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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1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책소개>
걸어라 서쪽으로.
문명의 달빛을 따라
“새 길을 내고 싶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공간적 장벽을 허물고,
전통과 근대 사이의 시간적 단층을 돌파해내고 싶었다. 유라시아의 길을 걷고 싶었다.”
미래는 다시 ‘유라시아의 길’로 열린다!
젊은 역사학자 이병한의 ‘유라시아 재통합’ 현장 견문 3부작, 첫째 권 출간!
젊은 역사학자 이병한의 장대한 유라시아 견문록 제1권.
저자는 전작 ≪반전의 시대≫(2016)에서, 패권경쟁과 냉전질서로 유지되던 이제까지의 세계체제가 막을 내리고 좌/우, 동/서, 고/금의 반전(反轉)이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이를 ‘반전의 시대’라 명명한 바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반전’의 시대적 징후를 유라시아 도처에서 목도하며 증언하는, 성실하고 통찰 가득한 견문록이다. 단순한 기행이나 여행이 아니라, 가깝게는 ≪서유견문≫을 잇고 멀리는 동방의 전통적인 연행록 혹은 견문록을 계승한다.
저자는 2015년 2월부터 3년 여정의 ‘유라시아 견문’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방콕, 하노이, 자카르타, 울란바토르, 프놈펜,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마닐라, 시안, 우루무치, 카슈가르, 쿤밍, 양곤, 델리, 뭄바이, 라호르, 카슈미르, 다카, 테헤란, 이스탄불 등 유라시아 곳곳을 누비며 이제 막 견문의 반환점을 돌고 있다.
이 기나긴 여정에서 저자가 목도한 것은, 지금의 세계가 단지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이동한다거나 혹은 인도가 부상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패권적 세계체제 자체가 끝났다는, 그리고 근대 이전까지 존속해왔던(즉, 단지 지난 1~2백 년간 망실해버린 것에 불과했던) 거대한 유라시아망이 다시 연결·복원되는 지각변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세계는 지금, 서구 자본주의의 승리를 예견하는 ‘역사의 종언’(프랜시스 후쿠야마)이나, 이데올로기 대신 종교가 부흥하면서 종교/문명 간 전쟁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문명의 충돌’(새뮤얼 헌팅턴)을 넘어, ‘유라시아 재통합’의 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다시 말해 석탄의 대량 이용이 시작된 19세기 ‘대분기’(데이비드 포머란츠)와,
자본주의 ‘악마의 맷돌’이 세계를 집어삼킨 20세기 ‘대전환’(칼 폴라니)의 시대를 지나,
이제 유라시아의 ‘대반전’으로 수렴되는 문명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라시아 견문≫이라는 이 3부작 전체가, 그러한 반전시대를 증명하는 거대한 주석이자 생생한 사례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전체의 과거-현재-미래를 함께 조망하며, 역사사회학적인 시선으로 포스트-근대를 그려본다.
나라별로 토막났던 국사(國史)들이 하나의 지구사(유라시아사)로 합류한다.
아울러 자본주의 이후, 민주주의 이후를 고민하며 좌/우, 동/서, 고/금의 합작을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다른 백 년’의 길을 모색해본다.
<저자: 이병한>
연세대학교 학부에서 사회학을,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중화세계의 재편과 동아시아 냉전: 1945~1991>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교 국제학대학원, UCLA 한국학연구소, 베트남 하노이 사회과학원, 인도 네루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등에서 공부하고 연구했다.
월간 《말》 편집위원, 창비 인문사회 기획위원, 세교연구소 상근연구원 등을 지냈다.
2015년부터 <프레시안> 기획위원으로 3년 여정의 ‘유라시아 견문’을 진행 중이며, ‘한반도의 통일’과 ‘동방 문명의 중흥’을 견인하는 ‘Digital-東學’ 운동을 궁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반전의 시대》(2016, 서해문집)가 있다.
1978년 11월에 태어났다.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혁개방 정책이 공식화되던 무렵이다.
얼추 2050년까지, 인생 전체가 그 자장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난 곳은 경남 거제도이다. 저자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고향이다.
1·4 후퇴 때 흥남에서 만삭의 몸을 이끌고 미군 배에 오른 이가 할머니였다.
미군이 내려다준 곳이 바로 거제도다. 일제가 개발해둔 항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여생을 나신 집도 다다미방이 시원한 2층 목조 가옥이었다. 할머니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쪽 섬에 묻히셨다. 아버지도 흥남 땅을 밟아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세월이다. 삼 대째 되는 자신만이라도 꼭 흥남으로 돌아가 살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윤씨 사람이다. 충남의 사대부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문명 개화’의 물결과 더불어 가세는 차차 기울었다. 식민지가 되고 분단국이 되고 전쟁을 겪으면서 가파르게 몰락해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소용없는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떳떳하고 꼿꼿하셨다. 무력과 금력이 횡행하는 시대에도 자존심과 자부심까지 잃지는 않았다. 동방 문명의 기저에 깔려 있는 그 단단한 자긍심을 이어가고 키워가고 싶다.
<출판사 리뷰>
중화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상호 진화,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3부작 가운에 이번에 출간된 제1권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는, 중화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문명 간 교류와 재건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면서, 유라시아의 실크로드와 초원길과 바닷길이 다시 연결되고 부활하는 감동을 전해준다. 거기에다 새 천년에는 하늘길과 온라인이 더해져, 세계는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다.
가장 큰 축은 역시 중국이 2013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일 것이다.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One Belt)와, 동남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One Road)의 옛 길을 다시 복원해낸다는 구상이다.
예컨대 중국의 신장 우루무치에서 아라비아 해에 자리한 파키스탄의 과다르 항까지 도로, 철도, 송유관, 광섬유케이블 등이 연결되는 ‘경제회랑’이 건설되고 있다. 즉 파키스탄을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기점으로 삼으면서, 이제 과다르 항은 남아시아의 허브가 되고 있다.
또한 대당제국의 수도였던 장안이 과거 중원의 대운하와 서역의 비단길이 합류하던 곳이었듯,
현재의 시안도 내륙의 실크로드 프로젝트와 직결되면서 이국적이고 혼종적인 세계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그래서 “시안의 미래는 장안”이며, “미래 세계가 고대 중국으로” 향하는 것이다. 신세계는 기울고, 구세계는 다시 차오른다.
한편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가 점차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국가들을 수용해가는 양상도 흥미롭다. 최근 인도와 파키스탄이 정식 회원국이 되면서 그 영역은 더욱 넓어졌는데, 준회원(옵서버, 대화 파트너) 국가까지 포함하면 유라시아의 거의 대부분을 포괄한다.
이는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배타적·냉전적 동맹의 성격과 극명히 대비된다.
게다가 이란의 핵 협상 타결 후 ‘정상국가화’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이란의 ‘동방 정책’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곧 이란이 SCO의 회원국으로 참여하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산업혁명의 원조이자 신자유주의의 고향인 영국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결단하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의 AIIB 가입이 봇물을 이루었다. 아편전쟁 이래 200년의 세계체제가 저물어가고, 이제 신동방무역 시대를 맞아 유러피언 드림과 중국몽이 합류하면서 유라시아 르네상스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비단길 프로젝트가 있다면, 인도에는 면화길이 있다. 인도는 이미 러시아와 함께, 이란을 통해 양국을 잇는 남북 회랑을 구상 중이다. 이란, 남아프리카공화국, 아세안, 인도네시아 등 인도양 주변의 세계를 아우르며, 신드바드가 바그다드에서 인도양을 거쳐 중국 광저우를 향했던 것처럼 과거 인도양 세계의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인도양을 둘러싼 이슬람 세계의 부흥도 활기를 띤다. 명실상부 아세안 최대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대표적인 무슬림 국가다. 1955년 수카르노(인도네시아)와 네루(인도), 저우언라이(중국), 나세르(이집트) 등의 정상들이 모였던 반둥 회의(아시아-아프리카 회의)의 정신이 60년 뒤 다시 꽃을 피워 “자유”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인도태평양 시대’의 ‘역동적 균형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또 다른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서 ‘이슬람 경제’를 일구어냈다(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에는 IMF에 맞서 비서구적 세계화를 추진했다).
즉 이슬람의 성경인 ‘코란’의 율법에 따라 도박성과 불확실성, 착취적 요소를 포함한 경제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원천적으로 불로소득인 이자를 인정하지 않고(은행 이자는 간통보다 36배 나쁘다고 한다) 투자 리스크를 공유하는 독창적인 ‘이슬람 금융’을 수립했다.
월 스트리트의 아성에 도전하는 할랄 스트리트의 구현이다.
그리고 이슬람 전통에 기반한 할랄 산업이 점차 확산되면서 이제는 소비 공간 자체가 이슬람화하고 있다. 특히 깨끗하고 윤리적인 할랄 식품은 시대적 트렌드에도 부합하여, 중국의 무슬림을 비롯해 유럽 각지의 무슬림들에게도 확산되면서 이미 세계인이 즐기는 식품이 되고 있다.
유라시아의 한복판인 신장 우루무치와 카슈가르는 그야말로 코즈모폴리턴의 세계다. 중국 최서북단에 위치한 우루무치는 사실 베이징과 상하이보다 테헤란(이란)과 뉴델리(인도)가 더 가깝다. 아랍어와 중국어와 러시아어에 능한 위구르인들의 유라시아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중화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섞여든다.
인구 또한 급격히 증가하면서 한족들만이 아니라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이란과 터키, 러시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유라시아의 한복판에 ‘범이슬람 1일 생활권’이 형성되고 있다. 또한 중화세계의 서쪽 끝이자 파키스탄에 인접한 카슈가르 역시 인구의 9할이 위구르인들로서, 중화문명과 인도 문명, 이슬람 문명과 유럽 문명이 어우러진 다문명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유라시아의 남북을 잇는 초원길은 어떤가? 유라시아의 거시적 통합의 마지막 열쇠를 쥔 것은 바로 몽골이다. 몽골은 세계 두 번째, 아시아 첫 번째 공산국가를 거치는 동안 사실상 소련의 속국으로 살았으나, 1992년 ‘붉은 몽골’이 사라진 이후에는 다시 동방으로 귀환하고 있다.
2015년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 중국의 일대일로를 통합하고자 하는 중-러 간 ‘동맹’의 구상에서 몽골의 역할은 실로 다대하다.
유라시아형 세계체제를 복구해가는 21세기에 몽골은 다시 동서남북을 잇는 ‘가교국가’로 비상하는 것이다.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왕년의 초원길을 대신한 하늘길이 분주하고, 유목민의 후예답게 울란바토르 시민의 절반이 외국 생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북방에서도 오래된 세계가 새롭게, 다시 펼쳐진다.
좌-우. 근대-전근대. 서구-비서구.
3중의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유라시아/사’의 재구성
이 책의 미덕은 단지 유라시아의 현재를 보여주는 유라시아-사(事)에서 멈추지 않는다.
곳곳에서 지난 세기 동안 단절되고 일그러진 유라시아-사(史)를 온전히 복원해내고 있다.
근대의 유럽과 태평양에 편중된 영·미 중심의 역사 기억을 바로잡는,
이른바 ‘역사전쟁’, ‘기억전쟁’이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을 ‘태평양전쟁’으로 축소시키는 명명에서 벗어나, 소련과 중국이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을 격퇴한 ‘유라시아 전쟁’으로 자리매김한다.
아울러 중국공산당의 ‘붉은’ 대장정 외에 또 하나의 대장정, 즉 장제스의 국민당이 충칭으로 대장정을 떠난 역사를 재조명한다.
상하이 전투와 난징 대학살을 거치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버텨낸, 항일의 최후 보루였던 1937년의 충칭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충칭 시민들은 방공호의 공포에서 자그마치 8년을 떨어야 했고,
중국은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오래 전쟁을 치른 나라이자 가장 많은 사람이 죽고 가장 많은 피난민이 발생한 나라였다. 그러므로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은 명백히 소련과 중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에서 속국 민주화로 이행한 필리핀의 ‘슬픈 민주주의’의 뿌리를 들여다보고, 캄보디아의 ‘적색 킬링필드’에 가려진 미국의 ‘백색 킬링필드’도 주목해본다.
‘붉은 라오스’의 탄생에 깃든 인도차이나의 근현대사와, 몽골 분단의 비밀도 세심하게 더듬어본다.
또한 중국 윈난에서 미얀마, 태국, 라오스의 국경 지대까지 이어진 버마 로드의 흔적을 더듬고, 작금의 우크라이나 사태의 기원을 ‘나치의 후예’(우리로 치면 친일파)들의 등극에서 찾아낸다.
이 외에 ≪서유견문≫과 ≪대당서역기≫와 ≪서유기≫에 대한 창조적 독해, 캉유웨이의 ≪대동서≫와 ‘대동’의 계보, 포스트-몽골 시기에 대청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서로 다른 향방 등을 읽는 재미는 덤이다.
이 책은 이렇듯 유라시아의 과거와 현재가 씨실과 날실처럼 종횡무진 엮이면서, 다채로운 ‘유라시아/사’를 재구성한다. 지난 세기, 구미의 세계질서가 일방으로 주입되면서 문명적 질서가 모두 붕괴되고 국가별로 쪼개져서 무한경쟁을 반복해왔다.
중국의 부상이니 인도의 부상이니 하는 작금의 세계인식 또한 국가 중심으로 사고하는 20세기형 지정학과 국가간체제(Inter-state system)의 소산이었다. 하여 새 천년 초원길과 바닷길의 복원은 판갈이의 출발이다. 백 년간 끊어지고 막혔던 동-서의 혈로를 다시 뚫어 물류와 문류(文流)를 재가동하는 유라시아의 재활운동이다.
국경(Border)이 통로(Gateway)가 되어 문명과 문명을 잇는다.
지리는 재발견되고, 지도는 다시 그려진다. 21세기의 대세이고 메가트렌드이다.
유라시아 지성들과의 인터뷰,
서구-근대에 편향된 한국 지식인 사회에 일침을 가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백미는, 유라시아 곳곳의 지식인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지성의 향연이다. 한국에 소개된 해외 사상가들이 워낙 서구에 편중되어 있기에, 저자는 지적 재균형을 위해서라도 유라시아 여러 문명, 여러 나라의 저명한 인사들을 만나 자신의 견문과 소회를 재차 확인한다.
예컨대 일대일로의 설계자인 중국 학계의 거물 후안강을 만나 일대일로의 사상을 직접 듣고 질문을 던진다. 이른바 ‘중국학파’ 가운데 사상 면으로는 왕후이, 외교 면으로는 옌쉐퉁과 함께, 경제 방면으로 대표적인 인물이 후안강이다.
2000년부터 중국 내정을 연구하는 칭화대학교 국정 연구원장을 맡아 ‘슈퍼차이나’, ‘중국몽’, ‘일대일로’, ‘신상태’ 등 최근 널리 회자되는 개념과 조어가 거의 그의 연구에서 비롯됐거나 구체화되었다. 후안강은 일대일로 사상의 핵심으로 ‘지리 혁명, 공영주의, 천인합일’을 꼽았다.
즉 향후 중국은 ‘책임대국’으로서, 일대일로라는 일종의 지리 혁명의 새 공간을 ‘윈-윈의 공영주의’와 ‘생태 문명 건설’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채워나가겠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키쇼어 마부바니(싱가포르대학교 리콴유공공정책대학 학장)도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으며 아주 새로운 영감을 선사한다. 흔히 싱가포르를 독재국가라고 일컫는 데 대해 마부바니는 그야말로 “시각이 좁은 것”이라며 일축한다.
모든 국가의 역사적 발전 경로가 하나뿐이라는 터무니없는 세계관에 빠져 다른 역사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사고를 못하는 서구 중심주의의 발로라는 것이다.
오히려 작금의 서구 민주주의야말로 대중에 아부하고 편승하는 정당이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면서 국가 운영을 방만하게 하는, 민주국가의 커다란 ‘역설’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일당제 국가인 싱가포르는 최고의 엘리트를 공정하게 선발하여 국가에 헌신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공공주택, 공공의료, 공공교육 등에서 이미 세계적인 성취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빈곤도 거의 없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라고 말한다.
서구의 국가들이 종교국가에서 세속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확보가 그만큼 중요했던 것과 달리, 중국이나 싱가포르는 ‘사대부’와 같은 비판적 지식인을 내부로 포용하는 세속국가의 경험이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서로의 역사적 경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인도 출신으로 시카고대학에 있다가 최근 싱가포르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프라센지트 두아라는 ‘서구적 근대’가 아닌 ‘지구적 근대’의 시대인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즉 서구에서 주도하던 ‘탈근대’ 담론이 아니라 ‘탈서구적 근대’, 즉 서구를 여럿 중 하나로 담아 안는 ‘지구적 근대’의 담론이 필요한 때이며, 따라서 그에 걸맞은 새로운 모델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더 이상 진보, 발전, 성장 등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지구의 지속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종교와 영성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동아시아의 ‘하늘’이라는 개념이나 남아시아의 ‘다르마’(법, 도),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 같은 고전 종교들의 세계관을 재사유하면서,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와 같은 근대적 인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를 주체로 내세우지 않고 자아를 극복하려 했던 다양한 수련들을 복구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원래 철학의 일종이자 진리 추구의 방편이었던 요가와 쿵푸 같은 수행마저 단순히 몸 가꾸기로 변질되어 신체마저 자본의 영토가 되어버렸다며, 아직 ‘뉴에이지’는 도래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이 외에도 중국의 민간 유학자인 장칭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넘어 왕도정치를 주장하며 ‘의회 삼원제’를 제안한다.
즉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합법성을 대의하는 기구로서 일종의 유림정치를 행하는 ‘통유원’(通儒院), 민의를 대표하며 서구 민주주의의 의회를 수용한 ‘서민원’(庶民院), 그리고 각종 종교단체나 교육기관 또는 비정부기구 인사 등의 망라하여 역사와 문화를 대변케 하는 ‘국체원’(國體院) 등 3체제의 의회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물론 각 의회마다의 선출 방식은 그 성격에 맞게 선발제, 선거나 추첨제, 세습 혹은 추천제 등으로 달리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인 유학자’와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 서구적 좌파에서 이른바 ‘유교 좌파’로 ‘전향’해 칭화대학교 교수로 재임 중인 대니얼 A. 벨이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을 ‘중국 모델’에서 찾고 있다.
그는 현대 민주국가의 선거가 갈수록 시장화·미디어화되면서, 선거의 정치문화가 점점 예능산업이나 스포츠산업과 같은 소비문화와 유사해진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미국의 대통령 선거 과정은 메이저리그 야구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선거정치 자체가 월 가와 거대 자본, 거대 미디어에 좌우되고 있는데도 유권자들은 마치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듯한 착시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공산당원의 선발과 승진의 내부 시스템에 착안해 ‘정치적 실력주의’에 주목한다. 즉 기층과 상층을 나누어서 풀뿌리 자치는 ‘민주주의’로, 국가 통치는 ‘실력주의’로 가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시아의 전통적인 과거제를 선거제와 접목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전 지구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근대 세계체제(자본주의, 민주주의) 이후의 대안 찾기에 골몰한 유라시아 지성들의 뜨거운 목소리를 듣다 보면, 한-미-일의 냉전적 동맹체제에 갇혀 퇴행을 거듭하는 우리 사회의 앞날이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우리 사회가 하루 빨리 ‘헬조선’에서 탈출하고 ‘지속 가능한 지구와 인류 만들기’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영감과 혜안을 얻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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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보다 젊고 똑똑한 이병한 작가를 통하여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라시아>의 숨겨진 역사를 접하고...
막연히 알고만 있던 나의 작은 앎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공부하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