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學年
나는 대전사범부속국민학교, 대전사범 병설 중학교. 그리고 대전 사범학교 15회를 마지막으로 졸업한 후 고향 대전을 떠나게 된다. 내가 알기에는 그 당시 대전에 남느냐 공주에 가느냐 논란이 있었는데 그 당시 공주출신 김종필씨의 압력으로 2년제 교육대학이 공주로 옮겨갔다. 결국은 내가 다녔던 초,중,고(모두 남여공학)학교가 모두 없어져서 불행스럽게 모교가 하나도 없는 고아가 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 고향에 가더라도 한번도 학교 방문을 해 본적도 없고 학교로 가는 길마저 가 본적이 없다. 도대체 모교라고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외에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 대전 사범부속 국민학교(별칭:은방울)는 중앙 초등학교로. 중학교는 아주 폐교되고. 대전 사범학교는 공주로 옮겨 교육대학으로 재편되었다.
사범학교 2학년 - 담임선생 오른쪽이 이태성
우리집은 교육자 집안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 이면에는 부모님의 교육열이 대단하였다. 선친께서는 대전에서 60여년 동안 "형제양복점"을 운영하셨는데 장소가 대전역에서 5분 거리 원동의 아주 번화가에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本丁通(혼마찌)으로 일본사람들이 살았던 번화한 곳이었다. 8남매를 둔 선친은 선생님외에는 모든 직업을 인정을 하지 않으실 정도로 교직을 좋아하셨다. 그리고 선생님들과는 항상 교분이 두터우시며 최선을 다하여 깍듯이 예우와 대우를 하시었기 때문에 8남매를 가르쳤거나. 인연이 있는 선생님은 은퇴 후에도 계속 우리집에 드나드시면서 계속 인연을 맺어 나가셨다. 우리집에 드나드셨던 선생님들 중 많은 분들이 우리 부친에게 술을 배웠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곤 하였다.
13회 전국체육대회 밴드부 연주(가운데 부분)
우리집은 5남 3녀를 두셨는데 나를 중심으로 위로 형님2, 누님 2, 그리고 나, 남동생2, 여동생1명으로 모두 8남매였다.
큰형님은 교육청에서 근무하시다 중학교 교장은퇴, 형수님은 초등학교 교장은퇴, 둘째 형님은 engineering을 전공하여서 교직하고는 관련이 없었고, 그 다음 큰누님은 초등학교에 오래 계시다가 정년 몇년전에 은퇴, 큰매형은 중앙대교수, 인천대 교수와 학장으로 은퇴하셨다. 그리고 작은 누님의 남편이 2째 매형 역시 고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하셨고 그 다음이 본인인데 나도 사범학교를 나와 1년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대학으로 진학하고 또 대학을 졸업한 다음 연주생활이 주였지만 다른 직업으로 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선생도 겸하고 대학에 강사도 겸했으니 교직하고 인연이 있다고 하겠다.
다음 내 바로 밑에 동생은 교직하고 연관이 없고 그 밑에 밑에 동생은 미술대학을 나와 소설가로 대뷰하였고 기자생활을 거쳐 현재는 경희대 미술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서울에서 고등학교 독일어 선생과 영어 선생을 하다 지금은 전업 주부로 있다. 이러니 과연 주위에서 교육자 집안이라고 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형제자매간의 조카들도 얼마나 부모 교육열이 높아 공부를 얼미니 열심히 시켰는지 박사학위가 몇개가 있는지 헤아릴 수 없다.
이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려 한다. 나는 처음에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권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아주 우스운곳에서 찾을 수 있다.난 어려서 살이 통통 쪄서 의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넌 의사 공부를 해라" 라는 아버님 말씀이 기억나지만 결국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많이 계시는 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들어가자 마자. 난 밴드부에 들어가서 공부는 뒷전이고 매일 매일 늦게 까지 밴드부실에서 악기 연습을 하였다. 아주 열심히 한 결과 악기 하나하나를 터득해 나갔다.
공부도 해야하는데 사실 악기나 음악에 비해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당시 우리 부친께서는 우리학교 사친회장이라는 감투도 가지고 계셔서 자주 학교에 오셨는데 그때 마다 난 얼굴을 들수 없었다.
많은 선생님들께서 아버님을 아는 관계로 난 부자유스러울 때가 많았다. 복도에 있으면 아는 선생님들은 날 툭치고 지나가시건 말씀을 건네셨다.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선생님들이 애정어린 관심(?)도 보여 주시고 곧장 아버님 귀에 들어 갔지만 아버지께서는 8남매가 득실거리는 가족관계에서 나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것 같다.
사범학교 밴드부
당시 대전에서는 바이얼린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고등학교 문학의 밤, 남여고등학교 서클활동에 난 바이얼린 소품을 자주 연주하여 특히 여자 고등학교에서는 제법 유명해져 있었지만 별건 아니였다.
난 체격이 크지 않아서 항상 앞줄에 앉거나. 아침조회시간에도 항상 눈에 띄는 앞줄 아니면 두번째 줄에 서야 했다. 어영구영 3년을 다니고 자동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범학교 3년 동안 밴드부, 피아노 오르간, 바이얼린만 하다가 졸업한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졸업을 할때 쯤 우리들은 곧바로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되기 때문에 3학년 부터는 머리를 기를 수 있었는데 우리가 졸업하는 그해에는 교사 인원 수급에 차질이 생겨서 발령을 못받을 거라는 소문이 자자 하면서 기르고 있던 머리를 단속하면서 선생님들이 머리를 모두 깎게 했었다. 그래서 졸업식 전날 머리 검사를 해서 긴 학생들은 모두 빡빡 밀어 버렸다. 나도 머리를 빡빡 밀어벼렸다.
2월 18일 졸업식을 했는데 충남교육청에는 선생이 남아 돌아 발령을 못주는데 서울과 경기도에는 많은 선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난 음악대학을 가려고 준비를 했는데 부모님께서는 발령을 받으면 교사를 해야 한다고 미리 못밖고 계셨었다.
여자 1반 남자 2반 모두 150명이 졸업하였는데 서울과 경기도를 지원한 졸업생들에세는 전원이 3월2일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난 경기도를 지원하였는데 2월 말에 교육청에 등청하여 담당자와 면담을 하는데 어디를 지원하느냐고 묻길래 대학을 못간 분풀이로 "저 제일 먼곳으로 가게 해 주세요" 라고 대답을 하였다.
며칠 후 발령 통지서를 받았는데 3월 2일자로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 백령국민학교로 부임하라는 것이었다. 충청도 촌놈이 인천만 알았지 생면 부지의 백령도라 하여 지도를 보고 찾아보니 남한이 아니고 북한에 있는 것처멀 아주 북에 가까웠다.
이를 어쩌나 하면서 뱃짱이 생기기도 하고 알아보니 같은 친구 강광남이라는 동창 한명이 같은 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그래서 서로 의지하고 학교에 부임준비를 서둘렀다. 인천에서 300ton정도의 배를 타고 열몇시간을 가는데 장난이 아니였다.
배를 탈때만 해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한 여자들이 열댓시간 배를 타고 가니 배멀미에 완전히 ㅁ ㅣ ㅊ ㅣㄴ ㅕ ㄴ 처럼 흐트러져 있어서 정말 볼거리였지만 나 역시도 멀미로 내코도 석자나 빠져 있어서 보이지도 아니 하였다. 그 당시 이후로 배를 탄다면 일단 타지 않는다고 버티는 습관이 생겼다.
졸업시 머리를 빡빡 깎은 머리가 10여일이 지났으니 얼마나 자랐겠는가? 신사복도 없이 그당시 유행하던 재건복을 입고 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지금은 쾌속정이 있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이 안걸리겠지만 그당시에는 인천에서 배를 17시간정도 걸려서 연평도와 소청도, 대청도를 거쳐 맨 마지막으로 백령도에 도착하게 된다. 중간에 들르는 곳에서는 주민들이 생필품을 푸느라고 시간이 꽤 걸려 머물다가 이동했던 기억이 난다.
경기도 옹진군 백령국민학교 교사시절 상단 왼쪽에서 3번째가 나, 오른쪽에서 4번째가 동창 강광남선생
학교에 도착해 교장선생님과 교감, 그리고 학교 동료교사들과 인사를 하니 학생수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각 학년이 1,2반으로 되어 있었고 20명 미만의 선생님이 계셨던 조그만 학교의 섬마을 선생님이 되었다. 그다음 전체 학생이 모이는 아침 조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소개되었는데 내 모습이 너무 어리고 머리가 짧아서 도저히 선생이라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나 보다. 마치 5,6학년 사이에 있으면 구별이 안가며 어리고 귀엽다고 여자선생님들이 지어준 별명이 7학년이었다. 내가 걸어가면 뒤에서 내가 겅중겅중 걸어가는 모습을 흉내을 내면서 깔깔 대고 놀리시던 선생님과 학생들 ....
40여년이 지난 얼마전 그때의 제자들이 KBS에 출연하여 그 때 그리운 선생님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날 찾는 소동이 벌어진 일도 있다.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몹씨 궁금하다.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선생님 과 함께 음악회 마치고
교사 당시 부모님과 가족 1964년도(?)
오른쪽부터 큰형님(태형) 작은형님(태환) 그 위 둘째동생(태호) 첫째동생(태헌) 작은누나(수엽)
본인(태성) 앞 막내동생(수란) 왼쪽끝이 큰누나(수정)
첫댓글 우선 이런 소중한 정보를 찾아 올려준 라일락 아우님한테 고맙다는 말 전하고,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국민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을 실제로 만나본 듯 반갑네... 훌륭한 음악가로 대성하신 이태성 선생님, 건강하시고 언제 귀국하시면 옛날 백령도 부임 시 첫 제자들과 한번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는선생님은 저분들중엔 이학재선생님.이복만샘.장두환교장샘.최형서샘.김정서샘.서연옥샘.그옆에 이름은기억나질아는샘이정도네요
사진 뒷줄 오른쪽부터 첫째가 이학재선생님, 두번째가 김일곤선생님, 그리고 세번째 안경낀 분이 바로 이태성 선생님이야, (사진 설명과는 좀 다른것 같구나) 그리고 키 크신 세명이 선친 장두환 교장선생님이 보이고, 왼쪽서 두번째 김정서 선생님이 계시누먼~
저도 처음엔 사진 설명이 잘못된줄 알았는데 선생님들 기념사진은 보는사람위주가 아니고 서서 찍은자리에서 설명한거더라고요 가족사진 설명은 또 앞에서 보는사람 위주로 설명을 하셨고요 그리보시면 정확할겁니다
너희들이 샘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모두 잊었던 기억속에 다시 샘님 성함이 생각이 나는구나.
그리운 제자들아 이렇게 카페에서 만나게 되다니 라일락이 누군지 몰라도 은방울 카페에서 퍼 날랐구나. 우연중의 필연으로 성빈이를 만나다니 정말 감격스럽고 눈물이 나는구나. 내가 5년동안 충남대 재직시절 만나고 다시 미국에 와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너희들을 얼마나 그리워 했는지 어찌 내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미국에 오래 살았으나 아직도 우리집은 서울 신반포의 반포 레미안 퍼스티지 아파트를 세룰 주어 그곳에 가지는 못하고 마침 내가 8월 10일 한국을 방문한다. 우선 누님집에서 여장을 풀 예정이다. 전화번호는 02-535-6130인데 나의 누님에게 멧세지를 남겨 놓아라. 빨리 보고 싶지만 참고 기다리겠다. 서울서 보자
예 선생님. 꼭 뵙고 싶어요.
선생님 반갑습니다 백령의 자랑입니다 .
향녀는 1반이었니? 2반이었니? 아래에 댓글 단 영옥이도 이름을 알겠는데 얼굴은 .........
라일락님 큰일 하셨네요? 선생님 "은방울카페" 방문해 봐도 될까요? 그런데 김광남선생님은 기억이 나질 안네요?
김광남 선샌님께는 참 죄송합니다... 여드름 많다구 얼마나 뒤에서 놀려댔는지.. 그리고 강낭콩이라고 이름가지고 놀려대고..관심이었겠죠만 ㅋㅋㅋ
김광남선생님이 아니라 강광남선생님이셨다. 아주 젊은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셨단다.
사진보니 선생님들의 모습을 알수가 있네여..그래도 반이상 알겠네요....우~~와~~~!! 멋져부러~
운동회날 "까다 까다 알통까다. 36계 까다" 태권도 유단자셨던 강광남샘님 바이얼리니스트 이태성선생님, 렸다 하면 김일곤선생님 ....쓰타 티쳐
맞아요 창서 선배말이 ㅎㅎㅎ 강광남, 김광남? 강낭콩 헷갈리네요...
지가요 5학년때에 북포학교서 전학해서요,(아버지 김문영선생님)선생님 말씀많이들어서 낯설지가 않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