없는
가랑잎 엽서(葉書) 한 장
바람에 돌고 도는 장난감 풍차(風車)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時間)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妓女)의 마음일까
붉은 양관(洋館) 긴 층계를 내리면서
문득 내 나이 이미 젊지 않음을
생각하는 날
풍차, 신흥출판사, 1964
하나의 약속을 홍윤숙
하나의 약속(約束)을
뜨거운 것은 아니올시다
불붙는 것은 더욱 아니올시다
높고 맑은 것
겨울날 두터운 얼음장 밑에 고이는
파-란 옹달샘 같은 그러한 것이
나의 태양이었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미움 바치지 않고
잊히워 버린 작은 관목(灌木)처럼
살아온 어느 세월
나는 마음 착한 소녀(少女)처럼
인내(忍耐)라는 험준한 연인(戀人)을 섬겨 왔습니다
계절(季節)의 환기(換期)―
빗발이 창문을 두드리는 밤엔
눈 먼 여인(女人)처럼 지척거리는
마음의 고삐를 채찍질하며
아, 진정 그리워한다는 것이
사슬처럼 무거운 밤
당신의 무서운 책벌(責罰) 앞에
나 엎드려 생각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풀 길 없는
하나의 약속(約束)을
어찌할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무서운 약속(約束)을 주셨습니까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죽어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그러헌 오뇌(懊惱)스러운 약속(約束)을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하얀 민들레 씨 홍윤숙
하얀 민들레 씨
아기야 업어 줄까
내 아기 엄마 등에
하얀 민들레 씨
바람개비 날릴까
옛날의 내 어머니
나에게 그랬듯이
지금 나 또 네게 주는
오직 하나의 정(情)
모정(母情)의 아득한 무지개 다리
좀더 예쁘게
좀더 슬기롭게 태어날 것을
주고 주어도 준 것이 없는
아기에게 엄마는 슬픈 채무자(債務者)
무우밭에 피어난
장다리꽃 같은 걸까
주절이 꿈을 열은
포도원(葡萄園)의 가을일까
모두 다 가버린 빈 과원(果園)에
새벽바람 홀로 가슴에 불면
내 착한 아들의 손길이라
어루만지리
어느 날 낙백(落魄)한 그 분신(分身)들
돌아와 곤히 내 곁에 누우면
아기야 다시 한 번 꿈길에
내 아기 엄마 등에
하얀 민들레 씨
바람개비 날리자
세상은 너와 나 모두가
허망하게 날려 보낸
꽃씨 주머니
풍차, 신흥출판사, 1964
하일 홍윤숙
하일(夏日)&
우거진 전나무 숲을 헤쳐 가면
잃어버린 소녀(少女)의 날이 가슴 젖어 오고
산(山)딸기 알알이 풀숲에 익는 산 (山) 속 지름길엔
여름이 한참 풍성한 과실처럼 어우러졌다
누가 여기 아름다운 기억(記憶) 속에
한 조각 보석(寶石)을 흘려 보지 않았는가
나의 분별(分別)도 한 묶음의 청춘(靑春)을
저 먼 산(山)길 이름없는 골짜기에
묘표(墓標)도 없이 묻고 왔다
발부리 휘감기는 칡넝쿨 뒤 헤치면
이끼 핀 바위 밑 나비 날개같이 말라붙은
꽃잎의 이즈러진 형해(形骸)를 본다
이는 숨길 수 없는 젊은 날의 흔적
다시 생생한 그날 그대로의 아픔이 오누나
지그시 눈 감고 아무렇게나 기대 서면
여름은 숲속에 숨이 찬가
다시 되돌아오는 바람결조차
숨결 가쁘게 풀숲을 감돈다.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하지제 홍윤숙
하지제(夏至祭)
□ 1
둥, 둥, 둥,
낯선 땅 모래벌에
신명은 주문(呪文)처럼 하늘에 닿았다
불모의 여름을 유랑하는
곡마단
청춘은
그렇게 짐을 싸며 떠났다
땀으로 눈물 씻던
산하(山河)
함성처럼 떠오르다 사라진
별들
찢어진 희망들이
눈을 뜨고 죽어 갔다
시간이
안개빛 명정(銘旌)을 휘날리는 벌판
□ 2
가시, 엉겅퀴
형벌(刑罰)처럼 여름은 뜨거웠다
들끓는 신열 노을로 쏟으며
만리장성 구름이 되어 가다
한 주름 비로 내리는 곳은
비슷한 길목 고개 숙인 어둠 속
창에 어린 몇 개의 별들이 길을 잡는
꿈의 변방을 오르내리다
새벽이면 다시 짐을 싸는
불거진 등에
익명의 사나이는
먼저 운명의 작은 싸인을 했다
하루 아침
노독(路毒)은 아름답게 발병(發病)하고
싸움도 없는 벌판에선
산탄(散彈)처럼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제, 문지사, 1978
환별 홍윤숙
환별(歡別)
총대도 탄환도 없이 오르는 장도(壯途)에
주먹과 가슴팍과 불타는 젊음만이
하나의 무기(武器)라고 웃음짓던 너
낙엽(落葉)도 목숨처럼 쌓이고
목숨도 낙엽(落葉)처럼 쌓이는 높은 산(山)마루엔
청춘(靑春)이 한 묶음 꽃처럼 뿌려지리
너 가거든
옳은 것이 그리워 너 가거든
부디 사랑과 같은 것은 조그마한 이름으로
불러 두어라
백설(白雪)이 휘날리고 얼음이 깔리련다
밤마다 하늘은 포성(砲聲)에 무너지고
아, 나는
얼어붙은 창(窓) 밑에 손 끝을 녹이며
너 돌아오는 날
개선(凱旋)의 새벽까지 살아야겠다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황혼 홍윤숙
황혼(黃昏)&
하늘이 탄다
언덕도 지붕도 백양(白楊)나무 수풀도
모두 다 잔잔한 불꽃 속에
피어 오른다
바람에 찢기운 삐라쪽같이 날으는 아이들놈의
깔깔대는 웃음소리 언덕을 넘어 사라졌는데
나는 아직도 무엇을 기다리고 여기 섰는가
떠나가 버린 사람, 이미 먼 들길
가리마 같은 흰 길로
목화(木花)꽃 지듯 사라져 버렸는데
보람없이 궁구는 태양(太陽)의 안타까운
화심(火心)을 향해
발버둥치며 가슴의 화살을 쏘고 또
쏘는 것
이제 대지(大地)와 등을 진 태양의 그늘 속에
거짓처럼 뿌려진 슬픈 밤의 씨앗을
온몸에 이슬처럼 받으며
하늘과 땅 사이 끝없이 허황(虛荒)한
들길을 간다
아 여기 나의 혼백(魂魄)이 묻히고 싶은
땅이 있다 하늘이 있다
마지막 불붙는 태양이 있다
여사시집(麗史詩集), 동국문화사, 1962
회귀 홍윤숙
회귀(回歸)
가을잎 한 잎
빛나는 가지 끝에 머무는 햇살은
여름을 걸어온
해의 발자욱입니다
소슬한 바람에 오스스 나부끼는
잎들의 잔잔한 아우성은
때를 알리는 시간(時間)의 손짓입니다
이제 저 많은 황금(黃金)의 작은 잎새들이
수만의 작은 새 새끼들처럼
노을 속에 부산히
먼 길을 차리고 떠나려 합니다
바람 속에
불빛으로 익어 온
회상(回想)의 날개를 달고
즐거웠던 이웃도 없이
그 전날의 그들의 본향
흙의 무덤으로 돌아간다 하오니
거두어 주소서
당신……
자비로운 대지(大地)의 어머니
그도 우리도 모두가 끝내는
광야(曠野)의 한 티끌 같은 목숨들이매
풍차, 신흥출판사,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