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노성면 노성산 산행 추천
1. 산행 코스 : 노성노외주차장(노성산애향공원) → 노성향교 → 명재 윤증 고택 → 열녀 공주이씨정려각 → 노성궐리사 → ① 옥리봉(252m) → ② 옥재봉(256.8) → 헬기장 → 노성산정자 → ③ 노성산(348.9m) → 노성산성 → ④ 봉우재산(204.5m) back → 주차장 <원점회귀>
덤) 산행 후 ⑤ 반야산(96.2m), 관촉사, 국보 고려불상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 탐방 : 약 30분
2. 거리/시간 : 6.9㎞/3:30
3. 이동 상황, 시간 운영 참고
부민병원 기준 버스 이동 거리/시간 : 295.1㎞/3:15+@
산행지 도착 예정 시각 : 11:30 내외
산행 종료 예정 시각 : 16:00 내외(후식 포함)
관촉사주차장 이동 : 15㎞/20분 정도
관람 후 출발 : 16:20-17:00 (40'반야산 코스 2 ㎞)
덕천동 외식1번가 : 282㎞/3:10 /// 20:30 덕천 도착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반야산 코스 ↑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관촉사 은진미륵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현 관촉동)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쌓아 올리는 데 아이들의 탑 쌓기 놀이를 모방하였다는 조성과 관련된 전설.
줄거리
고려 때 절 아래에 살던 한 노파가 쑥을 캐러 갔는데 땅속에서 바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노파가 이 일을 사위에게 말하자 사위가 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기이한 일이라 하여 다시 조정에 알렸고, 당시 임금인 광종이 대신들과 상의하여 미륵불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관촉사 미륵불 조성은 해명대사가 책임을 맡아 인부 100명을 데리고 38년에 걸친 불사 끝에 완공하였다.
당시 미륵불은 머리와 신체 상하부를 따로따로 조각하였다. 조각을 마치고 나서 이들을 하나로 세워야 하는데 각 부위가 너무 무거워 들어서 세워 올릴 수가 없었다. 이에 해명대사가 고민하면서 마을 앞 강가를 걷고 있는데 두 동자가 탑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두 동자는 하나의 돌을 놓고 그 주변에 흙과 모래를 채운 뒤 또 다른 돌을 굴려 기존의 돌 위에 포개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해명대사는 순간 미륵불 쌓기의 깨달음을 얻고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탑 쌓기를 하던 두 동자가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해명대사는 사찰로 돌아와 아이들의 탑 쌓는 방법을 모방하여 미륵불을 세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당시 해명대사에게 지혜를 알려 주고 사라진 두 동자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 하였다.
변이
은진미륵에 대한 조성담 외에 활동담도 있다. 고려 때 오랑캐가 압록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물의 깊이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비쩍 마른 한 스님이 나타나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것을 본 오랑캐 장수가 스님이 건너간 곳을 따라 강을 건너라고 병사들에게 명했는데, 물이 깊고 물살이 세서 수많은 병사가 강을 건너다 빠져 죽었다. 이에 화가 난 오랑캐 장수가 스님을 잡아오게 해 죽이라고 명하였다. 병사가 스님을 칼로 내려치려는 순간 쇳소리가 나면서 스님이 사라졌는데 그가 바로 은진미륵이었다고 한다.
분석
은진미륵에 대한 전설은 은진미륵의 ‘조성담’과 ‘활동담’으로 구분되는데, 이 전설들은 논산 일대와 그 주변 지역에 분포한다. 그중에서도 조성담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돌의 솟아오름을 알려 줌, 땅에서 솟아오른 돌 확인, 나라에서 돌미륵 조성을 명함, 해명대사가 돌미륵 조성을 주도함 동자의 탑 쌓기 놀이에서 돌미륵 쌓는 방식을 알게 됨’과 같은 기본 줄거리를 갖추고 있다. 이 같은 기본형은 다수 전설에서 대동소이하다. 다만 동자의 탑 쌓기 놀이에 대한 표현에서 표진강가라고 하는 예와 사찰 아랫마을의 길가라고 하는 공간설정의 차이가 있다.
의의
은진의 미륵불 조성은 고려 때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만큼 은진의 미륵불은 국가의 보호 아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높이가 18.2m에 이르고 둘레 또한 9m가 넘는, 당시로서는 거대 석불이라는 점에서도 그와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촉사은진미륵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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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尹拯)
조선 후기 논산 출신의 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35세에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이후 공조랑·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0년(숙종 6)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그를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하였으며, 나중에는 특별히 분부를 내려 부르기도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여 군왕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오직 윤증뿐이었다고 세간에 알려졌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사헌부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령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1699년(숙종 25)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그즈음 윤증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아져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를 모방하여 거상 중에 강학(講學)을 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고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학의 사장(師長)으로서 문중 운영과 종학에 힘을 쏟았다.
1642년(인조 20) 14세 때 아버지 윤선거가 유계(兪棨)와 함께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온 마음을 쏟기로 마음먹었다. 19세에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권시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전에 주자에 관한 책을 김집(金集)에게 배웠는데, 김집은 송시열(宋時烈)이 주자학에 정통하므로 그에게 배우라고 하였으므로 29세 되던 해에 송시열에게 가서 사사하여 『주자대전』을 배웠다. 저서로 『명재유고(明齋遺稿)』가 있다.
1722년(경종 2)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작되었다. 지방 유림들의 합의로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江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증 [尹拯]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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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산성 봉수(魯城山城烽燧)
향토문화전자대전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노성산 정상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