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시대 국왕의 유적을 찾아
◇ 연서역(延曙驛) 터 : 은평구 역촌동 8번지 12호
- 조선시대 중국으로 드나드는 길목의 역으로 인조반정군이 최초로 집결한 곳
본래 영서역(迎曙驛)이었던 연서역(延曙驛)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길에서 첫 번째에 있던 역이고, 연서도에 있던 6개의 역을 관할하던 찰방(察訪) 역이다. 영서역은 중국으로 드나드는 길목에 자리한 역으로 기능했으며, 인조반정을 성공시켰을 때에 반정 군이 최초로 집결한 장소이기도 하다.
영서역은 한성 주변에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던 서쪽 금표(禁標)에 포함되어 결국 역의 위치를 부평(富平)으로 옮겼다. 이후 부평에 있던 역을 다시 이곳에 옮겨 오면서 이름이 연서역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신이 통과하면서 휴식을 취하던 역이었으므로, 역도를 관리하던 찰방을 임명할 때에도 품계가 높고 명망이 있는 문관을 선발하여 보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조정에서 영서역을 어느 정도 비중 있게 취급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서역이 중국으로 드나드는 길목에 자리한 찰방역으로 기능함에 따라 세종 때에는 영서역의 정원을 8명에서 6명을 더 늘려주었다는 기록도 『세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연서역은 능양군, 인조(1623~1649)가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반정을 계획하다가 경기도 장단의 부사인 이서(李曙)가 보낸 군병력의 후원을 받아 인조반정을 성공시켰을 때에 병력이 최초로 집결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인조가 이서를 맞이하였다고 해서 영서(迎曙)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1720년대에 한양도성을 그린 『도성도(都城圖』에는 ‘연서역 옛 건물터(延曙旧館基)’라는 표기가 있다. 연서역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당시 영서역은 매사냥 터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태조실록 10권』 5년(1398) 8월 4일 자에는 중국에서 온 사신 우우(牛牛) 등이 영서역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도 있다.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에 ‘소나기가 내려 영서역의 정자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벼락을 맞았다.’라는 기록도 있다.
연서역에는 조선 전기 한성부에 속한 무악(毋嶽) 서봉(西峯)과 연결되던 서산봉화(西山烽火)가 있었다. 무악의 서봉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바닷길을 통해 전해진 신호를 서산봉화에 전달하였다. 서산봉화는 조선 전기에만 있었고,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에서 1993년 11월에 세운 표지석에는 ‘조선 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 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역 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서역 터 표지석이 세워진 곳은 부평의 역을 이곳으로 옮겨와 새로 지은 자리이고, 그 이전의 영서역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불광동으로 알려져 있다.
연서역이 있어서 이 일대의 마을 이름이 역촌 또는 역말이 되었으며, 이것이 역촌동으로 변화했다. 연서역 주변을 흐르던 하천 이름은 ‘연신내’이다. 연신내는 불광천의 옛 이름으로 영서천, 연서천, 연서내, 까치내 등으로 불렸다. 이 일대의 도로명에는 연서로가 사용되고 있으며, 연서시장에서도 지난날 연서역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 인조 별서 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 은평구 역촌동 8번지 12호(보물 제1462호)
- 인조가 광해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혁명 거사를 기념한 비석
비각 내에는 조선 16대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머무르면서 광해군을 폐하고,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어 왕위에 오른 혁명 거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인조 별서 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가 세워져 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비는 비신은 화강석, 8각과 12각의 이중 기단 위에 놓여 있는 돌거북은 운문(雲紋)으로 조각되어 있다. 돌 거북은 험상궂은 형태로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낸 상태이며, 특히 눈 위는 두툼하게 장식하고 꽃무늬로 조각하였다.
비신 위에는 옥개형(屋蓋形) 개석(蓋石)으로 덮었고, 비신의 높이는 168cm이며, 폭은 72cm, 두께는 26cm로 되어있다. 이 비문은 숙종이 친히 지었고, 글씨는 오위도총관을 지낸 이항(李杭)이 썼다.
이 비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초익공계(初翼工系) 공포(栱包)를 갖춘 팔작(八作)집의 비각 속에 세워져 보존이 잘 되어있다.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뒤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西宮, 현 덕수궁)에 유폐하는 등의 실정(失政)을 저질렀다. 이로 인하여 민심이 흉흉하자 서인(西人) 일파인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은 광해군을 내쫓으려는 반정(反正)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였다. 이에 당시 능양군(陵陽君) 인조는 이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인조반정을 모의하였다.
숙종이 증조부인 인조의 별장 타에 세운 인조 반정비
인조반정의 주모자들은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밤에 홍제원에 모이기로 정한 뒤 장만(張晩)의 빈집에 모여 계획을 다듬고 거사 날짜를 여러 곳에 알렸다.
“장단 부사 이서(李曙)와 이천 부사 이중로(李重老)는 어떻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그들 휘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홍제원으로 올 겁니다. 북병사(北兵使) 이괄(李适) 장군도 가담하기로 되었고, 특히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이 내응하기로 약속되어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이귀와 김자점이 이처럼 거사 계획을 점검하고 있을 무렵 -
광해군은 김자점이 김개시 상궁을 통해 푸짐하게 보낸 술과 안주를 들면서 궁녀들과 태평하게 즐기고 있었다.
이때 반정 계획의 실패를 두려워한 이이반(李以攽)은 이날 밤,
“김류, 이귀 등이 방금 군사를 홍제원에 모아 궁궐을 침범할 것이며 훈련대장 이흥립도 내응할 것입니다.”
라고 고변(告變)하고 말았다. 이 고변을 승정원에서 광해군에게 알렸으나 왕은 이를 묵살하고 말았다.
한편, 이괄은 군관 20여 명을 거느리고 홍제원에 먼저 도착하였다.
“그거 이상하다. 아무 기척이 없으니 실패한 것이 아닐까.”
하고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홀연히 서북산 아래 한 점의 불빛이 명멸하여 그곳으로 가보니 이귀, 김자점 등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모여 있었다.
그러나 장단의 이서, 이천의 이중로의 군사와 대장 김류도 도착하지 않아 불안해할 때,
“반정 계획이 그만 탄로되어 모의한 자를 체포하고 있으며, 이곽(李廓)이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문을 나왔습니다.”
라는 장유(張維)의 보고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겁을 먹고 흩어지려 할 때, 이귀는 이괄에게,
“대장 김류가 오지 않고 일이 이쯤 되었으니 당신이 대장이 되어야겠소.”
라고 말하자 이괄은 이를 수락하고 대오를 정돈하였다.
이때 김류는 고변 소식을 듣고 사태가 틀렸다고 생각하여 집에 있었다. 그러자 심기원, 원두표가 달려와서 그를 대장에 앉히고 군사를 정돈한 다음 사현(沙峴)을 넘어 홍제원에 도착하였다. 이천과 장단의 군사도 모여 왔다.
김류의 도착으로 이괄은 대장직을 내놓게 되자 반발했으나 이귀의 설득으로 겨우 무마되었다.
대장 김류는 드디어 반정군을 이끌고 창의문을 깨뜨린 다음 도성으로 들어가 창덕궁 문에 이르렀다. 반정군은 닫힌 돈화문을 도끼로 찍어 문을 연 뒤에 궁궐에 불을 질렀다. 당황한 광해군은 북문을 통해 도망하다가 잡히고 말았다. 이로써 인조반정은 성공하였다.
◇ 서오릉 (西五陵 : 경릉·창릉·명릉·익릉·홍릉)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번지 1호(사적 198호)
-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 왕실의 능역
전체 면적이 55만 3,616평이나 되는 서오릉은 행정구역상 경기도이지만 서울과 가까운 사적이며,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 왕실의 능역이다.
서오릉에는 경릉(敬陵, 추존왕 덕종과 昭惠王后 한씨)을 위시하여 창릉(昌陵, 예종과 계비 安順王后 한씨), 명릉(明陵, 숙종과 제1 계비 仁顯王后 민씨, 제2계비 仁元王后 김씨), 익릉(翼陵, 숙종의 비 仁敬王后 김씨) 및 홍릉(弘陵, 영조의 비 貞聖王后 서씨) 등 5개의 왕릉이 있다.
그 밖에 순창원(順昌園, 순회세자와 恭懷嬪 윤씨), 수경원(綏慶園, 영조 후궁으로 莊祖의 생모인 宣嬉宮 영빈 이씨), 대빈묘(大嬪墓, 숙종의 후궁, 경종의 생모인 대빈궁 玉山府大嬪 장씨) 등의 묘가 주위에 조성되어 있다.
▼ 명릉(明陵) : 명릉(明陵)은 서오릉 입구에서 관리사무소 오른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홍살문이 보인다. 명릉은 숙종과 1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2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의 능인데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雙陵), 오른쪽에는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숙종은 1661년(현종 2) 8월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현종의 원자로 태어나 1667년(현종 8)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세인 1674년 8월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숙종은 대동법 실시 및 임진·병자 양난 이후의 토지개혁 종결, 화폐 통용 등 경제정책에 전력을 다하였고, 1712년 백두산정계비의 건립으로 국경선을 확정시켰다. 1720년(숙종 46) 6월에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하여 그해 10월에 명릉에 장례하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의 딸로 1667년(현종 8) 4월에 태어나 1681년(숙종 7)에 가례를 올리고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경종의 책봉 문제로 폐위되어 안국동 본가에서 지내다가 복위하였는데 소생 없이 1701년(숙종 27) 8월 창경궁 경춘전에서 질병으로 35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이곳에 장례를 하고 오른쪽을 비워두어 숙종의 능 자리를 남겨두었다가 숙종의 장례를 치르고 능의 이름을 명릉으로 정하였다.
인원왕후 김씨는 경은부원군 주신(柱臣)의 딸로 1687년(숙종 13) 9월에 태어나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간택되어 1702년(숙종 28) 왕비로 책봉되었다. 소생 없이 1757년(영조 33) 3월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평소 숙종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명릉에서 400여 보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아 놓았으나 따로 정자각을 세우자면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해야 하므로 영조는 현 위치로 정하고 명릉과 한 정자각에서 제사를 받게 하였다.
명릉의 특징은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하였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줄였고, 종래의 8각의 장명등 옥개(屋蓋)를 4각형으로 제도화하였다.
▼ 익릉(翼陵) : 익릉(翼陵)은 명릉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서오릉의 여러 능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익릉은 순회세자와 공빈 윤씨의 묘소인 순창원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홍살문과 익릉이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익릉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원비(元妃)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의 단릉(單陵)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만기(萬基)의 딸로 1661년(현종 2)에 태어나 열 살 때 세자빈에 책봉되어 숙종이 즉위하자(1674) 왕비가 되었으나 1680년(숙종 6) 10월에 천연두 증세를 보인 뒤 발병 8일 만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자 이듬해 2월에 이곳에 장례 하였다.
이 능은 숙종 재위 때 조영되었으나 능을 간소하게 꾸미라는 명령 이전이므로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쫓고 있다.
▼ 경릉(敬陵) : 서오릉 입구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경릉의 홍살문이 나타난다.
안내판을 읽어보면 경릉은 의경세자(懿敬世子, 추존왕 덕종)와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능임을 밝히고 있고, 고개를 들어 능역을 바라보면 왼쪽에 추존왕 덕종, 오른쪽에 소혜왕후의 능이 배치된 것이 눈에 들어오는데 능의 배치가 다른 능과 달리 왼쪽과 오른쪽이 반대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세종 20년(1438)에 태어나 세조 즉위년(145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병약하여 20세인 세조 3년(1457)에 일찍 세상을 떠나자 명당으로 추천된 이곳을 세조가 친히 답사하여 능지로 정하고, 그해 11월 24일 대군묘 제도(大君墓制度) 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의 둘째 아들인 성종 2년(1471)에 의경왕으로 부르고 성종 7년(1476)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로 1437년(세종 19)에 태어나 1455년(세조 즉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1471년(성종 2)에 의경세자를 의경왕으로 높이자 왕후가 되었고, 덕종의 추존과 함께 왕대비가 되었다.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한 소혜왕후는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다룬 여훈(女訓)을 저술하였으며, 2남 1녀(월산대군, 성종, 명숙공주)를 두었다.
소혜왕후는 손자 되는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모함 때문에 폐위, 사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관련자를 처벌하려고 하자 병상에 있으면서 이를 꾸짖다가 얼마 후인 1504년(연산군 10)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안장하였다.
경릉의 특징을 보면 덕종의 능은 간소하다. 봉분에는 병풍석, 난간석이나 무인석, 석수(石獸) 등이 없는데 비해 소혜왕후의 능은 왕비로 생전에 책봉되었으므로 왕릉 형식을 갖추어 난간석을 두르고, 문․무인석과 망주석, 장명등, 8마리의 석호․석양이 서 있다.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
▼ 홍릉(弘陵) : 홍릉(弘陵)은 경릉과 창릉 사이에 위치하는데 장희빈의 묘소인 대빈묘를 지나 창릉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이 보인다. 홍릉은 영조의 비(妃)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단릉(單陵)이다. 이 능도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692년(숙종 18) 12월에 태어나 1704년(숙종 30) 연잉군(영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721년(숙종 47) 연잉군이 세제(世弟)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책봉되고, 1724년(영조 즉위)에 왕비가 되었다. 1757년(영조 33) 2월에 소생 없이 창덕궁 관리각에서 66세에 세상을 떠나 이해 6월에 이곳에 장례하였다.
영조는 왕후의 능자리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하여 왕비릉의 오른쪽에 돌을 십자(十字)로 새겨 묻어 장차 영조의 능 터로 하고자 했으나 영조가 동구릉에 안장됨으로써 홍릉 오른편은 비어있게 되었다. 이에 석물은 쌍릉을 예상하여 배치하였다.
홍릉은 명릉의 숙종 계비 인원왕후의 능보다 20일 늦게 조성하였으므로 능의 제도나 석물(石物) 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문인석은 용모․복식 상태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실제 착용할 때와 같이 양각을 측면으로 돌출시키기 위해 외곽을 융기선을 넣어 만들었으며, 얼굴 표정도 살아있는 듯 미소를 띠고 있다.
▼ 창릉(昌陵) : 창릉(昌陵)을 찾으려면 오륙교라고 쓰인 금천교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가면 숲속으로 홍살문이 보인다. 창릉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으로 5개의 능 중에서 가장 북쪽인 외진 곳에 있다.
예종은 1450(세종 32)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지고, 1457년(세조 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68년 9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11월에 병으로 20세에 승하하였다. 1470년(성종 원년) 2월에 경릉의 북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안순왕후 한씨는 한백륜(韓伯倫)의 딸로 1468년(예종 즉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498년(연산군 4) 12월에 창경궁에서 승하하여 다음 해인 1499년 2월에 이곳 예종의 능 동쪽에 장례하였다. 소생으로 1남 1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