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둑을 타고 걷는 것은 매우 힘들고 귀찮고 짜증스럽기도 합니다. 풀이 무성하여 어떤 구간은 나무만큼 자라 있습니다. 헤치고 지나가기가 산골의 고개 넘기만큼 힘듭니다. 게다가 들고 있는 우산이 매우 거추장스럽습니다.
한 오백 미터를 전진하는 데 한 시간 쯤이나 걸린 것 같습니다.
비는 부슬거리는데 이 무슨 고생인가 싶기도 합니다.
(위 사진 : 수문이 통째 뽑혀나가 갈대숲 사이 구멍으로 대수로의 물이 다 보인다.)
(위 사진 : 그대신 개인 양수기가 출동, 호스가 빵빵하도록 물을 퍼올린다.)
(위 사진 : 철로의 침목이 없는 구간. 왜 없나 했더니...)
(위 사진 : ...침목을 뽑아 이렇게 쓰고 있었군요.)
(위 사진 : 수로 시스템이고 뭐고 나는 이렇게 옛날식으로 물 댈껴.)
수문을 통째로 뽑아내버린 곳도 있고,
그래서 곳곳에서 개인용 양수기가 대수로에 바로 꽂혀 직접 물을 뽑아가고…
폐지된 열차선로의 침목은 용도가 다양합니다.
조악한 양수펌프실의 또 하나의 예.
‘미제천잠관’에서 약 1킬로미터, 정리마을 입구입니다. 철길의 자갈에 얼얼해진 발바닥을 달랠 겸, 다리 건너 마을에 잠깐 들러봅니다.
여기도 예외 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수로 건너 들판 건너 옥구읍의 행정중심지 선제리가 보입니다. ‘힐스톤온천리조트’에는 차가 많이 서있고, 누구의 사당인지 거대한 한옥 건물도 건너다보입니다.
(위 사진 : 철로침목의 또 하나의 활용방안.)
다시 걷기 시작, 얼마 안 가 우치산마을.
이곳에서 대수로가 분기점을 또 맞이하는데 여기는 Y자형이 아니라 역Y자, 즉 ‘ㅅ’자 모양으로 나뉩니다. 내 뒤편 오른쪽으로도 물길이 있는데 이 물길로 물이 흘러들어가는 것인지 거기서 나와 대수로로 합류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거의 끝에 와버린 지점, 경사가 없어서 흐름이 보이지 않는 것이겠지요.
나뉘는 곳의 옹벽도 역시 부드러운 곡선입니다.
따라 들어가 보았습니다.
어귀에는 수초가 가득하지만 들어가 보니 그렇지도 않네요.
그런데 중-소 규모의 수로에서는 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수로로 합해지고 있는 흐름이었다는 거죠. 이 물은 또 어디서 발원한 무슨 물일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복잡하고 어려운 수로시스템입니다. 더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되돌아 나옵니다.
군산자양중학교.
아마도 군산에서는 가장 서쪽 끝에 있는 학교가 아닐까 합니다. 마침 학교 진입로 가까이에 수많은 차가 서 있어 관심이 갑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자양중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라. 오늘이 일요일이군요. 객지에 나가 있던 동문들이 다 모였겠습니다. 노랫소리가 길까지 들리는군요.
학교 앞 서점은 어디나 다 그렇듯이 이미 폐업.
대수로 옆에 또 어딘가로 물을 보내는 양수장이 있습니다. 매우 큰 편입니다. 물을 따라 가봅니다. 대수로와는 직각 방향인 남쪽으로, 이번에도 고가도로처럼(!) 길게 뻗어 있습니다. 비교적 요즘에 만든 수로인 듯.
양수장에서 뽑아 올린 물이 콸콸 시원하게 고가수로로 쏟아져 들어갑니다.
그런데 수로의 벽을 흙더미가 감싸고 있네요. 벌어진 틈으로 물이 줄줄 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금방 눈에 띕니다. 관로의 벽이 벌어지지도 무너지지도 않도록 하는 가로 걸친 막대기(?)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일제 때 만든 수로에는 그 가로막대기가 다 있던데 요즘 지은 수로에는 왜 만들지 않았을까요?
일껏 많은 비용을 들여 여기까지 끌고 온 물을 이렇게 허망한 이유로 줄줄 새게 하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가만히 보니 벌어진 틈이 많습니다. 노랗게 물든 곳은 이른바 포움(foam)으로 틈새를 막으려 했던 자국이군요.
- 전세제수문 -
자양중학교에서 다시 1킬로미터, 종점을 바로 눈앞에 둔 마지막 갈림목의 수문이 나타납니다. 오른쪽으로 분기되어 나가는 물목의 수문. 일제 때 지은 그 수문이 상처투성이인 채 그대로 있네요. 오랜만에 보는 수문이름 돌판도 그대로 있습니다.
‘錢洗制水門(전세제수문)’.
이 수문은 대정 11년(1922년) 준공. 즉, 어우리수문 등 지금까지 본 대부분의 수문들보다 1년 나중에 완공했습니다.
뿐 아닙니다. 수문 옆쪽에는 사업관련자 이름을 새긴 돌판도 붙어 있습니다. 들여다보니 어우리에서 본 최초의 이름판에 있던 바로 그 이름들입니다.
‘기사장 타카지마 하지메’와 ‘시공사 대표 코다마’의 이름은 낯익기까지 하네요. 이 판에는 흘려 쓴 손글씨가 아니라 얌전한 체로 새겨서 비교적 읽어내기 쉽습니다. ‘請負人’(시공사 대표) 이름이 ‘兒玉’(코다마)였음도 이 판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감독원 조영윤’은 조선 사람이었고, 그때만 해도 아직 「창씨개명」의 물결이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