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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글에서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성격과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 주요 원인의 하나로 서구중심주의를 지적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된 담론들을 검토하고 그 적실성에 대해 논의한다. 서구중심적 세계관의 무의식적 내면화 과정이 일반 대중과 미술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그래서 한국 현대미술의 빈곤성이 초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민정기 <우리섬 독도 별맞이>
캔버스에 유채 225×340cm 2002
지난 10여 년간 우리 문화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자신이 목청 높여 비난하는 ‘근대’와 별 차이 없이 근대적 방식으로 수용된 이 흐름은, 이에 못지않은 폭력성을 가지고 계몽, 해방, 진리, 이성과 보편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대서사’를 해체하고자 한 이 방대한 논의가 우리 문화를 설명하는데 정작 어떠한 기여를 했던가.
근대가 무너진 자리에 그 공백을 메우려고 등장한 이 흐름, 그것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사상의 다원성? 관계의 비(非)폭력성?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포스트모던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첫째는 근대 비판을 민주주의의 폭력적 전복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자본주의 틀 내에서 가능한 개혁에 간단히 ‘근대적’ 이라는 딱지를 붙여 평가하면서, 여기서 탈주하여 문화라는 미시영역으로 도피하는 횡단운동을 행한다. 마지막으로, 근대를 ‘탈(脫)’하여 전근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해석으로, 유교적 전통의 복고를 주장하는 논리가 여기에 속한다. 근대를 비판하는 과정에 곧바로 선 불교와 노장사상으로 날아가는 동양주의적 해석이 그것이다.
서구중심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유럽중심주의적(Europocentric)’이라는 형용사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유럽을 그 중심에 두거나 간주하는, 세계문화 등에서 유럽 또는 유럽인의 최고 우월성을 상정하는”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가 암시하듯이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기존 논의들이 진행된 것을 정리하면, 근대 서구문명은 인류 역사의 발전단계 중 최고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또한 서구문명의 역사발전 경로는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을 포함한 전인류사에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고, 역사 발전의 저급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비서구사회는 오직 서구문명을 모방, 수용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구중심주의는 서구우월주의, 보편주의/역사주의, 서구화/근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는 유럽이 발전시킨 보편주의적 정치이념인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관통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근대서구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및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보급된 근대화 이론의 근간이 된다. 따라서 서구중심주의는 궁극적으로 비서구인들에게 서구문명의 우월성 및 보편성을 받아들이게 하고 서구의 문화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비서구인들에게 서구의 세계관, 가치, 제도 및 관행이 보편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여 동화주의적 사고를 갖게 하고, 서구를 ‘중심’에 놓는 과정에 비서구는 스스로 비하하고 자기부정 의식을 갖게 한다. 이들은 서구문명을 유일하고 보편적인 대안으로 생각하게 하고 서구중심적 세계관을 내면화하게 함으로써, 비서구인들이 독자적인 세계관을 형성하지 못하게 한다. 문화와 사상적으로도 서구의 ‘선진적’ 동향을 수용하는 과정에 서구의 문제의식마저 우선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내면화하여 비서구 문화사회에 대한 독자적인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고, 세련한 서구 이론에 동화되어 자국의 현실을 해석하는 경향을 갖게 하는 것이 서구중심주의다.
유럽중심주의와 서양중심주의, 역사서술의 해체와 대안
그렇다면,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노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재로서는 이론적으로 명쾌하고 실천적으로 간명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을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해 보자. 동화적 담론의 전략은 서구중심주의의 보편적인 주장과 현실의 모순된 실천 간의 단절에 초점을 맞추면서, 보편적 주장의 완전한 실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중심주의 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를 인정하면서 표면적인 보편성의 실천을 추구하고자 한다. 따라서 동화적 담론은 서구중심주의적 담론의 모순성을 비판하면서 그 체계의 주어진 틀 내에서 괄목할 만한 개혁을 도입하는데, 서구중심주의적 담론이 그 자신들의 보편적 주장을 실천하도록 강제하고, 그 결과는 이러한 담론을 더욱 보편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동화적 담론이 얻을 수 있었던 성과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동화적 담론은 그것이 비판하는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한다. 이것은 지배적 담론을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더욱 보편적이고 풍성하게 만듦으로써 그 정당성을 제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서구 타자에 대한 서구 중심적인 담론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담론은, 그 타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자신의 우월성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역전적 담론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는 오리엔탈리즘에 대처하기 위해 전개된 서양주의(Occidentalism)다. 비서구인도 서구인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서구보다 우월한 문화를 꽃피운적이 있으며, 이에 따른 문화적 긍지를 느껴 왔고 자문화중심주의에 근거하여 서구인에 대한 그들 나름의 부정적 고정관념, 이질성 및 편견을 갖고 있다. 역오리엔탈리즘은 아프리카 출신의 사상가인 상고르, 세자르 등이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야만성에 반대하고 아프리카의 진정한 타자성과 인본주의에 근거하여 제시한 네그리튜드의 관념과 운동 역시 토착주의적이면서 아프리카 중심적인 역전적 담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일본, 중국, 한국 등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동아시아 담론’이나 유교적 가치 논쟁, 전통에 대한 복귀 등은 일종의 역전적 담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와 비서구 간의 오랜 불평등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관계가 역전되지 않는 한, 이 담론은 힘을 얻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제3의 전략은, 서구중심주의 담론에서 서구가 자신과 타자인 비서구 간의 차이를 서술하고 재현하는 과정이 이미 권력을 함축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대상화하고 종속하지 않으면서 재현할 수 있는 대안적 형태의 지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담론이다. 이러한 시도를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io Lyotard),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푸코와 리오타르는 이론과 개념에 의존하는 지식의 전체론적 체계에 회의를 표명한다. 보편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단순성을 분리하여 전면에 배치하고자 시도하는 것에 주된 관심을 가져왔다.
우발적 사건에 대한 관심은 타자를 동일자에 흡수하지 않으면서 지식의 형태를 창출하고자 하는 의도로 연관되어 있으며, 사이드 역시 대상들을 전체론적 도식을 통해 포착하고자 하는 통합된 이해의 형태를 제시하지 않고 다원적 복수의 대상을 그 자체로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을 구축할 것을 제안하며 이를 위해 분석적 다원주의를 제창한다. 사이드는 서구인들이 보는 동양은 본래의 동양이 아니라 부정확한 정보와 왜곡된 눈을 통해 투사된 허상이라 통박하면서 지식과 권력의 상호 불가분적인 담합관계를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양의 문화를 폄하하는 방식으로 기술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의 구체적 실천 방법의 하나로, 이 글에서는 최근 시도되는 서구중심주의적 역사서술의 해체에 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우선 서구중심주의를 ‘서구’와 ‘중심주의’로 분해하여 각각을 바라보면, 중심주의는 그 중심을 신비화하여 이상적인 모습으로 제시한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중심주의 역시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신비화하고 그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또한 중심주의에서 중심은 스스로 보편적 잣대로 타자를 비교하고 평가함으로써 그 타자를 주변화하고 소외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해체주의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서구중심주의에서 중심주의의 해체는 보편적이고 우월적 지위를 누려 온 서구적 사유의 탈중심화, 탈식민지화, 탈유럽(서구)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담론으로서 해체주의는 파편화, 분절화, 개체화의 경향과 함께 극단적 문화상대주의, 낭만주의, 허무주의 등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서구역사와 조형예술에 대한 서술은 중심주의에 의해 신비화되어 있고, 또한 중심주의를 강화한다. 따라서 서구 문화에 대해 내재적 또는 외재적 비판작업은 서구문명에 대한 과장된 이해를 불식하는 동시에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즉 서구문화 자체에 대한 비판이 서구문화에 대한 탈신비화된 이해를 수반한다면, 서구에 대한 비판이 직접 중심주의의 해체로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서구문명의 실상을 파헤치는 것이고, 또한 서구문명의 실상을 파헤치는 것이 서구중심주의를 잠식시키는 이중적 측면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심의 해체와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중심주의에 도전하는 하나의 전략으로 우리는 서구 미술에 대한 서구 기술과 서구 중심적 미술사 기술을 비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곧 서구중심주의적 미술사 기술의 사실 부합성 및 해석의 타당성을 좀더 엄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성희 〈어주도〉 장지에 먹과 채색 126×165cm 2001▶
서구문명의 우월성과 여타 문명의 열등성을 강조하기 위해 서구 중심적 미술사 기술은 다분히 ‘초역사적으로 우월한 서구’ 문명을 부각하고 있으며, 그 원인에 대한 정교하고 세련된 해석학적 이해를 통해 서구문화를 특권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미술의 1950년대 앵포르멜에 대한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에 대한 기원설,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서구 미니멀리즘과의 관련성을 미술사에서 자리 매김하고 서구미술을 한국현대미술의 상속자로 규정하려는 시각 등을 역사적으로 좀더 치밀하게 검토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대안적 해석을 제시하고 서구 중심적 미술사 기술의 오류를 파헤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 미술이론계에서 최근 일기 시작한 ‘한국성’, ‘동양성’에 대한 논의는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 미술계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의 정체성을 동양성 담론과 연관지어 해석해 낸 작업이 그것이다. 한국의 모노크롬에 대해 정신적 차원에서 자기 환원으로 설명하는 이일의 논의에 이어 오광수는 물질을 통해 물질을 지우는 비물질화, 그리는 것을 통해 그린다는 것을 부단히 극복해 보이는 한국 모노크롬은 정서로의 회귀로 해석되는데 이는 이 정서에서 한국인 특유의 환원의식을 보여 준다고 해석한다. “평면은 단순히 그림의 바탕이 아니라 범자연의 소우주로 치환”되는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는 우리 자신의 정서를 발견해 나간 최초의 운동이었다고 한국성 담론과 관련지어 읽어 내고 있다.
오광수의 주장은 한국의 현대미술을 서구미술의 아류로 해석하는 기존의 이론가들의 시각에서 일탈하였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고 한국의 모노크롬과 미니멀리즘, 유럽의 모노크롬 맥락 간의 ‘차이’를 읽어냈다는 데 그 의미가 있으나, 그의 담론은 위에서 언급한 동화적 담론의 전략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을 읽는 데 서구중심주의적 담론의 모순성을 비판하지만, 그 결과는 서구중심주의 담론을 통해 자신의 보편적 주장을 실천하고 있다. 한편 김성희는 서구 타자에 대한 서구 중심적 담론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역전적 담론의 형태를 취한다. 그는 〈어주도〉에서 서구 타자에 대해 자신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자문화의 우월성을 중층적으로 보여 주는 전략을 취한다. 서구문화에 대한 한국문화의 진정한 타자성과 인문주의에 근거하여 제시된 그의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경도와 전통에 관한 관심은, 서구와 비서구 간의 불평등한 관계망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인다.
또한 〈역사와 의식, 독도진경전〉은 전시의 목적 자체가 위에서 언급한 주체와 타자 간의 차이를 한쪽에 종속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전략을 취한 전시다. 강경구와 서용선의 독도풍경에서 독도는 더 이상 일본(또 다른 서구중심주의)과 한국(타자)의 정치적 권력간의 문제를 재현한다기보다는, 독도라는 섬의 그 처절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통해 서구중심의 담론과 타자 간의 차이를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타자를 대상화하거나 종속하지 않는 대안적 담론의 전략을 취하고 있다. 민정기의 〈우리섬 독도 별맞이〉는 주체와 타자를 동등하게 두면서, 독도의 강렬한 아름다움을 동양적 조형언어를 통해 구현하는데, 이것은 마치 미완의 거대한 해방공간처럼 보인다.
이러한 미술계의 움직임과 함께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련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데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그것이 다차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문명은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분명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선도하며 심화시켜 온 반면, 서구사회 특유의 가치와 관행 및 타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체계화하여 왔다. 따라서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서구 문명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 없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작업은 복잡하고 어렵다. 또한 ‘서구적인 것’과 ‘비서구적인 것’의 경계가 모호하고 그것들의 접합양상이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서구중심주의 극복을 위한 담론들을 형성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충돌하거나 대립할 때 서구중심주의가 대체적으로 문제가 되는데, 양자가 합의하거나 일치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야기되지 않는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정관념 탈피, 서구와 조우하는 유연한 길
그러나 양자를 구분하는 작업은 특히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유동성 및 그 관계의 유전성(流轉性), 그리고 양자의 중층적인 접합양상, 사회의 서구화 정도 등의 요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그 문제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경계 설정이 수반되는 모호함은 ‘서구적’인 것을 규정할 때 보이지 않는 준거점으로 작용하는 ‘한국적인 것’ 또는 ‘우리의 것’ 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한다. 즉 이것은 비교 대상에 따라 다양하고 다르게 설정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적인 것’ 또는 ‘우리의 것’이라는 개념은 타자를 전제로 하는 관계적 개념이지 절대불변의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중국이나 일본에 대응하여 내세우는 ‘한국적인 것’과 서구 문화에 대응하여 내세우는 ‘한국적인 것’은 다르다. 예를 들면 한국의 유교전통 일반을 ‘한국적인 것’으로 서구에 내세울 수 있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렇듯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자체적인 변화에 의해 또는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체이며, 동시에 각각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재규정되는 ‘관계 속의 실체’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술에 관해 서구 중심적 이해를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하여 검토해야 할 것이다. ①근대 서구문명의 성취에 대한 통상적인 역사서술이 과연 타당한가. ②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의 문화적 선행변수라고 추정된 것이 과연 타당한가 ③서구의 새로운 성취가 과연 긍정적인가? 서구중심적 세계관이 서구와 비서구에 관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이항대립 - 예를 들면 창조성/모방성, 합리성/비합리성, 마음/몸, 진보/정체, 과학/마술, 정상/비정상 등 - 의 관계항을 비판적으로 지양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문화적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형태의 전략이 동시다발적으로 실험되어 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동화적, 역전적 담론은 부분적으로 해방의 계기를 부여하지만, 그 해방이 완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른 한편 셋째 전략은 그 열망에 있어 완결된 해방을 추구하지만 그 이론적 성과는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가장 현명한 접근방법은 완전한 대안을 찾을 때까지 서구와 조우하는 길, 서구 중심적 이론의 성격 및 삶의 영역에 따라 세 가지 담론의 전략과 유연한 만남을 지속하면서 셋째 전략의 완성을 추구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