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본관을 찾아 나주로/ 전성훈
도봉문화원 6월 역사문화 탐방 지역은 전라남도 나주였다. 탐방 코스가 나주임을 알고 나주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딱히 집히는 것이 없다가 불현듯이 생각이 났다. 40년 전 광주 보병학교 시절 3월의 매서운 꽃샘추위 속에 나주시 남평 ‘드들강’에서 도하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 집 전씨 본관이 나주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본관이 나주이지만 나주에는 지금껏 아무런 연고가 없다. 선대 조상부터 평안남도 안주에서 거주하셨다. 6.25때 증조께서 남쪽으로 피난 오는 도중에 가지고 계셨던 족보를 잃어버리셨다. 그래서 언제부터 우리 집안 선조들이 전라도 땅을 떠나 머나먼 평안도로 이주하셨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조선왕조 후대인 18세기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 몇 해 동안 심한 기근이 닥쳤다. 그 당시 수많은 유랑민이 발생하였고 일부는 북쪽으로 옮겨갔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 시절 우리 조상이 북녘 땅으로 옮겨가지 않았을까 막연히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나주로 향하는 날, 새벽부터 장마를 재촉하는 비가 후드득 후드득 내리기 시작하였다. 도봉문화원 앞에서 정각 7시에 출발한 관광버스는 비 내리는 아침 출근길과 맞물려서 엄청나게 막혔다. 동부간선도로를 거쳐 서초동 경부고속도로 입구에 접어드는 데 한 시간 20분 이상 걸렸다. 관광버스 창문 선팅을 심하게 하여 시야가 어두웠지만 차창 밖을 내다보니 마음이 느긋해졌다. 늘 느끼지만 길을 떠난다는 그 자체가 설레는 기분에 젖어들게 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등성이엔 눈이 내려 눈꽃송이가 얹혀 있는 듯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때가 때인지라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숨 가쁘게 고속도로를 달려온 버스가 서울을 출발하여 두 시간 정도 지나 정안휴게소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충청도 공주 땅과 가까워서 그런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릿한 밤꽃 냄새가 온 천지에 진동하고 밤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밤꽃 내음에 취하여 잠시 넋을 잃다가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객쩍은 웃음을 지었다.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찾아오고 초여름 터질듯이 뿜어져 나오는 밤꽃 냄새는 여염집 아낙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어 잠을 못 이루게 한다.”라는 속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주에 도착하여 처음 찾은 곳은 나주향교였다. 그런데 나주시 소속 문화해설사와 향교를 관장하는 유림단체 소속으로 보이는 노인들 간에 사소한 절차 문제로 언쟁이 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융통성 없이 꽉 막혀서 원칙만 고수하려고 한다고 폄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임금님에게 간했던 선비 정신을 생각해보면 그 분들의 태도가 수긍이 갔다.
향교를 떠나 조선 왕조 시절 나주 목사 관청인 금성관과 관아를 구경하고, 반남고분군을 찾았다. 삼국시대 보다 앞선 삼한 시대에 이곳 마한지역에 있었던 부족국가 시절의 고분인 반남고분을 만났다. 경주에서 보았던 신라 고분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는 고분을 나주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학창시절 전라도 지방에 고분군이 있다고 배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국립나주박물관은 예약한 시간보다 30분 이상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입장하지 못하였다. 박물관측에서 사전에 소방훈련계획에 있어 우리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소방훈련이 시작된 후였다.
나주하면 생각나는 나주의 별미는 “홍어와 곰탕 그리고 장어”다. 막걸리로 입맛을 돋우고 나서 묵은지를 얹어 먹은 나주 곰탕은 꼭 먹어보라고 권할 만 하였다. 곰탕에 넣은 고기가 풍성하고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냄새가 났다. 묵은지를 얹어 먹으니까 묵은지의 시큼한 냄새와 절묘하게 조화 되어 목구멍으로 살살 넘어갔다. 곰탕 국물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 나니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영산포 등대 부근에는 온통 홍어 음식점뿐이었다. 홍어 삭인 냄새인 자연의 향내가 내 코끝을 간질거리자 입안에 침이 저절로 고였다.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냄새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홍어의 땅, 나주에서 진짜배기 홍어 맛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조상의 얼을 생각하면서 조상의 체취를 만나보고 싶었던 나주 역사 탐방, 그 소중한 인연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 대신 얻은 것은 사람 사이 소통의 상관관계였다. 서로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생각과 의견이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대방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또 일깨워준 여행이었다. 역지사지의 마음이 들어야 원만한 해결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2016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