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십대 초반의 한 남편 분 고백입니다. 최근에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겁니다.
그것도 동창회에서 만난 남자 동창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올해 초까지 아무런 일이 없이 살아왔습니다.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한 가정, 그저 성실하게 일해 온 것 밖에 없는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남편은 "5월에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 동창에게 그렇게 쉽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 고 합니다.
처음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주변사람들이 하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분은 외면상으로 볼 때는 완벽한 사람입니다. 교과서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큰소리 내면서 부부싸움을 해 본 일도 없습니다.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적도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게을리 한 적도 없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해 달라는 거 다해 줬습니다. 오로지 한 길로만 열심히 달려왔다고 자부합니다.
아내와도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왔기에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 부부였으며 올 봄에는 등반도 함께 다녀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외도를 하게 되었고 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부관계에선 '어느 날 갑자기' 란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사고방식은 아날로그식 사고방식이라 남자들의 디지털 사고방식과는 다릅니다.
남자들은 사건을 따로 따로 보지만 여성들은 하나의 사건을 이어서 보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내의 경우는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내재되어 있던 것이 터질 시점에 한꺼번에 터진 ‘드디어 때가 되어’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집단상담을 진행하는 중에 제가 느낀 느낌은 그분이 너무도 답답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남편의 태도는 이랬습니다. 대답을 잘 안합니다. 꼭 두 번을 물어야 대답합니다. 그것도 대답을 들으려면 적어도 10초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말끝을 흐립니다. 조금 애매한 질문은 아예 대답도 안하고 고개를 돌리고 눈도 안 마주칩니다.
그리고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난 못합니다’,‘난 잘 모릅니다’, ‘답답하니까 정답을 바로 알려 주세요’ 라고 채근대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부부관계에서는 수동적 공격성으로 작동됩니다. 수동적 공격성(passive aggression)은 표면적으론 공격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특징으로는 지연하기, 무응답, 무반응, 게으름 부리기, 눈 안 마주치기, 잠수타기, 전화기 끄기, 응답 안하기, 무조건 Yes 내 놓고 결국 No하기 등등의 방식이죠.
외부적으로는 완벽한 남편인데, 아내가 느낄 때는 완전히 벽이 된 남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아내 입장에선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가 제대로 수납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동안은 참고 견디며 살아오다 용량의 한계를 느끼는 시점이 되었고 동창과의 만남은 작은 구멍을 낸 것이었는데, 그 작은 구멍으로 한꺼번에 많은 것이 밀려나간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집을 나가 있는 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증상 즉 symptoms입니다. 전혀 상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놀랍니다.
외도로 드러나거나, 종교에 탐닉하거나, 무슨 다단계판매 같은데 연루되거나, 사소한 일에도 격노하거나 싸우려고 드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부부관계에서의 수동적 공격성은 소리 없는 살인자입니다. 마치 007 영화의 007처럼 수트를 입고 나타나 총에 소음기를 장착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심장을 정확히 관통시켜 사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남편 분의 아내는 어떤 면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살길을 찾아 나갔다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돌아오고 안 돌아오고, 받아주고 안 받아주고의 문제보다 앞서 이러한 관계의 패턴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혹, 내가 조용하고 착한 사람, 늘 침묵을 삶의 모토로 삼고 사는 사람이라면, 혹시 나와 사는 사람이 나의 수동적 공격 때문에 상처받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살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