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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Path and Fruit (도와 과)
24-1. Ambition seems to be a natural part of human being
Ambition seems to be a natural part of human being. Some people want to be rich, powerful or famous. Some want to be very knowledgeable and get university degrees. Some want to find a perfect partner, as nearly perfect as possible. Some just want to find a little niche for themselves, where they can look out the window and see the same scenery every day.
욕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 같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 권력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 또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지적인 걸 좋아해서 학위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가능한 한 완벽에 가까운 멋진 배우자를 원하기도 한다. 단지 자그마한 보금자리가 있어 창밖으로 같은 풍경을 내다보기만 해도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
24-2. We are looking for something that is not there
Even when we live in a nunnery, we have ambitions: to become excellent meditators, to be perfectly peaceful, to achieve the rewards of this lifestyle. There is always something to hope for. Instead of being attentive to what is now, we hope for something better to come, maybe tomorrow. Then, when tomorrow arrives, we do the same again. If we were change this pattern of thinking and attend to what is, we would find something to satisfy us. But if we look for some future thing that is more perfect, more wonderful, more satisfying than what exists right now, we won't find it. We are looking for something that is not there.
수행처에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욕망을 가진다. 뛰어난 수행자가 되기를 원하거나 완벽하게 평화롭기를 원하며 수행생활에 무슨 보상을 받기를 원한다. 항상 무언가를 바라며 산다. 지금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다가올 좀 더 좋은 것을 바라며 내일에는 오겠지 한다. 그러다가 내일이 오면 같은 방식으로 원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사고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만족할 만한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완벽하고, 더 멋지고, 더 만족시켜 주는 미래의 어떤 것을 찾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는 셈이다.
24-3. Only in the recognition of each moment can liberation occur
The Buddha spoke about two kinds of people, the ordinary worldling (puthujjana) and the noble one (ariya). Obviously becoming a noble one is a worthwhile ambition, but if we wait for it to happen at some future time, it will escape us. Only in the recognition of each moment can liberation occur. The difference between a noble one and a worldling is the experience of "path and fruit" (magga-phala) consciousness. The first fruit of this supermundane consciousness is termed stream-entry (sotāpatti) and the person who experiences it is a stream-winner (sotāpanna).
붓다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다. 범부(puthujjana)와 고귀한 사람(ariya)이다.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야망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기다린다면, 우리로부터 멀리 도망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매순간에 대해 인지하는 것으로만 해탈은 일어나기 때문이다. 고귀한 자와 세속적인 자의 차이점은 도(magga)와 과(phala) 의식의 경험 유무에 있다. 이 세상을 초월하는 초세속적인 의식의 첫 번째 순간을 경험하는 것을 담마의 흐름에 들어섰다고 하고 그것을 경험한 자를 수다원(sotāpanna)이라고 부른다.
24-4. wrong view of self, skeptical doubt, and belief in rites and rituals
The distinguishing feature of stream- entry is the elimination of the first three fetters binding us to continuous existence. These three are wrong view of self, skeptical doubt, and belief in rites and rituals. Anyone who is not a stream-winner is chained to these three wrong beliefs and reactions that lead away from freedom into bondage.
수다원의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를 계속하게 묶어 두는 첫 세 가지 족쇄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회의적 의심, 의식과 계율에 대한 집착이다. 수다원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이 세 가지 잘못된 믿음과 자유로부터 속박으로 이끄는 반응에 묶여있다.
24-5. we are looking in the wrong direction
Let us take a look at skeptical doubt first. It is that niggling thought in the back of the mind: "There must be an easier way" or "I am sure I can find happiness somewhere in this wide world." As long as we are doubtful whether the path of liberation leads out of the world and whether satisfaction cannot after all be found within the world, we have no chance of noble attainment, because we are looking in the wrong direction.
먼저 회의적 의심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것은 마음 뒤편에서 자꾸 드는 사소하고 성가신 생각이다. “좀 더 쉬운 길이 확실히 있을 것이다.” 또는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 틀림없이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하지만 자유로 향한 이 길만이 세상 밖으로 인도한다는 것에 의심을 지니는 한, 그리고 세상 안에서 그와 같은 만족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한, 고귀한 성취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된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24-6. What are we looking for then?
Within this world with its people and things, animals and possessions, scenery and sense contacts, there is nothing other than what we already know. If there is more, why is it not easily discernible, why have we not found it? It should be quite plain to see. What are we looking for then?
사람과 동물들, 다양한 물질과 우리가 소유한 것들, 풍경들과 감각적인 접촉들로 가득 찬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외에 다른 것들을 찾을 수란 없다. 만약 거기에 또 다른 것이 있다면, 왜 우리가 그것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겠는가? 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겠는가? 그러한 것들은 너무나 명백히 보인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24-7. but they are a waste of time and energy
Obviously we are looking for happiness and peace, just like everyone else is doing. Sceptical doubt, that alarmist, says: "I'm sure if I just handled it a little better than I did last time I'll be happy. There are a few things I haven't tried yet." Maybe we have not flown our own plane yet, or lived in a cave in the Himalayas or sailed around the world, or written that best-selling novel. All of these are splendid things to do in the world, but they are a waste of time and energy as far as inner peace is concerned.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틀림없이 행복과 평화를 찾고 있다. 회의적 의심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자들이 말하는 이러한 것이다. “만약 내가 이전에 했던 것보다 그것을 더 잘 처리한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아직 내가 시도하지 않은 몇 가지 것이 있다.” 아마 아직 자신이 비행기를 날려 보지 않았다든지, 히말라야 동굴에 있어 보지 않았다든지, 배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지 않았다든지, 베스트셀러가 될 책을 써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멋진 것들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내면의 평화에 관심 있는 한, 그것들은 단지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일 뿐이다.
24-8. One knows from one's own experience
Skeptical doubt makes itself felt when we are not quite sure what our next move should be: "Where am I going, what am I to do?" We have not found a direction yet. Sceptical doubt is a fetter that arises in the mind when clarity -that clarity that comes from a path moment- is absent. The consciousness arising from "path and fruit" removes all doubt, because one has experienced the proof oneself. When we bite into the mango, we know its taste. One does not have to force oneself to give up skeptical doubt. What is there to doubt when one has experienced the truth? If one hits oneself with a hammer, one feels pain cannot doubt it. One knows from one's own experience.
회의적 의심은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할 때 느낀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지?” 우리는 아직 가야 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회의적 의심은 도의 순간으로부터 오는 명확성이 없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족쇄다. 도와 과의 순간 일어나는 의식은 모든 의심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망고를 씹으면 망고 맛을 안다. 우리는 억지로 회의적 의심을 제거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진리를 경험하면 어떤 의심이 있겠는가? 망치로 자기 몸을 때리면 아프다.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기 경험으로부터 알기 때문이다.
24-9. the deeply imbedded "this is me" notion
The wrong view of self is the most damaging of the fetters that besets the ordinary person. It contains the deeply imbedded "this is me" notion. There is this "someone" who is meditating. This "someone" wants to get enlightened, wants to become a stream-winner, wants to be happy. This wrong view of self is the cause of all problems.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평범한 사람을 괴롭히는 가장 치명적인 족쇄다. 그것에는 ‘이것이 나다.”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져 있다. 명상을 하는 ‘그 누군가’가 있다. ‘이 누군가’는 깨닫기를 원한다.” ‘담마의 흐름에 들어선 자’가 되기를 원하며,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이런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24-10. When nobody is there, who could have difficulties?
As long as somebody is there, that person can have problems. When nobody is there, who could have difficulties? Wrong view of self is the root of all pain, grief, and lamentation. With it also come the fears and worries: "Am I going to be alright, happy and peaceful? Am I going to find what I am looking for, get what I want. Am I going to be healthy, wealthy and wise?" These worries and fears are well substantiated from our own past. We have not always been healthy, wealthy and wise, nor gotten what we wanted, nor felt wonderful. So there's very good reason to be worried and fearful as long as the wrong view of self prevails.
거기에 누군가 있으면, 그 사람은 문제를 만든다. 거기에 아무도 없으면, 누가 문제를 일으키겠는가?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모든 고통, 슬픔, 비탄의 뿌리다. 또 그로 인하여 두려움과 걱정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괜찮을까, 행복할까, 평화로울까?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건강해질까, 부유해질까, 현명해질까?” 이러한 걱정과 불안은 자신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더욱 구체화된다. 우리는 과거에 항상 건강하거나, 부유하거나, 현명하지 못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도 못했으며 또 항상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예속되는 한, 걱정과 두려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24-11. None of them contain any basic truth
Rites and rituals in themselves are not harmful, but believing them to be part of the path to Nibbāna is detrimental. They need not even be religious, although we usually think of them in that context-for example offering flowers and incense at a shrine, prostrating or celebrating certain festivals and believing that this will accumulate enough merit to go to the deva realms. It is devotion, respect, and gratitude to the Triple Gems (Buddha, Dhamma, Sangha) that count. But rites and rituals are not confined only to religious activities. In our relationships we have certain prescribed ways of acting toward our parents, our children, our partners. How we relates to coworkers, friends, and strangers, how we want affirmed by others- all are connected to preconceived ideas of what is right and proper in a certain culture and tradition. None of them contain any basic truth; all are mind-made. The more ideas we have, the less we can see reality. The more we believes in customary, traditional behavior, the harder it is to abandon it when it is not skillful. If we imagine ourselves to be a certain kind of person, we relates to all situations in that way. So ritual is not solely about the way we put flowers on a shrine. It can also dictate how we greet people, if we do so in a certain stereotyped manner rather than simply with an open heart and mind.
종교적인 의식과 관습 자체가 해로운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닙바나에 이르는 길의 일부로 믿는 것은 이롭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가 보통 종교적인 것으로 여길지라도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제단에 꽃과 향을 올리고, 절을 하고 특정한 날 축제를 열 때 축하하고. 그러한 것들을 믿는 것은 천상의 영역에 갈 수 있는 충분한 선업을 쌓는 것이다. 그것은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고 존경을 보내며 감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의식과 관습이 종교적인 행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에는 행위의 규정된 방식이 있는데, 부모나 자녀들이나 배우자 등에 모두 해당한다. 우리는 직장동료나 친구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우리는 남들로부터 얼마나 인정받기를 원하는가-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가 하는 선입견과 특정 문화와 전통에서 무엇이 적절한지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것들 중 어떤 것도 근본적인 진실은 없다. 관념이 많을수록 실재를 보기 어려우며, 그것이 정교하면 버리기가 더 어렵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방식으로 모든 상황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관습이란 제단 위에 꽃을 놓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를 규정한다. 그렇게 하게 된다면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하기보다는 판에 박은 태도로 하게 될 것이다.
24-12. The only significant to do is going ahead with the practice
These three obstructions fall away when a path and fruit moment has been experienced. There's a marked change in such a person, which is — of course — not externally visible. It would be nice to wear a halo and look blissful. But the change occurs inside. The experience removes all doubt regarding what has to be done in this life. The event is totally different from anything previously known, so much so that it makes one's life, up to that point, immaterial. Nothing can be found in the past that has fundamental importance. The only significant to do is going ahead with the practice: to repeat and fortify this experience of the first path moment in oneself. One must relieve the initial fruit moment, reexperiencing it over and over until the second path moment can arise. One must repeat what one knows and build on it.
이러한 세 가지 장애물은 도와 과를 경험하는 순간 사라진다. 도와 과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현저한 변화가 있으나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후광이 비친다든지 축복 받은 것이 보인다면 멋질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 경험은 이번 생에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게 한다. 그 사건(?)은 이전에 알았던 그 어떤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 그러기에 그것은 이전에 경험한 삶을 보잘것없는 수준으로 만든다.
과거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함을 지닌 것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수행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며, 도의 순간에 일어났던 경험이 그 자신 안에서 반복되고 강화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도의 순간이 일어날 때까지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 과의 순간들을 소화시켜야 한다. 아는 것을 되풀이해야 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쌓아 나가야 한다.
24-13. it goes deeper and further
The path and fruit moments recur for the once-returner (sakadāgāmi), the non-returner (anāgāmī) and the Enlightened One (arahant). Each time they make a deeper impact. We could compare this to having examinations at the university. If we go through four years of university study to get a degree, we have to pass examinations at the end of each year. We have to answer questions each time, based on our previously absorbed knowledge. But the questions become more intricate and more difficult with each subsequent examination. While they are always concerned with the same subject, they require more depth of understanding each time. Until we finally graduate and do not have to return to university. It's the same with our spiritual development. Each path moment is based on the previous one and is concerned with the same subject, yet it goes deeper and further, until we pass our final test and need not return.
도와 과의 순간들은 사다함, 아나함 그리고 아라한에게는 다시 일어난다. 매 번 그것들은 더욱 깊은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대학에서 시험을 치는 것과 비유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학위를 받기 위해 4년간 대학에 다닌다면, 매 년 학기 말에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매 번 시험을 치르면서 그 전에 흡수한 지식들에 근거하여 답변하여야 할 것이다. 그 질문들은 시험이 계속되면서 보다 복잡해지고 어려워질 것이다. 항상 동일한 주제와 관련된 것이지만 매번 더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우리의 정신적인 계발도 이와 같다. 매번 도의 순간은 그 전의 것에 토대를 두고, 같은 주제와 관련되어 있으나 더 깊고 더 진일보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여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을 때까지 계속된다.
24-14. understands experience with a totally new vision
The path moment doesn't have any thinking or feeling in it. It is not comparable to the meditative absorptions (jhāna). Although it is based on them (only the concentrated mind can enter into a path moment), it does not have the same qualities. The meditative absorptions have — in their initial stages — the ingredients of rapture, happiness and peacefulness. Later on, the mind experiences expansion, nothingness and a change of perception. The path moment does not contain any of these states of mind.
도의 순간에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그것은 집중을 통하여 얻는 선정(Jhana)과 비교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선정에 토대를 두지만(집중된 마음만이 도의 순간에 들어 갈 수 있다) 질이 다르다. 선정은 초기에는 기쁨, 행복, 그리고 평정심의 요소들을 지니며 나중에 그 마음은 무한한 공간으로 팽창, 텅 빈 느낌, 공간과 지각의 변화를 경험한다. 하지만 도의 순간에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전혀 지니지 않는다.
It has a quality of nonbeing. This comes as such a relief and changes one's world view so totally that it is quite understandable that the Buddha insisted on the distinction between a worldling and a Noble One. While the meditative absorptions bring feeling of oneness, of unity, the path moment leaves such feelings behind. The subsequent moment of fruition understands experience with a totally new vision.
그것은 무아의 자질을 지닌다. 이것은 굉장한 안도감으로 다가와서는 세상을 보는 눈을 완전히 바꾸어서 붓다께서 구분한 세속적인 자와 성자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선정은 대상과 하나가 된 통일된 느낌을 수반하나, 도의 순간에는 그런 느낌을 내려 둔다. 연이어 일어나는 과의 순간은 완전히 새로운 비전으로 경험을 이해한다.
24-15. Once one sees this, one's passion for wanting anything dies away
The new understanding recognizes every thought, every feeling as stress (dukkha). The most elevated thought, the most sublime feeling still has this quality. Only when there is nothing, is there no stress. Nothing - no internal or external thing-has the quality of total satisfactoriness. Once one sees this, one's passion for wanting anything dies away. One sees all things for what they really are, and one knows that nothing can give the happiness that arises through the practice of the path.
그러한 새로운 이해는 모든 생각과 느낌을 두카로써 인식한다. 가장 고양된 생각과 숭고한 느낌도 두카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을 때, 어떠한 괴로움도 없다. 내적이나 외적으로 완벽한 만족의 자질을 지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단 두카를 보면, 어떤 것을 원하는 열정은 사라진다. 모든 것에 대하여 실재하는 것을 보면, 도를 실행함으로서 일어나는 행복감은 어디에도 없음을 안다.
24-16. no more unhappiness, only peace
The Nibbānic element cannot be truly described as bliss, because the word "bliss" connotes exhilaration. We use this word for the meditative absorption, where it refers to a sense of excitement. The Nibbānic element does not recognize bliss because all that arises is seen as stress. The phrase "The bliss of Nibbana" may give one the impression that one may find perfect happiness, but the opposite is true. One finds that there is nothing -no more unhappiness, only peace.
진실로 닙바나는 축복으로 표현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축복이란 표현에는 유쾌함이라는 함축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축복이란 단어를 선정의 상태에서도 쓰는 데, 그것은 감각적인 흥분을 포함하고 있다. 닙바나의 특질은 축복이라고 인식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괴로움으로 보기 때문이다. ‘닙바나의 축복’이란 그가 완벽한 행복을 발견할 것이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거기에서 발견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 불행함도 없고 오직 평화로움만 있다.
24-17. this is the only worthwhile one
To look for path and fruit moments will not bring them about, because only moment to moment awareness can do so. This awareness will eventually culminate in real concentration, where one can let go of thinking and be totally absorbed. We can drop the meditation subject at that time. We need not push it aside, it falls away of its own accord, and absorption in awareness occurs. If there has to be an ambition in one's life, this is the only worthwhile one. No others will not bring fulfillment.
도와 과를 찾는다면 그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직 순간순간의 알아차림만이 도와 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마침내 참된 집중에서 극에 달하는데, 그러면 생각들을 놓아 버릴 수 있고, 완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때 명상 주제를 놓을 수 있다. 그것을 한 쪽에 제쳐 둘 필요 없이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알아차림 안에서 집중이 일어난다. 만약 자신의 삶 안에서 어떠한 야망이 있어야 한다면, 이것만이 유일하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할 만한 가치가 없다.
24-18. one will act out of a spontaneous, open heart
Rites and rituals cease for a stream-enterer because the person who has experienced a path moment under no circumstances indulges in any role-playing. All roles are the ingredients of unreality. One may continue to observe religious rites, because they contain aspects of respect, gratitude and devotion. But no longer relates to people or situations through rituals or stories that one has invented. Instead one will act out of a spontaneous, open heart.
수다원이 되면 종교적인 의식과 관습에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의 순간을 경험한 자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특정한 역할에 매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역할은 비현실적인 요소로 되어있다. 종교적인 의식을 지속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존경과 감사 그리고 헌신의 모습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의식이나 이야기를 통해서 더 이상 사람들이나 상황과 연관 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즉각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행동할 것이다.
24-19. the most profound change
Letting go of the wrong view of self is — of course — the most profound change. For the stream-winner the wrong view of self can never arise again, but feelings associated with it can, because the path moment has been singular and fleeting. It has not made a complete impact yet. Had it done so, it would have resulted in Enlightenment. It is possible (the Buddha's discourses mention this) for all four stages of holiness to be realized while listening to one exposition of the Dhamma.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놓아 버리는 것은 물론 가장 심오한 변화다. 흐름에 들어선 자에게는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느낌은 일어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도의 순간이 단 한번 빨리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영향을 아직 완전한 다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완벽한 영향을 주었다면 깨달음이 일어났을 것이다. 붓다께서 법문에서 이런 언급을 하셨듯이, 담마를 듣는 동안 성스러운 네 단계가 모두 일어날 수 있다.
24-20. ordinary problems become less
It is useful to remind ourselves in all waking moments that body, feeling, perception, ment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have no core substance, are all impermanent, changing from moment to moment. Whether we have had a direct vision of nonself or just an understanding of it, we have to bring that realization back into our minds and relive it as often as possible. As we continue to do this, ordinary problems become less of an obstruction. If we remain aware of the impermanence of all that exists, our difficulties seem far less important and the view of self subtly changes.
깨어 있는 순간에는 언제나 몸과 느낌, 지각, 정신적인 형성력과 의식이 어떠한 실체도 없으며, 매우 무상하여 매 순간 변한다는 것을 자신에게 일깨우는 것은 아주 유용하다. 무아에 대한 직접적인 비젼을 지녔거나, 지니지 않았더라도 단지 무아에 대한 이해만 있다면,
그 중 하나를 자신의 마음에 가져와서 가능한 자주 그것을 되새겨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을 지속하면 할수록, 일상적인 문제는 점점 덜 방해가 된다. 만약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무상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의 어려움은 덜 중요하게 보일 것이고, 자아에 대한 견해는 조금씩 변한다.
24-21. The view we have of ourselves is our worst enemy
The view we have of ourselves is our worst enemy. Everyone has invented a persona, a mask that one wears and we do not want to see what is behind it. We do not allow anyone else to look either. After having had a path moment, we no longer feel the need to maintain our persona. But without the experience if anyone should even try to look behind our mask, fear and rejection come to the fore. The best antidote is to remember again and again, that there is really nobody there, only phenomena. Even though our inner vision may not be developed enough to substantiate such a claim, the affirmation helps to loosen our grasp and cling a little less tightly.
우리의 견해가 가장 해로운 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가리는 덮개, 즉 가면을 쓰고 있으나, 정작 그 가면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자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허용하지도 않는다. 도의 순간을 경험한 후에는, 그것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 없이 마스크 뒤에 있는 것을 보고자 한다면 두려움과 거부감은 표면화된다. 최선의 해독제는 거기에 아무도 없으며, 오직 현상일 뿐임을 되풀이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비록 내적인 앎이 그와 같은 주장을 입증할 만큼 충분히 확고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확신은 집착이 느슨해지도록 도울 것이고, 보다 덜 매달리게 할 것이다.
24-22. all caused by "self"
The direction of the practice is certainly toward stream-entry. However, there is nothing to get, and everything to give up. Unless we relinquish all we cling to, the moment cannot happen, and we will continue to live the same way we always have-beset and obstructed by dukkha, and subject to praise and blame, loss and gain, fame and ill-fame, happiness and unhappiness. The usual problems — all caused by "self" — will arise again and again. The real change begins with a decisive alteration in the way we view ourselves. Otherwise the difficulties remain, recreated by the same unchanged person.
수행의 방향은 확실히 흐름에 드는 것으로 향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무엇도 얻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집착하고 있는 것을 모두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은 일어나지 않으며, 우리는 항상 지녀왔던 같은 방식의 삶을 지속하게 될 것이다. 두카(dukkha,괴로움)를 당하며 두카에 둘러싸여, 칭찬과 비난, 이익과 손해, 명예와 불명예,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지배를 받는다. 자아(‘나’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야기되는 통상적인 문제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참된 변화는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에 대한 결정적인 변화가 있을 때 나타나고, 그렇지 않으면 힘듦은 그대로 남는다. 그 이유는 변하지 않은 똑같은 자가 같은 짓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24-23. Until we see it, the world will keep calling
We can read about disenchantment and dispassion as steps on the path to liberation and freedom. They cannot have meaning and impact unless we have a vision of a totally different reality, one that does not contain the world's manifoldness. When we sit in meditation and start thinking, this is mental diversification and expansion(papañca). The Nibbānic element is unitary, not manifold. One could say that it is empty of all that we know. Until we see it, the world will keep calling. But we need not believe it all. This is a difficult task, and we must remind ourselves of this often, lest we gets caught in temptation.
지금까지 우리는 해방과 자유로 향하는 길에서 환멸을 느끼고 냉정해 지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완전히 다른 실재에 대한 앎이 없는 한, 그리고 이 세상의 다양함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그 의미와 영향력을 지닐 수 없다. 좌선에 들어가서 생각이 시작될 때, 바로 그것은 생각의 다양함과 관념 확산(papañca)이다. 닙바나의 요소는 다양함이 아니고 하나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그 모든 것들이 비어 있는 것(아무런 실체가 없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함이 보이기 전까지 이 세상은 끊임없이 시비를 걸 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자주 상기하고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24-24. But do these bring fulfillment?
Certainly one can experience pleasure from the senses. If we have good karma, there will be many occasions-delicious food, beautiful scenery, pleasant people, good music, interesting books, a comfortable home, not too much physical discomfort. But do these bring fulfillment? Since they have not done so in the past, why should they in the future? Path and fruit bring fulfillment because they are empty of phenomena. Emptiness neither changes nor becomes unpleasant, and it cannot lack peace, since there is nothing to disturb it.
확실히 감각으로부터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만약 선업을 지녔다면,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경치, 즐거운 사람들과의 만남, 좋은 음악 그리고 흥미로운 책, 편안한 집, 육체적인 불편함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떤 만족을 가져오겠는가?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미래에 일어나겠는가? 도와 과는 만족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비어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공(空)은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쾌하게 되지도 않으며 평화로움이 부족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24-25. there is nothing worthwhile to be had
When people hear or read about Nibbāna, they are apt to say: "How can I want nothing?" When one has seen, however, that every single want we have is mean to fill an inner void and dissatisfaction, then the time has come to want nothing. Wanting nothing goes beyond "not wanting" because one now accepts the reality that there is nothing worthwhile to be had. Wanting nothing makes it possible to experience that actually there is nothing — only peace.
사람들은 닙바나에 대해서 듣거나 읽으면 곧잘 이렇게 되묻는다. “어떻게 내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만약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하나가 한낱 내적인 공허감을 채우는 것일 뿐, 또 불만족이 온다는 것을 알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가 온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원하지 않는 것”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없다는 실상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오직 평화뿐이다.
24-26. with patience and perseverance
Being mindfully aware in and out of meditation is the practice that brings results. It means doing one thing at a time, attentive to mind and body. When listening to Dhamma, just listen. When sitting in meditation, just attend to the meditation subject. When planting a tree, just plant. No frills, no judgements. This habituates the mind to be in each moment. Only in such a way can a path moment occur, here and now. There is no reason why an intelligent, healthy, committed a person should not be able to attain it with patience and perseverance.
알아차리고 있음을 계속 알아차리다 보면 어떤 결과가 온다. (이 문장은 해석을 잘 못하겠음) 그것은 몸과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 한 순간에 하나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담마를 들을 때는 담마만 듣고 좌선할 때는 명상주제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나무를 심을 때는 나무를 심는다. 가식도 없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마음을 매순간마다 길들인다. 이런 방식으로 해야 도와 과가 일어난다. 지성적이고 건강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인내와 끈기로 하면 도와 과를 성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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