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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예레미아 1 : 4 - 9
제목: 부르심
일시: 2008. 12. 7.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부르시고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움직였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호세아 1:1), “여호와께서 브드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요엘1:1),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오바다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요나1:1),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미가 1: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부르심을 위해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계셨다. 5절의 말씀을 보라.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할 평생의 베르푸였다. 즉, 부름을 받아서 하는 일이었다.
II. 부름을 받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예레미야의 반응이 옳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부름을 받는 자는 먼저 자신이 그 일에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 자격이 있어서 불려진 것이 아니라, 아이같이 잘 모르고 부족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예레미야와 같이 아이이다. 말도 못하고 지혜도 부족하고 제대로 뭐 잘 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어제는 프라하에서 한분의 목사님을 안수하고 4분의 안수집사님들을 세우고 한분의 권사님 임직식을 가졌다. 거기서 맡은 순서는 축사였다. 짧은 몇 분의 축사를 준비하면서 과연 임직을 받는 것이 축하할 일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제가 목사안수를 받을 때, 그리고 아내가 사모로 사역을 할 때 사람들은 소위 “그 길”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 길은 무슨 길이길래?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고 주님을 위해 인내하고 섬기고 죽어 살라는 길 아닌가! 어제도 계속,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라는 이야기들이 풍성했을 뿐이다. 힘든 그 길을 가니 오히려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것 같은데, 내게 축하를 하라니... 하지만, 마른 걸레를 짜 본다는 심정으로 무엇을 축하하나 싶었는데, 참으로 축하할 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래서 임직을 받게 되는 분들에게 3가지 이유에서 축하드린다고 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말씀드리면 바로 우리가 자격이 되지 않은데, 불러주셨다는 것이다. 그 말에 모든 임직자들은 동의했다. 임직자들이 답사를 할 때 공히 하는 말은 “부족한 저를” 이었다. 부족한 사람을 부르셔서 직분을 맡겨 감사히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축하의 한 이유가 된다고 한 것이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고 직분을 받은 것에 대해 사용한 용어가 소명도 아니고, 부르심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고, 발탁이었다. 마치 월드컵 대표팀에 23명의 엔트리에 발탁되는 것이 축복인 것처럼,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감독에 의해 베스트일레븐이 되고, 선발로 뛰게 되는 것이 축복인 것처럼 우리는 호명되는 것이 축하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가 있을 수 있다. 나보다 더 뛰어난 솔리스트가 있을 수 있다. 나보다 더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보다 못한 나를 발탁시켜 주셔서 직분을 맡기신 것이 축복할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그의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이요 동역자이고 후배목회자인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것이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되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충성되다고 간주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를 예쁘게 보시고 훌륭하게 보신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신 자녀보다 더 잘난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다”라고 할 때는 그렇게 여겨주는 것이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말 예쁜가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생각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한 줄 알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기에 힘에 부치는 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내게 요구하실 때 내게 가진 것이 없는 줄을 알고 계신다. 우리에게 별로 시간도 없고 재능이 없으신 것도 아신다.
III 부르심을 받은 자가 할 일은 순종하는 것이다.
참으로 예레미야는 난처한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을 통해 범죄한 유다백성을 심판하신다는 슬프고 비통한 소식을 전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 사실을 유다 왕이나 정치인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고 또 말을 하게 될 때 그들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회개할 것인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맡기시는 것은 종종 우리의 영역 밖의 것으로 여겨질 때도 많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능력 밖이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고, 내게 불리하고 손해가 되는 것들을 자꾸 맡기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순종이다. 예레미야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예레미야의 무능력과 부족, 그의 난처한 입장, 아이같이 판단능력도 없고 어찌할 줄 모르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순종하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다. 순종은 자신을 꺽는 일이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레미야의 생각은 “나는 아이라”였지만, 그 생각을 접으라는 것이다. 누가 자기 좋아하는 것만을 하는 것을 가지고 순종한다고 할 수 있는가! 좋아하는 것을 취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도 할 수 있어야 순종이다. 누가 자기 계획만 고집하면 순종할 수 있는가! 내 계획과 주장대로 하면 고집일 뿐이다. 누가 자기 형편과 이익만을 고려한다면 순종할 수 있겠는가! 다른 이들의 사정도 살펴보고 내가 손해를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스스로 종종하는 질문은 왜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도록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죄된 본성 때문이리라.
설주야 오늘 공부하고 피아노 연습하고 집안 정리하고... 이렇게 말하면 순종이 잘 안될 수 있다. 왜냐하면 꺽어야 할 것이 많기에 말이다. 하지만, 설주야 오늘 점심은 라면 끊여먹고 인터넷 유트부에서 하이킥 드라마도 서너편 너가 보고 싶은대로 보다가 원더걸스가 나오면 그 춤추는 것도 연습하다가 오후 느즈막히는 친구 프란츠를 만나서 바이나흐트 구경가서 만델른도 사먹고 저녁으로는 피자헛에 가서 피자를 먹고 저녁때는 놀고 싶을 때까지 놀다가 와라하면 예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순종인가! 그것이 순종을 잘하는 것인가?
순종하는 데는 희생이 따른다. 순종의 제물이 있다. 예수님도 순종을 하기위해 자신을 버렸다. 아담은 불순종의 조상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순종의 어린양이 된 것이다. 순종의 제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아이다. 나를 드리는 것이다. 나를 세우는 그것을 드리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도 드려야 한다. 자존한다는 것은 나를 세운다는 것인데 나를 세우는 것이 무엇인가? 나의 삶에서 그것을 빼면 나는 없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을 자존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인가? 즉, 그의 삶에서 도무지 뺄 수 없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아들 이삭이었다. 주님이 그의 순종여부를 보기 위해서 그를 시험하신 것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즉, 그의 자존까지 버렸다. 나를 세우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까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둘째 아이 혜주가 어릴 때 고집을 피우기에 실컷 설명을 한다. 다 듣고 이해가 간다는 듯한 얼굴을 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주 맥이 빠지는 말이다. “그래도”이다. 설명하는 것도 이해하고 맞다고는 생각이 드는데, 내 마음에는 수용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순종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주님도 그 모습을 볼 때 우리의 버팅기는 모습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실 것이다. 성숙되지 못한 자는 “그래도”가 나온다. “그래도” 신앙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강력하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사람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도 순종하였다. 이삭도 순종의 사람이었다. 야곱도 순종이었다. 순종하는 사람은 속도 없는 사람인가? 아니다. 가장 무서운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순종은 우리를 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순종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기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의 죄의 본성을 꺽어가면서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III.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어제 임직식에서 드레스덴 안창국목사님이 격려사를 했다. 중요한 포인트는 부족하고 자격이 완벽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하시니 너무 두려워말고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하라는 것이었다. 정말 격려가 되는 격려사였다. 우리가 힘을 얻는 구절이 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순종을 하자니 겁이 난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격려가 되는 것은 바로 일을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내가”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내가 너를 세우고 내가 너에게 할 말을 주고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내가 너를 구원하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무엇을 하게 하든지 주체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체자가 될 때는 일이 잘 되도 문제, 못 되어도 문제이다. 1)우리가 “주체자다”라는 생각을 할 때 수고와 고민이 많다. 게다가 일이 못되어 보라.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한다. 스스로를 자책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체자이면 편안하다. “알아서 하시겠지”,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 “내가 손해냐 하나님이 손해시지”라고 하면서 배짱으로 나갈 수 있다. 2)내가 주체자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할 때 일이 잘 되어 보라. 그것은 더 큰 문제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교만이 싹트게 될 것이고 자신이 영광을 받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시편 127편 1,2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주체자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실 때 우리는 귀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비록 깨지기 쉽고 흙으로 만든 그릇이 값싸게 보인다할찌라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그릇에 대한 호칭이 달라질 것이다. 그 안에 고추장을 넣으면 고추장 단지, 된장을 넣으면 된장단지, 간장을 넣으면 간장단지, 술을 넣으면 술단지, 김치넣으면 김치 단지...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나를 날카롭게 갈린 칼로 만들어 놓아라.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손에 의해 내가 결정되고 규정될 것이다.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예레미야는 아이와 같이 미성숙하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고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선지사역속에 그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일하신 것이다.
IV.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지체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오늘은 2008-9년도 일하실 라이프찌히의 일꾼 집사님들과 팀장들을 부르셨다. 걱정이 들기도 할 것이다. 맡겨진 직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좀 바쁜 일이 올해 많을 수 있다. 내 적성에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의 머릿속에 이름들을 거론하셨다. 음성을 들려주셨다. 저의 펜을 굴리게 하셨다. 손가락으로 타자가 가게 만들었다. 주의 종들과 함께 기도하게 하셨다. 축복된 일임을 알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일을 이루며 순종의 모습으로 한해를 잘 감당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