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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도시형중등대안[단재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대표교사박준규
일 년 전 이맘 때 여수 돌산수련원에서 6명 학생들과 힘들지만 행복한 시간 보내고 있었다.
이 년 전 이맘 때 연극 <완득이>도 보고, 2차 리빙라이브러리 준비하고, 뉴질랜드 人 앨리샤도 학교에 놀러오고, 부족한 재적수 채우려고 학교설명회와 대안교육세미나도 주최하는 등 정신 없었다.
삼 년 전 이맘 때 대안학교 세우려고 안승문 교육NGO 활동가와 김승태 선생님, 기타 몇 몇 분들과 미팅을 활발히 갖고 있었다. 만나서 이야기 나눌 공간이 없어서 강동송파 전교조 사무실을 제공받았는데, 바로 둔촌동역 3번 출구 앞에 있는 삼오빌딩 3층이었다.
그리고 현재, 외부에서 "단재학교 학생들은 어쩜 그렇게 글을 잘 쓰나요?" "어떻게 하면 단재학생들처럼 역동적으로 잘 지낼 수 있나요?" 하는 얘기를 듣고 다닌다.
최훈민(올봄 고2 자퇴) 학생이 있다. 이 친구가 지난 3월에 자퇴를 하고 11일 동안 광화문에서 '죽음의 입시교육 철폐'를 주장하며 1인 시위를 벌여 매스컴을 탔다. 곧바로 학생들만으로 구성하고 운영하는 <희망의 우리학교>를 추진하고 70여 일만에, 오늘 개교식을 치렀다.
어제 앳된 목소리가 전화를 걸어왔다. <희망의 우리학교>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주문과 오늘 개교식에 참석해달라는 요구였다.
전화를 받고서야 그런 학교가 세워지는 것을 알았다. 곧바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학생들끼리 기획하고 설립하여 운영해나가는 학교라는 것을 알았다. 충격적이었다. 호기심도 생겼다. 이 친구들이 과연 어떤 커리큘럼을 운영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개교식에 다녀왔다.
<사회를 보는 최훈민 학생대표>
교실은 조계사가 공간 두 칸을 내주었다. 임대료는 건물청소. 일 주일에 한 번씩 건물 두 동을 청소해야 한다. 학생들과 조계종 종무원이 흔쾌히 합의하였다.
개교식에 종로구청과 종로구의회가 적극 참여했고, 황인국 서울시대안교육센터장, 전교조 위원장을 지낸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광우병 촛불집회로 감옥까지 갔다온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팀장 등 저명인사들이 참석해서 축사를 했다. 모두 하나 같이 축하와 더불어 학생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너희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교육현실을 만든 기성세대를 대신해서 사과한다"
15명 학생들이 출발한다고 했지만 소개는 12명만 이루어졌다. 막내는 중2 나이, 최고령은 19살. 남여가 골고루 있었고 모두 똘똘해 보였다. 대부분 학교를 중퇴했고, 일부는 홈스쿨러였다.
자신들을 배움나라 학생공화국으로 명명하고 개교식 장소인 종로구청 강당에 들어서는 모든 축하객들에게 '입국심사'를 받게 했다. 배움나라 학생공화국 PASSPORT를 발행하며 입시경쟁교육에 반대하는지 확인대답을 듣고 OK도장을 찍었다. 학벌사회에 반대하는지 우리학교에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낼 것인지도 확인했다. 이름이 무어냐고 묻고 심사원들이 내 이름을 여권에 써넣었다.
올해를 배움혁명 원년으로 선포하고 개교식을 CMS 정기후원금을 받기 위해 벌이는 이벤트로 이용하는 등, 비록 NGO활동가들이 조언을 했을 법하지만 당돌함과 저돌성, 창의성에 박수를 보냈다.
이들의 홍보리플렛을 보았다. 내 가장 큰 관심은 커리큐럼이기에 어떤 과정을 준비하고 있는지 살폈다.
우리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기수업을 개설해야한다. 수유너머의 콜로키움이 생각났다.
"어? 이 친구들 수준이 장난이 아니네. 과연 가능할까?"
높은 이상과 의욕은 최고다. 그런데 이들이 해보겠다고 하는 공부가 너무 많다. 배움/성찰/자기계발/체험/나눔으로 나뉜 카테고리에서 20여 개의 과정을 설정하고 있다.
일단은 구체적인 진행이 없는 상태에서 사고실험으로 커리큘럼의 큰 틀을 마련했다. 세밀한 과정은 앞으로 고민해보겠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많은 배움은 2~3년 동안 이루어질 수 없다. 가히 수퍼맨학생을 상정한 것이다.
걱정을 넘어 실패가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침 축사를 하는 인사들도 같은 말을 한다.
"여러분이 성공적으로 학교를 운영할지 실패할지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여러분은 우리학교 간판을 걸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학교가 문을 닫는 일이 벌어져도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더 큰 발전을 위한 거름이 될 것입니다."
대견한 생각과 몇 가지 우려가 단재학교의 지난 3년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단재학교는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듭했다. 2010년 5월의 2차 리빙라이브러리를 경험한 친구는 재영이만 남아있다. 졸업생도 있지만 더 많은 학생들이 새로운 선택을 찾아서 단재학교를 떠났다.
실험과 거듭된 실패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실패라고 말하는 내용들이 다음 단계의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실패가 상실이 아닌 잉태의 씨앗이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는 당연히 치러야할 교육과정의 핵심이다.
둘째는 다양한 실험이 하나의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고, 실패의 경험이 원칙의 신뢰를 높이고 더욱 공고히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 아이들은 성장한다"이다. 그리고 "표현의 중심에 언어가 있으며 비언어적인 표현도 함께 고려해야한다"도 같이 따라가는 원칙이다.
청소년교육은 교육의 종결이나 완성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마치 완성된 전인(全人)으로 키워내야할 것처럼 과정을 만들고, 외부적으로도 홍보한다. 좋은 대안학교, 훌륭한 대안학교를 드러내기 위해 졸업 후의 기대모습을 비현실적으로 부풀려놓는다. 내가 50 가까이 나이 먹어 터득한 경험과 능력들을 20살이 갖추길 바란다는 것은 범죄에 가까운 오류이다.
<희망의 우리학교> 개교식에 참석해서 일어난 상념들은 오전에 참석한 『민들레』80호 저자 초청 특강에서 비롯한 것이다.
『민들레』80호에 교육기본권을 주제로 민들레논단 꼭지에 글을 쓴 영산대 법대 소속 장은주 교수 초청 강연이 있어 오전에 참석했다. 이름만으로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훈남 교수님이다. 이 분의 글 제목이 "우리가 보장받아야 하는 건 반값 등록금만이 아니다"라서 오해 소지가 있었다.
오해의 최고봉은 '반값 등록금"이 주는 이미지로 사학의 횡포라든가, 회계비리, 계급에 따른 교육불평등을 거론한 것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이는 본문을 읽어보면 금방 해소된다.
읽어보고도 오해할 수 있는 것은 공적 국가기관인 학교가 사적 이익, 즉 개인의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개탄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능력지배주의 사회를 뜻하는 신조어(영국의 무명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이 만든 조어)인 '메리토크라시(merit+cracy)'에 대한 오해 없이 글을 소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런 미묘한 독해력 차이는 직접 장은주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해소될 수 있었다.
처음에 메리토크라시 사회의 성립은 평등한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환영할 일이었다. 장 교수는 <수퍼스타K2>의 우승자 허각을 예로 들었다. 중학교 졸업 학력의 환풍기 수리공 허각이 오직 노래 실력으로 스타가 된 것은 능력이 있다면 누구든 대접 받는 사회라는 메리토크라시의 정신을 잘 표현한다.
누구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면 평등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이런 것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도 시험 문제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연 기회균등이 우리 사회에서 보장되는가를 가지고 논쟁한다. 논쟁을 넘어 물리적 충동도 불사한다. 혁명을 말하며 그 목표가 평등한 기회의 보장에 있다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역설한다. 하지만 우리가 냉정하게 따져야 할 일이 있다.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는 것인가?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 아무런 사심과 편견 없이 1등을 뽑는다면, 그러니까 사회적 배경에 관계없이 노래 실력(능력;merit)만이 유일한 선발의 기준이라면 우리는 이상적인 세상에 산다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다. 객관적인 능력이 확인된다면 더 많은 재화와 권력을 가지고, 능력이 뒤처지는 사람은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평등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장은주 교수의 『민들레』80호 글인 것이다.
장 교수의 <민들레 논단> 바로 앞 꼭지가 <민들레 단상>이다. 매번 현병호 발행인이 도맡았던 칼럼인데, 이번에 이희경의 글이 실렸다. "교육에서 멀어지기"가 그것이다. 민들레 편집인은 분명 이희경 글 뒤로 장은주 교수 글을 배치한 속셈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에서 멀어지기"는 장 교수가 메리토크라시 사회를 비판한 내용을 일상 교육 버전으로 풀어 놓은 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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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학교도 망하고 교육학도 별 볼일 없다면? 그래, 다른 교육을 실험해보자. 앞서 이야기한 ‘학교 잔혹사’의 경험을 공통으로 가진 우리 세대는 획일적이고 폭력적이고 훈육적인 교육 대신 다양하고 자율적인 공동체교육을 꿈꿨다. 바리캉과 교복이 없는 곳, 체벌과 선도부가 없는 곳, 점수로 아이들을 줄 세우지 않는 곳. 아이들이 저마다 개성을 뽐내고 창의성을 키워가는 곳. 바로 대안학교!
마침내 기회가 왔다. 소위 87체제 이후 넓어진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공간에서 우리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왕창 쏟아 부어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머리만이 아니라 손과 발을 키우기 위해 농사나 노작교육을 도입하고, 이성이 아니라 감성까지 조화롭게 키우기 위해 예술교육을 강화하였고, 공동체성을 키우기 위해 모둠활동이나 사회참여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그러나 통제와 감시의 규율이 없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자율적이라기보다 제멋대로였고, 지덕체를 균형 있게 키우겠다는 야심찬 기획은 아이들 활동의 ‘버라이어티’만 증가시킬 뿐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죽지 않고 즐겁게 학교를 다니는 모습은 ‘보기에 좋았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대안학교는 즐거운 ‘소란’이었다.(이반 일리히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이른바 자유학교의 교육과정은 민요나 록뮤직에 의한 미사의 식전 모습을 닮았다. 교사를 선택할 때의 발언권을 요구하는 고교생의 요구는 사목자의 선택권을 요구하는 교구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소란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대안학교 안팎에서 조심스러운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대안은? 언제나 ‘교육과정의 재편’ 혹은 ‘새로운 프로그램의 도입’이었다. 활동의 가짓수가 너무 많은가? 그러면 교육과정의 집중과 선택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너무 무기력한가? 자기주도학습과 관련된 구체적 테크놀로지를 도입하자. 대안학교에서의 대안을 둘러싸고 나는 대안학교를 함께 만들었던 동지들과 ‘피 터지게’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곳과 결별했다. 그러나 나의 결별은 동지들과의 견해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나와 친구들의 견해 차이조차 동일한 욕망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이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좋은 교육’을 만들어낼까? 아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하면 내 아이에게 ‘더 좋은’교육을 시킬 수 있을까라는. 그때부터 나는 대안학교의 방향이나 비전이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대안학교를 향한 나의 의지, 나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대안학교를 향한 나의 순수한 열정과 아낌없는 헌신은 어떤 의지이고 욕망이었을까? 혹시 이반 일리히가 말하는, 구원을 위해 타인을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육학적 오만’에 다름 아니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온갖 뒷바라지를 마다 않는 대치동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나는 뼈아프게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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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교육에서 멀어지기"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꺼낸 것이지만 한편으로 매우 쇼킹한 지적이다. 위에서 말한 단재학교의 일관된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의 이름으로 타인(학생)을 조작하여 원하는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희경은 단재의 원칙을 한 번 더 확인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결코 쉽지 않다. 능력 있는 사람이 더 큰 짐을 감당하고 그 대가로 더 큰 재화를 획득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라고 대부분이 믿고 있는데, 메리토크라시 사회를 비판하고 메리토크라시 사회를 넘어 메리트와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엄을 인정받아야한다고 주장한들 메아리만 울리지 사회구성원들에게 스며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조작될 수 없다는 주장은 인간의 조작을 교육의 개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다시 <희망의 우리학교>를 생각한다. 15살~19살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교사 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때론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이 되면서 성장하겠다고 하기에 매스컴과 소위 사회지도층인사들이 달려와 손을 잡고 격려한다. 어른들은 우리학교 학생들이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대견스러워 하는 것은 이들이 스스로 능력을 기르겠다고 다짐을 하기 때문이다. 누가 잔소리 하지 않아도 merit(능력)를 길러서 cracy(지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청소년이 우수 견본인 사회라면 교육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제도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이렇게 선언하는 청소년이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공부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지적훈련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고민하겠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청각장애인과 얘기를 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글을 읽는 것은 시각장애인에게 신문과 책을 읽어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은 외로운 독거노인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골고루 먹고 몸을 움직여 건강하려는 것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의 손발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내 성공을 위한 어떠한 학습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가. 그 아이가 내 아들이고 내 딸이라고 한다면.
이런 청소년들이 수능성적이 꼴찌고, 외국어 능력이 바닥이라서 그들의 장래가 걱정되는가 . 아니다. 우리 모두 이 아이들에게 신세를 질 것이며, 이들 덕분에 세상은 망하지 않고 대를 이어갈 것이다.
파격적인 상상이라고 생각할 것 없다. 이들이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때 진정 이런 생각을 품은 친구는 성인 이후에 필요한 능력이 있다면 자기 것으로 할 것이다. 영어든, 양자물리학이든, 뇌과학이든, 역사철학이든 말이다.
단재학교가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가진 것처럼 학부모들도 하나의 원칙을 세우고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삼단변신"을 하였노라고 고백한 김동은의 글이 같은 『민들레』80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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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이전의 일차적 불안감이 걷히고 대안교육을 통한 가능성을 어설프게나마 느끼면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건 사실 좀 새로운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상은 이전의 불안과 그리 속성이 다르지 않았다. ‘대안교육은 피난처가 아니다. 회피가 아닌 정말 대안이 되는 교육이다. 따라서 기존 교육과정을 넘어선 그 무엇을 통해 아이는 목표(다소 세속적이기도 한)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불안감이었다. 대안교육을 통해 이대로만 간다면 뭔가 그냥 흐지부지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안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먹을 것이 갑자기 뚝 떨어지진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아이를 사교육 시장에 던져 놓고 무조건 앞으로 나가게 하는 과거의 그 짓거리는 분명히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거다. 답이 있을진대 답을 얻지 못했다. 그 목표라는 것이 내겐 여전히 결과물의 성격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삶의 근본적인 목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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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첫 변신은 내 아이를 정규중학교가 아닌 비인가 대안학교에 입학시킨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위 글이 두 번 째 변신을 말한 것인데, 제도학교보다 양질의 결과물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면서 새로운 불안감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한다. 그리고 드디어 세 번 째 변신을 하는데, 기다림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됐다는 "간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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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이 방임하는 기다림. 현실적으로 안 되니까 어차피 기다릴 수밖에 없어 기다리는, 그런 어쩔 수 없는 기다림이 아니었다. 승리와 패배를 앞두고 결정을 해야 하는 그런 맘 졸이는 기다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 스스로 깨달아 자기를 발견하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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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단재학교 학부모회장님 중 한 분인 '이향아빠'다. 이향아빠는 지난 4월 초에 단재학교에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하려는 공지를 올렸더니, 격려와 더불어 "(프로젝트)성공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덧붙였다.
가히 득도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사실 선생인 나도 머리로만 생각하지 감히 단재학교에 적용하려고 하지도 못한 철학이다.
이희경, 장은주, 김동은으로 이어지는 글의 숨어있는 일관성을 고려한 편집을 위해 민들레출판사 직원들이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열렬히 동의한다.
타인의 조작을 교육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 개인 능력의 유무를 정치적 결정의 잣대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는 것은 결국 무너지게 될 욕망이라는 것-이런 깊은 고민을 내가 몸담은 단재는 물론 오늘 개교한 <희망의 우리학교>구성원과 학부모들도 공유하면 좋겠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