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선교 연구원이라고 하는 기독교 연구소가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우리 시대의 문화 동향을 신학적으로 평가하고, 그 속에서 문화선교의 방향과 전략을 연구하는 연구소입니다. 이 연구소에서 2016년을 보내면서, 사회문화분야 10대 이슈를 선정해서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 첫 번 째 이슈는 여러분 짐작하시는 대로 ‘최순실 게이트와 대통령 탄핵’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선정한 사회문화분야 이슈는 무엇일까요? 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첫번째 이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두 번째 이슈는 ‘불안사회’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불안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쟁지역인 중동 지역뿐 아니라 안전한 지역으로 알았던 프랑스, 독일 등 유럽과 터키, 요르단 같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나 휴양지에서 연이어서 테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해외 여행도 마음 놓고 떠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동북아 지역에서는 영토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분쟁이 심각합니다. 이 지역에서 언제 전쟁 상황으로 전개될지 모를 정도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습니다.
몇 해 전 일본에서는 대지진이 발생하여 쓰나미가 덥치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주변지역이 심각한 방사능 오염에 노출되는 재난이 발생했었는데, 지난 9월에는 우리나라 경주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지진 발생 지역은 원자력발전소로부터 그리 먼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결코 지진으로부터 안전지대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또한 불안을 더하고 있습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국가를 지키고 국민 안전을 책임질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을 우리가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세월호 침몰 사건을 비롯하여 그 동안 일어난 여러 가지 재난 상황에 대해서 정부가 보여준 부실한 대응력 또한 우리에게는 불안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불황이나 안보 문제 등 산적한 국정과제들을 제대로 풀어갈 수 있을지, 또한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정부나 공권력은 우리 국민의 안전을 제대로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여전히 이념대립과 계층 간의 갈등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북한은 핵무기개발에 여념이 없는데,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 진영은 사드 배치나 대 북한 정책 등에서 사사건건 대립합니다. 안보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이어지는 묻지마 범죄를 비롯한 폭력 범죄의 희생양이 바로 내가 되고 내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심각합니다. 거기에 경기불황으로 인한 고용불안, 주거 불안에 노후 불안까지, 우리 사회의 불안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한 세상을 살다보니,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스님이나 교수들의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그만큼 불안하고,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시대이며, 우리 모두는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위로를 기다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주께서 들으셨다’는 의미인데, 야곱의 둘째 아들 이름입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로서, 그만큼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학자들은 이 시므온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여러 가지로 추정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시므온에 대해서, 그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직업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사회적인 지위에 있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예루살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 백성들은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위협을 받아 왔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번영과 영광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리 긴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빌론, 희랍, 그리고 로마로 이어지는 제국들의 지배를 받으며,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도 번번히 무산되고, 이스라엘은 식민지 백성으로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제사장들은 형식적인 제사과 절기만을 강조하면서,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경제적인 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하였습니다. 율법 전문가요 민중의 교사를 자처하던 바리새인들 역시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져있었고, 율법적인 지식을 가지고 영적인 교만에 빠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정죄하고 비판하며 고통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인 고통에 짓눌리고 영적으로도 짓눌리면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은 진정한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위로란 무엇입니까? 위로라는 말은 사전을 찾아보면,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주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통스럽거나 불행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위로받으면서, 그 상황을 견디고 또 다시 일어서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이스라엘이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그 역시 고단한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만의 위로가 아니라 민족의 위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로를 기다리며 그는 성전에서 평생을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오래 전 예언자들이 전해 준 예언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이 백성들을 구원할 위대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언이 선포된지 수 백년이 지나왔고, 백성들의 삶과 민족의 현실은 여전히 비참했습니다. 제사장들도, 영적인 지도자들도, 저마다 현실에 안주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여전히 민족의 위로를 기다리며 하나님께 평생을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 시므온은 그 대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 이것이 곧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의롭다'는 말은 원어로 '디카이오스'입니다. '공정하다'는 의미도 있고, '정의롭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올바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었지만 아직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양자라도 들여서 후손을 이어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마침 하인들 중에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고 하는 신실한 청년이 있어 양자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아들이 네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시더니 하나님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창세기 15장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과연 무슨 업적을 세우고 어떤 공로를 세웠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방향이나 혹은 선택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로운 사람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정직합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공정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즐거워 합니다. 그 뜻을 따라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자신을 희생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견디고 다시 일어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라베스’라고 하는 이 말은 '경건하다', '독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주의하고', '신중하고' 혹은 '두려워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독실한 유대인들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까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알기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힘써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현실에서의 성공, 더 많은 소유와 더 높은 지위를 목표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시므온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기다리며 살아온 그 사람이기에 성경은 그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다림의 사람 시므온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계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계시다는 것!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은 믿음을 지키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신자들을 변호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의 성품과 그의 삶 속에서 은사로 나타나기도 하고, 열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은사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게 머물러 계시지 않고 떠나신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불안하고, 유혹에 넘어지고, 흔들리고, 경건의 능력은 사라지고 경건의 모양만 남고, 의로움에서 빗나가고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서 어긋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바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축복 받는 것입니까? 소원을 이루고 형통하는 것입니까? ‘성령이 나를 떠나지 않고 내 위에 머물러 계시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바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시므온 위에 성령이 언제나 머물러 계셨다고 누가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성령의 지시, 곧 성령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죽기 전에 위로를 보게 될 것임을 확신하였기에, 그는 믿음을 지키고 더욱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의 감동으로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갔는데, 마침 요셉과 마리아라고 하는 젊은 부부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 아들을 낳으면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40일, 여자아이는 80일이 차면 성전에 나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정결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일종의 헌아식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순간 시므온은 바로 이 아기가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감동하셨습니다. 성령이 그 사실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주재여” 전능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제야 내가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토록 바라던 이스라엘의 위로를 내가 보았으니 이대로 눈을 감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시므온은 고백합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이방 민족까지, 만민을 구원하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비방을 받고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마리아의 마음은 칼에 찔리듯 아픔을 겪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자인 이 아기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백성을 위로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위가 가득 차고 위선이 득세하는 세상, 신앙이 형식화 되고 모두가 다 자기 이익만 취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이기주의, 물질주의, 우상 숭배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위로자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희생하며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밝혀 주고, 대속의 제물, 희생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고백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오늘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갓난 아기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그는 주님의 구원을 그 아기에서 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진정한 위로가 그에게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곧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진정한 위로가 있고 구원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접하며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로를 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기도 하고, 물질에서 위로를 찾기도 하고,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쾌락으로 위로를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의 삶과 교훈, 그 십자가에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의 삶, 그의 죽음,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진정한 위로를 얻고, 모든 유혹과 시련을 견디며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와 같이 위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사랑에 우리의 위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