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사지와 대통다리 이야기
공주 공산성 답사 길에 공주시내 반죽동에 있는 대통사지 당간지주를 찾아갔습니다.
백제시대의 절이라고 해야 이름으로만 남아있을 뿐 실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망국의 비애를 나타내듯 실물은 커녕 기록에 조차 찾을 길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여 정림사지도 오층탑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익산의 미륵사지도 그렇고, 부여 울성산성 아래에 있는 왕흥사지도 발굴이 한창이지만 역시 터로만 남아있습니다.
공주의 대통사도 터로만 남아있고, 당간지주와 몇 개의 돌들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통다리라는 다리가 지금도 모양은 옛것은 아니지만 이름만이라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대통사(大通寺)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입니다.
신라의 법흥왕이,
대통 원년인 정미년(527년)에 중국 양(梁)나라의 무제(武帝) 즉위를 기념해 웅천주(熊川州 - 지금의 공주)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통사라 하였습니다. 대통사를 세운 서기 527년은 백제 성왕 5년입니다. 백제의 왕도가 아직 부여로 천도하기 전입니다. 부여 사비성으로 옮긴 해가 538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째는 어찌해서 신라의 법흥왕이 백제의 수도인 공주 한 복판에 중국 양무제의 즉위를 기념해서 대통사를 지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기에 신라왕에게 대통사를 짓도록 허락하였을까?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건립당시의 신라-백제 관계는 라제동맹 관계이던 시절이라는 점과, 서로 혼인관계를 유지했던 사이이고, 신라는 아직 공식적으로 불교가 공인되기 전의 일입니다. 이차돈이 순교한 때도, 불법(佛法)을 공인한 시기도 527 년이니까요.
(전북 무주에서 구천동 가는 길에 지금도 라제통문이 남아있습니다. 신라-백제관계를 잘 나타내는 것이지요. 나중에는 백제 무왕(의자왕의 아버지)과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도 있고.)
개인적으로 불심이 돈독했던 법흥왕으로서는 자신의 나라 안에 절을 지을 만한 분위기도 아니 되고, 절을 지을 만큼의 건축기술이나 불교에 관한 지식도 미흡했을 터이니 불교선진국인 백제에게 사돈간의 정리로써 사찰 건립을 간절히 염원했을 것이오. 마침 중국 양무제가 즉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그의 연호인 대통을 따서 대통사(大通寺)라 명명한 것으로 추측되어집니다. 누이좋고 매부좋다는 식의 속언처럼 백제의 땅에 신라가 자금을 제공하여 중국 황제 즉위를 기념하는 절을 지었으니 국제 외교적으로 삼국관계가 매우 친밀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로니칼하게도, 백제의 성왕은 후에 충북 옥천의 관산성에서 신라군 (삼년산성에서 온) 도도에 의해 죽습니다. 아마도 신라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어서 일어난 사건이었겠지요.
대통사 인근에 대통다리(大通橋)가 지금도 이름을 간직한 채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다리는 무지개 모양의 돌로 된 다리(虹橋)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공주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조선 임란 후 200여 년 간 충청도 감영터) 정문에서 공주의료원(고려?/조선시대 때 공주목의 관아터였음)사이에 있는 제민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입니다.
아주 오래된 다리이고, 매우 중요한 다리였을 것입니다.
돌로 된 무지개 모양의 다리는 생각만 해도 멋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다리가 언제 어떻게 해서 사라지고 지금의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사연은 잡초처럼 버려진 채 이름으로만 그냥 무심하게 남아있을 뿐입니다.
대통교 아래로는 제민천(濟民川)만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까요.
<대통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당간지주와 석물>
<제민천의 뜻도 특이하고, 대통교가 가로질러 있다. 옛날에는 돌로 된 무지개 다리가 있었다는데. 홍수에 떠내려갔는지.?>
<이름으로만 전해져 오는 대통다리>
<감영로로 명명된 그 한쪽에 충청감영터를 알려주는 것들이 교정 한 쪽에 있다. 공주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정문 안쪽>
(1960년대 초만 해도 옛 공주여고 교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었는데, (포도청 관아 정문이었다는 데 )지금은 KT&G 건물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고. 감영터 표지판 뒤편으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