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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늘도 즐겁게-1 원문보기 글쓴이: 권준부
돌로미티 케이불 카 힐링 트래킹 -효도 관광 힐링 트래킹-
제22화 모차르트도시 잘츠부르크 3화
2025년 8월 7일
음악과 역사가 숨 쉬는 마지막 여정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알프스의 맑은 공기가 가슴 깊이 스며드는 이 순간
이별의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오늘은 오전에 미처 보지 못한 보석 같은 장소들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헬브론 궁전의 물의 정원에서 바로크 시대의 유쾌한 상상력을 만끽한 뒤
저녁 8시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Großen Festspielhaus)에서 펼쳐질 오페라로
이 도시와의 작별 인사를 나누는 특별한 하루였다.
호텔에서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미라벨 정원으로 향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 머금은 꽃들과 조각상들이 마치 우리의 마지막 산책을 축복하듯
빛나고 있었다.
삼위일체의 신비, 드라이팔티히카이츠키르헤
미라벨 정원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마카르트 광장(Makart Platz). 그 코너에 우뚝
선 삼위일체 교회(Dreifaltigkeitskirche)는 18세기 초 바로크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경건한 성소였다.1694년 대주교 요한 에른스트 폰 툰의 명으로 건축이 시작되어
1702년 완공된 이 교회는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의
초기 작품이다. 웅장한 중앙 돔과 곡선미가 살아있는 외관, 하늘을 향해 솟은 쌍둥이 탑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크 양식 특유의 역동성과 화려함이 절제된 우아함으로
승화된 모습이었다.
교회 내부로 발을 들이는 순간 순백의 공간이 주는 경건함에 숨이 멎는 듯했다.
네 개로 나뉜 예배당은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두 개의 종탑과
중앙의 거대한 돔을 장식한 프레스코화는 이 교회의 진정한 보물이었다.
요한 미하엘 로트마이어(Johann Michael Rottmayr, 1656~1730)가 1700년에 제작한
중앙 돔의 프레스코화는 바로크 천장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대천사 미카엘을 중심으로
수많은 천사들, 구약의 예언자들, 10명의 교황, 그리고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들이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를 찬양하는 장면이 하늘을 향해 펼쳐진다.
로트마이어는 빛과 색채의 마술사였다.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천상의 광경은 신자들에게
천국의 환상을 선사했고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다.
모차르트가 꽃피운 창작의 공간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간 곳은 마카르트 광장 8번지 모차르트 가족이 1773년부터 1780년까지
7년간 거주했던 집이자 지금은 모차르트 박물관(Mozart-Wohnhaus)으로 사용되고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의 좁은 생가를 떠나 이곳으로 이사했을 때
모차르트는 17세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11년부터 무용 학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소유주인 마리아 안나 라압
(Maria Anna Raab, 1710~1788)이 모차르트 가족을 위해 건물을 개조하여 제공했다.
라압 부인은 모차르트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젊은 천재는 마음껏 창작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1787년 영면했고 누나 나네를(마리아 안나)은
장크트 길겐의 고위 관리와 결혼하여 떠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모차르트가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교향곡 25번, 29번, 31번 "파리",
바이올린 협주곡 3번, 4번, 5번,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미사곡, 세레나데 등
청년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폭발한 작품들이 이 공간에서 탄생했다.
박물관에는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프란츠(1756~1801)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1775년 잘츠부르크를 방문한 대공이 19세의 모차르트에게 직접 의뢰한 작품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아들이자 베토벤의 후원자가 될 인물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긴 이 초상화는 모차르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헝가리 화가 미하이 문카치(Mihály Munkácsy, 1844~1900)가 1884년에 그린
"모차르트의 마지막 순간들"이라는 작품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1791년 12월 5일 새벽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는 천재의 임종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침대 옆에서 애통해하는 아내 콘스탄체와 친구들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을 레퀴엠 악보... 역사의 한 장면이 캔버스 위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1775년 모차르트"라는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19세의
모차르트가 맞이한 황금기를 조명하는 전시였다. 이 해에 뮌헨에서 초연된 오페라
"가짜 정원사(La finta giardiniera)"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를 비롯한 청중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고 어떤 평론가는 "모차르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 작곡가
중 한 명이 될 운명"이라고 예언했다. 전시장에는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바이올린,
가족의 친필 편지, 일기, 악보 초판본들이 마치 시간 여행의 통로처럼 우리를 18세기로
안내하고 있었다. 잉크가 바랜 악보 위에 춤추는 음표들을 보, 나는 젊은 천재의 펜을
쥔 손가락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을지 상상해 보았다.
과학의 선구자, 도플러의 발자취
마카르트 광장 1번지에는 또 다른 위대한 인물의 생가가 있었다. 크리스티안 도플러
(Christian Doppler, 1803~1853) 생가 앞에 서니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가 과학의
요람이기도 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803년 11월 29일 석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도플러는 허약한 체질 때문에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지 못하고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빈 공과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1842년 프라하 왕립 학술원에서 발표한 논문으로
과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 -
파원과 관찰자의 상대 운동에 따라 관찰되는 파동의 진동수가 변하는 현상.
구급차가 다가올 때 사이렌 소리가 높게 들리고 멀어질 때 낮게 들리는 것이 바로 도플러 효과다.
빛의 경우, 천체가 지구로 다가오면 파장이 짧아져 청색 편(blue shift)이 일어나고
멀어지면 파장이 길어져 적색 편이(red shift)가 발생한다. 이 원리는 우주의 팽창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현대 천문학과 우주론의 기초가 되었다.
레이더 속도 측정기, 의료용 초음파, 기상 레이더 등 현대 기술의 핵심 원리로 활용되고 있다.
도플러 탄생 100주년인 1903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에 기념 명패가 설치되었다.
명패의 음각된 글씨를 손끝으로 따라가며 과학자의 호기심과 열정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지 생각해 보았다.
잘츠부르크 시내 탐방을 마치고, 우리는 시티 버스를 타고 남동쪽으로 약 4km 떠어진
헬브론 궁전(Schloss Hellbrunn)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목가적인 풍경 사이로
어제 방문했을 때 외관만 잠깐 보았던 논베르크 수도원(Nonnberg Abbey)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800년 역사를 간직한 이 수도원은 지금도 20여 명의 수녀들이 기도와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물의 마법사, 헬브론 궁전으로
헬브론 궁전에 도착하자, '맑은 샘(Hellbrunn)'이라는 이름 그대로 온 세상이 물의 청량함으로
가득했다. 1613년부터 1619년까지 마르쿠스 시티쿠스 폰 호엔엠스(Markus Sitticus von
Hohenems, 1574~1619) 대주교가 여름 별장으로 지은 이 바로크 궁전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독창적인 건축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마르쿠스 시티쿠스는 1612년 잘츠부르크 대주교로 선출되기 전 이탈리아에서 성직 생활을
하며 르네상스 문화를 깊이 체험했다. 특히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이었던 외삼촌 마르코
시티코 달템프스(Marco Sittico d'Altemps, 1533~1595)의 영향을 받아 예술과 건축에
대한 안목을 키웠고 이탈리아의 빌라 정원 문화를 알프스 북쪽에 이식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품었다고 한다
잘츠부르크는 할레인 소금 광산과 금 광산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도시였다.
"하얀 금"이라 불리던 소금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이었고 잘츠부르크 대주교들은
소금 무역으로 세속 군주들에 버금가는 권력과 부를 누렸다. 마르쿠스 시티쿠스는
이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헬브론 궁전이라는 놀라운 창조물을 탄생시켰다.
약 60헥타르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에 펼쳐진 정원과 아름다운 작은 호수는 지금도
잘츠부르크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헬브론 궁전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트릭 분수(Wasserspiele), 즉 '물의 정원'에 있었다.
바로크의 유머, 트릭 분수의 세계
궁전 뒷마당으로 들어서자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유쾌한 상상력이 물줄기로 되살아나는
마법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대주교 시티쿠스는 방문객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교한 수압 시스템을 설계했다. 헬브론 언덕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샘물을 이용한
이 시스템은 전기도 펌프도 없던 시대에 오직 중력과 수압만으로 작동하는 경이로운 기술의
결정체였다.
첫 번째로 만난 알템프스 분수(Altemps Fountain)는 세 개의 분지(basin)와 별 모양 연못
(Star Pond)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이 분수는 대주교의 외삼촌이자
로마의 저명한 추기경이었던 마르코 시티코 달템프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의 위대한 수집가였으며, 그의 컬렉션은 지금도 로마 알템프스
궁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분수 주변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제우스, 포세이돈, 아프로디테,
아폴론... 각 신의 특성에 맞춰 물이 뿜어져 나오는 방향과 세기가 정교하게 계산되어 있어,
아무리 주의해도 물벼락을 피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이 바로 '트릭' 분수의 묘미였다.
오르페우스 동굴(Orpheus Grotto)에서는 음악과 시의 신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는
조각상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저승까지 내려갔던 비극적 영웅이다. 그의 음악은 너무나 아름다워 저승의 신들조차
감동시켰다고 전해진다. 동굴 안에서 울려 퍼지는 물소리는 마치 오르페우스의 리라
선율처럼 애잔하고 아름다웠다.
기계 극장(Mechanisches Theater)은 1750년에 추가된 시설로, 헬브론 궁전의 하이라이트였다.
약 200여 개의 움직이는 인형들이 오직 물의 힘으로 작동하며 18세기 바로크 도시의
번화한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제빵사가 빵을 굽고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자르고,
음악가들이 연주하고 귀족들이 산책하는 모습... 당시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수력으로
작동하는 정교한 기계 장치로 되살아나는 광경은 실로 경이로웠다.
이 기계 극장은 스위스 기술자 호르체 콘라트 그루베르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바로크 시대의 자동인형(automata) 기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전기가 발명되기 150년 전
물의 힘만으로 이렇게 복잡한 움직임을 구현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이아나 분수(Diana Fountain)에는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가 활을 든 채 우아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솟구쳐 올라 순식간에 관람객들을 적셨다.
로마 신화에서 다이아나는 순결의 여신이자 동물들의 수호자였다. 목욕하는 그녀를 훔쳐본
악타이온은 사슴으로 변해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겨 죽었다는 무서운 전설이 전해진다.
분수 옆에는 9명의 뮤즈(Muses) 여신 조각이 있었다. 클리오(역사), 에우테르페(음악),
탈리아(희극), 멜포메네(비극), 테르프시코레(무용), 에라토(서정시), 폴리힘니아(찬가),
우라니아(천문학), 칼리오페(서사시)... 각 뮤즈가 담당하는 예술 영역에서 물이 다른
패턴으로 분출되며 노래하듯 춤추었다. 바로크인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교양이
물의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넵튠 분수(Neptune Fountain)는 가장 웅장했다. 바다의 신 넵투누스
(포세이돈)가 삼지창을 높이 들고 중앙에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을 돌고래와 바다의
요정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세이돈은 제우스, 하데스와 함께 세계를
삼등분한 올림포스의 삼대 신 중 하나다. 그가 삼지창으로 땅을 치면 지진이 일어나고
바다를 치면 폭풍이 몰아쳤다고 전해진다. 넵튠 분수에서 갑자기 사방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물벼락을 맞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이렇게 즐거운데
400년 전 바로크 시대 사람들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을까? 대주교 마르쿠스 시티쿠스의
장난기 어린 상상력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었다.
역사의 그림자, 오버잘츠베르크
오후 2시가 넘어서야 트릭 분수 체험을 마쳤다. 시장기가 느껴져 헬브론 궁전 앞 광장의
레드불 카페(Red Bull Café)로 들어갔다. 레드불의 창립자 디트리히 마테슈츠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해결했다.
레드불은 1987년 오스트리아에서 탄생하여 전 세계 에너지 드링크 시장을 장악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식사 후, 현재는 민속 박물관으로 변모한 헬브론 궁전 내부를 관람했다. 1618년 카니발을
주제로 한 멀티미디어 설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사순절 전 카니발
기간에 신분의 구분 없이 모두가 가면을 쓰고 춤추며 즐겼다고 한다.
1613년에 제작된 역사적인 지구본도 전시되어 있었다. 17세기 초 유럽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윤곽을 이제 막 파악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지구본을 보며 세상의 크기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욕구...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다른 방에는 실물보다 큰 유니콘(일각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니콘은 순결과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처녀만이 유니콘을 길들일 수 있다는 전설이
기독교 문화에서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과 연결되었고 귀족들은 유니콘의 뿔로 만든
술잔이 독을 중화시킨다고 믿었다. 대주교 시티쿠스가 이 신비로운 생물의 거대한 조각을 궁
전에 둔 것은 자신의 권위와 영성을 상징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옥타곤(Octagon) 음악실에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L'Orfeo)"
악보가 담긴 나선형 조각상이 있었다. 1607년 만토바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오페라
역사상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몬테베르디는 오페라라는 새로운 예술 형식에
극적 표현력과 음악적 깊이를 부여한 선구자였다. 헬브론 궁전에서 오르페오의 악보를 만나니
바로크 시대가 음악, 건축, 정원 예술이 하나로 통합된 종합 예술의 시대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터랙티브 회전 소파 방은 현대적 감각을 더한 공간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안락함과
21세기 기술이 만나 방문객들에게 독특한 휴식 경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소파가 단순한 휴식 가구를 넘어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회전하거나
자세를 바꿀 수 있도록 전동 메커니즘을 가미한 안락한 방이 있었다
궁전을 설계하고 건설한 마르쿠스 시티쿠스 대주교(1574~1619)의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었다.
45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는 재임 7년 동안 잘츠부르크에 헬브론 궁전뿐 아니라 대성당
재건축 계획도 수립했다. 그의 사망 후 계속된 대성당 공사는 1628년 완공되어 지금의
장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한다.
무도회장의 천장과 벽면을 덮은 화려한 프레스코화는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17세기 이탈리아 양식을 따른 이 그림들은 원근법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실제 공간보다 훨씬 더 크고 높아 보이게 만드는 착시 효과(트롱프뢰유, trompe-l'œil)를
구현했다. 탁 트인 푸른 하늘이 그려진 천장을 올려다보면 마치 야외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긴 벽에 그려진 도시 풍경은 피렌체와 베니스의 명소들이라고 한다.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 오버잘츠베르크
헬브론 궁전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시티 투어 버스에 올랐다.
잘츠부르크로 직행하는 줄 알았는데 버스는 여러 곳을 우회하며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목가적인 시골 전원주택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도쿠멘테이션 오버잘츠베르크(Dokumentation Obersalzberg)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옆에는 "독수리 둥지(Eagle's Nest) 버스 탑승장"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
름다운 알프스 풍경 속에 감춰진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가이드의 목소리에 무게감이 실렸다. 그는 창밖을 가리키며 오버잘츠베르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산 너머가 바로 오버잘츠베르크입니다. 1890년대부터 유럽 귀족과
부유층이 여름 휴양을 즐기던 아름다운 곳이었죠. 그러나..."
그의 말에는 깊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럴 만도 했다. 이 평화로운 산촌 마을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정권의 권력 중심지로 변모했으니 말이다.
"오버잘츠베르크는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 바이에른주에 속합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죠."
히틀러는 1933년 이곳에 알프스 저택을 건설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재자가 이 아름다운
산비탈에 자리를 잡자 독일 나치의 주요 인물들도 앞다투어 저택을 지었다.
괴링, 보어만, 슈페어... 제3제국의 핵심 인물들이 이 작은 마을에 모여들었다.
히틀러는 베를린보다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통치했다고 한다.
"특히 히틀러의 저택을 **베르크호프(Berghof, '산의 집')**라고 불렀습니다."
가이드가 설명을 이어갔다. 30개의 방을 갖춘 이 저택은 단순한 별장이 아니었다.
국내외 정치 의사 결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외국 국가 원수들과 나치 지도자들은 물론
"집의 안주인" 역할을 한 연인 에바 브라운의 접대를 받으며 유럽 상류 사회 인사들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프란츠 바이스가 1941년 그린 나치당 지도자들의 저택들
가이드가 자료 사진을 보여주었다. 1941년 나치당 화가가 그린 오버잘츠베르크의 모습이었다.
산비탈에 늘어선 저택들, 깔끔하게 정돈된 도로,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뒤에서 홀로코스트와 세계대전이 계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지금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1945년 4월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전쟁 후 바이에른 주 정부가 나머지를 철거했죠.
신나치의 순례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한 곳만은 예외였다. 오버잘츠베르크 산정상, 해발 1,834m 케슈타인(Kehlstein)
산 꼭대기에 있는 켈슈타인하우스(Kehlsteinhaus), 일명 독수리 둥지(Eagle's Nest)"는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탓에 파괴되지 않고 현존하고 있었다.
"독수리 둥지는 나치당이 히틀러의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1939년에 건립한 것입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6.5km의 도로를 건설하고, 산 내부를 관통하는 124m 길이의 터널을 뚫고
황동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죠. 13개월 만에 완공된 건축의 기적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는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총 14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나치 선전부는 이곳을 "총통의 신성한 산장"으로 홍보했다.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알프스의
절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죠.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도 보입니다."
시티 투어 버스는 오버잘츠베르크를 지나며 아무런 제재 없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1995년 솅겐 조약 발효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국경 검문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EU 회원국들 간의 자유로운 이동... 이것이야말로 나치가 꿈꾼 정복이 아닌 평화와 협력으로
이룬 진정한 유럽 통합이 아닐까. "시간이 있으시면 나치 문서 박물관을 방문해보시길 권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히틀러의 도시 오버잘츠베르크의 역사를 상세히 볼 수 있고
지하 벙커 시스템의 일부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가이드의 말이 끝나고 버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창밖의 알프스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오버잘츠베르크를 지나온 후라 그 풍경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일 것이다.버스는 다시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잘츠부르크로 향했다.
음악으로 마무리하는 완벽한 하루
오후 4시,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은 특별한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8시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
(Großes Festspielhaus)에서 열리는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공연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미리 준비해온 정장을 꺼냈다.
거울 앞에서 양복을 입으며 오늘 밤이 얼마나 특별한 순간이 될지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내도 우아한 드레스 차림으로 준비를 마쳤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석하는 것은 단순히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럽 문화 예술의 정수를 경험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7시 30분, 택시를 타고 페스티벌 하우스로 향했다. 저녁 햇살이 잘츠부르크 구시가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채가 노을에 실루엣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리는 이날 입을 옷을 미리 가지고 왔기 때문에 옷의
다려서 입고 정장차림으로 페스티발 하우스로 갔다
페스티벌 하우스 앞 광장에 도착하니 정장과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남성들은 턱시도나 다크 슈트를 여성들은 우아한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입장 전 아는 사람들끼리 조우하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샴페인 잔을 든 손, 우아한 웃음소리, 여러 언어로 오가는 대화... 이곳은 음악뿐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하는 문화의 장이었다
우리도 안내원과 기념 사진을 찍고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로 입장했다.
로비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레이트 페스티벌 하우스는 196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공연장이다.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의 주도로
건설되었다고 하며 개관 공연은 카라얀이 직접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였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의 대본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가 곡을 붙힌
이 작품은 1911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이래 독일어 오페라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카라얀은 무대가 넓으면서도 최상의 음향을 구현할 수 있도록 이 홀을 설계했다.
2,179석이라는 제한된 좌석 수는 음향의 완벽함을 위한 선택이었다. 모든 관객이 최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음향 공학의 모든 첨단 기술이 동원되었다.
우리는 5개월 전에 예약하여 인당 235유로(약 40만 원)의 입장료를 지불했지만
2층 좌석을 배정받았다. 세계적인 페스티벌인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2층에서도
무대가 잘 보였고, 음향은 완벽했다. 객석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니 현대적이면서도
우아한 건축미가 돋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여왕의 비극, "마리아 스투아르다"
오후 8시 조명이 어두워지고 지휘자가 등장했다. 박수 소리가 객석을 가득 채웠다.
오케스트라가 서곡을 시작하자, 홀 전체가 음악으로 숨 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라이브 오페라의 마법이었다.
오늘 밤 공연은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의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
였다. 도니체티는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으로 70여 편의 오페라를 작곡한 다작 작곡가였다.
"사랑의 묘약",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등 지금도 전 세계 오페라 하우스에서 사랑받는 작품들을 남겼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1835년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서정 비극 오페라다.
이 오페라는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희곡 "마리아 슈투아르트"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실러의 희곡은 1800년 6월 14일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괴테는 이 작품을 "여러 관점에서 완벽한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16세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비극적 역사를 담고 있다.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튜더 왕가의 헨리 7세의
증손녀였다. 그녀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정통 혈통이었다.
반면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과 재혼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였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은
메리를 잉글랜드의 정통 계승자로 여겼다.메리는 자신이 적통자이며 엘리자베스는
시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로 왕위를 찬탈한 자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런데 메리가 두 번째 남편 헨리 단리를 죽인 살인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1568년 메리는 잉글랜드로 도피하여 사촌인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딜레마에 빠졌다. 가톨릭 세력들이 언제 메리를 앞세워 자신을 몰아낼지
두려웠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죄수처럼 이 성 저 성으로 옮겨 가며 19년간 감금했다.
영국 내에서 메리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가톨릭 교도들의 모반 사건이 여러 차례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죄수처럼 갇혀 있는 메리를 이 모든 모반의 책임자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사형을 선고하도록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강요했다.
결국 메리는 45세의 나이에 1587년 2월 8일 참수당하는 비운의 여왕이 되었다. 처형 당일,
그녀는 가톨릭 순교자의 색인 붉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단두대에 오르면서 그녀는"내 끝은 내 시작이다(In my end is my beginning)"라는 말을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는 1603년 엘리자베스 사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모두 계승하며 두 왕국을 통합했다. 메리가 꿈꾸던 잉글랜드 왕위는 결국 그녀의 아들을 통해 실현된 것이다.
반면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부터 1603년까지 45년간 재위하며 "엘리자베스 시대"를 열었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나는 잉글랜드와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으로
불렸다. 그녀의 치세는 잉글랜드의 황금기였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해양 강국으로
부상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위대한 문학이 꽃피었으며 훌륭한 정치와 외교, 물가 안정,
복지법 등으로 영국 국민들에게 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여왕이 되었다.
메리 역의 소프라노는 감옥에 갇힌 여왕의 절망과 자존심을 절절하게 표현했고 엘리자베스 역의
메조소프라노는 권력과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군주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려냈다.
2막의 두 여왕이 대면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실러는 극적 효과를 위해 역사에는 없었던
이 장면을 창작했다. "사생아!" "살인자!" 두 여성의 대결은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여성으로서의 자존심 정통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운명의 잔인함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객석은 숨죽이고 있었다.
3막 메리의 처형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단두대로 향하는 메리가 부르는 마지막
아리아는 죽음을 앞둔 여왕의 평온함과 용기를 절절하게 표현했다.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높은 음으로 치솟을 때, 객석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막이 내리고 조명이 켜졌을 때, 우리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오페라가 끝났지만, 두 여왕의 비극이 가슴속에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통성이란 무엇인가? 여성으로 태어나 왕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16세기 두 여왕의 이야기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주는 이유는그것이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선택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커튼콜이 이어졌다. 메리 역의 소프라노가 무대에 등장하자 관객들은 기립하여 박수를 보냈다.
"브라바! 브라비시마!(Brava! Bravissima!)" 이탈리아어로 환호하는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지휘자, 오케스트라, 합창단 모두가 무대에 올라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도 손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쳤다.
잘츠부르크여, 안녕
페스티벌 하우스를 나서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잘츠부르크의 밤거리는 고요했지만
여전히 오페라를 본 관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택시를 기다리며 오늘 본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 장면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두 여왕 모두 안타까웠어요. 역사는 누구에게나 가혹하네요."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잘츠부르크의 야경이 스쳐 지나갔다.
호엔잘츠부르크 성채가 조명을 받아 밤하늘에 떠 있는 모습이 마치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모차르트가 걸었던 거리, 대주교들이 통치했던 도시, 그리고 지금도 음악으로
숨 쉬는 이 아름다운 도시... 호텔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니 하루 종일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헬브론 궁전의 트릭 분수에서 맞은 물벼락과 웃음 오버잘츠베르크에서
느낀 역사의 무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오페라의 감동...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내일이면 우리는 이 도시를 떠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경험과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창밖으로 잘츠부르크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알프스의 맑은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뭉클한 감정으로 오늘 하루를 되새겼다.
"음악의 도시에서 음악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것, 그보다 더 완벽한 여행이 또 있을까?"
2025년 8월 7일 오늘의 운동량
걸음 수: 19,684보
이동 거리: 12.7km
이동 시간: 3시간 21분
마음의 추억 : 감동으로 가득찬 의 하루
숫자로 기록된 오늘의 여정. 하지만 숫자가 담지 못한 것들이 훨씬 더 많다. 헬브론 궁전에서
맞은 물벼락과 함께한 웃음, 오버잘츠베르크에서 느낀 역사의 무게,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에서 흘린 감동의 눈물...
이 모든 것이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을 채웠다. 내일이면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겠지만
이 도시의 음악과 역사, 그리고 아름다움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잘츠부르크여, 안녕. 당신의 음악과 아름다움, 그리고 당신이 가르쳐준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